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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역사인식에 광해군은 영명한 현군으로, 인조는 어리석은 혼군으로 각인되어 있다. 광해군은 明나라와 淸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취한 반면, 이를 빌미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는 明에 대한 사대주의에 집착하다 淸나라의 침입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가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살펴보자.
누루하치는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건주여진을 1588년에 통일하였다. 1592년 일본이 조선에 침입하자 명나라가 대군을 파병하면서 여진족에 대한 견제가 소홀해졌다. 이 기회에 세력확장을 추진한 누루하치는 1593년 해서여진 연합군을 격멸하고 대부분의 부족을 통합하였다. 그 후 야인여진마저 정복한 누루하치는 1616년 1월 1일 金國을 선포하고 한(汗)에 즉위하였다. 역사에서는 1115년에 건국하고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의 金나라와 구별하여 누루하치가 세운 나라를 後金이라고 부른다.
만주 형세(16세기)
동북아시아 형세(1616)
누르하치가 북경으로 입조하기를 거부하며 맞서자 명은 정벌군을 동원하면서 조선에게도 파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내키지 않았으나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천 명의 군대를 출정시켰다. 강홍립은 전쟁에 나가기를 꺼려하여 거듭해서 사직을 청했지만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다. 1618년 8월에 한양을 출발한 원정군은 평양을 거쳐 10월에 압록강변 창성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창성에 주둔하고 있는 강홍립에게 다음과 같은 칙서를 보냈다. "후금의 원한을 불러일으키면 화근이 더욱 깊어질 것이니, 사세의 변화를 기다려 모든 조치를 각별히 신중하게 취하라.... 명나라 장군의 말을 모두 따를 필요는 없다.... 절대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
이는 싸우지 말라는 뜻이다. 광해군의 칙서를 받은 강홍립은 누루하치에게 밀사를 보내 "조선군은 싸울 뜻이 없으며, 항상 전선의 후방에 있을 것이다"라고 통지했다. 그런데 강홍립에게 전투의지가 없음을 간파한 명군 사령관 유정은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하여 조선군 1만을 明軍에 배속시키고 강홍립에게는 3천 군사만 남겨주었다.
요동 형세(1616 ~ 1618)
1619년 2월 明軍 8만 8천과 조선군 1만 3천은 후금의 도성을 향해 네 갈래로 진격했다. 명군은 동로군, 서로군, 남로군, 북로군으로 나뉘었고 조선군은 동로군에 합세했다. 연합군의 주력은 보병이었고 후금군 6~7만은 모두 기병이었다. 2월말에서 3월초에 걸친 사르후 전투에서 서로군과 북로군이 참패하고, 3월 4일 부차전투에서 동로군이 참패하면서 사령관 유정은 전사하고 명군에 배속된 조선군 1만도 궤멸되었다. 후방에 처져있던 강홍립은 전세가 불리하자 휘하의 3천 병력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후금정벌 전투상황도(1619)
강홍립이 투항하자 그의 가족을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광해군은 이를 물리치고 그의 가족들을 보호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강홍립은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투항했음이 분명하다. 승리한 누루하치는 5일 마다 작은 연회, 10일 마다 큰 연회를 열어 강홍립을 환대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강홍립은 사전에 누루하치와 내통하여 투항하기로 밀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일기>에도 강홍립의 투항은 처음부터 예정된 계획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누르하치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무역을 요구했다. 명이 후금과의 무역을 단절하여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던 후금은 조선과의 무역이 시급했던 것이다. 원래 여진족의 거주지는 한랭한 기후 탓에 농업이 부진하고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여진족은 의복, 식량, 소금 등 생필품을 明나라에서 수입하였다. 여진족은 백두산 일대에서 채취한 산삼이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그 다음이 모피였다. 백두산 산삼은 중국에서 인기가 높아 같은 무게의 銀과 교환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후금의 산삼과 모피가 필요치 않았다. 백두산 산삼은 조선에서도 충분히 산출되었고 모피의 수요는 거의 없었다. 누루하치가 무역과 화친을 청하는 사신을 여러 차례 보냈지만 광해군은 묵묵부답이었다.
누르하치는 조선에게 무역만이 아니라 군사동맹을 제안하고, 동맹을 수락하면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군 포로를 송환하겠다고 했다. 후금은 신속한 회답을 원했으나 조선은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고 질질 끌기만 했다. 격분한 누르하치는 조선군 포로 중에서 부원수 김경서를 포함해 사오백 명을 학살했다. 그래도 조선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후금에서는 조선정벌론이 강하게 일어났지만 요동 방면의 정세가 급박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조선과 후금의 냉랭한 관계는 광해군 재위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광해군의 행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광해군은 왜 강홍립에게 후금과 싸우지 말고 여차하면 투항하라고 지시했을까? 1623년 3월 12일의 광해군 폐위 교지에는 광해군의 죄상이 열거되었는데 그 중 이런 대목이 있다. “광해는 중국의 은덕을 저버리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기미년(1619년)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주장의 실마리는 여기서 시작한다. 하지만 역사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화친을 청한 쪽은 누루하치였고 광해군은 이에 불응한 것이 실제의 사실이다. 광해군이 후금과 화친을 도모했다는 주장은 반정세력이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모략이었다. 실제 있었던 사실을 외면하고 신뢰하기 어려운 정적들의 주장에 의지하여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역사학의 원칙은 물론이고 상식에도 어긋난다.
이렇듯 광해군의 목적이 중립외교는 아닐진데,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여차하면 항복하라고 지시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광해군은 후금이 두려웠던 것일까? 광해군은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겁쟁이였던가? 당시 조선의 인구는 대략 6~7백만이었고, 명나라의 인구는 줄잡아 1억 수천만이었다. 후금의 인구는 70만 정도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최대 6~7만이었다. 임진왜란 내내 전국을 돌며 근왕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던 광해군이 후금을 두려워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후금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미래를 예견하는 신통력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납득하기 어려운 광해군의 행보를 해명하려면 다른 요인을 찾아야 한다. 광해군은 왜군이 침입한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1608년에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明나라는 조선의 거듭된 간청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끝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후궁 소생인데다가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 장자가 아니거나 후궁 소생인 경우가 허다했지만 명나라에서 이를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유독 광해군을 문제 삼은 이유는 당시 명나라도 똑같은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빌미로 왕실과 조정의 정적들은 광해군의 지위를 끊임없이 흔들었고 부왕인 선조도 그 쪽에 가세했다. 광해군은 16년 동안 말할 수 없이 시달리다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간신히 왕위에 올랐다.
명나라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어떠했겠는가? 광해군으로서는 자신을 괴롭힌 명나라 편에 서서 후금과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내고도 싸우지 말라고 지시한 데에서는 굿이나 보자는 오기가 엿보인다. 심사가 뒤틀린 광해군은 명나라에게 한번쯤 쓴맛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광해군의 심경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이런 추측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광해군은 국가의 중대사인 전쟁에 임하여 사적인 감정을 앞세운 것이 된다.
동기가 무엇이건 간에 동맹국을 배신하고 적과 내통한 행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후금에 밀사를 보냈을 때는 아군의 군사정보도 누설했을 것이 뻔한데, 그로써 동맹군의 패전을 유발하여 누루하치의 환심을 얻은 것은 너무나 비열한 짓이다. 투항을 지시하고서도 포로가 된 군사들의 송환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또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광해군은 국가의 명예를 더럽히고 군주의 의무를 저버린 인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1619년 가을 누루하치는 요동 북부를 공격하여 요충지 철령과 개원을 점령했다. 1621년 3월에는 요동의 심장부인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고, 1622년 1월에 요하를 건너 광녕을 점령했다. 이로써 후금은 대릉하 동쪽 지역을 모조리 장악했다. 조선에서는 1623년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었는데, 반정세력 간의 알력으로 다음해 1월 서북병마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관군을 격멸하고 한양을 점령했으나 또 다른 관군의 반격에 패배하여 한 달 만에 진압되었다. 내란으로 관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가장 강력했던 서북군 역시 궤멸되어 조선의 군사력이 몹시 허약해졌다.
요동을 상실한 명나라에서는 뛰어난 전략가 원숭환이 등장하여 영원성(寧遠城)을 거점으로 대릉하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을 철통같이 방비하였고, 특히 서양식 대포를 모방하여 제작한 홍이포(紅夷砲)를 배치하였다. 누루하치는 1625년 3월 1일 심양으로 천도하고 다음해 1월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영원성을 공격했으나 원숭환의 강력한 수비로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다.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그해 8월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뒤를 이었다.
원숭환
영원성
홍이포
1626년 동북아 형세
후금은 한족이 거주하는 농경지대인 요동을 점령했지만 많은 한족들이 도주하거나 폭동을 일으켜 물자 부족을 해소할 수 없었다. 중국으로의 진군이 저지된 후금에게 부족한 물자를 구할 곳은 조선 밖에 없었다. 홍타이지가 즉위하자마자 조선 침공을 계획한 까닭은 그만큼 후금의 경제 상황이 곤궁했기 때문이다.
1627년 1월 후금의 3만 군사가 강홍립을 향도로 삼아 압록강을 넘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겨울에 몹시 추운 만주에서는 무엇보다도 피복이 가장 필요했다. 후금의 목적은 급히 피복을 조달하는 것이었고, 이괄의 난을 겪은 조선은 싸울 군대가 없어서 양측은 한 달 만에 타협하고 전쟁을 끝냈다. 조선은 전쟁배상금조로 물자를 바치기로 했는데 주된 품목은 피복류였다.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두 나라가 형제관계를 맺기로 하되 후금은 명에 대한 조선의 사대관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한국사에서는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이 명나라에 사대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바람에 정묘호란을 자초했다고 하면서 인조와 조선 조정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그러나 정묘년의 강화조약에 나타나듯이 조선이 명나라와 관계를 단절하고 후금에 복속하는 것은 후금의 요구 조건이 아니었다. 또한 명나라가 비록 요동을 상실했지만 요동은 중국의 변방으로 명나라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후금이 요동을 차지했어도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영원성에서 명군에게 패하여 누르하치가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금에게 자발적으로 복속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묘호란은 외교 문제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얼어죽을 지경인 여진족이 피복자재를 강탈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외면한 채 조선은 명나라와 절연하고 후금에 복속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에 무지한 자들의 잠꼬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는 강도질을 당한 피해자에게 강도가 원하는 것을 왜 미리 내주지 않았냐고 탓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 침공으로 물자 부족을 해소한 홍타이지는 중국으로 방향을 돌려 1627년 5월 영원성을 공격했으나 원숭환의 완강한 방어에 막심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홍타이지는 다시 금주를 공격했으나 여기서도 패배했다. 기병이 주력인 여진족 군대는 서양식 대포로 무장한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2년 동안 후금은 속수무책이었다. 1629년 가을 홍타이지는 반간계(反間計)를 구사하여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명나라 조정에 퍼트렸다. 의심이 많은 숭정제(崇禎帝)는 그해 12월 원숭환을 투옥하고 다음해 9월에 처형하였다. 중국 역사의 마지막 영웅은 이처럼 허망하게 사라졌다. 원숭환을 제거한 홍타이지는 1631년 8월 대릉하성을 포위하여 10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홍타이지는 난공불락인 영원성과 산해관을 돌파하여 북경으로 직행하기를 포기하고 먼저 내몽고 정복에 착수했다. 당시 몽고족은 고비사막을 경계로 해서 남쪽의 차하르와 북쪽의 할하, 서쪽의 오이라트로 분열되어 있었고, 대칸의 지위는 징기스칸의 적통인 차하르에서 계승하고 있었다. 1632년부터 계속된 후금의 공격에 차하르는 패전을 거듭하여 1635년 4월 마지막 무리가 大元제국의 전국옥새를 바치며 항복하였다. 전국옥새를 수중에 넣은 홍타이지는 천명이 자신에게 왔다면서 1636년 4월 11일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淸으로 개칭했다. 그 해 12월 8일 청군이 압록강을 넘었고,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조선은 다음해 1월 30일 항복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동북아시아 형세(1636)
병자호란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지극히 자학적이다. 사대주의에 집착한 인조정권은 망해가는 명나라에 충성하면서 떠오르는 청나라를 배척하다가 재앙을 자초했다고 말한다. 삼전도의 치욕은 천지분간을 못할 만큼 어리석은 조선의 자업자득이라고 매도한다. 조선은 일찌감치 명나라와 의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함으로써 전쟁을 피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야말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허무맹랑한 역사 왜곡이다.
병자호란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면 만주가 본거지인 여진족은 근자에 내몽고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만리장성 남쪽에는 여전히 명나라가 건재했다. 명은 비록 전성기에 비해서 쇠약해지긴 했으나 요동에서 산해관으로 가는 길목인 영원성과 금주성을 확고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세는 홍타이지가 사망한 1643년을 지나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명나라는 청나라에게 망한 것도 아니다. 명나라는 1644년 3월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숭정제가 자결함으로써 그야말로 느닷없이 멸망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영원성과 산해관 일대를 수비하던 명군 사령관 오삼계가 수십만 병력을 이끌고 청나라에 투항했고, 청군은 오삼계 군대의 뒤를 따라 산해관을 무혈통과해서 북경으로 진격했다.
인조정권이 무능하여 명나라가 망해가는 줄도 몰랐다고 비방하지만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에 8년 후의 사태를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강대한 소련이 하루 아침에 붕괴할 줄 누가 알았던가? 태평양전쟁과 한반도 분단을 누가 예상했던가? 1950년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사람이 있었던가?
인조정권이 오로지 명에 대한 의리와 사대주의에 집착하여 청(후금)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정묘조약 이후 10년 동안 거듭된 여진족의 조약위반과 무리한 요구가 조선의 반감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1627년의 정묘조약에서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후금은 明에 대한 조선의 사대관계를 인정하였다. 조선은 후금의 요구를 수락하여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허용함으로써 후금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해 주었다. 조선은 전쟁배상금으로 목면 1만 5천 필, 면주 2백 필, 백저포 250 필, 호피 60장, 녹피 40 장, 왜도 8병, 안구마 1필 등을 보내기로 했다. 이는 해마다 바치는 조공이 아니라 1회에 그치는 배상금 성격이었다.
그러나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무시하고 막대한 식량을 강요하였고 이에 더해 황금 1만 냥, 병선(兵船) 3백 척, 군마 3천 필, 군사 3만 등 갈수록 요구 사항이 늘어났다. 또 정묘호란 때 붙잡혀간 많은 조선인 중에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을 색출해서 돌려보내거나 고액의 몸값을 지불하라고 압박했다. 그뿐 아니라 수시로 국경을 넘어와 민가를 약탈했고, 후금을 명나라와 동등하게 예우하라고 요구했다. 이 모든 것이 정묘조약 위반이었다. 조선은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고 후금에 대한 감정이 점점 악화되어 갔다.
1636년 2월, 후금은 인조비 한씨(韓氏)의 장례식에 문상(問喪) 사절단을 보내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이는 형제관계를 맹약한 정묘조약의 일방적인 파기였다. 누적되었던 조선 조야의 분노가 이를 계기로 폭발하자 인조도 후금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다. 그해 4월,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홍타이지는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해 10월 심양(瀋陽)을 방문한 조선 사신을 통해 홍타이지는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 주창자를 압송하라는 통첩을 보내왔다. 조선이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자 청나라는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가 조선을 침공했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인조의 친명반청 노선이 청나라의 침입을 자초했다고 설명함으로써 인조의 잘못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말한다. 조선이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려서 침략당했고, 어리석은 인조가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은 여진족의 거듭된 조약위반과 막대한 공물 요구를 감수했어야 하고, 일방적인 조약파기에도 군소리 없이 순종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 이것도 말이라고 하는가? 조선에게 무리한 요구를 거듭한 쪽은 청나라였는데 인조가 왜 명나라와의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에 순순히 복속했어야 하는가? 타국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여 침략당한 처지에 전쟁이 일어난 책임을 자국 탓으로 돌리는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한국 밖에 없다. 정신이 돌지 않고서야 역사를 어찌 이 따위로 볼 수 있는가?
제대로 된 역사가라면 인조에 대한 평가는 다른 측면에서 내려야 할 것이다.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은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10년 동안 거국적으로 국방을 강화하여 여진족의 재침에 대비했어야 한다. 결과만 보면 남한산성에서 45일 동안 항전하다 끝내 항복했으니 대비를 제대로 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인조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역사가는 조선이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대비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인조가 국방을 전혀 등한히 했는지,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충분치 못했던 것인지, 혹시 국방전략에 실책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 모든 이유는 제각기 무엇이었는지,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을 밝히는 것이 역사가에게 부여된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학계는 이런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 게다가 여진의 무리한 압박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인조가 명에 대한 충성을 지키느라 청을 배척했다고 비난한다. 인조가 어리석어서 종주국을 잘못 선택했다고 탓할뿐이니 그야말로 노예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이같은 노예의식은 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이는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노예의식을 주입하고자 식민사관에 의거해서 조선사를 전면적으로 왜곡했다. 식민사관에 물든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생존방식과 달리 신흥세력인 여진의 압박에 순종하지 않은 인조를 비방했고 그런 인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역사는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보는 것이며,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에는 각자의 인생관과 사회적 의식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교과서가 가르치는 한국사에는 강한 쪽에 빌붙어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자들의 노예적 인생관과 역사관이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다. 주인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노예의 역사관일랑 이제 그만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외적의 강압과 침략에 항거한 민족의 기상을 드높이 찬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