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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168-6)
02-2077-9000
관람시간 : [월화목금일] 10:00-18:00 / [수토] 10:00-21:00
관람료 무료 (특별전시는 유료)
<특별전시>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전시명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전시장소
기획전시실
전시기간
2022-04-28~2022-08-28
입장료 : 성인 5,000원 / 청소년,어린이 3,000원
오전10시부터 30분 간격으로 100명씩 입장을 하는데, 70%는 온라인으로 30%는 현장발권을 한다.
온라인 예매는 전체 매진상태라 현장 매표소에서 줄을 서서 입장권을 구매하여야 한다.
오전9시40분부터 현장발권을 시작하는데... 적어도 9시에는 줄을 서야한다.
한 명이 2매까지 구입할 수 있다.
교체 전시품으로 인왕제색도가 4월 28일부터 5월 31일까지 전시되고
추성부도가 6월 1일부터 6월30일까지 전시되며,
불국설경은 7월1일부터 7월 28일까지, 화접도는 7월 29일부터 8월 28일까지 전시된다.
고려 수월관음도와 십장생도 병풍은 4월 28일부터 6월 30일까지 전시되고,
고려 천수관음보살도와 해학반도도 병풍이 7월 1일부터 8월 28일까지 전시된다.
기획전시실 매표소에서 줄을 서서 오전10시 1회차 현장구매를 하고 입장을 했다.
어느 수집가가 여러분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수집품이 수집가의 집에 가득 차 있습니다.
수집품에는 상상력을 펼치며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온 인류의 궤적과 지혜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수집가는 자신의 수집품 속 인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수집품에는 어떠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요?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함께 준비하고,
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박수근미술관, 이중섭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이 함께 출품했다.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김씨 가족'을 지켜낸 기와집과 주름진 노부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댜.
선으로 그려진 노부부의 신체가 붉은 흙과 하나 되어 따뜻하고 튼튼한 기와집의 토대가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굳건하게 터전을 일구고 살아간 윗세대들의 삶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돌로 어린아이 형상을 새겨 무덤 주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수호신 기능을 하도록 무덤 앞에 세운 동자석(童子石)이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현무암이나 응회암과 같은 화산암으로 독특한 조형미가 느껴지는 동자석을 많이 만들었다.
이목구비 표현이 단순하면서도 정감 넘친다.
기발하고 재미있는 작품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가운데 액자형태의 뚫린 구멍으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는 군더더기의 설명이 필요 없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사랑의 요점을 세련되게 전달한 작품이다.
좌우 대칭의 형태, 부드러운 볼륨과 우아한 선을 전체의 형태 안에 하나의 덩어리로 연결해 사랑의 본질을 표현했다.
김정숙은 한국의 첫 여성 조각가이자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 단순한 형상의 조각상을 제작했다.
화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콧수염을 길렀으며,
양복과 넥타이를 갖추어 입은 모습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짐작할 수 있고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에서 근엄하고 엄격한 성품이 느껴진다.
이종우는 부친의 반대를 무릎쓰고 화가가 되었고, 1925년 한국 화가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화가가 자신의 아내를 그린 이 그림에서 전통적으로 중시된 정숙한 여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두운 실내지만 얼굴과 상체 위로 밝은 빛이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어서 인물의 온화함이 강조되었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린 박득순은 여인과 정물을 사실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즐겨 그렸다.
사랑의 결실로 탄생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가족 모두 발가벗고 있는데, 신선들처럼 여유롭다.
대자연, 우주의 중심에서 자유와 여유를 누리는 가족의 모습은 장욱진이 꿈꾼 모습일 것이다.
장욱진은 이처럼 자신의 생활에서 우러나온 심상을 동화 같은 그림으로 표출했다.
온 세상 풍파에서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엄마의 굳은 의지를 드러내듯,
여인의 시선과 입매, 그리고 아이를 두 다리로 받치고 탄탄한 양팔로 감싸 안은 자세에서 긴장감이 전해진다.
엄마의 든든한 보호를 받고 있는 아기는 평온하기만 하다.
권진규 특유의 사실성과 정신성이 잘 드러난다.
아이는 태어난 후에도 엄마에게 한 몸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듯 어린아이가 여인의 목에 감긴 포대에 싸여 있다.
포대에 싸인 아이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머리를 옆으로 돌린 어머니의 형상은 백영수 모자상의 전형이다.
"현재 우리 문화의 색깍이 있느냐, 우리 나름의 문화정체성이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 이건희 에세이에서
"문화는 좋고 나쁨으로 우열을 논할 수 없습니다. 문화란 단지 다를 뿐입니다."
- 이건희 에세이에서
일터에 나간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을 돌보는 소녀 모습은 박수근이 즐겨 그린 소재이다.
화가는 소녀와 아기를 작은 화면에 가득 차도록 그려 놓고 배경은 비워둔 채 황토색으로 칠했다.
거칠거칠한 그림의 표면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지 않은 골목길 흙바닥의 색과 질감을 연상시킨다.
1953년 이중섭은 가족을 만나러 일본으로 갔으나 5일간의 해후를 끝으로 헤어졌다.
그림 속 그는 현해탄(玄海灘)이라고 불렀던 대한해협을 건너서 세 가족을 만나러 간다.
얼마나 기뻤으면 머리가 뒤로 젖혀져 얼굴이 거꾸로 그려졌다.
이처럼 그는 일본으로 보낸 편지에 다시 만날 소망을 담은 그림을 동봉하곤 했다.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데, 이를 잘하는 사람이 바로 화가이다.
화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창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작품 속 화가는 단칸방 벽에 수많은 작품을 붙여놓고 파이프를 문 채 누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예술에 몰입한 화가에게는 허름한 골방도 예술의 성전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비좁은 골방도 행복한 아틀리에가 될 수 있습니다.
<26 -Ⅰ- 68 > 김환기(1913-1974) 1968년 종이에 유채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김환기는 1963년부터 미국에서 점,선,면으로만 된 추상 화면을 시도했다.
추상화에서도 달 같은 자연의 이미지와 따뜻한 정감이 계속 남아있었다.
이 작품 위쪽에 있는 둥근 원, 원 둘레의 분할된 선과 색점에서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달무리가 연상된다.
그 주위의 색점과 테두리는 하늘의 별과 같아 달밤의 서정적 분위기가 전해진다.
<작품> 김환기(1913-1974) 195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화가는 자연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 김환기는 달과 백자의 형태를 연결시켜 큰 백자 항아리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였고,
큰 백자 항아리에 달의 이미지를 더해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밤하늘의 둥근 달, 이지러진 달항아리, 더 이지러진 달 그림자의 형태 변주가 자연스럽다.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높이와 폭의 비율이 거의 같은 단아한 달항아리다.
사발 모양 두 개를 빚어 물로 문질러 붙여서 만들었다.
한 아름에 가득 차는 넉넉한 영감과 어딘지 일그러진 비대칭 형태가 편안한 느낌이다.
둥그스름한 그릇을 보름달에 비유한 '달항아리'라는 별명이 서정적이다.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 있다
굽이 좁다 못해 두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
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
틀림없는 한 쌍이다
똑
닭이 알을 낳듯이
사람의 손에서 쏙 빠진 항아리다
- 김환기
이번 특별전시는 작품 감상도 중요했지만 정말 감동적인 것은 작품구성과 배치로 보고 있으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구체화되는 느낌... 맨 오른쪽엔 아예 실제 백자 달항아리 위에 달을 형상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한 행복한 기억과 이별의 슬픈 기억을 그림에 녹여냈다.
1952년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는
부친이 사망하자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 도쿄로 떠났다.
이중섭은 가족과 만날 날을 기약하며, 다 같이 어울려 놀고 춤추는 가족 그림을 많이 남겼다.
외로운 화가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행복했던 순간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정약용은 정여주(鄭汝周)의 요청으로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들 정관일(鄭寬一)의 효행에 관해 글을 지었다.
3년 뒤 정여주는 자신의 며느리이자 정관일의 부인 김씨의 엄격한 자녀 교육에 관한 글도 부탁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정약용의 필치를 감상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어머니에게 매달린 아이, 아버지 뒤로 숨은 아이 형상에서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삶이 전해진다.
이 작품이 제작된 1990년대에는 4인 가족 비율이 30%를 차지해 가족 형태의 표준이었다.
지금은 1인 가족 비율이 40.3%에 이른다.
가족의 형태는 변화하지만, 변치 않는 소망은 가족이 함께하고 그 시간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다.
<'무신 경수궁'이 새겨진 백자 청화 국화,괴석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 청화 국화,괴석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 청화 국화,괴석무늬 사발>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 청채 조롱박모양 병>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간은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냅니다.
..............................................................................
물건을 모은다는 것은,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모으는 것입니다.
재산 얼마를 가졌든 이렇게 귀한 것들을 기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고...
어떤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그리고 그 뜻과 정신을 가족과 함께 공유했기에 그 지속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이 귀한 나전칠기함을 실물로 접하는 느낌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다.
이 상자에 무엇을 넣든 이 상자값이 훨씬 비쌀 듯하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생각나는 목공예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의 설명이나 수집과정을 알수없어서 아쉬웠지만...
작지만 아주 섬세하게 조각하고 채색까지 한 인상적인 호랑이 목공예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했다.
특히 날카로운 이빨까지 디테일하게 묘사하여 입체감과 사실성을 강조했다.
이 두개의 작은 도장 세트는 더욱 섬세하여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미 호랑이가 두마리의 새끼와 함께 있는 세마리 호랑이 가족을 매우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여 새겨 놓았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매우 작은 호랑이 인장은 역사의 흔적을 함께 한 모습으로 여러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조선시대 책가도 병풍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지고 싶은 귀한 것들을 그림 속에 가득 채웠습니다."
책장인 책가(冊架)에 책과 다양한 물건을 그린 그림을 책가도라고 한다.
안료를 진하게 칠해 상서로운 의미를 화려하게 표현했다.
책장 칸 옆면 안쪽을 어둡게 칠해 실제 같은 공간감을 연출했다.
조선 18-19세기 사람들은 이러한 물건들을 실제 소유하기 어려웠기에 실감나게 그린 그림으로 대리만족했을 것이다.
<삿자리 장식 삼층 장> 조선 18-19세기
규모가 큰 왕실용 가구이다. 뼈대를 이루는 쇠목과 동자주의 단면을 삼각형으로 깎아내 날렵하게 보인다.
앞면 판재 전체에 삿자리무늬 장식을 붙인 것이 특징이다.
<투각 장식 삼층 장> 조선 18-19세기
붉은 칠을 올린 왕실용 가구이다. 문판에 넝쿨무늬를 뚫어새기고 뒷면에 얇은 비단을 발랐다.
투각은 장식일 뿐 아니라 공기가 잘 통하게 해준다.
<등가> 조선 19세기
등잔을 올려두는 받침대로, 정사각형 받침 위로 직선 세 가닥이 서로 꼬며 올라가는 형태가 독특하다. 등잔을 놓는 부분은 박쥐 모양으로 조각했다.
<경상> 조선 19세기
경상은 천판 양쪽 끝이 말려 올라간 서안이다. 두루마리가 떨어지지 않게 고안된 것으로,
원래 사찰에서 사용했으나 조선시대 선비들도 애용했다.
이 경상은 섬세한 장식이 돋보인다.
<연상> 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먹감나무를 얇게 켜서 붙인 연상이다. 검게 물결치는 나뭇결이 천연의 장식이 되었다.
아랫부분을 넓게 비우고 가장자리에 버섯코 모양 선을 둘러 경쾌한 인상을 준다.
<약장> 조선 19세기
서랍 일흔 두 개가 빼곡히 들어찬 약장이지만 여닫이문을 닫으면 간결한 비례와 나뭇결이 돋보이는 가구가 된다.
약재 사용량에 따라 서랍 하나를 두 칸 또는 세 칸으로 구획했다.
<반닫이> 조선 19세기
무쇠 장석과 나뭇결의 조화가 멋스러운 나주 반닫이다. 사개물림으로 짠 모퉁이에는 광두정을 박아 튼튼하게 마무리했다.
안쪽에 선반과 서랍을 붙였다. 문짝 안쪽에 '함경도 함흥 고산면'이라는 주소가 먹으로 적혀 있다.
흡습성이 좋은 얇은 화지(和紙)에 색점을 무수히 많이 칠해 물감이 번지는 효과를 내는 기법으로 활동을 한
곽인식의 작품이다. 물감 농도에 따라 색점이 다르게 보이며, 관점에 따라 색점이 서로 밀치고 흩어진다.
이 작품과 조선 19세기 청화백자 문양의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
"21세기는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이 융합되는 시대입니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것,
서구의 합리성과 동양의 지혜가 만나는
공존과 융합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 이건희 에세이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빛이 곧 색체'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평생 고수했다.
같은 대상이라도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체를 야외 현장에서 생생하게 포착하여 연작으로 제작했다.
야외 작업의 영향인지 1908년부터 그의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그의 아내와 아들이 세상을 뜬 후 그는 실의에 빠졌다.
지인들의 지원과 위로로 1917년부터 다시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전과 달리 오직 수련과 물 표면의 변화에만 집중하여 대상을 모호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러한 표현 경향은 추상화의 출현을 예고하는 표현법이라고 평가받는다.
"모네의 정원
어느 하루 연못가 물빛에
자연의 오묘한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2021년 뉴욕 소더비(Sotheby) 경매에서 약800억에 낙찰된 클로드 모네의 <수련>은 아니고
그와 유사한 <수련이 있는 연못>이다.
처음엔 전시품 설명에 <수련>이라고 되어 있어서... 클로드 모네의 <수련>인 줄 알고 완전 깜놀~~
다음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직접 만나기 전 영상으로 먼저 설명을 해주는 공간이 있었는데...
약 5분정도의 영상을 보고나니 더욱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로부터 인간은 자연에서 얻은 기본 소재인 흙으로 사람과 동물 모양을 만들어 토기를 장식하거나 무덤에 넣었다.
삼국시대 원통형 그릇 받침대에 부착된 도망가는 개구리와 쫓는 뱀 토우는 생사를 오가는 냉혹한 자연 현장을 보여준다.
더벅머리 총각, 소와 말 한씩을 소박하게 만든 조선시대 백자 명기에서는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삶이 느껴진다.
설명이 필요없는 이중섭 <황소>
소는 인내와 끈기의 상징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인에 곧잘 비유되었다.
이중섭의 소 그림은 작가의 자화상과도 같았다.
그림 속 때로는 힘차고,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슬프게 피 흘리는 소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던 이중섭의 모습이다.
소의 주름과 근육의 결을 드러내듯 그은 힘찬 선은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한데, 이 그림에서 '소'와 '여인'은 검은 선으로만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따뜻한 색감과 만져질 듯 풍부한 질감으로 소와 여인의 본질을 전달하다.
김기창은 1960년대에 추상미술을 시작했는데,
종이를 구긴 채 거칠게 붓질을 하거나 구긴 종이에 물감을 묻혀 찍는 독특한 기법을 선보였다.
백자 청화 산수무늬 병(백자 청화동정추월문 항아리, 白磁 靑畵洞庭秋月文 壺)은 2003. 12. 30. 보물 제1390호로 지정되었다.
보름달 뜬 강가 풍경이 병 전면에 그려져 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풍만해지는 병의 형태와 너른 강에서 뱃놀이 하는 유유자적한 그림이 잘 어울린다.
이 병은 떡을 칠 때 사용하는 몽둥이처럼 생겼다 하여 '떡메병'이라고 하며 화병으로 사용되었다.
<정사신이 참석한 계회도> 작가 모름, 조선 1583-1587, 비단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6세기 문인 관료 정사신(鄭士信, 1558-1619)이 처음 벼슬에 나아간 때부터 4년 동안 여섯 번 참석한
계회(契會, 모임) 그림을 모은 병풍이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한 동기끼리, 같은 관청에서 일하는 동료끼리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모임이 성행했고,
모임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나누어 가졌다.
정사신이 참석한 계회도(정사신 참석 계회도 일괄, 鄭士信 參席 契會圖 一括)는 2005. 4. 15. 보물 제1431호로 지정되었다.
이 계회도(契會圖)는 제작연대와 참여자들이 확실하게 밝혀져 있고 1580년대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어서
학술적, 회화사적 가치가 높으며, 동일한 인물이 참여했던 여러 폭의 계회도(契會圖) 일괄이어서 자료적 의미가 매우 크다.
제1폭 괴원장방계회도
1582년 과거시험 합격 동기 중 승문원 현직 관원들이 1583년경 강가에서 모인 계회
제2폭 봉산계회도
1583년 정사신이 일본 사신을 호송하기 위해 동래에 체류했을 때 부산에서 열린 모임
제3폭 태상계회도
1585년 봉사시의 전현직 관원들이 강가에서 모인 계회
제4폭 예조낭관계회도
1586년 예조 관원들이 강가에서 모인 계회
제5폭 형조낭관계회도
1586년 형조 관원들이 강가에서 모인 계회
제6폭 미원계회도
1587년 대사간 이하 사간원 관원이 경북궁 동쪽 사간원 청사에서 모인 계회
물가 소나무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는 인물이 그려져 있어, 무더위를 피해 계곡을 찾은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그림이다.
화면을 장악하는 소나무 두 그루를 먹의 농담과 굵기를 조절하며 자신 있게 표현했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폭포는 엷게 칠하고, 아래 물줄기를 선명하게 그려서 공간이 깊이를 구현했다.
단양 구담봉은 남한강 가에 솟아 있는 높이 338m의 바위다.
주위에 봉우리가 이어져 있으나 문화가가 윤제홍은 다섯 개의 봉우리로 구담봉을 표현했다.
화가가 화면 왼쪽에 '구담봉은 웅장하고 막힘이 없다. 신기한 절경 중에서도 특별하고 기이하다'라고 적은 것처럼
신선이 사는 곳처럼 신비롭게 묘사했다.
수하한담도(樹下閒談圖)
큰 바위와 절벽 사이에 두 그루의 큰 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ㅣ두 선비가 한가롭게 앉아 있다.
담백함이 특징인 이 작품에서 문인화가 이인상이 추구했던 천연스러운 경지가 느껴진다.
화면 왼쪽 아래에 다른 사람이 그림을 가져가지 않도록 친구 임매를 위해 그린 그림이라고 적은 이인상의 글이 있다.
"온 세상을 웅혼하게 바라본다"는 제목은 매의 시선을 의미한다.
매와 토끼를 함께 그린 그림은 제왕의 위엄 앞에 소인배가 움츠린다는 의미이다.
높은 바위에서 날갯짓하는 매와 아래에 화들짝 놀라며 달아나는 토끼의 모습에서
자연에서 늘 일어나는 긴장 관계가 느껴진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과 도전정신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거대한 바위산을 향해 한 여인이 말을 타고 달려간다.
여인의 얼굴과 바위틈의 남청색은 세속과 동떨어진 맑은 기운을 드높인다.
'산의 정기'를 뜻하는 제품처럼 신비롭고 활달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둥치에 걸터앉아 피리를 부는 소년의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구불거리며 뻗어나가는 나뭇가지가 피리 소리에 맞추어 흔들리는 듯하다.
이처럼 한가로운 그림을 그린 박래현은 실제로는 시간을 쪼개어가며 집안일, 육아와 그림 그리기를 병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과 싸우면서 대작을 남겼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면 모두 아릅답거나 추한 형태를 지닙니다.
자연과 조응하며 도움이 되면 아름다운 것이 되고 자연과 어긋나며 방해가 되면 추한 것이 됩니다."
- 윌리엄 모리스,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에서
<난초(묵란도, 墨蘭圖)> 신명연(1809-1886) 조선 1862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괴석과 난초(괴석난초도, 怪石蘭草圖)> 이하응(1820-1898) 조선 1887년, 비단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다.
<영지와 난초로 상서로움을 드리다> 김응원(1855-1921) 20세기 전반, 비단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지란정상도(芝蘭呈祥圖)
인간은 자연 현상과 생명체에 추상적 의미를 부여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난초에 '인품이 고아한 선비'를 빗대어 표현했다.
선비를 상징하는 먹으로 그린 난초 그림은 점차 장식적으로 변모했다.
꽃대 하나에 여러 송이가 줄지어 핀 난초를 그리기도 하고 난초에 괴석화분을 배치하기도 했다.
20세기가 되면 물감으로 난초를 그려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백자 청화 대나무무늬 각병(백자 청화죽문 각병, 白磁 靑畵竹文 角甁)은 1991년 1월 25일 국보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단단한 팔각형 병에 간결하고 청초하게 그렸다.
이 병은 바탕흙이 눈부시게 희고 유약이 맑고 투명하여 최상품 조선백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18세기 전반 조선백자의 수준 높은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화가들은 자연의 매력을 그림에 담아내기 위해 늘 고심한다.
홍세섭은 자연물의 형태를 특색있게 변형하는 데에 뛰어났다.
겨울 산을 새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산봉우리를 향하는 동작이 극적이며,
눈 덮인 봉우리의 단순한 표현은 상당히 역동적이다.
꽃망울을 틔우려는 붉은 매화를 표현한 이 작품은 전통적인 구상이나 추상이라는 표현의 경계를 넘어서 있다.
캔버스에 겹겹이 쌓아올린 물감과 흐릿하고 짧은 선으로 매화나무 줄기를 표현했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조선 조화기법 분청사기를 떠올리게 한다.
강요배는 추상화 같은 풍경화로 자신의 심리 변화를 드러냈다.
과감하고 빠른 선이 특징인 조화기법 분청사기는 현대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조화(彫花)는 거친 갈색 바탕에 백토를 바른 뒤 표면을 선으로 긁어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조선 15세기 후반부터 지역마다 특징적인 기법으로 분청사기를 장식했는데,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조화기법 분청사기를 제작했다.
자유분방하게 변형한 반추상적인 표현으로 장식된 분청사기가 많다.
큼직한 항아리에 흰 흙을 거칠게 바른 후 선으로 긁어 모란무늬를 간략하고 힘차게 표현했다.
갈색 바탕흙과 어지러운 백색 붓자국 위로 모란무늬를 그린 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돈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고 솟아오르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1984년 8월 6일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긴 장맛비가 갠 후 인왕산은 사뭇 다르다.
장맛비로 바위들은 물기를 머금어 묵직해 보이고 수성동과 청풍계에 폭포가 생겨났다.
계곡을 따라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촉촉하고 청신한 여름날의 정감을 드러낸다.
인왕산 자락에서 태어난 겸재 정선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인왕산을 늘 보고 자랐다.
일흔여섯의 노(老) 대가 정선은 자신의 눈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인왕산 구석구석을
자신감 있는 필치로 담아내 최고의 역작을 남겼다.
특징 있게 생긴 인왕산의 바위를 원경 가득히 배치하였다.
그 아래에 안개와 수목을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를 이룬다.
그리고 수목과 가옥이 있는 전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 부감법(俯瞰法)으로 포착하였다.
원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고원법(高遠法)으로 나타냈다.
이로써 마치 바로 앞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듯한 현장감을 준다.
안개와 산능선은 엷게, 바위와 수목은 짙게 처리하였다.
먹색의 강렬한 흑백 대비로 굴곡진 산의 습곡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며 화면에 변화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바위의 거대한 양감(量感)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사된 적묵(積墨)의 힘찬 붓질과,
크고 작은 수목들에 가해진 편필(偏筆)의 활달한 운필,
그리고 산등성이의 성근 피마준(皮麻皴), 짧게 끊어 찍은 작은 미점(米點) 등은
정선이 서울 근교의 실경들을 사생하면서 사용했던 기법이다.
이 그림에서는 보다 능란하고 완숙된 필치를 보여 준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용은 구름을 몰고 비를 부르는 신령한 동물로, 동아시아에서 최고 권력자가 독점한 상징물이었다.
이 항아리는 왕실 연회에서 술을 담거나 종이와 비단으로 만든 꽃나무를 꽂는 데 사용했다.
왕실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이어서 청화를 사치스럽다고 여겨 금지했을 때도 계속 만들어졌다.
<백자 청화 모란 봉황무늬병>
<백자 양각 청화 장생무늬 필통>
<백자 투각 청화 장생무늬 필통>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봉업사명 청동 향로, 奉業寺銘 靑銅 香爐)는 2004년 8월 31일 보물 제1414호로 지정되었다.
청동은 본래 황색 광택이 있지만 표면에 청록색 녹이 잘슬어서 '푸른 동', 즉 '청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향로는 불교 의식에서 잡귀를 쫒고 잡념을 없애려고 향을 피울 때 사용한 기물이다.
이 향로는 형태가 간결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고르게 핀 청동녹이 아름답다.
향로 표면에 새겨진 글씨로 고려 태조 어진을 모신 봉업사(奉業寺)에서 제작된 향로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은 늘 변화하지만 짧은 시간을 살다 가는 인간의 눈에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래 살거나 변치 않는 자연물을 함께 그리는 십장생도는 만수무강을 비는 그림이다.
대표적인 십장생은 해, 산, 물, 돌, 소나무,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인데
십장생이 그림마다 모두 그려진 것은 아니다.
이 병풍에는 십장생에 대나무와 복숭아를 더했다.
격조 높은 십장생도 병풍으로 완성도가 높다.
봉황은 현명한 군주가 이룩하는 태평성대의 상징이어서 왕실 기물에 널리 장식되었다.
이 원반은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식사하는 큰 상으로,
한국의 칠기 중에서도 색을 들인 상어가죽, 자개, 구리선 같은 갖은 재료로 화려하게 장식한 보기 드문 작품이다.
붉은색과 녹색 계통 물감이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생명력을 표출하는 작품이다.
김흥수는 추상과 구상을 오가며 실험적인 작품을 남긴 화가이다.
구상과 비구상, 한국화와 서양화, 음과 양 등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함께 존재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 <작품>은 두 가지 개념이 양립하는 시기 전에 제작한 작품이다.
나뭇잎의 골격만 남기고 안을 비워 잘 드러나지 않았던 잎맥과 오묘한 형태를 감상하도록 이끈다.
작품 안팎을 훤히 드러내며 이어지는 선은 공간을 새롭게 보도록 한다.
정광호는 '비조각적인 조각'을 추구했는데,
이는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작품이 공간 속에 2차원인 동시에 3차원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강렬한 녹색의 대나무가 눈길을 끈다. 대나무를 겸허한 스승으로, 난초를 의기투합한 친구로 빗댄 작품이다.
전통적인 서화의 소재와 주제를 따른 것이지만, 이전과 달리 크기가 크고 색채가 강렬하다.
서화가이자 국내 최초의 사진작가였던 김규진이 미술관 전시를 염두에 두고 큰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난초는 향기 좋으니 마음 맞는 친구가 될 만하고,
대나무는 가운데 비었으니 겸허한 스승으로 삼을만하네."
인간이 자연에서 이루어낸 것은 결국 손으로 해낸 것이다.
인간은 정교하고 힘찬 손동작으로 문명을 만들어냈다.
손과 팔뚝을 정교하게 재현한 이 작품에서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권진규는 힘을 잔뜩 준 근육의 미묘한 변화를 잘 포착했다.
마른 붓과 물기 많은 수묵을 번갈아 휘둘러 자연의 변화 무쌍한 매력을 포착한 그림이다.
서화 이론에 정통한 조희룡은 그림에 옛 선인들의 화론에서 뽑은 구절과 자신의 예술론을 그림에 적었다.
"화법(그림 그리는 법)은 있으나 화리(그림 그리는 이치)가 없음은 잘못이고,
화리는 있는데 화취(그림의 운치)가 없으면, 이 또한 잘못이다.
그림 그리는 데 정해진 법(法)은 없지만, 자연에는 변화지 않는 이치가 있다.
그러나 자연의 동정(動靜), 변화 기취(機趣)를 표현하는 데 고정된 방법은 없다.
그것은 붓에서 나와야 신묘한 곳으로 이르게 된다."
- 조희룡, 산수 그림에 적은 글에서
철, 인간과 가장 밀접한 금속
철광석은 지구에 고르게 분포하지만 철을 뽑아내는 제련 공정이 까다롭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3세기 무렵부터 철기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무기 제작에는 당시 금속을 다루는 최고의 기술이 집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강도가 높은 철제 칼이 만들어졌다.
둥근고리자루 칼은 삼국시대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무기였다.
이 두 자루의 칼은 손잡이와 고리를 은으로 만들었다. 고리 안쪽에는 나뭇잎 모양을 장식해서 주인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다.
청동, 인간이 만든 최초의 금속
<거울> 중국 한 2세기 후반,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덕산 출토로 전해지는 청동방울> 초기 철기시대,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각형 별모양의 각 모서리 끝에 방울이 달려 있는 팔주령 1쌍, 아령 모양의 쌍두령 1쌍, 포탄 모양의 간두령 1쌍, 그리고
쌍두령과 비슷하나 X자 형태로 둥글게 한 조합식쌍두령 1점(전 덕산 청동방울(령) 일괄, 傳 德山 靑銅鈴 一括)은
1990년 5월 21일 국보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봉함무늬 향함> 고려 14세기, 청동과 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 최고의 가치를 지닌 금속
<귀걸이> 삼국시대 5-6세기, 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은 녹이 슬지 않고 광택이 변하지 않으므로 인류가 가장 가치있는 금속으로 아껴왔다.
삼국시대에는 지배계층의 지위를 상징하는 금제 장신구가 유행했다.
이 귀걸이는 금에 약간의 은을 합금해 강도를 높인 귀걸이다. 금판을 두드려 고리를 만들어서 속이 비어있다.
<여지무늬 허리띠> 고려 12-13세기, 청동에 금도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은 희귀하기 때문에 다른 금속으로 물건을 만든 후 금을 얇게 입혀 금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금도금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허리띠 장식은 청동에 금도금한 것으로, 여덟 개의 판과 끝장식이 남아있다.
각각의 판에 여지(荔枝, 중국 열대 과일 리치) 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허리띠에 화려하게 장식된 여지는 '리찌[Lychee, Litchi]'라고 부르는 열대과일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과일이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과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지를 이국적이고 진귀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여기에 길상(吉祥)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은, 빛나지만 변하는 금속
<허리띠와 드리개> 삼국시대 5-6세기, 은 (국립중앙박물관)
은은 희고 반짝이지만 색이 잘 변한다. 은은 귀한 금속이지만 금보다 아래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은 허리띠 착용자는 금 허리띠 착용자보다 신분이 낮았다.
신라에서 금 허리띠는 수도 경주의 대형 무덤에서만 출토되는데,
은 허리띠는 경주와 신라에 편입된 지역의 대형 무덤에서 출토된다.
<연꽃,모란 넝쿨무늬 팔찌> 고려 12-13세기, 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은은 두들기거나 정으로 쪼아 무늬를 섬세하게 표현하기 좋은 재료이다.
이 팔찌 겉면에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은판을 두들겨 모란과 연꽃 넝쿨무늬를 촘촘하게 표현했다.
팔찌 안쪽은 정으로 넝쿨무늬를 쪼아 새겼다. 팔찌 속에 부적과 다라니경문이 들어 있었다.
자연은 인간에게 경이로움과 막연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지식이 늘면서 인간은 삶을 근본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처럼 인간은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면서 종교의 차원이 높아졌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선과 절제된 형태, 소박한 재료의 성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일광삼존상(금동보살삼존입상, 金銅菩薩三尊立像)은 1970년 12월 30일 국보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유한한 생의 의미를 성찰한 종교이다.
부처의 모습을 새긴 불상은 추상적인 가르침을 쉽게 전달하는 방편이었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불교를 받아들인 뒤 부처의 영험함을 조각으로 표현했다.
이 조각상은 큰 광배 하나에 보살입상과 비구상 두 구를 배치했다.
보살의 몸에서 나오는 신성한 기운을 광배에 섬세한 선으로 새겨 표현했다.
<보살> 삼국시대-통일신라 초 7세기 후반, 청동에 금도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은 1984년 8월 6일 보물 제780호로 지정되었다.
머리는 큼직하게 묶어 올렸고, 관(冠)의 일부와 그것을 끼운 자국이 남아있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신체는 발달한 가슴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 늘씬한 하체 등으로 인하여 우아하고 세련된 조형성을 보인다.
옷은 물결무늬를 이루고, 하체의 옷은 얇아서 두 다리의 윤곽이 뚜렷하며 긴 타원형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인체 비례가 매우 시원스럽고 표정도 부드러운 7세기에 만들어진 뛰어난 작품이다.
[위키백과]
<부처> 통일신라 8세기, 청동에 금도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은 1984년 8월 6일 보물 제779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그 위로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묶음이 솟아있다.
둥근 얼굴에는 눈·코·입 등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옷은 양 어깨에 두껍게 걸쳐 입고 있으며 U자형으로 넓게 드러난 가슴 안에는 속옷이 표현되었다.
양 다리에 표현된 옷주름은 U자형으로 흐르면서 다리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손가락을 편 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반대로 아래를 향하고 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연꽃이 새겨진 8각이며, 하대에는 귀꽃이 높게 솟아 있다.
[위키백과]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1(初雕本 顯揚聖敎論 卷十一)은 1988년 12월 28일 국보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옛 경전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된 덕분에 동아시아에 불교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
<현양성교론>은 인도의 무착이 저술했고 중국 당나라 현장(602-664)이 한문으로 번역했다.
이 목판본은 11세기에 인쇄한 초조대장경의 일부이다.
고려왕실은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려고 한국 최초로 대장경을 집결했다.
감지금니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75(紺紙金泥 大般若波羅蜜多經 卷一百七十五)은 1986. 1. 29. 보물 제887호로 지정되었다.
경전을 베껴 쓰는 사경 작업은 부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중생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어서 큰 공덕이 있다고 여겨졌다.
고려시대에는 감색이나 갈색 종이에 금과 은으로 베껴 쓴 사경(寫經)이 널리 제작되었다.
이 사경 끝부분에 고려 1055년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김융범(金融範)이
돌아가신 선조와 부모의 명복을 빌려고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재위 1567-1608)의 계비 인목대비는 영창대군 역모 사건의 배후라는 모함을 받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5년 동안 유폐되었다.
인목대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지만 바깥출입이 금지된 생활을 강요당했다.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슬픔과 가문의 생존이 위태로운 불안 속에
인목대비는 손수 한 자 한 자 불경을 옮겨 쓰며 마음을 다잡았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업경대(業鏡臺)
중생이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 앞에서 생전의 죄를 비추어 보는 거울을 업경대라고 한다.
업경대를 받친 사자의 짧은 다리와 휘날리는 꼬리, 업경대를 둘러싼 둥근 불꽃의 형태로 보아
17세기 전반에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온 세상 괴로움을 없애는 큰 북을 받치고 있던 법고대(法鼓臺)
사자 위에 연꽃 모양 법고(法鼓) 받침을 올린 법고대로, 법고는 전하지 않는다.
법고는 양쪽에서 치는 북으로 종, 운판, 목어와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을 구성하는 대표적 범음구(梵音具)이다.
사찰 전각 안에 법고대를 두고 의식이 있을 때 사용했을 것이다.
섬세한 아름다움의 극치, 수월관음보살의 옷 무늬
수월관음은 관음보살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하늘의 달이 여러 곳의 맑은 물에 비치듯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이 불화는 아래쪽이 손상되어 선재동자가 보이지 않지만
관음보살이 걸치 투명한 베일 아래 비치는 옷 문양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7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선불교의 사상과 수행에 관한 한문 서적을 한글로 옮겼다.
한문을 읽기 쉽도록 한글 토를 달아 싣고, 뒤에 우리말로 풀어썼다.
15세기 말 한자음 표기에 옛이응이 사라지는 등 한글 창제 당시보다 간략하게 변화한 표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변상도(變相圖)에 <화엄경> <현수품(賢首品)>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보살의 신통력이 얼마나 큰지를 제석천과 아수라의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림 왼쪽 수미산 주변에 수많은 용들이 모여들었고, 궁전에서 제석천의 군대가 나와 아수라 무리와 싸움을 벌이고 있다.
부처의 신통력은 흉포한 아수라를 굴복시킨 제석천보다 더 크다는 비유가 담긴 변상도다.
1447년 세종이 작고한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려고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한글로 지은 불교 서적이다.
여러 한문 불교 서적의 내용을 편집해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를 구어체로 풀고 훈민정음으로 표가했다.
금속활자인 갑인자로 찍어낸 초간본으로 매우 귀중하다.
15세기 우리말, 한글 활자의 조형미가 돋보인다.
월인석보 권11(月印釋譜 卷十一)은 월인석보 권12와 함께 1987년 12월 26일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었다.
1447년 완성된 <석보상절>과 세종이 1447년 무렵 노래 형식으로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합본한 책이다.
<월인천강지곡> 노랫말을 본문으로 쓰고 <석보상절> 구절로 이를 해설한 뒤, 작은 글씨로 보충설명을 넣는 체제로 편집했다.
본문과 주석, 보충설명은 각기 글씨의 크기와 서체를 달리하여 위계를 체계적으로 구분했다.
사경의 첫머리에는 경전의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서 그린 변상도(變相圖)를 싣는 경우가 많다.
이 <화엄경> 첫머리에는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변상도로 그려져 있다.
도토리로 염색한 갈색 종이에 두께 0.2mm의 극히 가느다란 금선을 그어 섬세하고 화려한 부처의 세계를 묘사했다.
삼현수간첩(三賢手簡帖)은 2004년 8월 31일 보물 제1415호로 지정되었다.
유학자 송익필, 성혼, 이이가 30년 넘게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서간첩이다.
송익필의 아들이 가문에 남아 있던 편지들을 첩으로 편집했다.
세 학자는 편지로 성리학을 토론하거나 재상에 임명된 친구에게 국가 경영의 주의사항을 일러주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대를 이어 관료가 되고 친분을 이어가는 인연을 기념해서 만든 계회첩이다.
이호민은 1579년, 그 아들 이경엄은 1601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호민의 과거 급제동기 여덟 명의 아들들도 모두 급제했기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호민의 저택에서 모임을 열었다.
모임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주고받은 글과 시를 첩으로 꾸몄다.
영원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록이 필요합니다
"좋은 시절은 다시 오기 어렵지만, 좋은 일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계(契, 모임)를 만든 의도가 아름답다."
- 이호민, 세년계회도 서문, 세년계회첩에서
이호민은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평에 있었던 사천장에서 지냈다.
이 서화첩은 사천장의 풍광을 칭송하는 당대 최고 문장가 34명의 시와 당대 최고 화가 이신흠의 그림을 합쳐서 꾸민 것이다.
가문의 위세를 그림과 글로 후대에 전하고자 한 의도가 담겨있다.
이경엄은 중국 동진 시인 도잠(365-427)이 지은 <유사천(遊斜川)>을 읽고
자신의 별장과 도잠이 노닌 곳의 지명이 같음을 기뻐하며 지인들에게 시를 부탁했다.
조희일은 시로 이렇게 읊었다.
"도연명(도잠)은 세상을 피해 은둔한 늙은이, 가고 머무는 것을 운명에 맡겼다...
땅은 몇 천리나 떨어져 있지만, 똑같이 사천(斜川)이라는 강물이 있다.
관직 생활하면서도 세속의 욕망 잊을 수가 있으니, 구태여 바다 갈매기를 가까이할 필요가 있으랴?"
고사인물화보첩 진재해(?-1735), 장득만(1684-1764) 등 8인, 조선 18세기 전반,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사인물화보는 중국의 옛 이야기를 성현의 삶과 역사의 교훈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 모여 있는 그림첩(화첩)이다.
원, 형, 이, 정 4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65편의 고사를 소개하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화원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세자 등 왕실 유교교육을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
진재해가 1735년에 사망했으므로 그 이전에 제작되었다.
각 첩마다 정조(재위 1776-1800)의 인장 '홍재'와 '중광지장'이 찍혀 있어 왕실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재해(?-1735): 소하가 달빛 아래 한신을 쫓아가 중용하다> 고사인물화보첩 원권 제16면
유방의 책사 소하가 한신의 마음을 되돌렸다는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
한신은 유방에게 귀순했으나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하자 떠나고 말았다.
한신의 잠재력을 알아보았던 소하는 밤중에 쫓아가 그를 붙잡았다.
훗날 한신은 군사적 재능으로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장득만(1684-1764): 유방이 홍문에서 목숨을 구하다> 고사인물화보첩 원권 제15면
유방이 홍문에서 목숨을 구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항우와 유방은 진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낙양 근교 홍문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항우의 책사 범증은 연회를 틈타 유방을 죽이려 했는데, 유방은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활약으로 위험에서 벗어났다.
<장득만(1684-1764): 공자가 행단에서 예악을 가르치다> 고사인물화보첩 형권 제10면
공자와 제자들이 살구나무 아래의 단에서 예악을 논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장자에 따르면 공자가 치유림을 거닐다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며 거문고를 연주했다고 한다.
<작가 모름: 공자가 노자를 만나다> 고사인물화보첩 형권 제9면
공자가 노자를 만나 예를 물었다는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
후한 때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 노자한비열전에 공자가 노자를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공자는 제자들에게 노자를 '용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현당갱재첩(景賢堂賡載帖)> 영조(재위 1724-1776), 권적(1675-1755), 김상성(1703-1755) 등 14인, 조선 1741년
그림: 종이에 색, 글씨: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희궁 경헌당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신하들이 모여 사도세자의 교육 상황을 점검하는 모임을 갖고 이를 기록한 글과
영조와 신하들의 시를 모은 첩이다.
일곱 살 왕세자를 엄격하게 교육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
학문으로 군신 간의 의리를 강조하는 임금으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경현당선온도> 경현당갱재첩 제1면, 작가 모름
경희궁 경현당은 왕세자가 공식 의례를 행하고 공부하던 전각이다. 1741년 6월 21일 영조는 <춘추집전> 강독을 마쳤다.
다음날 경현당에서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하는 선온을 열고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전각 중앙 일월오봉도 병풍 앞이 국왕(영조)의 자리이고, 그 오른쪽이 왕세자(사도세자)의 자리이다.
앞쪽에 행사에 참여한 관원 13명이 앉아 있다.
<전우 초상> 그림: 채용신(1850-1941), 제발: 김종호, 1920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든 살의 전우(1841-1922)를 황색 평상복과 장보관 차림으로 그린 초상이다.
완고한 선비의 느낌이 잘 전달된다.
전우는 근대의 격변기에 마지막까지 성리학을 수호하고 서구 문물을 배격한 도학자였다.
채용신은 최익현(1833-1906)과 전우를 비롯한 우국지사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려 그 정신을 기렸다.
<권상하 초상> 이명기(1756-1813 이전) 조선 18세기 말~19세기 초,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흔아홉의 권상하(1641-1721)가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었다.
이 그림은 화원 김진여가 1719년에 그린 초상화를 본으로 하여 이명기가 18세기 후반에 다시 그린 것이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였다. 권상하의 후학들도 그의 초상화를 다시 제작하여 추모와 계승의 뜻을 이어갔다.
박수근의 한일(閑日)
1950년대 서울에 살던 박수근은 날마다 길을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을 즐겨 그렸다.
당시 서울에는 취미생활을 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사람들은 길가에서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냈다.
국민 화가 박수근의 우직한 손길을 거쳐 특유의 색감, 투박한 질감으로 탄생했다.
불안한 현실과 이를 포용하듯 묵묵히 받아들이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여인의 다리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고양이, 여인 뒤쪽의 검은 그림자, 날카로운 가시와 나뭇가지,
그리고 거꾸로 매달린 새는 여인 주위에 존재하는 불안을 상징한다.
여러 불안 요소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여인은 묵상하고 있다.
김환기의 산울림 19-II-73#307
인간은 보이는 세계를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대형 화면을 점으로 가득 채워,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광대한 별자리처럼 보인다.
김환기는 광목을 바닥에 놓고 아교칠을 한 곳에 푸른 점을 무수히 채워 넣어 한지에 먹이 번지는 듯한 효과를 연출했다.
파란 점들이 이루는 파동이 합쳐져 광대한 우주의 에너지를 품은 듯하다.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방혜자의 작품은 흙, 석채와 같은 천연 안료를 종이에 칠했다가 지우거나 문지르고, 재료를 구겼다가 펴는 기법을 써서
파장으로 퍼져나가고 은은하게 스며드는 빛을 표현했다.
이 빛은 우주의 존재를 담고 있는 매개체이자 깊은 명상과 사유로 얻어지는 내면의 빛이다.
우리 곁에 존재하는 불안함을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다.
인간의 형태를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조각가 최종태의 <손>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쫙 펴고 있는 형상이다.
곧게 뻗은 손은 우리에게 함께하자고 청하는 듯하다.
아이 키우는 일은 힘들지만, 아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부모는 아이와 살과 살을 맞대며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게 된다.
두 아이와 엄마의 정겹고 평화로운 한때에서 원초적 생명에 대한 찬미가 느껴진다.
'비상'은 김정숙이 추구한 영원을 향한 초월의 의지를 반영한 시리즈이다.
작가는 나선이나 부채꼴 같은 형태를 실험하면서 상승과 하강의 움직임을 표현했다.
특히 엄격한 균형감과 표면 질감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천국의 계단> 박종배(1935년생) 1980년대, 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종배의 조각은 원과 사각, 구와 기둥 등 서로 다른 조형 요소가 능숙하게 결합해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 작품 역시 곡선과 직선의 이질적인 모양이 반복하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상승하는 느낌을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했는데, 이는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며 영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의 의지를 대변한다.
존 배는 철사를 용접하여 만들어낸 선적인 구조를 탐구해왔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기본 단위나 요소에서 시작한 형태가 점차 복잡해지고,
시점에 따라 구조와 색채가 다르게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철선의 형태와 공간이 이루어내는 구성적인 아름다움과 리듬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대 미술의 개념을 확장한 백남준은 1963년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TV모니터를 사용하여 실험을 하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이 작품처럼 예술가나 역사적 인물을 비디오 모니터, DVD플레이어 등으로 로봇처럼 표현했다.
한자와 악보 등을 덧붙여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확장하고 뻗어나가는 인류의 문화를 상징한다.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의 변화'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의 파문이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져 호수 전체로 확산돼 나가는 것처럼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부터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 이건희 에세이에서
"변화란 쉬운 일, 간단한 일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야 합니다.
작은 변화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변화가 가져다주는 좋은 맛을 느껴보고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이건희 에세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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