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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조엄.조순.조남욱.조남풍.조치훈 |
김진우의 족보이야기 - (33) 풍양 조씨 (豊壤趙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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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공원에 조성된 풍양조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
메신저(messnger)'97뿌리
조 성 묵 (전업 조각가)
흰색 화강석은 현대(現代)를, 검은 오석은 고대(古代)를 상징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삼각형 구조의 청동 조각은 현대와 고대의 시간에 서 있는 우리세 대와 뿌리 의식을 함께 투영한 예술적 작품임.
뿌리공원에 조성된 풍양조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
<뿌리공원에 새겨진 풍양조씨 유래>
풍양조씨의 발상지는 고려시대 풍양현이니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이다. 신라말기에 바위 라는 은자(隱者) 한분이 천마산 지맥인 독정산(獨井山)의 암굴(巖窟)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찾아가 장군을 삼으니 보령 70세였고 모습이 웅위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태조의 남정(南征)에 여러 차례의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고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이르러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풍양조씨는 고려시대에 중간 세계(世系)의 실전으로 전직공파(殿直公派) 평장공파(平章公派. 南原公派)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상장군은 정3품 최고군직)가 계파를 달리하며 전직공파는 다시 호군공파(護軍公派;호군은 5위의 정4품 무관.장군을 고쳐부른직제) 회양공파(淮陽公派) 금주공파(錦州公派)로 분파되어 5대파로 불러온다. 고려시대에도 벼슬이 이어졌고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더욱 현창하여 문과 180여명에 정승7명 문헌4명 왕비2명을 비롯하여 많은 문무백관과 도덕문장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성씨의 명문으로 일컬어진다. 현재에도 국내외의 각 계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으므로 계속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994년 7월
풍양조씨 대종회장 조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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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작가의 해설>
풍양조씨(豊壤趙氏) 역대 및 현대인물
조 순(전서울시장.전부총리.서울대교수.한나라당 총재.현서울대명예교수).조광희.조중연(전국회의원).조남풍(육군대장.육사18기 현 글로벌전략연구원 이사장).조남욱(삼부토건회장).조광희(전국회의원).조남수(전의원).조구연(전고대교수).조동호(의학박사).조선구(의학박사).조수연(농학박사).조양자(의학박사).조준구(의학박사).조흥구(의학박사).조동산(전충북대교수).조성정(전충북대교수).조성석(전충남대교수).조순구(전남대교수).조남철(전의원).조남희(전의원).조정구(전삼부토건회장).조남지(연대교수).조만(공학박사).조상희(공학박사).조재연(농학박사).조태순(의학박사).조덕구(전국제대교수).조남두(전육사교수).조경희(전영남대총장).조성희(전인천대교수).조중구(전동경대교수)조인구(변호사).조창희(변호사).조대연(충북지사.전의원).조석구(동양전자 전사장).조덕영(한독대표이사).조덕연(의사).조남인(예비역소장).조용희(광일식품회장).조용진(동양화가).조동재(전 아세아재단이사).조성구(예비역준장).조민하(전유네스코 한국위원회사무총장).조건묵(변호사).조용연(판사).조준희(변호사).조창구(전삼부토건회장).조한구(예비역육군소장).조명기(장군).조남익(시인).조동수(전연세대부총장).조풍연(소설가).조치훈(바둑천재기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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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 문과(文科)급제자 명단>
名 |
字 |
號 |
試 驗 | |
조각 |
趙恪 |
경문(敬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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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10년(병오, 1786) 식년시(式年試) |
조강하 |
趙康夏 |
경평(景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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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1년(갑자, 1864) 증광시(增廣試) |
조경 |
趙擎 |
천주(天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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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11년(을묘, 1735) 식년시(式年試) |
조경명 |
趙景命 |
군석(君錫) |
|
경종2년(임인,1722) 정시(庭試) |
조경진 |
趙璟鎭 |
상지(尙之) |
|
순조10년(경오, 1810) 식년시(式年試) |
조경진 |
趙經鎭 |
군범(君範) |
|
순조5년(을축, 1805) 별시(別試) |
조경하 |
趙敬夏 |
순교(舜敎) |
|
고종1년(갑자, 1864) 별시(別試) |
조계평 |
趙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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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17년(을묘, 1435) 식년시(式年試) |
조공진 |
趙公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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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51년(을미, 1775) 별시(別試) |
조구 |
趙球 |
선명(善鳴) |
|
성종13년(임인, 1482) 친시(親試) |
조국빈 |
趙國賓 |
경관(景觀) |
설죽(雪竹) |
선조39년(병오, 1606) 증광시(增廣試) |
조귀하 |
趙龜夏 |
기서(箕敍) |
|
헌종6년(경자, 1840) 식년시(式年試) |
조기영 |
趙冀永 |
수경(守卿) |
|
순조14년(갑술, 1814) 정시(庭試) |
조기하 |
趙夔夏 |
|
|
고종28년(신묘, 1891) 증광시(症廣試) |
조길하 |
趙吉夏 |
|
|
고종23년(병술, 1886) 정시(庭試) |
조남식 |
趙南軾 |
|
|
고종23년(병술, 1886) 중시(重試) |
조남철 |
趙南轍 |
|
|
고종28년(신묘, 1891) 별시(別試) |
조대수 |
趙大壽 |
덕이(德而) |
지와(止窩) |
숙종13년(정묘, 1687) 식년시(式年試) |
조덕 |
趙 |
희천(希天) |
|
순조1년(신유, 1801) 식년시(式年試) |
조덕수 |
趙德壽 |
인지(仁之) |
|
중종29년(갑오, 1534) 식년시(式年試) |
조돈 |
趙暾 |
광서(光瑞) |
|
영조16년(경신, 1740) 증광시(增廣試) |
조동갈 |
趙東葛 |
군극(君克) |
|
고종11년(갑술, 1874) 증광시(增廣試) |
조동면 |
趙東冕 |
|
|
고종20년(계미, 1883) 별시(別試) |
조동완 |
趙東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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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29년(임진, 1892) 별시(別試) |
조동윤 |
趙東潤 |
|
|
고종24년(정해, 1887) 별시(別試) |
조동필 |
趙東弼 |
|
|
고종10년(계유, 1873) 정시(庭試) |
조동협 |
趙東協 |
인여(寅汝) |
|
고종17년(경진, 1880) 증광시(增廣試) |
조득영 |
趙得永 |
|
|
정조13년(기유, 1789) 별시(別試) |
조량진 |
趙良鎭 |
사목(士牧) |
|
순조1년(신유, 1801) 별시(別試) |
조만영 |
趙萬永 |
윤경(胤卿) |
|
순조13년(계유, 1813) 증광시(增廣試) |
조만원 |
趙萬元 |
태시(泰始) |
|
정조18년(갑인, 1794) 정시(庭試) |
조만협 |
趙萬協 |
|
|
순조12년(임신, 1812) 정시(庭試) |
조만화 |
趙晩和 |
경취(景翠) |
|
고종1년(갑자, 1864) 증광시(增廣試) |
조문명 |
趙文命 |
숙장(叔章) |
예곡(藝谷) |
숙종39년(계사, 1713) 증광시(增廣試) |
조문우 |
趙文宇 |
|
|
영조35년(기묘, 1759) 별시(別試) |
조문하 |
趙文夏 |
|
|
철종6년(을묘, 1855) 식년시(式年試) |
조문화 |
趙文和 |
장지(章之) |
|
헌종14년(무신, 1848) 증광시(增廣試) |
조민화 |
趙民和 |
중필(仲必) |
|
정조24년(경신, 1800) 별시(別試) |
조방직 |
趙邦直 |
숙청(叔淸) |
수죽(脩竹) |
광해군1년(기유, 1609) 증광시(增廣試) |
조범구 |
趙範九 |
|
|
고종24년(정해, 1887) 별시(別試) |
조병건 |
趙秉健 |
희중(羲中) |
|
고종17년(경진, 1880) 증광시(增廣試) |
조병구 |
趙秉玖 |
|
|
순조27년(정해, 1827) 정시(庭試) |
조병귀 |
趙秉龜 |
경보(景寶) |
|
순조27년(정해, 1827) 증광시(增廣試) |
조병기 |
趙秉夔 |
경주(景胄) |
|
헌종11년(을사, 1845) 별시(別試) |
조병상 |
趙秉常 |
여오(汝五) |
|
순종26년(병술, 1826) 별시(別試) |
조병성 |
趙秉聖 |
성익(聖益) |
|
고종17년(경진, 1880) 증광시(增廣試) |
조병승 |
趙秉升 |
치일(稚日) |
|
고종15년(무인, 1878) 별시(別試) |
조병승 |
趙秉承 |
경무(景茂) |
|
고종28년(신묘, 1891) 증광시(增廣試) |
조병옥 |
趙秉鈺 |
치상(稚相) |
|
철종10년(기미, 1859) 증광시(增廣試) |
조병위 |
趙秉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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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14년(정축, 1877) 별시(別試) |
조병위 |
趙秉緯 |
성건(聖建) |
|
고종14년(정축, 1877) 별시(別試) |
조병준 |
趙秉駿 |
경범(景範) |
|
헌종7년(신축, 1841) 정시(庭試) |
조병집 |
趙秉輯 |
|
|
고종23년(병술, 1886) 정시(庭試) |
조병철 |
趙秉轍 |
치유(稚由) |
|
고종7년(경오, 1870) 별시(別試) |
조병필 |
趙秉弼 |
성필(聖弼) |
|
고종8년(신미, 1871) 별시(別試) |
조병항 |
趙秉恒 |
여구(汝久) |
|
순조29년(기축, 1829) 정시(庭試) |
조병헌 |
趙秉憲 |
윤문(允文) |
|
순조27년(정해, 1827) 증광시(增廣試) |
조병현 |
趙秉鉉 |
경길(京吉) |
|
순조22년(임오, 1822) 식년시(式年試) |
조복양 |
趙復陽 |
중초(仲初) |
송곡(松谷) |
인조16년(무인, 1638) 정시(庭試) |
조봉하 |
趙鳳夏 |
적호(적皓) |
|
헌종6년(경자, 1840) 식년시(式年試) |
조상건 |
趙尙健 |
자이(子以) |
|
숙종39년(계사, 1713) 증광시(增廣試) |
조상경 |
趙尙慶 |
자여(子餘) |
|
숙종45년(기해, 1719) 증광시(增廣試) |
조상경 |
趙尙絅 |
자장(子章) |
|
숙종36년(경인, 1710) 증광시(增廣試) |
조상명 |
趙尙命 |
자휴(子休) |
|
경종3년(계묘, 1723) 증광시(增廣試) |
조상우 |
趙相遇 |
자직(子直) |
동강(東岡) |
숙종9년(계해, 1683) 증광시(增廣試) |
조상진 |
趙尙鎭 |
이진(爾眞) |
|
영조49년(계사, 1773) 증광시(增廣試) |
조상행 |
趙尙行 |
자민(子敏) |
|
영조1년(을사, 1725) 정시(庭試) |
조서정 |
趙瑞廷 |
자부(子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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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1년(계유, 1452) 식년시(式年試) |
조석구 |
趙晳九 |
내경(來卿) |
|
고종17년(경진, 1880) 증광시(增廣試) |
조석룡 |
趙錫龍 |
경운(景雲) |
|
영조32년(병자, 1756) 식년시(式年試) |
조석명 |
趙錫命 |
백승(伯承) |
|
숙종33년(정해, 1707) 별시(別試) |
조석목 |
趙錫穆 |
원중(遠仲) |
|
영조32년(병자, 1756) 식년시(式年試) |
조석우 |
趙錫遇 |
성백(省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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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30년(갑술, 1754) 증광시(增廣試) |
조선구 |
趙善九 |
|
|
고종25년(무자, 1888) 별시(別試) |
조선규 |
趙善奎 |
사문(士文) |
|
명종1년(병오, 1546) 증광시(增廣試) |
조성보 |
趙聖輔 |
사준(士俊) |
|
헌종1년(경자, 1660) 증광시(增廣試) |
조성복 |
趙聖復 |
사극(士克) |
|
숙종28년(임오, 1702) 별시(別試) |
조성재 |
趙城載 |
|
|
고종30년(계사, 1893) 알성시(謁聖試) |
조성진 |
趙城鎭 |
완경(完卿) |
|
정조4년(경자, 1780) 식년시(式年試) |
조성하 |
趙成夏 |
순소(舜韶) |
|
철종12년(신유, 1861) 식년시(式年試) |
조세보 |
趙世輔 |
국로(國老) |
|
성종23년(임자, 1492) 식년시(式年試) |
조세영 |
趙世英 |
자실(子實) |
용헌(용軒) |
중종16년(신사, 1521) 별시(別試) |
조세철 |
趙世哲 |
국언(國彦) |
|
중종11년(병자, 1516) 별시(別試) |
조세후 |
趙世 |
자후(子厚) |
|
숙종31년(을유, 1705) 식년시(式年試) |
조수익 |
趙守翼 |
시보(時保) |
자오(自娛) |
선조24년(신묘, 1591) 식년시(式年試) |
조수인 |
趙守寅 |
직재(直哉) |
|
선조30년(정유, 1597) 별시(別試) |
조수준 |
趙守準 |
국균(國均) |
|
선조23년(경인, 1590) 증광시(增廣試) |
조숙 |
趙肅 |
석로(錫魯) |
|
고종3년(병인, 1866) 정시(庭試) |
조승하 |
趙承夏 |
|
|
고종7년(경오, 1870) 별시(別試) |
조시구 |
趙始久 |
여징(汝徵) |
|
헌종6년(을사, 1665) 정시(庭試) |
조양진 |
趙壤鎭 |
|
|
영조49년(계사, 1773) 증광시(增廣試) |
조억 |
趙 |
卓汝 |
|
순조16년(병자, 1816) 식년시(式年試) |
조엄 |
趙 |
명서(明瑞) |
永湖 |
영조28년(임신, 1752) 정시(庭試) |
조여수 |
趙汝秀 |
신보(愼甫) |
|
효종2년(신묘, 1651) 식년시(式年試) |
조연빈 |
趙然斌 |
|
|
철종9년(무오, 1858) 별시(別試) |
조연우 |
趙然友 |
|
|
철종10년(기미, 1859) 증광시(增廣試) |
조연창 |
趙然昌 |
문보(文甫) |
|
헌종1년(을미, 1835) 증광시(增廣試) |
조연춘 |
趙然春 |
성원(聖元) |
|
순조27년(정해, 1827) 증광시(增廣試) |
조연흥 |
趙然興 |
대여(待汝) |
|
헌종11년(을사, 1845) 별시(別試) |
조영구 |
趙寧九 |
|
|
고종22년(을유, 1885) 별시(別試) |
조영진 |
趙英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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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45년(기축, 1769) 희희과시(희喜科試) |
조영하 |
趙榮夏 |
한유(漢儒) |
|
철종12년(신유, 1861) 식년시(式年試) |
조영하 |
趙寧夏 |
|
|
철종14년(계해, 1863) 정시(庭試) |
조용하 |
趙用夏 |
|
|
철종5년(갑인, 1854) 정시(庭試) |
조용화 |
趙容和 |
성교(聖交) |
|
순조22년(임오, 1822) 식년시(式年試) |
조운경 |
趙雲卿 |
|
|
헌종13년(정미, 1847) 별시(別試) |
조운기 |
趙雲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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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9년(을사, 1785) 춘당대시(春塘臺試) |
조운익 |
趙雲翊 |
군필(君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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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1년(신유, 1801) 별시(別試) |
조운종 |
趙雲從 |
성관(聖觀) |
|
순조13년(계유, 1813) 증광시(增廣試) |
조운주 |
趙雲周 |
기서(岐瑞) |
|
철종8년(정사, 1857) 정시(庭試) |
조운철 |
趙雲澈 |
백영(伯泳) |
|
순조34년(갑오, 1834) 식년시(式年試) |
조원영 |
趙遠永 |
효직(孝直) |
|
헌종9년(계묘, 1843) 식년시(式年試) |
조응록 |
趙應祿 |
경수(景綏) |
죽계(竹溪) |
선조12년(기묘, 1579) 식년시(式年試) |
조응룡 |
趙應龍 |
운부(雲夫) |
|
명종11년(병진, 1556) 알성시(謁聖試) |
조익 |
趙翊 |
비중(비仲) |
가규(可畦) |
선조21(무자, 1588) 알성시(謁聖試) |
조익 |
趙翼 |
비경(蜚卿) |
포저(浦渚) |
선조35년(임인, 1602) 별시(別試) |
조익명 |
趙翼命 |
사필(士弼) |
|
숙종31년(을유, 1705) 증광시(增廣試) |
조익영 |
趙翼永 |
|
|
고종9년(임신, 1872) 별시(別試) |
조익정 |
趙益貞 |
이원(而元) |
|
세조11년(을유, 1465) 춘당대시(春塘臺試) |
조인규 |
趙仁奎 |
경문(景文) |
수암(수庵) |
중종14년(기묘, 1519) 식년시(式年試) |
조인영 |
趙寅永 |
희경(羲卿) |
|
순조19년(기묘, 1819) 식년시(式年試) |
조장하 |
趙章夏 |
|
|
고종17년(경진, 1880) 증광시(增廣試) |
조재덕 |
趙載德 |
경부(敬夫) |
|
영조16년(경신, 1740) 증광시(增廣試) |
조재민 |
趙載敏 |
언신(言愼) |
|
영조13년(정사, 1737) 별시(別試) |
조재원 |
趙在元 |
|
|
고종2년(을축, 1865) 식년시(式年試) |
조재위 |
趙載偉 |
사첨(士瞻) |
|
영조47년(신묘, 1771) 식년시(式年試) |
조재준 |
趙載俊 |
사장(士章) |
|
영조42년(병술, 1766) 정시(庭試) |
조재한 |
조재한 |
|
|
영조49년(계사, 1773) 정시(庭試) |
조재호 |
趙載浩 |
경대(敬大) |
|
영조20년(갑자, 1744) 춘당대시(春塘臺試) |
조재홍 |
趙載洪 |
취심(就深) |
|
영조30년(갑술, 1754) 함경도도과문과시(咸鏡道道科) |
조재후 |
趙載厚 |
수상(秀尙) |
|
영조27년(신미, 1751) 정시(庭試) |
조적 |
趙績 |
희숙(熙叔) |
구촌(구村) |
인조8년(경오, 1630) 식년시(式年試) |
조적명 |
趙迪命 |
유도(由道) |
|
경종1년(신축 1721) 증광시(增廣試) |
조전소 |
趙全素 |
자현(子玄) |
|
인조17년(기묘, 1639) 식년시(式年試) |
조정 |
趙晸 |
인서(寅瑞) |
|
영조44년(무자, 1768) 식년시(式年試) |
조정 |
趙靖 |
안중(安仲) |
검간(黔澗) |
선조38년(을사, 1605) 증광시(增廣試) |
조정기 |
趙廷機 |
형선(衡善) |
|
명종19년(갑자, 1564) 별시(別試) |
조정진 |
趙鼎鎭 |
사수(士受) |
|
정조1년(정유, 1777) 증광시(增廣試) |
조정추 |
趙廷樞 |
두응(斗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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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6년(계유, 1573) 식년시(式年試) |
조정화 |
趙庭和 |
수지(修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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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24년(경신, 1800) 별시(別試) |
조종경 |
趙宗敬 |
효백(孝伯) |
독암(獨庵) |
중종15년(경진, 1520) 별시(別試) |
조종영 |
趙鍾永 |
원경(元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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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24년(경신, 1800) 별시(別試) |
조종진 |
趙琮鎭 |
장지(章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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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5년(을축, 1805) 별시(別試) |
조준 |
趙 |
경서(景瑞) |
하서(荷棲) |
영조39년(계미, 1763) 증광시(增廣試) |
조준하 |
趙準夏 |
윤평(允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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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2년(을축, 1865) 식년시(式年試) |
조중명 |
趙仲明 |
용회(用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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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25년(기묘, 1699) 식년시(式年試) |
조즙 |
趙 |
덕화(德和) |
화천(花川) |
선조24년(신묘, 1591) 별시(別試) |
조지겸 |
趙持謙 |
광보(光甫) |
구포(鳩浦) |
현종11년(경술, 1670) 별시(別試) |
조직영 |
趙直永 |
백인(伯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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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4년(갑자, 1804) 식년시(式年試) |
조진성 |
趙鎭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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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4년(경자, 1780) 식년시(式年試) |
조진용 |
趙鎭容 |
의숙(儀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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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50년(갑오, 1774) 정시(庭試) |
조진택 |
趙鎭宅 |
인숙(仁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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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49년(계사, 1773) 증광시(增廣試) |
조진형 |
趙鎭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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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38년(임오, 1762) 식년시(式年試) |
조진화 |
趙晉和 |
관지(寬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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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24년(경신, 1800) 별시(別試) |
조창하 |
趙昌夏 |
경언(景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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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11년(갑술, 1874) 정시(庭試) |
조창화 |
趙昌和 |
성○(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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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13년(임술, 1862) 별시(別試) |
조채 |
趙埰 |
공수(公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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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8년(정사, 1857) 정시(庭試) |
조철증 |
趙喆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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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10년(기미, 1859) 증광시(增廣試) |
조최수 |
趙最壽 |
계량(季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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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40년(갑오, 1714) 증광시(增廣試) |
조추 |
趙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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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23년(신유, 1441) 식년시(式年試) |
조충하 |
趙忠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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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22년(을유, 1885) 증광시(增廣試) |
조학년 |
趙學年 |
화중(和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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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28년(무자, 1828) 식년시(式年試) |
조한위 |
趙漢緯 |
공서(公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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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2년(병오, 1726) 알성시(謁聖試) |
조항존 |
趙恒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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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16년(임자, 1792) 식년시(式年試) |
조주 |
趙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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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道菴) |
세종11년(을유, 1429) 謁 |
조항진 |
趙恒鎭 |
인백(仁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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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6년(임인, 1782) 비천당문과시(丕闡堂文科試) |
조헌영 |
趙獻永 |
보경(輔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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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13년(정미, 1847) 별시(別試) |
조현명 |
趙顯命 |
치회(稚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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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45년(기해, 1719) 증광시(增廣試) |
조형 |
趙珩 |
군헌(君獻) |
취병(翠屛) |
인조8년(경오, 1630) 식년시(式年試) |
조형하 |
趙衡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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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22년(을유, 1885) 증광시(增廣試) |
조홍진 |
趙弘鎭 |
관보(寬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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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7년(계묘, 1783) 증광시(增廣試) |
조환 |
趙환 |
군서(君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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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45년(기축, 1769) 정시(庭試) |
조황진 |
趙璜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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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20년(병진, 1796) 별시(別試) |
조횡 |
趙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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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10년(계유, 1873) 식년시(式年試) |
조휘 |
趙徽 |
자미(子美) |
송파(松坡) |
선조1년(무진, 1568) 증광시(增廣試) |
조흥진 |
趙興鎭 |
수보(秀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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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50년(갑오, 1774) 정시(庭試) |
조희보 |
趙希輔 |
백익(伯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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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21년(무자, 1588) 식년시(式年試) |
조희일 |
趙熙一 |
순유(舜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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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9년(무오, 1858) 식년시(式年試) |
조희철 |
趙熙哲 |
성소(聖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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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10년(갑진, 1844) 증광시(增廣試) |
풍양조씨(豊壤趙氏)
고구마를 최초로 들여와 재배한 조 엄,세도정치로 유명
문과(文科;대과)에 186명,무과(武科)에 15명 등 모두 599명의 과거급제자
문헌에 따르면 풍양조씨의 시조 조 맹(趙孟)의 초명(初名)은 바위(岩)였다.
그는 풍양현(현재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숯을 구우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던 도인(道人)이었다고 하며 불가(佛家)에서는 "바우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친견(親見)하였다"는 설도 전해 오고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 년전인 통일신라 말엽 풍양현(豊壤縣:현재의 남양주시 진전읍 송릉리)의 독정이(현재의 독정리 獨井里)라는 마을 암굴에서 농사를 생업으로 하며 학문과 정신수양에 정진하던 "바위"라는 은자(隱者)가 있었다.
당시 국운이 기울어진 신라와 망국 백제의 설분을 표방하고 일어난 견훤의 후백제,고구려의 회복을 내건 궁예의 태봉으로 정립된 군웅할거의 후삼국시대를 거쳐 태봉의 궁예가 잇따른 실정으로 민심이 이반하자 막하의 시중(侍中:정승)이었던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高麗)라는 국호가 탄생하기 직전 상황으로 신라.후백제.태봉간에는 하루도 쉴새없이 전쟁을 하던 시기였다.
견성암(見聖庵) 전경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3 견성암(見聖庵)은 고려시대 풍양현(豊壤縣)이였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에 있는 풍양조씨(豊壤趙氏) 시조의 유적지에 세워진 암자(庵子)로서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재궁(齋宮)이다. 암자 뒤에 있는 석굴(石窟)은 신라말기에 후일 풍양조씨의 시조(始祖)로 받들어진 조맹이 은거하여 수양하던 곳이다. 조맹의 초명(初名)은 "바위"로 보첩(譜諜)상의 파회(破回)는 바위의 음역이다. 후삼국 통일을 앞두고 현자(賢者)를 물색하던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왕위에 오르기전 공(公)의 명성을 듣고 이곳의 "바위"를 찾아와 경국지사(經國之事)를 논(論)하고 한번의 만남으로 의견이 같아 즉석에서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 길로 왕건(王建)을 따라 남방정벌에 많은 공(功)을 세워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이 되고 조맹(趙孟)이란 이름을 하사(下賜)받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이르렀는데 이 인물이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始祖)이다.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3 번지
견성암내 암굴 |
어느날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다가 영해지방의 전투에서 신라에 크게 패하고 패잔병을 이끌고 철수하던 중 풍양땅에 이르게 되었다.이때 막하의 장수들은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꼭 이곳 풍양땅에 사는 "바위"도인을 찾아가 왕업을 이룰 계책을 상의함이 좋겠다"고 건의하자
태조 왕건이 직접 찾아가 제우(際遇:만남)하고 바우노인을 장군을 삼으니 그때 도인의 나이 70세였다. 그는 왕건과 같이 남정(南征)에 나섰으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고려통일을 이루는데 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이 그에게 맹(孟)으로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시조 조 맹(趙孟)의 벼슬은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부의 정2품 벼슬)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으뜸 벼슬.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정승)에 이르렀다.
그는 통합삼한벽상(統合三韓壁上:공신당에 초상이 새겨진 공신)개국공신으로 상주국(上柱國:고려때 최고의 훈호)에 이르렀으며, 조 맹이 죽자 자신이 수도생활하던 독정이 마을 천마산지맥에 묻혔으며 매년 음력 9월에 향사(제사)한다.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남아있으며 견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고 있다.
시조 조 맹 동상 |
한편 <풍양조씨 대종회>기록에 의하면 시중공(侍中公) 조맹의 묘가 조선왕조에 와서 커다란 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조선의 제14대 선조에게는 공빈김씨(恭嬪金氏)라는 후궁이 있었으며 이 공빈김씨는 제15대왕이 된 광해군의 생모(生母)이다.
서기 1577년(선조 10년) 공빈김씨가 죽자 그의 묘를 시중공 조 맹(趙孟)의 묘 뒤 약 30보쯤 떨어진 곳에 장사를 지냈다.
당시의 국법으로는 왕실에서 능묘(陵墓)를 쓰게 되면 그 구역 내에 있는 사가(私家)의 묘는 이장하여야만했다.
따라서 공빈 묘가 입장함에 따라 시중공(侍中公) 묘도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 선조대왕은 "그분으로 말하면 과인이나 공빈에게도 외조(外祖)가 되는 터이니 이장은 하지 말라"는 왕명으로 간신히 수난을 면하였다.
서기 1608년(선조 34년)에 선조가 죽자 세자이던 광해군이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임금이 된 광해군은 자신의 생모인 공빈김씨를 왕비의 지위로 격상하는 추존사업을 추진 마침내 1610년 광해군은 공빈김씨를 왕비의 지위로 격상시키고 그 묘에 성릉(成陵)이란 휘호를 가하고 봉릉도감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공빈김씨의 묘소가 성릉으로 격상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중공 묘의 이장문제가 대두하게 되었고 이장은 불가피하게 되어 조정에서는 군.신(君臣)간에 여러 차례 논의가 되었으며
자손들은 이장문제에 따른 비용 염출을 위해 친손만으로는 부족해 외손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통문을 보내고 이장 예정지까지 정하였던 상황에서 당시 영의정(領議政:정1품 벼슬.정승) 이덕형의 의견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으뜸 벼슬) 윤승훈.완평부원군 이원익.청평부원군 한응인등 여러 신료들과 지관들의 증언으로
광해군은 왕명으로 이장만은 면하되 다만 봉분을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산을 꾸며 치산토록하여 자손들은 물론 보는 사람마다 상심하지 않는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23년(광해군 15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성릉도 혁파되어 다시 공빈묘로 환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시조 시중공 조맹의 묘 1630년(인조 8년) 자손들의 상소로 시중공 "묘"의 원상복구 승인을 받고 그해 10월 많은 자손들이 묘하에 모여 고유제를 올리고 봉분을 짓고 옛 모습대로 복구하였다. |
풍양현(豊壤縣)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과 진접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의 명칭이었다.
시조 시중공(侍中公) 조맹은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松陵) 1리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세보(世譜)에 풍양 적성동(豊壤 赤城洞)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적성동이 송릉 2리이며 산하에 '적성골'이란 동네 이름이 남아 있다.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는
"풍양현(豊壤縣)은 주(州:양주 동헌(東軒)소재지)에서 동쪽으로 50리 지점에 있었다.신라때에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때는 풍덕이라 고쳤고 1018년(현종9년)에 양주(楊州)에 귀속시켰다가 그후에 포주(抱州:포천)에 귀속시켰으며 1419년(세종 원년)에 다시 양주의 소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풍양조씨는 시조 조맹(趙孟)의 후대에서 조지린(趙之藺)을 중흥시조로 받드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조신혁(趙臣赫)을 중흥시조로 받드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대별된다.
이 두파는 뒤에 다시 분파되는데 전직공파는 호군공파(護軍公派).회양공파(淮陽公派).금주공파(錦州公派)의 3파로 나뉘고, 평장공파는 남원공파(南原公派)를 이루어 현재의 풍양조씨는 이 4파의 후손들이다.
이 가운데 (회양공파)가 조선시대에 벼슬을 많이 배출 하였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이 파(派)는 후에 한평군파(漢平君派:노론집)와 청교파(靑橋派:소론집)로 대별되는데 회양공파에서는 상신(정1품 정승) 6명,문형(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판서급이 30여 명이나 배출되었다. 남원공파 역시 "소론집"으로 상신1명과 문형 1명을 배출하였다.
조 정의 임진란 기록 조정(趙靖:1555∼1636)의 자는 안중(安仲),호는 검간(黔澗)으로 본관은 풍양이다. 조선 선조.인조 때의 학자로 정구.김성일의 제자이다. 임진왜란에 창의(倡義:병란을 당하여 의병을일으킴)하여 국토 수호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상주.함창은 물론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의 의병 및 관료들의 활동, 백성들의 동향과 고통상 및 왜적의 갖가지 만행을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상주 임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고, 나아가 한국 임란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임란일기(壬亂日記)내용은 1592년 4월 14일에서 1592년 8월 24일까지의 일기로 2권, 1592년8월25일에서 1593년 1월7일까지의 남행록 1권, 1593년 12월 25일부터 1594년 2월 4일 까지의 일기 부잡록(日記 附雜錄) 1권, 1597년 1월 24일부터 1597년3 월19일 까지의 서행일기(西行日記) 1권과 견문록(見聞錄) 1권등 모두 6종 7책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003호(서기 1592년 일기.1989년5.23일 지정)-상주시 신봉동179-4 |
주요 인물을 보면 숙종 때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벼슬. 정승)을 지낸 조상우(趙相愚),영조때 좌의정(左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에 오른 조문명(趙文命)과 영조때 영의정(領議政:정1품벼슬. 정승)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영조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벼슬.정승) 조재호(趙載浩)가 회양공파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로 효종 때 좌의정(左議政;정1품 벼슬.정승)을 지낸 조 익(趙翼),현종 때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으뜸벼슬)을 지낸 조복양(趙復陽)은 남원공파이다.
(풍양조씨 족보판목 보각,1731년)풍양조씨 호군공파 문중(豊壤趙氏 護軍公派 門中)
소재지:경상북도 상주시 남장동 376번지(지방문화재 자료제208호) 풍양조씨 호군공파(護軍公派) 보판은 총934판 중 폐판본 260판을 제한 674판이다. 1924년 남장사(南長寺)에 있던 보각을 현 위치 소재의 남장재 경내에 이건하여 보존중이며, 조씨 보각이란 현액을 달았다. 보존 내용은 1731년에 창간한 신해보(辛亥譜,
壤趙氏族譜版木)와 1760년에 중간한 경진보(庚辰譜), 1826년에 삼중간한 병술보(丙戌譜, 族譜)등이다.이 보각에 보존된 보판은 그 보존 상황이 양호하며 통풍.소독.채광.배열 등이 판목 보존에 비교적 양호한 배려와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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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판목 |
영조때 통신사(通信使:조선시대 일본으로 보내던 사신.수신사 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조엄(趙曮)이 유명한데 조엄은 회양공파의 분파인 <한평군파>이다.
한평군파는 헌종때 세도정치(勢道政治:세도는 정치의 권세이며 그 권세를 휘두르는 일)로 유명한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安東金氏.신안동)와 쌍벽을 이루었다.
조 엄의 손자 조만영(趙萬永)이 문조(文祖.익종)의 국구(國舅:장인)가 되었는데 문조의 아들(조만영의 외손)인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에는 조병현(趙秉鉉)이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벼슬.법무부장관 격)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편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인물 중 고려때의 조운걸은 1357년(공민왕 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시종하여 2등공신에 올라 3도 안찰사(按察使:지방장관 격으로 안렴사)를 지냈으며 1374년에 벼슬을 버리고 경북 상주에 은거하면서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하며 "기우도(騎牛圖)"등의 작품을 남겼다.
풍양조씨 가문이 세도의 기반을 이룬것은 조선 숙종이후로 상신(相臣:정1품 벼슬로 우의정.좌의정.영의정.정승)7명,대제학(大提學:정2품 홍문관.예문관의 으뜸 벼슬.문형) 4명,공신7명,장신 7명을 배출했다.
숙종 때 조도보는 조상경.조상강.조상기 등 아들 3 형제와 손자 8명이 있었는데 이들 중 5명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이들이 영.정조시대에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력기반을 다진 주역들이다.
학당 조상강은 영조때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벼슬.국방부장관)를 네차례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벼슬)를 다섯차례나 지냈다.
그의 증손자 조만영(趙萬永)은 순조의 외할아버지로 이때부터 풍양조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정치의 권세 그 권세를 휘두르는 일)가 시작된다. 영조 때 통신사(通信使:조선시대에 일본으로 보내던 사신.수신사 修信使)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조 엄은 조만영의 할아버지이다.
현종 때 대제학(大提學:정2품 홍문관.예문관의 으뜸벼슬)을 지낸 조복양(趙復陽)과 일제강점기때 상주에서 궐기하여 싸우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순국한 조동범 등이 있으며 현재 활약중인 바둑계의 천재기사 조치훈도 풍양조씨이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는 풍양조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 대부분이 호군공파 후손들로 20여대를 이어 살고있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퇴색된 단청 이끼낀 기와집이 3백년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마을 한가운데 야산 밑에 자리한 양진당(養眞堂)은 난중일기를 쓴 조 정이 여생을 보냈던 99칸 기와집으로 호군공파 후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2년에 문중에서는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지정받고 보수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풍양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86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3년마다 실시됨)에 15명 사마시(司馬試:진사와 생원을 뽑던 과거시험)에 395명,의과에 1명,주학에 2명 등 모두 59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풍양조씨는
1985년에는 총 25,894가구에 인구는 109,434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35,009가구에 인구는 113,798명으로조사되었다.
---------------------------------<인물 탐구>
조 엄(趙曮,:1719~1777,호는 영호 자는 명서.시호 문익)
조 엄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명서(明瑞),호는 영호(永湖)이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그는 이조판서를 지낸 조상경(趙商絅)의 아들로 서기1738년(영조14)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음보(蔭補:벼슬을 조상의 덕으로 얻음)로 내시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 侍直:왕세자의 시위(侍衛)를 맡았던 관청의 벼슬)을 지낸 뒤
1752년 정시문과(庭試文科:나라에 경사가있을때 대궐안에서 보는 과거)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에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 벼슬)이 되었다.
1757년에 교리(校理:홍문관.승문원의 정5품 벼슬)에 올랐으며,동래부사(東萊府使;정3품 벼슬)를 거쳐 충청도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
1760년에는 창원마산창(昌原馬山倉:세곡을 쌓아 두던 창고).진주가산창(晉州駕山倉).밀양삼랑창(密陽三浪倉) 등 조창(漕倉:세곡을 쌓아두던 창고로 조운창이라함) 3개의 증설을 건의하여 세곡수송의 폐해를 줄이고,공물(貢物)의 수납을 공정하게 하여 국고(國庫)의 안정을 기하였다.
이어 예조참의(정3품 당상관),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으로 대제학 다음벼슬)을 거쳐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으뜸벼슬)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그는 1763년 통신사(通信使:조선 중엽이후 일본으로 보내던 사신)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동래(東萊)와 제주도에 재배케 하여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하였다.
이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왕명을 받아 조인을 추국하던 의금부의 벼슬).제학(提學:규장각.예문관.홍문관의 종2품 벼슬).이조판서(判書:정2품 벼슬.장관)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觀察使:종2품 외관직.감사) 때 무고(誣告: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고발하거나 고소함)를 받아 파직되었으나,
뒤에 혐의가 풀려 대사간(大司諫:왕의 잘못을 간하던 일을 맡아본 관청인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과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벼슬)를 지냈다.
1777년(정조1)에 홍국영(洪國榮) 일파의 무고(誣告: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고발하거나 고소함)로 평북 위원(渭原)에 유배되었을때 아들의 직소(直訴)로 김해에 이배(移配)되었으나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조엄은 영조를 도와 산업의 발전과 건전한 재정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하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해사일기> 등이 있다. 출처<한국인의 역사.한국의 역사.백과사전 등>
문익공 조엄 묘역 조선 이조판서 증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종1품 벼슬) 시호는 문익(文翼) 조엄지묘. 정경부인 홍씨 부좌 |
이 묘역은 지난 2000년 11월 18일 강원도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 1763년(영조39)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對馬島]에 들러 고구마의 보관법.재배법을 익히고 그 종자를 가져온 문익공 조엄의 묘역이다. 그의 후손 7대가 연이어 판서(判書:정2품 장관)를 지냈다 하여 작동(爵洞)이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북쪽 동산에 자리잡고 있다.
100m 떨어진 묘소 진입로 쪽에는 1835년(헌종 1)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신도비는 제사날 혼을 안내하기위한 이정표)가 서 있다. 이 비문은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짓고, 글씨는 광주유수(廣州留守:2품벼슬)김이재(金履載)가 쓰고 이판 김재창(金在昌)이 새겼다. 2001년 현재 풍양조씨 <회양공파>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김진우 |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인 선정).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이메일 sewoora@naver.com 블로그.카페 blog.naver.com/sewoora.cafe.naver.com/sallija<한국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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