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던 맑는 개울, 청계천(淸溪川)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도성 중심을 관통해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하여 한강으로 들어가는 자연 하천이었던 청계천. 태종 때부터 강폭을 넖히고 바닥을 파내 양안에 둑을 쌓기 시작했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수해는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청계천 상류를 돌로 쌓고, 광통교(廣通橋, 청계2가 부근)와 혜정교(惠政橋, 광화문우체국 부근)를 돌다리로 만듭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를 이르는 말이었는데, 백성들 사이에선 공사가 잦은 청계천의 별칭이 되었고 이후 사람들의 손길이 닿은 개울의 통칭이 됩니다. 세종대왕 때는 지천(支川)의 정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청계천 상류로 몰려 범람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 피해를 예방하는 조치였지요. 그리고 청계 2가 부근에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표지(水標)도 세웠는데 그 옆에 놓인 다리가 수표교(水標橋)입니다.
원래 자리에 서 있는 수표교 모습 / 1915년 촬영
영조 때에는
각 지방에서 장정 20만여 명을 동원하여 두달 가까이 개천 바닥을 파내 강폭을 넓히고 파낸 토사는 청계5가 방산시장 부근에 산처럼 쌓아 놓았다고 합니다. 평지 명칭에 山자가 붙은 건 아마도 이런 연유인듯 한데, 개천을 파낸 고약한 냄새나는 곳을 '향기로운 산(芳山)'이라 부른 건 아이러니가 아닐지.. 이 무렵부터 준천사(濬川司)를 두어 해마다 모래를 파내고 둑을 수축하다가 후에
돌로 둑을 쌓게 됩니다. 한참 뒤인 1903년 나라의 보조금과 민간의 기부금을 모아 다시 준설 공사를 하고, 방산시장 부근 인공산을 모두 헐어 종로 부근 길에
깝니다. 6.25 전쟁 후 청계천에 손을 대기 시작, 1959년에는 2가 부근에 놓여 있던 멋진 돌다리 수표교를 장충단공원으로 옮깁니다. 1963년에는 큰 광통교(청계2가)로부터 오간수다리(청계6가)까지 철근과 시멘트로 덮어서 큰길을 만들고 고가도로를 놓습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들어서서는 대대적인 청계천 복원사업을 하지요. 조선 건국이래 청계천의 역사는 말 그대로 '개울 정비(開川)'의 역사였다 할 있습니다.
풍치 만점 수표교(水標橋)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세워진 수표교 근래 모습
수표교는 세종로를 기점으로 4번째(5번째?) 다리로,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을 대표하는 다리지요. 조선 초기에는 이 부근에 말 시장이 있어 마전교(馬廛橋, 청계천 5가에 동명의 다리가 또 있음)라 하였으나, 세종대왕 당시 비가 왔을 때 수위를 재는 팻말(量水標)을 설치하면서 다리 이름을 수표교(水標橋)라 부르게 됩니다. 돌로 만든 다리가 아름다워 조선시대에는 장안의 백성들이 사시사철 나와 즐기던 명소였는데, 특히 대보름날에는 이곳과 광통교에는 연날리기와 다리밟기(踏橋)를 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북적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1959년 청계천 정비를 하면서 다른 다리들은 그대로 묻어버리지만 수표교 돌다리만은 현재의 위치인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 설치합니다.
수표교 절구(水標橋絶句) -일부 / 이덕무(李德懋, 조선 후기)
燈火脩廊射兩邊(등화수랑사양변)
다리 난간따라 켜진 등불은 양쪽을 비추는데,
虹橋暝踏一冷然(홍교명답일냉연)
무지개 모양 다리를 어둠속에 건너자니 썰렁하구나.
願移西子湖*中藕(원이서자호중우)
원컨데 西湖*의 연꽃을 옮겨다 심어,
朝冪朱霞暮綠烟(조멱주하모록연)
아침엔 붉은 노을로 저녁엔 푸른 안개로 덮었으면..
*西子湖(서자호) : 중국 古都 항주(杭州)의 서호로 경국지색 서시(西施, 일명 西子)의 고향이라 하여 서자호(西子湖)라는 별칭이 있음.
당시 수표교에는 저녁에도 등불이 다리 난간을 따라 켜져 있음을 알 수 있군요.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종로 탑동 부근에 살았는데, 이 부근에 살던 다른 서얼 출신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백탑파(白塔派) 시회에서 함께 활동했다고 하지요(백탑(白塔)은 현재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 석탑을 지칭).
수표교(水標橋) -일부 / 유득공(柳得恭, 조선 후기)
兩行絲柳舊無邊(양행사류구무변)
양쪽으로 늘어선 실버들 끝이 없는데,
日暮人歸祗黯然(일모인귀지암연)
해지고 사람 돌아가자 어둑할 뿐.
愁殺孝經橋*外望(수살효경교외망)
시름겨워 효경교* 너머를 바라보니,
不知何際是和煙(부시하제시화연)
어디까지 이내 낀 곳인지 알 수 없네
*효경교(孝經橋) : 청계천 4가 부근의 다리로
원래 영풍교(永豊橋)라 하였는데, 부근에 소경들이 많이 산다하여 효경교(孝經橋)·효교(孝橋)·새경다리·소경다리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는데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 있음.
유득공(柳得恭, 1748~1807)도 역시 백탑 시 모임의 일원으로 위의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과 자주 만나 시를 짓고 밤새 통음하지요. 이 백탑시사(白塔詩社) 모임을 이끈 이는 서얼 출신이 아닌 연암 박지원이라고 합니다.
수표교에서 백탑 시벗들과 함께 지은 칠언절구(水標橋同白塔詩社濬人作七絶) -일부
/ 이서구(李書九, 조선 후기)
日午橋頭水色鮮(일오교두수색선)
한낮 다리 머리 물빛도 고운데,
雪鵝花鴨最嫣嫣(설아화압최언언)
하얀 거위 꽃같은 오리 너무도 곱구나.
齊齊浴罷闌干下(제제욕파란간하)
난간 아래에서 줄지어 미억을 감고는,
盡澤輕陰一餉眠(진택경음일향면)
모두 다 설핏한 그늘을 찾아 잠시 졸고 있네.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백탑 시모임(白塔詩社)의 막내이면서 유일하게 양반 자제이나 서얼 출신 북학파(北學派)들과 함께 시를 짓고 허물없이 어울렸다고 합니다.
대보름 연날리기(上元竹枝詞 紙鳶) / 조수삼(趙秀三, 조선 후기)
黃絲白線細相同(황사백사세상동)
노란 실 흰 실 서로 같이 가느다란데,
竟日惟爭上下風(경일유쟁상하풍)
아래 위로 부는 바람 속에 종일토록 다투네.
寒嘯一聲何處起(한소일성하처기)
찬 바람 소리 어디에서 이는지,
萬人擡首碧霄中(만인대수벽소중)
모든 사람들 머리들어 푸른 하늘을 쳐다보네.
수표교 답교놀이
대보름 답교놀이(上元竹枝詞 踏橋) / 조수삼(趙秀三)
橋上遊人立萬重(교상유인입만중)
다리 위에 노니는 수많은 사람들 겹겹히 서있는데,
橋邊春水月溶溶(교변춘수월용용)
다리 아래에 봄 물에는 달빛이 넘실댄다.
行歌兩岸遙上答(행가양안요상답)
양쪽 언덕에서는 노래 부르며 화답하는데,
滿地梅花五夜風(만지해화오야풍)
새벽 바람에 매화가 떨어져 땅에 가득하구나.
영·정조 때의 여항시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 그의 가계에 역관이 있는 걸로 미루어 봐 양반은 아니고 중인출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의 시에는 신분적 제약에 대한 불만과 갈등이 엿보이며, 특히 후반에는 백성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