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블로그 디오니소스에 의한 파토스적 사고
블랑쇼 카오스의 글쓰기의 사유구도
블랑쇼의 <카오스의 글쓰기>는 그의 후기 사유를 대변하 는 저작들 가운데 하나이자, 그의 사유 전체를 마지막으로 집약시켜 보여주는 작품이다.
침묵은 하나의 단어, 하나의 역설적인 단어가 묵언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절규, 목소리 없는 절규를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실추의 나락으로 떨어진 절규를 거쳐서 솟아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침묵의 영역인 오직 중간 영역만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 반면 가장 높은 긴장과 가장 낮은 곳으로의 침체로 인해, 말함을 통해 의미작용을 나타내는 모든 관계들이 깨질 때, 더 이상 긍정할 것도 부정할 것도 없다. 그러한 긴장과 침체로부터 중성적인 것에 이르러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강도는 가치등급을 매기지 않고, 평범한 도덕의 원리들을 정립하지 않으며, 높거나 낮다고 여겨질 수 없다.
강도의 차이는 극단이며 존재를 초과한다. 절대적인 뒤틀림을 가져오는 그 초과에 따라 체제, 영역, 규칙, 방향, 정립과 반란이 인정될 수 없게 된다. 그에 따라 강도는 그 자체를 사유하려는 사유를 불태워버리고, 초월성과 내재성을 타오르다 꺼져 버린 형상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소각을 통해 사유를 요구하면서, 그 자체가 가리키는 것을 파괴시킨다. 강도는 일반적으로 개념화로부터 벗어난다는 점만은 아니며 단어들의 복수성을 통해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이 행사되는 역능과 방향 기호 의미를 표시하는 지향성 그리고 펼쳐지는 공간과 탈자적인 시간에 거리를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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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탈구의 장소들, 정신의 부재가 가져온, 어디에서도 불지 않는 사방의 바람. 즉 사유와 글쓰기를 통해 파편적인 것으로 떨어져 나갈 때의 사유(파편적 글쓰기). 바깥,중성적인 것, 카오스, 회귀,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 이 단어들은 아무도 지칭하지 않는 고유명사처럼 느닷없이 모든 가능한 의미작용 밖으로 미끄러져 가며, 그 미끄려져 감도 의미작용을 형성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정해져 있지 않은 이 의미의-밖조차도 비추지 않는 미끄려져 움직이는 어렴풋한 빛만을 남긴다.
카오스는 현전하거나 부재하는 세계와의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무너뜨리며, 우리로 하여금 그 자체가 가져온 강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카오스 글쓰기의 극단적인 수동성과 죽어감의 욕망은 각각 소진되어 가면서 서로가 서로에 의해, 시간이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거나 적어도 변화하는 연속성 가운데,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그에따라 그것들은 안정될 수 없는 카오스를 쇠락에서 소멸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글쓰기 - 부재하는 의미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 ↔파편적 글쓰기 - 편재하는 의미작용에 부재함을 부여하는 것
카오스의 글쓰기 - 현전하거나 부재하는 세계를 다시 깨어
나게 하는 것, 언어의 바깥을 언어로 포착하려는 것
블랑쇼 사상의 사유구도
항상 그렇듯이 대륙철학, 특히 프랑스 사상가들의 사유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아래 표에서 보듯이 위상학적인 구도 에서 그들의 사유를 파악해야만 한다. 그들이 전개하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래 표에서 확인(본인은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할 수 있듯이 위상학적인 영역을 통해 그들의 개념을 구분해야만 한다. (본인은 그동안 이러한 차이를 색깔을 통해구분해왔다)
우선 파란색 영역은 현전하는 세계를 뜻하고
초록색 영역은 부재하는 세계, 즉 비가시적인 세계를 뜻한 다. 들뢰즈 철학으로 말하자면 이 영역은 강도의 영역이
다.
노란색으로 표시한 영역은 이 세계의 근본질서를 의미하며 우리 인간이 다가설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을 뜻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가설 수 없는 세계, 즉 물자체에 대해 간과하지 않았다. 철학자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 세 계를 탐구하기 위해 자신만의 개념을 창조해냈던 것이다.
비록 물자체의 세계는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이지만 인간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언어와 사유로 그나마 가깝게 다가서고 접근할 수 있는 잠재성의 세계를 창안해냈다. 바로 이 세계가 붉은색으로 표시된 카오스의 세계이다. 인간은 물자체를 파악할 수 없지만 인간의 언어와 사유를 기반하여 물자체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선 세계를 창안한 것이다. 이를 블랑쇼 사상으로 투사해보면 아래의 표와같다. 앞으로 본인은 지속적으로 이러한 색깔의 구분을 통해 유럽의 대륙철학자들의 사유의 지도를 모색해나갈 것이다. (참고로 향후 포스팅에서도 언급할 예정이지만 이잠재성의 세계도 위상학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의미는 언어의 현실을 통한 실존의 어두운 바닥(벼락같은 순간)으로의 회귀이면서 자신의 진실을 향한 단어의 움직임이다. 사물이 존재가 되고 관념이 되기 위하여 무화되고 파괴되는 그러한 부재의 모습을 블랑쇼의 사상은 현전시키고자 한다. 부재는 바로 죽음을 안고 죽음 속에 보존되는 삶이요, 부정의 경이로운 위력이요 자유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실존은 실존을 벗어나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사물의 이해에 관하여, 언어에 있어서 단어들의 명시 기능(의미작용)에 관하여, 부재의 힘은 언제나 또 다른 가능성으로 계속해서 긍정되고, 그리고 그 힘이 대립 속의 동일성이라는 모호함 가운데 그 항목들이 서로 겹치면서 번갈아 나타나는, 이른바 환원 불가능한 이중의 의미를 영속화하는 것이 전체이다.
우리가 이러한 힘을 부정 혹은 죽음이라고 부른다면, 언어의 바닥에서 작업하는 죽음은, 부정은 곧 세계 내의 진실의 도래를, 형성되는 의미를 창출한다. 사상의.핵심이다.
모든 말들을 뒷받침하는 말, 이 말은 모든 말들 뒤에 스스 로를 숨김으로써 그 말들을 뒷받침하는 말이고, 숨겨져 있 는 이 말은 모든 말들의 현전, 모든 말들의 보존이다. 하지만 모든 말이 끝날 때 벼락같은 순간, 번개 같은.섬광이 나타난다. 이 벼락같은 순간은 작품의 용솟음처럼, 작품의 총체적 현전처럼, 작품 자체의 비전처럼 작품으로부터 솟아난다.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 순간은 작품이 작품 속에서 언제나 작품을 무너뜨리고, 작품 속에서 언제나 무위의 헛된 과잉을 되살리는 시련을 받아들이면서만 가능한, 그러한 순간이다. 여기에 가장 깊이 감추어진 경험의 순간이 있다.
작품은 정신이고, 그리고 정신은 작품 속 지고의 미결정으로부터 극단의 결정으로의 이행이다. 즉 작품은 작품 바깥에서 외부 사물들로의 실현이다. 따라서 작품은 존재에 속하지만, 동시에 작품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작품은 결코 어떤 사물이나 일반적 존재의 방식을 따라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문학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여전히 문학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으로 주어지지 않는 어떤 것으로서 그러하다. 분명 언어는 여기서 현전하고, 여기서 명백해지고, 여기서 인간 활동의 다른 어떤 형태보다 더한 권위를 가지고 그 스스로를 입증한다.
언어는 여기서 총체적으로 실현된다.
작품의 중심점은 근원으로서의 작품, 도달할 수 없는 지점 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일의 도달 가치가 있는 유일의 지점이다. 이 지점은 지고한 요구이고, 작품의 실현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 하지만 또한 거기로의 접근만이 작품을 만드는 그러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알 수 없는 행운 또는 불운으로 인해, 거의 순수한 형태의 이 지점으로부터 압박을 받는다. 그들은 우연히 이 순간에 다가가는 것 같고, 그들이 어디로 가든, 그들이 무엇을 하든, 이 지점은 그들을 사로잡는다. 언제든지 발휘되면서, 그들을 시간 밖으로 이끄는, 절대적이고 공허한 요구에 침잠한다.
바깥(le dehors), 카오스(le déastre), 무위(le
désoeuvrement) 또는 죽는다는 것(le mourir), 죽음(lamort), 중성(le neutre), 망각('oubli), 되씹음(le ressassement), 텅 빈 비인칭적 목소리(la voix narrative) 등은 문학의 총체적 상황을 구성하는 블랑쇼의 사유구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