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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포기하지 않으실 주님(요한계시록 7:9~17)
2024년 10월 27일 성락교회 썸워십3(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요한계시록 7:9~17)
여러분과 내가 분명히 알아야 될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그가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구원할 자들의 괴로움을, 우리 심령을 억누르고, 어둠에 막혀 있는 우리의 무겁고 더러운 것을 벗기시고 우리 모든 아픔과 불행을 가져가셨습니다. 그 시간부터 우리는 주님이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책임지고 견인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그가 죄를 제거하신 일이 아무 소용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주님이 대신 가져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주님이 아무 유익이 없는 일을 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의 모든 진리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 나를 인도하신다.’
주님은 어디까지 우리를 인도해 가실까요? 그의 나라까지 인도해 가십니다. 이 땅에 오시고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려면, 우리를 데려 가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인도하시는 인도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들이 싸워서 알아서 올라와라.’ 절대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역사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분명히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오늘부터 너를 인도하시리라. 오늘부터 누가 너를 해하지 않도록 너를 보호하시리다. 그 나라에 갈 때까지 너를 기억하고, 너를 인도하리라.’ 하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이 부분이 해결이 안 되면 다른 모든 말씀이 또 진리의 설득들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다만, 과거 한 때 우리도 여기서 조금 벗어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투쟁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신앙은 투쟁하는 것이다.’ 좋긴 합니다. 멋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투쟁하는 것과 섞여서 세상 것과 합쳐진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너가 알아서 싸워야 된다. 경기할 때 1등만 상을 받는 것 모르느냐?’ 하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었습니다. 또한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해서 힘있는 사람이 천국을 빼앗아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전쟁 영화를 보면 언덕 같은 데를 오를 때 서로 사람들과 겨루어서 올라가다가 고지에 다다른 자가 그 뒤따라 올라오는 사람의 사다리는 밀어서 떨어뜨려 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천국 가는 것을 그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 힘 센 자가 승자가 되고, 영광에 들어가는 것. 힘 없는 자는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마찬가지로 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세상 이론입니다. ‘이긴 자가 얻는 것이다.’ 하는 것인데, 이는 기독교 이론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주었고, 연결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불문으로 남게 만들었습니다. “구원은 다 받은 것이다. 문제는 영광으로 하늘에 진입하느냐, 아니면 초라하게 진입하느냐에 있다. 그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 땅의 교회에서 큰 직분을 맡았거나,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거나, 업적이 많거나 신앙의 연륜이 깊은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럼 너는 뭐 했냐?” “난 그냥 서리집사인데요.” “너는 정말 불행하구나. 나를 좀 올려다봐라. 배워라.”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양이 천국에 그대로 연결된다’는 허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무언가 높아 보이는 직급을 좋아하고, 무슨 ‘장’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성취를 이루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과거부터 한국사회에 내려오는 문화에 기독교 신앙도 연결이 되어서 그렇게 나타난 것이지,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꼰대적 과시일 뿐입니다. 과시하면서 ‘하하, 한번 봐라. 나는 하늘나라에서 영광 받을 사람이다~’ 하면 신앙이 좋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완전히 잘못됐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해 놓아야 됩니다. 물구나무를 서서 봐야 합니다. 여기서 영광 받는 사람이 그 나라에서는 완전히 밑으로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핏 멀리서 바라보고 판단하건데, 천국은 계급사회로 보입니다. 주께 영광 돌리고, 주를 사모하고, 주를 잘 섬긴 사람들은 높은 직급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만하고 자기 자랑만 하고 게으른 사람은 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우와 높다!’ 하는 사람은 죄다 밑에 있을 것이고, 오히려 ‘천국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하는 사람들이 제일 높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이랑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면 실패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까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깁니다.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가느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아, 나는 너무나 훌륭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해. 보니까 나는 천국에 충분히 가겠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가난해서 천국에 갈 밑천도 없는 자를 말합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질 않습니다, 도무지 착하질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기대서 같이 빛나고, 하나님이 받아주실만한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착한 흉내를 낼 수 있고, 거룩한 척을 할 수는 있겠지만, 속은 너무 더럽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잘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빛내 보려고 해도, 그분 앞에서는 오히려 자기를 깍아내립니다. 자기가 너무 더럽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자기에게 의가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거 외에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보시고 합당히 여기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의에 굶주린 자입니다. 의가 완전 적자 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소망이 없습니다. ‘나중에 뭔가 잘 될 것이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것이다.’ 할만한 밑천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사람의 소원은 ‘부디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그의 의를 조금이라도 떼어 주셨으면… 하나님의 의를 입고 싶다.’ 하는 데 있습니다.
그가 또한 아는 것은, 하나님은 의가 넉넉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시구나. 하나님은 너무 완벽하게 사랑이 많으시고, 너무 의로우시구나. 하나님은 흠을 잡을 수가 없구나. 그런 하나님이 나 같은 자 받아주실까?’ 그래서 그는 하늘에 대한, 그 의에 대한 흠모함이 있습니다. ‘내게 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의 의가 내게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나라를 좀 떳떳하게 걸어보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작은 명령 하나에도 순수하게 순종합니다. 교회에 어떤 작은 일이라도 정성들여 감당합니다. 하나님께 자랑할 수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신앙생활 하고, 똑같이 일해도 다른 이들보다 두 배, 세 배의 시간이 더 들여야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가 그렇게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혹시 요만큼이라도 자기가 필요하실 까 봐, 혹시 하나님께서 ‘아 그래도 쟤가 요만큼은 쓸모가 있구나. 알았어, 그 동안만 있어.’ 하고 자기를 간직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런 자가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사랑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부러워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합니다. 이 사람은 바랄 것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고, 자기를 더 향상시킬 것도 없습니다. 이런 자가 사회에서 뭘 누리고 살았을까요? 사회적인 것이 아무 소용이 없지만, 그는 사회에서도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세상에 나간들 세상이 받아주지도 않고, 그곳에서도 소망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그저 주의 나라가 소망인 자입니다.
그 나라는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봤습니까? 누가 “그 나라는 내 마음에 있다.” 그러는데, 머리를 긁적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일부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잠시 여기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영생을, 영원한 처소를, 영원한 삶을 확증해 주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 나라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교회는 천국에 갈 사람을 합당하게 준비시키는 곳입니다.
여기는 길잡이도 있습니다. 그 길잡이 보여드릴까요?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 훈련하는 길잡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알고 계시나요? 사실 저입니다. 제가 그입니다.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의 의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반대쪽에 있는 어두운 자입니다. 무식하고, 무능합니다. 하지만 여기 제 직분이 있습니다. 저는 완장을 찼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하도록 돼 있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시느니라(데살로니가전서 2:11~13)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자입니다. 저는 그것 하는 사람입니다.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격려를 주고, 또 침체돼 있는 자들을 격려하고 북돋아줍니다.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순서를 가르쳐주고, 그 나라 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그 나라를 갈 때 필요한 일과 또 금해야 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그분의 감정도 알려주고 그분의 계획도 알려줍니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천국에 가게 되었는지, 그 계기도 알려드립니다. 저는 그거 하는 사람입니다. 완전히 깡통 같은 이 머리에 하나님은 말씀을 넣어주십니다. 전 이것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고 저는 누구보다도 시체가 더 세게 썩어 문드러져서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저는 그거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한시적으로 저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여기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는 곳입니다. 여기서 말씀들을 때 멀리서 팔짱을 끼고 ‘내게 도움이 되는 말인가? 설교 잘하네, 못하네.’, 이것은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에 손을 얹고 우리를 축복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만지시는 시간입니다. 내 마음이 감동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만지신다.’라고 찬양에서 설명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 어둠에서 빼내서 우리를 천국으로 준비시키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브리서 6:10~12)
천국으로 가는 우리의 투쟁입니다. 부지런히 이렇게 하여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갖고 일하는 것은 오래 참으로 인해 이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으로 향하는 우리의 열심의 투쟁입니다.
또 다른 말씀에서는 주님이 당신의 계획을 홀딱 다 보여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와 영원한 이 영적 관계를 가진 자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절대 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으리라![1]’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인데[2],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리니, 이 뜻은 내가 구원한 자를 절대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 자를 완전히 살려놓으리라.[3]’ 나중에 하나님처럼 세우리라는 것입니다.
‘말세에 나타나기로 된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오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고 있다.[4]’ 했습니다. “네? 지금 제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건데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삶에서 ‘하나님, 아이, 좀 저리 가세요!’ 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 날 오늘 보존해 주세요. 하나님, 나를 이끌어주세요! 하나님, 나를 가르쳐 주세요! 하나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내일 또 보존해 주세요. 내일 또 원수에게서 보호해 주세요. 내 육신도 보호해 주시고, 내 영혼, 무사히 영적 원수들로부터 보호해 주세요.’ 몸이 부스러지고 깨지면 그런대로 숨만 쉬면 되겠지만, 영혼이 병들고 영혼이 공격받으면, 그것은 영원토록 울며 이를 갈아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사모해서 이제 주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내가 그렇게 행하는 것은 의가 없는 우리에게는 엄청난 의입니다. 그저 내가 착하게 행한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의를 행하도록 하셔서 하나님께서 나를 ‘너 의다!’ 하시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도 내가 그의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너 의다! 이거 의다!’ 하고 하늘과 땅에 그가 자신있게 우리를 소개할 것입니다. 우리 변화된 것은 그의 자랑입니다.
여기 교회는 내 엄마의 태와 같습니다. 엄마의 아기집. 우리는 교회가 싫다며 “교회 싫어! 에이! 교회 마음에 안 들어! 에이! 부시자!” 할 수 없습니다. 태 속에 아기가 ‘에잇! 엄마 태 싫어! 에이, 깨자!’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쌍둥이가 ‘둘이 같이 공격하자! 협공하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내 엄마의 태입니다. ‘응애!’ 하고 세상에 나갈 때는 언제입니까? 천국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 안에 있습니다. 엄마의 태를 괴롭히지 마세요. 엄마의 태는 여러분을 보호할 유일한 보호구역입니다. 교회 밖에 나가 교회와 떨어져 홀로 있으면 누가 당신을 보호할까요? 아무도 보호해 줄 자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순종할 일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순종하고, 주님이 시키는 것에 순종하고, 주님이 이끄는 것에 끌려가야 되고, 주님이 주시는 복을 겸손히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지, 아무나, 하나님을 배반한 자를 놓치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절대 안 됩니다.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하나님, 나를 받으옵소서.’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패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 왜 중요한지 아세요? 이 사람의 믿음의 내용, 살펴볼까요? 이 사람의 믿음은 ‘주님이 나를 천국 갈 때까지 절대 버리시지 않으리라.’ 이것이 내 믿음입니다. ‘그가 나를 그 나라까지 인도하시리라.’ 이게 믿음입니다. 이 믿음 가지신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사모하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 믿음 원하시는 분은 ‘아멘’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이 믿음을 믿으시는 분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양하는 것도 여기서 ‘어떻게 하면 훌륭하게 보일까?’ 하는 이런 투쟁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은 동전의 한 면과 같습니다. 한 면이 하나님께 순종이 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 면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해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끊어지면 큰일나는 것은, 시험 들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다른 데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계속 우리 생각에 혼란을 줍니다. 우리가 찬양하지 않고 지내다 보면, 영혼은 그늘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아주 섬세하고, 잘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찬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깨워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열심히 연습해서 “하나님, 이거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당신 정말 훌륭하십니다! 아름다운 당신~ 영원하고 인자하시고 은혜로우십니다!” ‘어떻게 하나님, 제 찬양 받았어요? 연락해 주세요. 받으셨어요? 받으시면 받으셨다고 하세요~ 열심히 했는데~나 찬송했어요~’ 이게 아니라, 물론 우리가 “낳으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이처럼 직접 고백하는 것도 찬양이지만, 우리가 서로 너무 기뻐서, 우리 신앙생활의 기쁨,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기쁨에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당신은 훌륭하시고, 영원히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하는 데 아무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너무나 무례한 것입니다. 그럴 바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할 때 껌 씹는 불량한 심정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하는 이유는 기뻐서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 주님의 사랑받은 것, 우리 주님의 소망을 가지고 서로가 그 소망을 나누는 것입니다. ‘너 천국의 소망 있지? 나도 갈 거야. 같이 만나자. 우리 같이 친구 하자.’ 하는 그런 기쁨. ‘하나님 날 구원하셨다. 난 지금 세상에서 다 뽀개지고 아무것도 없다. 나 지금 길이 꽉 막혔는데, 하지만 난 천국 갈 것이다. 나는 주님의 이끄심을 받아 그 나라에 갈 것이다. 이 땅에서는 나를 실패자로 보지만, 난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가 나를 보증하셨다. 그의 성령이 나를 인치셨다. 그의 성령이 나에게 하나님의 도장을 찍으셨다.’ 우리가 함께 만나서 좋아하는 것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무슨 학예회 하듯이, ‘하나님께 작품 드리자.’ 하며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 와서 왜 찬양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기쁨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 삶은 좀 타이트하지만, 내 마음에는 소망 있습니다. 기쁨 있습니다.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함께 있으니까, 이 기쁨을 나누니까 너무 신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당신 구원받았어?” “어!” “기뻐?” “어!” “나만큼? 내가 더 기쁠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더 기뻐.” 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함께 모일 때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것도 있지마는, 우리의 기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 포인트가 있는 것입니다. 노래 좋아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찬양도 좋아해야 하나님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플 때에 찬양으로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자기 머리에 꽂히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찬양을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르면서 그 감사하는 감정을 나눠주기를 저는 대단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다 그렇지 않습니까? 찬양으로 서로 기쁨을 나누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하늘에 상달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까지 오늘 우리를 구원하시고, 어둠에서 우릴 꺼내 주시고, 영원한 나라로 이끄시는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될 수 있는, 참으로 기뻐하는 찬양하기 바랍니다. 이 시간 끝나고는 다른 거 해도 됩니다. 어디 가서 뛰시든지, 주무시든지 뭘 해도 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 신나게 우리 기쁨을 나눕시다. 은혜 받은 심령을 나누고, 이 공간에서, 같은 이 분위기와 같은 이 공기 내에서 서로 호흡을 하면서 같이 나눕시다. 주님 앞에 기쁨으로 여러분의 얼굴이 확대되어 주님 가슴에 안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신앙을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고, 겸손하고 또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사모하는 이 굶주린 심령, 이 궁한 심령이 하나님을 찾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주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 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신앙생활 도와주세요. 내 마음 도와주세요. 내 영원한 운명을 도와주세요. 우리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잘 가게 해주세요. 인도받는 데 어려움 없도록 해 주세요. 여기가 키입니다. 하나님, 주님의 인도받길 원합니다. 나를 결코 버리시지 않을 주님의 인도받고 가길 원합니다! 우릴 받아 주시고, 내 심령을 받으시고, 내 믿음을 받아 주시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2]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 6:38)
[3]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4]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출처] 20241027 우릴 포기하지 않으실 주님(요한계시록 7:9~17) 성락교회 썸워심3(주일연합) 김성현 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