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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중부(전남 여수·광양시)지역 탐방 ③" >
◈ 향일암(向日庵)
해마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마음에 와 닿는 일출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향일암에 오른다. 새아침, 새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어떤 희망을 염원하는 것일까. 여수는 물론 전국에서 몰려오는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해와 함께 희망을 염원하며 하늘로 띄워 보낸다.
가족의 건강, 연인과 사랑의 결실, 혹은 자식들의 무탈한 앞날을 바라며 소원하는 희망은 생각보다 소소하면서도 소박하지만 소박해서 오히려 더욱 간절하다. 밤이면 더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하는 돌산대교를 건너 향일암을 향해가는 길은 아름답다.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한 없이 오르는 길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오르는 길옆, 바다위에는 그림처럼 배 한 척 둥둥 떠 있다.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 도량인 향일암(向日庵)은 돌산도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의 원효대사가 선덕여왕 때 원통암( 圓通庵)이란 이름으로 창건한 암자다. 고려시대에는 윤필대사가 금오암(金鼇庵)으로 개칭하여 불러오다가, 남해의 수평선에서 솟아오르는 해돋이 광경이 아름다워 조선 숙종41년(1715년)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명명(命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주차장을 지나 거의 40도에 가까운 돌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온통 초록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나무 잎새들을 만난다. 햇빛에 반짝이는 싱그러움이 향일암에 대한 신비를 더하게 한다. 적당히 다리가 아파질 즈음이 되면 향일암으로 오르는 석문(石門)이 앞을 가로 막는다.
하늘을 향하여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여야만 지나 갈수 있는 석문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 이르는 길. 새로운 마음으로 해맞이를 하러가는 길은 그만큼의 겸손함을 배우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손수건 만한 햇볕이 스며드는 해탈문 같은 첫 석문을 지나면 다시 돌계단을 오르고, 뒤로는 금오산, 앞으로는 돌산의 푸른 바다와 하늘과 만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여행의 덤이다.
◈ 오동도(梧桐島)
오동도는 전남 여수시 한려동에 위치한 섬이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작점이다. 본래 여수항 동쪽에 있는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5년 축조한 길이 768m의 방파제로 육지와 이어져 있다. 면적은 약 0.12㎢. 행정 주소는 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 산1-11 이다.
섬의 이름은 오동나무에서 유래 되었는데, 섬의 모양이 오동나무 잎을 닮았고, 섬에 오동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 신돈이 오동나무 숲은 왕조에 불길하다고 주장하여 오동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섬 정상에는 1952년에 세운 오동도 등대가 있다. 그리고 등대 내에 전망대를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했는데, 올라가보면 여수항과 남해바다가 꽤 잘 보인다. 동도는 여수의 중심가에서 약 10분쯤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오동도 입구 주차장에서 약 15분 정도, 방파제 길을 따라 걸으면 도착한다.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바 있을 만큼 운치가 있으며,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동백을 이야기하자면 항상 가장 먼저 여수 오동도가 떠오른다. 섬 전체를 이루고 있는 3천여 그루의 동백나무에선 1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3월이면 만개한다. 오동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자산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향일암과 더불어 한려수도 서쪽 관광루트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오동도는 768m의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방파제 입구에서 동백열차를 타거나 걸어서 섬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섬에 들어서면 방파제 끝에서 중앙광장으로 연결된 큰길 옆으로 오동도 정상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나있다. 오동도에는 두 개의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말. 오동도에 오동 열매를 따 먹으러 봉황이 날아든다는 소문을 듣고 공민왕에게 고하여 공민왕이 오동도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명하였다.
아리따운 한 여인이 도적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벼랑 창파에 몸을 던졌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오동도 기슭에 정성껏 무덤을 지었는데 북풍한설이 내리는 그 해 겨울부터 하얀 눈이 쌓인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어나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시누대가 돋아났단다. 그런 연유로 동백꽃을 '여심화' 라고도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
◈ 홍쌍리 여사의 청매실농원
전남 광양 다압면 청매실농원의 홍쌍리 여사! 신지식 농업인이자 전통주를 제외하고 전통식품 분야에서 가장 먼저 명인으로 선정된 사람이기도 하다. 6만 평의 농원을 자기 자식처럼 보듬으며 도시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지상천국을 만들겠다는 홍여사는 우리 농업계가 가진 보물이다.
부산에서 시집 온 며느리, 매실 명인이 되기까지 홍 여사의 시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그리움은 각별하다. 시아버지는 밤농사를 짓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농가소득 1위 훈장을 받았다. 시아버지는 고집 센 며느리가 돈 되는 밤나무를 베고, 돈도 안되는 매화나무를 심는다고 하였을 때, 말없이 울면서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홍 여사의 오늘이 있기까지 시아버지의 도움이 컸다는 것이다.
홍쌍리 여사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65년 밤나무 1만주, 매실나무 2천주가 심어진 산비탈 농가에 시집와 피땀어린 노력으로 지금의 청매실농원을 일구어 낸 신지식인 농업인이다. 홍쌍리 여사님은 온갖 시련과 역경을 딛고서 꽁꽁 얼어붙은 차가운 눈 속에서 피어난 매화꽃이다.
홍 여사는 시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은 편지로 풀어내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시건방진 부산 가시나 아버지 며느리로 삼아주시어 감사합니다! 1965년, 돈 되는 밤나무 베어내고, 돈도 안되는 매화나무 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며느리, 남편 광산사업 망하고 빚쟁이 때문에 고생하고 힘들어 할 때에도 아버님의 넓고 크신 사랑의 마음을 담아 놓았다가 가끔 꺼내 보았습니다.
매화는 저의 딸이고, 매실은 저의 아들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시집 온 제 큰 며느리가 5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비록 몸은 떠나셨지만, 영혼은 저와 함께 살면서 도와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버지 살아오신 그 모습대로 살기를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버님! 세상에서 가장 후회하지 않는 아름다운 농사꾼이 되어 살고 싶습니다."
홍 여사님은 30 가지가 넘는 매실 상품을 만들어 냈다. 매실을 활용하여 30여 가지가 넘는 식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외부에서 기술도입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1966년부터 자체적으로 연구개발을 했고, 꾸준히 노력을 하였다. 홍 여사님는 도시민들이 맛있고, 삼삼하고 빛깔 좋은 것을 찾지만, 전통식품은 색깔이 조금 거무튀튀하고, 짤지라도 정말 건강에 좋은 것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