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기르기/ 곽주현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비가 내린다. ‘아니, 어제 일기 예보에 오후부터 빗방울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러면 어쩌지?’ 마음이 급해지다가 ‘천기를 어찌할 수 없지 뭐.’하고 포기한다. 어제 땅콩을 심었다. 비닐 덮는 작업을 다 못해서 일찍 농장에 갈 참이었다. 토요일이라 가까이 사는 외손주들을 데리고 가기로 약속했는데 본의 아니게 거짓말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 심고 가꾸면서 식물의 한살이를 알게 하려고 한다.
엊그제 땅콩 씨앗을 아이들 집으로 가져왔다. 낟알이 굵어서 싹틔우기 과정을 잘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물에 담그는 것부터 함께 했다. 하교하더니 통통하게 불어난 것을 보고는 왜 이렇게 뚱뚱이가 되었냐며 한 개를 집어서 이리저리 살핀다.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힘들겠다며 손가락으로 물을 짜는 시늉을 한다. 애들은 이처럼 하찮은 변화에도 눈이 동그래지고 호기심을 갖는다. 땅콩은 녀석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라 더 관심을 집중한다.
그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비닐로 덮고 수건으로 싸둔 양푼부터 열어봤다. 벌써 몇 알은 하얀 눈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돌처럼 딱딱한 것에서 이렇게 보드라운 싹이 트는 것을 보고 있으면 기적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는 찜질팩을 이용해서 온도를 높여 주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쳤는데 올해는 비닐로 싸서 그냥 방에 두었다. 요즈음 날씨가 따뜻해서 그렇게 해도 발아가 잘 될 것 같아서다. 습기가 마를까 봐 종이행주로 덮고 가끔 물을 뿌렸다.
손주 녀석이 눈을 비비고 나와 씨앗부터 살핀다. ‘와, 와’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싹이 생겼냐고 놀라워한다. 웃으면서 땅콩이 목이 말라 잠자고 있다가 물을 먹고 깨어났다고 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마술에 걸렸다가 일어난 것 같다며 자못 심각한 표정이다. 씨앗이 이렇게 되려면 충분한 물과 알맞은 온도가 필요한 거라고 말했다. 씨 하나가 어떻게 여러 개로 만들어지냐고 묻는다. 작년 가을에 같이 수확한 땅콩을 기억하고 그러나 보다. 밭에 심으면 흙과 만나 잎과 뿌리가 나오고 이것들이 햇빛과 거름으로 영양분을 만들어 저장한 것이 열매가 된다고 설명했다. 공장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더 묻는다. 식물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많은 공장이 있어 그런다고 말했으나 못 믿겠다는 듯 또 뭐라고 뭐라고 계속 질문한다.
세수할 것도 잊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싹튼 땅콩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 광합성을 말할 수도 없어 대답이 궁해진다. ‘네가 직접 농장에 가서 몇 알 심어 놓고 살펴보자.’라며 끝내려는데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면 비슷하게 생긴 아몬드도 물에 담갔다가 땅에 심으면 똑같이 열매가 많이 생기느냐고 묻는다. 미국 서부를 여행하면서 휴게소에 들렀는데 그곳에 커다란 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아몬드 나무라고 한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열매를 몇 개 주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보다 더 고소하고 맛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그 나무의 생김새를 자세히 설명하고 인터넷을 뒤져 사진을 보여줬다. 또 무슨 말을 묻고 싶어 하기에 학교 늦겠으니 빨리 밥을 먹자며 식탁에 앉혔다.
꽃피는 봄날이라더니 아파트 주변에 피어난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아이들 등하교를 도우면서 이름 알아맞히기 게임을 한다. 동백, 철쭉, 목련꽃까지 말하다가 라일락꽃 앞에서 머뭇거린다. 어제 가르쳐 줬는데 또 까먹었다. 수천만 년 전에 살았다는 그 어려운 공룡 이름은 줄줄 외우는데 정작 날마다 보는 식물은 잘 암기하지 못한다. 곁에 흔하게 있는 것들이라 오히려 관심이 적어 그런가 보다라고 짐작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이름을 아는 것은 그것과 친밀해지는 첫걸음이라 여겨 오가며 묻는다.
공부의 시작은 일상에서 흔히 보는 사물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늘 살펴서 호기심을 갖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여겨 왔다. 식물을 기르고 가꾸는 것이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것 같다. 땅은 거짓 없이 뿌린 대로 키우기 때문이다.
손주들과 땅콩의 한살이를 가을까지 살펴보려고 한다.
첫댓글 소재가 궁해서 대충썼어요.
우와.
선생님처럼 쓰고 싶습니다. 맑고 깨끗하게.
선생님 같은 할아버지를 만났다면 그리 됐을까요?
우리 할머니는 뭐 물어보면 '시끄럽다'고만 했거든요. 하하.
곽주현 선생님 손자들은 산 교육을 받고 있네요. 작년에 있던 학교 화단에 1학년 슬생에 나오는 나무가 있는데도 선생님이 이름을 모르니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보여 주더라구요. 그래서 데리고 가 실물과 이름을 가르쳐 줬던 적이 있습니다. 퇴직하면서 교장 선생님에게 나무에 이름 다는 작업하고 학교 떠나라고 부탁하고 왔어요.
할아버지의 이상형입니다.
손자들 마음 건강 하나는 단단하겠어요.
선생님 동시나 동화도 잘 쓰실 것 같습니다.
마음이 순수해서.
우와! 호기심 대장 손주들과 재밌는 일상을 보내시네요.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드러나네요.
손주분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네요. 글도 아주 좋습니다.
아이들이 호기심을 보일 때 풀어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저는 귀찮아서 모른 척하고 지날 때도 많았는데 반성되네요. 훌륭하십니다.
작년에 주말마다 할아버지랑 자전거를 타거나 텃밭을 가꾸며 일기를 써오던 2학년 아이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가 참 훌륭하시다고 칭찬 많이 했는데, 곽주현선생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시네요.
작년에도 선생님의 땅콩 심기를 읽었는데 같은 주제인데 느낌이 참 다릅니다. 예전 거는 섬세했는데 이번 글은 따뜻합니다. '공룡 이름은 줄줄~'이라는 문장에서 선생님만의 위트가 느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손주 녀석과의 일상이 참 아름답고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