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춘추)-238 春秋(춘추) 哀公 上篇(애공 하편)18
十有七年春(시유칠년춘)
애공 17년 봄,
衛侯爲虎幄於藉圃(위후위호악어적포)
위후(衛侯)가 적전(藉田)의 원포(園圃)에 호피(虎皮)로 장식한 막사를 지었다.
成求令名者(성구령명자) 而與之始食焉(이여지시식언)
낙성(落成)한 뒤에 성명이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太子請使良夫(태자청사량부)
태자가 혼량부(渾良夫)를 부르게 하였더니,
良夫乘衷甸兩牧(양부승충전량목)
양부는 경의 수레인 일원거(一轅車)를 타고,
紫衣狐裘至(자의호구지)
임금이 입는 자색(紫色)의 호피(虎皮) 갖옷을 입고 왔다.
袒裘不釋劒而食(단구불석검이식)
음식을 먹을 때 열이 난다고 하여 갖옷을 풀어 헤치고 보검을 풀지 않고 먹자,
太子使牽以退(태자사견이퇴)
태자는 사람을 시켜 그를 끌어내게 한 다음,
數之以三罪(수지이삼죄) 而殺之(이살지)
자의(紫衣)와 조구(朝裘)등 세 가지 죄목을 들어, 그를 죽였다.
三月(삼월) 越子伐吳(월자벌오)
3월에, 월자(越子)가 오(吳)나라를 쳤다.
吳子禦之笠澤(오자어지립택) 夾水而陣(협수이진)
오자(吳子)는 입택(笠澤)에서 막아, 물을 끼고 진세(陣勢)를 벌였다.
越子爲左右句卒(조자위좌우구졸) 使夜或左或右(사야혹좌혹우)
월자(越子)는 군대를 편성하여, 밤이 되면 좌나 우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
鼓譟而進(고조이진) 吳師分以御之(오사분이어지)
북을 울리며 진격하게 하여, 오나라 군대를 분산을 시켰다.
越子以三軍潛涉(월자이삼군잠섭)
월자(越子)는 주력군을 이끌고 물을 건너,
當吳中軍而鼓之(당오중군이고지)
오(吳)나라를 향하여 북을 치며 진격하니,
吳師大亂(오사대란) 遂敗之(수패지)
오(吳)나라 군대는 크게 어지러워져,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해설; 이 곳 부터는 본래의 경문(經文) 형식도 바뀌었는데, 이는 좌구명(左丘明)이 보완 했기 때문이다. 애공 14년조까지의 경문(經文)은 공자가 지었고, 좌구명은 이에 주석에 해당하는 전(傳)을 썼다.
애공 17년봄에 위나라 임금이 적전(藉田)의 원포(園圃)에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한 새 막사(幕舍)를 지었다. 낙성한 뒤에 명망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태자가 청하여, 혼량부를 오게 하였다. 혼량부(渾良夫)는 경(卿)의 수레인 일원거(一轅車)를 타고, 임금이 입는 자색(紫色)의 호피(虎皮) 갖옷을 입고 왔으며, 음식을 먹을 때에는 덥다고 하면서 갖옷을 풀어 헤쳐 잇매고 칼은 그대로 찬채로 먹고 있었다. 그래서 태자가 사람을 시켜 이를 끌어 내려 놓고 자의(紫衣)와 단구(袒裘)와 대검(帶劒)등의 세 가지 죄목을 들어 그를 죽였다.
3월에 월나라임금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침략 하였다. 오나라 임금은 입택(笠澤)에서 이와 대적하여 물을 끼고 군진의 세력을 폈다. 월나라 임금은 좌우로 군대를 편성하여 밤이 되면 혹은 좌편으로 혹은 우편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 북을 울리며 진군하여, 오나라 군대의 힘을 분산 시켰다. 이때 월나라 임금은 주력군을 이끌고, 몰래 물을 건너 오나라의 중군(中軍)을 향하여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으므로, 오나라 군대가 크게 혼란에 빠져 드디어 오나라를 패배시켰다.
진(晉)나라의 조앙(趙鞅)이 위(衛)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위후(衛侯)에게 고하기를, "임금께서 저희 진(晉)나라에 계실 때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정성을 다하여 임금님을 모셨습니다. 청컨대 임금께서 직접 오시지 못하신다면, 태자라도 보내어 저의 죄를 면하게 하여 주십시오. 만일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주군께서는 제가 위후(衛侯)를 핍박하여 진(晉)나라로 오지 못하게 한것으로 오해를 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후(衛侯)는 나라의 안에 난(亂)이 일어났음을 핑계로 거절하였는데 진나라의 태자가 위나라를 쳤다. 그래서 여름 6월에 조앙이 군대를 거느리고 위(衛)의 도성을 포위 하였다.
그러자 제나라의 국관(國觀)과 진관(陳瓘)이, 위(衛)나라를 구하려고 왔다. 진(晉)나라에서 싸움을 돋우기 위하여 보낸 사람을 사로잡았는데 진관(陳瓘)은 이 자가 입고 있는 포로의 옷을 벗게 하고 본래에 입었던 옷을 입게 하였다. 그리고 진관이 말하기를, "우리 국관(國觀)은 ,우리 제나라의 정권을 장악하고 계신 분이다. 그 분이 나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 군대를 피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셨는데, 내 어찌 감히 진(晉)나라와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명을 허술히 하겠는가? 너희는 어찌하여 또 위나라를 쳐서 우리를 욕되게 하는가?" 라고 하여 돌려 보냈다. 조앙(趙鞅)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나는 위나라를 칠 것을 점쳤지 제(齊)나라와 싸울 것을 점친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곧 군대를 철수하였다.
진(陳)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백공(白公)의난이 있음을 기화로 초(楚)나라를 쳤다. 이윽고 초나라가 안정을 되찾아 회복 되자, 장차 진(陳)나라의 곡식을 모조리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초왕(楚王)은 태사(太師) 자곡(子穀)과 섭공(葉公) 제량(諸梁)에게 누구를 장수로 임명하여야 좋을지를 물었다. 자곡(子穀)이 말하기를, "우령(右領)차거(差車)와 좌사(左史)노(老)는 모두 영윤과 사마를 도와서 진(晉)나라를 침략한 경험이 있으니, 이제 다시 시킬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고[子高: 섭공(葉公)]은 말하기를, "그 두 사람은 모두 초나라의 천한 벼슬아치에 불과 하므로 백성들이 이를 업신여기고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자곡(子穀)이 다시 말하기를, "관정보(觀丁父)는 약(鄀) 지방에서 사로잡은 포로 였지만 선군이신 초(楚) 무왕(武王)께서는 군사를 지휘하는 통수관(統修官)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료(州蓼)의 두나라를 이기고 수(隨)·당(唐)을 항복시켜 크게 여러 만이(蠻夷)의 땅을 개간하였습니다.
또 팽중상(彭仲爽)은 신(申)지방에서 체포된 포로 였지만, 선군이신 초(楚)문왕(文王)께서는 영윤(令尹)을 삼아서 실로 신(申)·식(鄎) 두 나라를 병합 하여 초현(楚縣)으로 만들고,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로 하여금 우리 초(楚)나라에 조공(朝貢)을 바치게 하여 나라의 국경이 여수(汝水)의 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재능을 가지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문제이지, 어찌 천인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자고(子高)가 말하기를, "하늘의 뜻은 의심 할 것이 아닙니다. 영윤(令尹) 자서(子西)가 일찌기 진(陳)나라에게 자못 유감이 있었으니, 이제 하늘이 만약 진(陳)나라를 멸망하게 하려 한다면 반드시 영윤의 아들을 등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왜 우령(右領)과 좌사(左史)를 버리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신(臣)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우령(右領)과 좌사(左史)의 신분이 천한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덕(德)이 없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초왕(楚王)은 할 수 없이 점을 쳐보게 하였더니, 무성윤(武城尹) 자서(子西)의 아들 공손조(公孫朝)가 길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로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진(陳)나라의 곡식을 빼앗아 오게 하였다. 진(陳)나라 군대는 이를 막다가 패주하므로 초(楚)나라 군대는 드디어 진(陳)나라의 도성을 포위 했다. 가을 7월 기묘일(己卯日)에 초나라의 공손조(公孫朝)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서 진(陳)나라를 쳐 없앴다. 그 뒤 초왕(楚王)은 성공(成公)과 초왕(楚王)의 아우인 자량(子良)을 점쳐서, 영윤(令尹)으로 임명 하였다. 이에 심윤주(沈尹朱)가 말하기를, "자량(子良)은 길한 운(運)이 그의 탐욕을 넘어서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섭공(葉公:子高)이 말하기를, "왕자로서 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탐욕이 거기서 더 지나친다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왕의 지위를 바라는 것인가?" 라고 하였으므로, 다른날 자서(子西)의 아들 공손녕(公孫寧)을 다시 점쳐서 영윤(令尹)으로 임명하였다.
위후(衛侯)가 북궁(北宮)에서 꿈을꾸었는데 한사람이 곤오(昆吾)의 대관(臺觀)위에 올라가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북쪽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곤오(昆吾)의 폐허지에 처음 덩굴이 뻗어 나는 과(瓜)와 같이 내 조그만 것을 키워 크게 만들어 너를 위후(衛侯)가 되게 하였도다. 나 혼량부(渾良夫)에게 세 번 죽을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맹약을 저버리고, 한 때의 일로 세 가지 죄를 만들어 나를 죽였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실로 죄가 없노라"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衛) 장공(莊公)은 친히 점을 쳐서 괘(卦)를 얻고 복관(卜官)인 서미사(胥彌赦)에게 해석을 하라고 하였다. 서미사(胥彌赦)는 거짓으로 아뢰기를,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으므로, 위(衛)장공(莊公)은 기뻐서 그에게 읍(邑)을 하나 주었다. 이에 서미사(胥彌赦)는 임금의 소인됨을 알고 감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고 환란을 두려워 하여 읍(邑)을 내던지고 송(宋)나라로 망명하였다.
위(衛)장공(莊公)은 다시 꿈의 길흉을 점치게 하였다. 그점사에 이르기를, "저 꼬리 붉은 물고기와 같이 파리한 몸으로 거센 물결속을 오르락 내리락하니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대국(大國)이 이 나라를 쳐 없앨 것이니, 장차 망할 때에 문을 닫고 구멍을 막고서 후면으로 넘어 나오리라"고 하였다. 그 뒤 겨울 10월에 진(晉)나라가 다시 위(衛)나라를 쳐서 도성의 외곽에 들어가 장차 성안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조간자(趙簡子)가 말하기를, "멈추어라.숙향(叔向)이 말하기를, ‘남의 문란함을 틈타 나라를 멸망시키는 자는 후속이 없다’ 라고 하였느니라" 라고 하였다. 그래서 위나라 사람들은 장공(莊公)을 추방하고, 진(晉)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진(晉)나라는 위(衛)나라 양공(襄公)의 손자 반사(般師)를 위후(衛侯)로 세우고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왔다.
11월에 위(衛)장공(莊公) 괴외(괴외)가 견(견)으로부터 들어오자 반사(반사)는 이를 피하여 망명하였다. 처음에 장공(莊公)이 성(城)에 올라 가서 관망(觀望)을 하다가 융주(戎州)를 보고 어디냐고 물었다.종자(從者)가 융주(戎州)라고 아뢰었더니, 장공(莊公)이 말하기를, "내가 희성(姬姓)인데 어찌 오랑캐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고서 그 융읍(戎邑)안의 취락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또 위(衛)장공(莊公)은 장인(匠人)을 혹사하여 오랫동안 쉬지도 못하게 하였고, 또 석악(石樂)의아우 석포(石圃)를 내쫓으려고 하다가 미처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 변란이 일어났으니, 신사일(申巳日)에 석포(石圃)가 장인(匠人)들의 장공에 대한 원망을 이용하여, 그들과 함께 장공(莊公)을 공격 하였다. 장공(莊公)이 문을 닫고 용서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북쪽으로 넘어 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태자(太子) 질(疾)과 공자(公子) 청(靑)이 장공(莊公)을 따라 넘어가는데 융주(戎州)의 사람이 추격해 와서 공격하여 태자(太子) 질(疾)과 공자(公子)청(靑)을 죽였다. 장공(莊公)은 그대로 달아나 융주(戎州)의 집으로 들어 갔다.
당초에 장공이 성(城) 위에서 올라가 관망할 때에 기씨(杞氏)아내의 머리털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이를 몽땅 깎아 내라고 하여 가져다가 자기 부인(夫人)여강(呂姜)의 가발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장공(莊公)이 달아나다가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된것이다. 장공(莊公)은 옥(玉)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살려 준다면 이 옥을 주겠다"라고 하니, 기씨(杞氏)가 말하기를, "너를 죽이면 그옥(玉)이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장공을 죽였다. 그래서 위나라 사람들은 공손(公孫)반사(般師)를 다시 청하여 돌아오게 하여 임금으로 세웠다.
겨울12월에 제(齊)나라 사람이 위(衛)나라를 침략하였다. 위(衛)나라가 화평을 청하자, 제(齊)나라는 공자(公子) 기(起)를 세우고, 공손(公孫) 반사(般師)를 체포하여 데리고 돌아가 로(潞)에 머물게 하였다.
애공(哀公)이 제(齊) 평공(平公)과 몽(蒙)에서 모임을 가지고 맹약할 때에 맹무백(孟武伯)이 예절을 돕는 재상이 되었다. 제(齊)나라 평공(平公)이 머리를 조아려 계수(稽首)하였는데,애공(哀公)이 계수하지 않고 배례(拜禮)만 하였으므로 제(齊)나라 사람이 노했다. 맹무백(孟武伯)이 말하기를, "주(周)나라에 계신 천자가 아니고서는, 우리 임금에게 계수(稽首)를 받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맹무백은 다시 고시(高柴)에게 묻기를, "제후(諸侯)들이 맹약할 때에 누가 우이(牛耳)가 되었소?"라고 하니, 고시(高柴)가 대답하기를,"회연(鄶衍)의 역(役)에서는 오(吳)나라 공자(公子) 고조(姑曹)가 되었고, 발양(發陽)의 역(役)에서는 위(衛)나라의 석퇴(石魋)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맹무백(孟武伯)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되리다"라고 하였다.
송(宋)나라 황원(皇援)의 아들 황균(皇麇)은 전병(田丙)과 친한 친구사이였다. 황균(皇麇)은 그의 형(兄) 참반(劖般)의 영지를 빼앗아 전병(田丙)에게 주었다. 이에 참반(劖般)은 화가 나서 망명하여 환사마(桓司馬: 向魋)의 신하가 되었던 자의극(子儀克)에게 이를 호소하였다. 자의극(子儀克)이 송(宋)나라로 들어 가서 송부인(宋夫人)에게 고하기를, "황균(皇麇)이 장차 향퇴(向魋)를 불러 들이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송(宋)경공(景公)은 이 일을 자중(子仲)에게 물었다. 일찌기 자중(子仲)이 자기(子期)의 처(妻) 기사(杞娰)가 낳은 아들을 적자(嫡子)로 삼지않자, 황균(皇麇)이 말하기를, "반드시 맏아들을 세워야 하는 법이오. 그는 참으로 어진 재목 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자중(子仲)이 이 말을 싫어 하였다. 그래서 이번엔 경공(景公)이 자중(子仲)에게 묻자, 자중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말하기를, "우사(右師)황원(皇援)은 늙었으니 난을 일으키지 못할것이고, 황균(皇麇)에 대하여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으므로, 경공(景公)은 황균(皇麇)을 체포하였다. 이 때 황원(皇援)은 무슨 환란이 있을까 하여 두려워서 진(晉)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송(宋)나라 경공(景公)은 그에게 돌아 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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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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