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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처사 성산이공의 묘
고려왕조는 중기 이후 권력자가 발호하고 외적이 침입하여 종묘 사직이 위태하고 백성이 어육이 되었다. 이때에 기미를 알고 은둔하여 물들지 않은 사람으론 녹사 한유한①과 요산공 이억년②이 유일할 것이다. 녹사는 고려 신종 시기에 최충헌(1149~1219)이 집권하고 몽고가 국토를 잠식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서쪽으로 은둔하였다. 뒤에 나라의 초빙을 받게 되자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그 시에,
“한 편의 조서가 산골짝에 날아 들어오니
비로소 이름이 인간 세계에 알려진 것을 알게 되었네”
고 하였다. 요산공은 충렬왕(재위 1274∼1308) 때에 원나라가 송나라(960∼1279)를 멸하고 나라의 기강이 해이된 것을 보고 새로 문과 급제자의 신분으로 떠나 지리산 북쪽에 숨어 은거하는 집을 한 채 짓고 도정정사라고 이름붙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10년의 속세 일은 꿈 밖의 일인데
청산 어느 곳에서 홀로 대문을 닫아걸고 있는가?”
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로도 공의 고상한 뜻이 김이상(1232~1303), 허겸(김이상의 제자, 다 송말원초의 은사임)③과 상통함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들은 드러나고 요산공은 묻힌 것이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더군다나 한 녹사는 남명의 평가를 얻어 산봉우리에 옥을 얹어놓고 수면에 달빛이 생긴 듯 백세에 빛나지만④ 요산공은 일두(정여창)선생과 탁영(김일손)선생의 평가를 얻지 못하고 그 <두류록>에 누락되었고 또 자손이 영락하여 우리 대동보에도 빠졌으니 거듭 비탄할 만하다.
공은 곧 우리 선조 농서공(이장경)의 제4자이고 매운당 문열공 이조년(1269~1343)⑤의 넷째 형이다. 묘소는 함양군 엄천(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 임좌병향의 언덕에 있다.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마을을 가리켜 억년동⑥이라고 한다. 사림이 안산서원⑦(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성주이씨 22현을 합사)에 배향하였다.
부인은 경주 이씨로 이용간의 딸이다. 쌍분으로 장례지냈다. 아들 태성은 밀직사사이고 태문은 낭중이다. 사위는 광평군 이능⑧(이호성의 5세조)이다. 손자는 일방으로 장남 소생이고 함방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치 않는다.
후손 이교연 등이 비석을 다듬어 언덕에 세우고자 하여 내게 기록을 청하였다. 우선 그 가문 전승의 기록을 토대로 그 글을 부연하여 이렇게 적는다.
을축년(1925) 3월 방손 이도복⑨(1862~1935) 삼가 지음
후학 청송 심상복⑩(1876~1951) 삼가 씀
후학 언양 김윤수 삼가 옮김
시조시인 김용규 탁본
李億年墓碑文
高麗處士星山李公之墓
配慶州李氏祔左
勝國自中葉以降 權臣跋扈 外寇陸梁 宗社綴旒 生靈魚肉 當是時 能見幾而
作 隱遯不汚 其惟韓錄事惟韓 李樂山諱億年乎 錄事當神宗時 見崔忠獻用
事 蒙古蠶食 棄官隱遯于方丈之西 後蒙旌招 而以詩示志曰 一片絲綸飛入
洞 始知名字落人間 樂山公則 當忠烈王時 見胡元簒宋 王綱解紐 以新榜文
科 去隱于方丈之北 築一巖栖之室 牓曰道正精舍 嘗有詩云 十載紅塵夢外
事 靑山何處獨掩扉 祗此一事 可想公志尙 與金仁山許白雲同調而其顯晦
之相遜 如彼者何哉 且况錄事得南冥而峯頭冠玉 水面生月 有光於百世 若
吾樂山公 不得於一蠹濯纓 而見漏其頭流錄 又因子姓之零替 漏我大同譜
重可悲也 公卽我先祖隴西公之第四子 而梅雲堂文烈公諱兆年之叔兄 墓
在咸陽郡嚴川負壬之阡 時人至今指點其里曰億年洞 士林從享安山書院
夫人慶州李氏龍幹女 葬用魯人禮 子男台成密直司事 台文郎中 女壻廣平
君稜 孫男日芳長房出 涵芳次房出 曾玄不盡錄 後孫敎然等 將伐石以竪
陘 請余以記之 姑據其家傳所錄 抽演其說 如此云爾
旃蒙赤奮若(을축1925)淸明節傍裔孫道復謹撰
後學靑松沈相福謹書
① 한유한-<고려사 열전>
한유한은 역사에 그 계보 기록이 없다. 대대로 개성에 살았고,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최충헌이 독재하고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리가 날 것이라고 하고는 처자식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굳은 절개로 깨끗하게 살며 외부인과 교유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 풍취를 고상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불러 서대비원 녹사로 삼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깊은 골짝으로 이거한 채 종신토록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거란 병의 침략이 있었고 몽고 병이 연이어 침입하였다.
韓惟漢.
韓惟漢史失其系世居京都不樂仕進見崔忠獻擅政賣官曰難將至矣. 挈妻子入智異山淸修苦節不與外人交世高其風致. 徵爲西大悲院錄事終不就乃移居深谷終身不返未幾果有契丹之難蒙古兵繼至.
② 이억년(李億年) :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 1285년(충렬왕11년)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치사(致仕), 위성(渭城: 함양) 엄천리嚴川里)로 들어가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공맹의 도를 강론하였다. 성주의 안산서원, 금릉의 상친사에 제향.
《성주이씨세보》에 “또 다른 이름은 영(永)이요 호는 요산재이다. 을유년(1285, 충렬왕11)에 문과에 올라 개성유수를 역임하고 무술년(1298, 충렬왕24)에 위성으로 이거하여 도정정사를 짓고 십재홍진몽외사하니 청산하처독엄비란 시를 지었다. 묘는 함양 남쪽 휴천면 문정촌 장항촌내 임좌다. 영정은 안산사에 봉안하다. 부인은 경주이씨 용간의 딸이요 묘는 쌍분이다.” 하였으니 묘비문과 족보 행적이 상이하다. 묘비문은 문과급제하자마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족보는 개성유수를 역임한 뒤로 서술하고 있다. “10년의 홍진을” 하는 시구를 보면 10여 년 벼슬살이를 한 듯하다. 다만 개성유수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 처음 설치되었다.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시대까지는 이억년의 문과급제 사실만 알려지고 개성유수 벼슬 사적이 밝혀지지 않았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이 1월부터 8월까지 왕위에 올라 재임중 여러 사람을 중경유수나 개성부윤을 시켰는데 이억년의 이름은 없지만 그전에라도 역임했을 수 있다. 이억년은 충선왕파로서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복귀하자 산간오지 함양 지리산 도정동으로 피신하여 은거하고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이 다시 복위했을 때는 이미 별세하여 복권되지 못한 듯하다.
<연려실기술>(1776, 영조 52년)의 성주 서원조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1602,선조35)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ㆍ이인복(李仁復)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ㆍ이숭인(李崇仁)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 ㆍ정곤수(鄭崑壽)선조조의 명신.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1635,인조13)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 ㆍ이백년(李百年)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ㆍ이천년(李千年)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ㆍ이만년(李萬年)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 ㆍ이억년(李億年)문과에 합격하였다. ㆍ이조년(李兆年)위에 보라. ㆍ이인기(李麟起)평양 부윤을 지냈다. ㆍ이승경(李承慶)평장사를 지냈다. ㆍ이포(李褒)문하시중을 지냈다. ㆍ이원구(李元具)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 ㆍ이인복(李仁復)위에 보라. ㆍ이인임(李仁任)출향(黜享)되었다. ㆍ이인민(李仁敏)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 ㆍ이숭인(李崇仁)앞에 있다. ㆍ이직(李稷)태조조의 정승 ㆍ이제(李濟)태조조의 명신 ㆍ이사후(李師厚)한성윤(漢城尹)이다. ㆍ이육(李稢)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 ㆍ이광적(李光廸)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우애 이야기- 투금탄(投金灘)
서울시 강서구 가양2동 앞 한강여울(지금은 )을 투금탄이라 한다. 『성주이씨가승』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고려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젊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이 나눠가졌다. 형제는 공암나루를 건너고자 나룻배를 탔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한강 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이 깜짝 놀라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생은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 형제의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던들 나 혼자서 금덩이 두개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악한 마음이 들어 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려고 해서 액물인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했다. 이에 형님도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③ 김인산 [金仁山 1232~1303]
중국 송말(宋末) ·원초(元初)의 유학자.
본명 김이상(金履祥)
별칭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인산선생
국적 중국 송(宋)ㆍ원(元)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주요저서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자 길보(吉甫) ·길부(吉父). 이름 이상(履祥). 저장성[浙江省] 란치[蘭谿] 출생. 인산선생(仁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군서(群書)에 통달하였다. 장년이 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왕노재(王魯齋) ·하북산(何北山)에게 사사하고, 주자(朱子) ·황면재(黃勉齋)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송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책(奇策)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으며, 송나라가 멸망하자 진화산[金華山]에 숨어 살았다. 문집에 《인산집(仁山集)》, 주요저서에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등이 있다.
허백운(許白雲) 허겸(許謙)
절강성 금화 사람이다. 자는 익지요 어려서 고아 되고 학문에 힘썼다. 인산 김이상에게 수업하여 그 비오를 다 전수받았다. 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마을 밖을 나가지 않은 지 40여 년이었다. 공경대부들이 여러 번 천거했지만 초치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강학하여 정성을 다하니 종유한 제자가 1천여 인이었다. 사방의 선비들이 문하에 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사대부들이 그 고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그 집에 들러 안부를 물었고 간혹 예법과 정무를 묻기도 하였는데 듣고서는 모두 만족해하였다. 늦게 백운산인이라 자호하니 세상에서 백운선생이라고 불렀다. 졸하자 문의공이라고 하였다. 저서에 《독서총설》, 《시집전명물초》, 《백운집》 등이 있다. 성리학자로 원초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금원사대가로 불리는 명의 단계 주진형의 스승이다.
④ 산봉우리에 옥을 얹고: 남명(조식)선생의 <유두류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한다면, 십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격이다.
而比韓鄭趙三君子於高山大川, 更於十層峯頭冠一玉也, 千頃水面生一月也.
⑤ 이조년 [李兆年 1269~1343]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별칭 자 원로(元老), 시호 문열(文烈), 성산군(星山君)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 안남서기(安南書記)가 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書郞)을 역임하였다. 1306년 비서승(書丞) 때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하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이에 연루되어 귀양갔다. 그 후 풀려나와 13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고,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왕위찬탈 음모를 원나라에 상소하였다.
12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 수차 원나라에 다녀왔다. 12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 사직,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이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l수가 전한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⑥ 억년동: 억년동은 미상이다.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백련동은 이억년의 백형인 이백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문정리는 일두(문헌공 정여창)선생이 살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문헌동과 이억년의 도정정사가 있던 도정동을 합하여 명칭한 것이다.
⑦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星州郡 碧珍面 紫山里 安山村)에 역대(歷代)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에서 도덕(道德), 경술(經術), 문장(文章), 관직(官職)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貢獻度)가 높은 현조(顯祖) 영정(影幀) 22位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이다.
서원(書院)의 제도는 당나라 현종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등을 설치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는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학습기관 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조 중기부터 보급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신라 불교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계승하였던 까닭에 지방마다 국법으로 건립한 사찰이 있어서 국가에 공로가 현저한 분은 사후(死後)에 반드시 출생지 소속 사찰에 사당(祠堂)을 따로 설립하도록 하고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은 초상화(肖像畵)를 만들어 후세에까지 그 위업(偉業)을 전하도록 하였으니 서원(書院)과 비슷한 제도라 하겠다. 이 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말에 현창(顯彰)한 분이 많아서
중시조 농서군공 이장경(中始祖 西郡公 李長庚),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경원공 이포(敬元公 李褒),
초은공 이인복(憔隱公 李仁復),
도은공 이숭인(陶隱公 李崇仁),
형재공 이직(亨齋公 李稷)
여섯 분의 영정(影幀)을 국가의 숭봉(崇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옆 선석사(禪石寺)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嫡庶) 18王子의 태실을 만들게 됨으로서 산소는 오현(梧峴)으로 이장하고 사당은 이곳 안산사(安山寺)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그후 선조(宣祖) 14년(1581) 후손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영당(影堂)을 중수(重修)하고 제기(祭器) 등을 새로 비치하였으며, 11년후인 임진왜란때 왜적(倭敵)이 침공하여 영정(影幀) 일부를 훔쳐 갔으나 승(僧) 경종(敬宗)이 나머지 영정(影幀)을 잘 수습하여 땅속에 묻어 보관하므로서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조(宣祖) 39년(1606) 외손(外孫) 이덕온(李德溫)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사림(士林)과 더불어 영당(影堂)을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으며,광해(光海) 9년 후손 이욱(李稶)이 경향각지의 친족들과 더불어 네 번째로 중수하고 현종(顯宗) 6년(1665) 6칸 신주(神廚)와 4칸 재실(齋室)을 완성 하였다.
인조(仁祖) 10年(1632)경상감사(慶尙監司)의 허가를 얻어 재실(齋室) 동편에 새터를 잡아 유림(儒林)에서 이문환(李文煥), 곽천우(郭天佑) 등이 도감이 되어 영당(影堂)을 새로 짓고 열세분을 추배(追配)하였으니,
밀직사사이백년(密直司事 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參知政事 李千年),
문하시중 이만년(門下侍中 李萬年),
개성유수 이억년(開城留守 李億年),
평양윤 이인기(平壤尹 李麟起),
요양성참지정사 이승경(遼壤省參知政事 李承慶),
대호군 이원구(大護軍 李元具),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
대제학 이인민(大提學 李仁敏),
경무공 이제(敬武公 李濟),
한성판윤 이사후(漢城判尹 李師厚)등이고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
정헌공 이광적(靖憲公 李光迪)이 추배된 것은 그 뒤의일이다.
숙종(肅宗) 6년(1680)에 다시 문정공 이지활(文靖公 李智活),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
사헌부 전중어사 이조(司憲府 殿中御史 李晁) 등 세분을 추배(追配)하고 춘추(春秋)로 인근 유림(儒林)에서 모여 제사 지냈으나 고종(高宗) 8년(1871)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에 따라 안산영당(安山影堂)으로 이름을 바꾸는 수난(受難)을 겪었다. 그후 병진년(1916) 다시 중수하고 영정(影幀)의 감실(龕室)을 구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제향(祭享)한다.
서원(書院) 앞에는 농서군공(농西郡公)의 신도비(神道碑)는 철종 6년(1855) 경향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鍾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좨주 매산 홍직필(祭酒 梅山 洪直弼)이 비명(碑銘)을 짓고 판서 응와 이원조(判書 凝窩 李源祚)가 글씨를 썼다.
영정(影幀) 10종 13폭은 경상북도 유형(有形) 문화재 제245호로, 영당(影堂)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地方) 문화재(文化財) 제217호로 각각 지정 되었다. 진영(眞影)은 별도 봉안(奉安)하고 있고 현재 봉안된 영정은 100여 년 전에 개모(改摹)한 것이다.
⑧ 이능 5세손- 이호성(李好誠)
이호성은 조선 초기 무신으로 본관은 성주이고 호는 동산이며, 삼중대광 광평군 이능의 5세손으로 경남 함안에서 1397(태조6)에 태어나 금산에서 1467년(세조13)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정무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고 달리는 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으며 병법에 능통하였다.
세종 9년(1427년) 무과에 급제, 사복시직장이 되고 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459년 첨지중추원사 겸 경상좌도도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을 요청하였으며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상우도처치사에 임명하였다.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49년 거제 현감에 임명되어 읍을 옮기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했다. 그 후 보성, 경산 고을을 맡아 청백명관으로 알려져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공조참의 거쳐 국정이 불안해지자 노모의 봉양을 애걸하여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가 단종 1년(1453년) 경상우도처지사가 되고 144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세조 3년(1457)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거치면서 왜인의 변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연변제읍의 제색군인을 동서양계의 예와 같이 각기 본 읍에 소속, 수비하게 하고 영진군을 내지 군사로 소속시켜 불의의 일에 임하도록 하며, 아울러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방책과 야인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큰 성을 쌓아 후환을 미리 제거하자고 건의하였다.
일찍이 최윤덕의 북정 때 편비로 이름을 떨쳐 비장군 이라 불렀으며, 20년 동안이나 북방을 수비하여 산천의 형세를 환히 알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를 함에 실수가 없었다.
⑨ 이도복(李道復) (1862~1935, 철종13~)
성주인 경무공파 19세 수(壽)77세
14세 강촌(江村) 여공(如珙)의 5세손이다.
자(字) 양래(陽來), 호(號) 후산(厚山), 거(居) 단성(丹城) 신안(新安)
철종(哲宗) 13년 임술(壬戌) 1862년 5월 28일생이며 1938년 무인(戊寅) 윤(閏) 7월 8일 졸(卒)했다.
졸(卒) 36후 계사(癸巳)에 사림(士林)에서 진안군 영곡사(靈谷祠) 배향(配享) 하였다.
동곡(桐谷) 조(晁)의 후손, 동범(東範)의 자(子)로 천자(天資)가 강의(剛毅)하고 기우(器宇)가 준정(峻整)하여 박만성(朴晩醒), 송연재(宋淵齋)에게 의기(李氣)와 학문을 전수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곽종석(郭鍾錫)과 조약무효와 오적을 참형할 것을 상소(上疏)하였으며 최면암(崔勉庵)에게 ?수신사명(修身俟命)?이란 글을 받아 후일을 기약했다. 스승 문집간행에 성실히 하고 한유(韓愉)와 깊은 학문을 토론하다 경술국치이후 전라도 마이산(馬耳山)으로 입산, 그곳 호남선비와 상교하며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는데 서어절요(書語節要), 중용도(中庸圖), 이학통변(理學統辨), 기정동감(紀政宗鑑), 심현기년(三賢紀年), 치종록(致宗錄), 존화록(尊華錄), 동감절요(東鑑節要) 등과 문집 22권 11책이 전한다.
⑩ 심상복(沈相福: 1876~1951)
목판본 古書 탄생과정 '한눈에' 2004-07-14
한말 이후 서부 경남 유학자 집안 목활자 인쇄문화의 전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목활자 일괄 유물이 박물관에 기증돼 일반에 공개 됐다.
특히 전시되는 6만5천여 개의 목활자는 유일하게 제작자가 알려진 개인 제작 활자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고경희)은 지난 13일부터 8월31일까지 '목활자로 보는 옛 인쇄문화-심재온 기증유물전'을 열고 있다.
특별전 에 나온 유물들은 지난해 3월 심재온(79·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 계리)옹이 기증한 목활자와 인쇄용 소도구, 고서적들. 여기에는 활자새김에서부터 책으로 간행되기까지 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목활자 6만5천186개, 활자를 분류해 보관하는 상자 21판, 활자 식자판 4개, 새기는 칼 등 활자 관련도구 들이 그 것. 또 활자 집게용 젓가락, 식자용 송곳 등 판짜기 도구, 책 표지 장식 그림인 능화판(菱花板)과 밀돌 등 제본용 도구, 활자를 처음 새기기 위해 쓴 활자초인자본(活字初印字本),교정지 등도 포함돼 있다.
또 1880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215종 551책의 서적도 기증목록에 올라와 있다.
기증자 심재온의 조부인 심상복(1876~1951)의 문집 '치당집(恥堂集)'을 비롯, 한말 이후 일제시대 이 지역 유학자인 김복한의 '지산집(志山集)', 이택환의 '회산집(晦山集)'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서적들의 60% 가량은 기증 목활자로 찍은 것이어서 결국 목활자 새기기에서 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유물이 망라된 셈이다.
한편 지방의 목활자들은 만든 시기와 글씨를 쓴 사람, 활자로 간행 한 책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증된 활자의 경우 심상복이 자본(字本)을 쓰고, 각수 김명곤이 하루에 1천개 가량의 글자를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제작자가 분명하다.
또 심상복은 단순한 인쇄업자가 아니라 최익현, 이도복의 가르침을 받은 노론계열의 유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서적 들을 통해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부 경남지역 유학자들의 교육활동과 학문세계도 유추할 수 있다.
기증 유물의 학술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29일 오후 2시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목활자와 경남 지역의 목활자 인쇄문화', 이상필 경상대 교수가 '산청 화계리 청송심씨 가장(家藏) 고서적의 성격'을 주제로 특강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