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자동차를 정비받기 위해 카센터로 향하기 전에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뭐라도 한 권 들고 가야지 싶어 어제 도서관에서 급하게 대출받아온 김려령 장편소설 『트렁크』를 기다리는 동안 줄곧 읽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책장을 펼쳤다가 순간 깜짝 놀랐다. 놀랬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설 속 내용의 주를 이루는 계약 결혼 회사를 모티브로 배우자를 임대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부간의 관계가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증오로 바뀌고 증오가 결국 오랜 시간의 침묵으로 근근이 이어져 오다가 결국 황혼 이혼으로 갈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그럴 수 있는 것도 용기라고 이야기하는 시대다. 뉴스를 통해 남녀 간의 사랑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전통적인 결혼 관계가 아닌 다른 형태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막상 소설을 통해 접하게 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아직 배우자를 임대하는 계약 결혼을 과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난감하다.
평범한 남녀 간의 관계를 벗어난 만남에 대해 과연 부모님 세대라면 쉽게 용인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든다. 내 자녀라면 최소한의 기준은 지켜 주길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 안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스스로를 지켜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속성이다. 나는 예외이겠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금 내 나이대는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단계라기보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은 잘 지켜내는 공격보다는 방어의 개념으로 자신을 잘 수성하는 단계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 다른 삶의 형태에 섣불리 호기심을 갖고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절제된 모습을 보여야 할 때임은 확실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생긴 여러 다른 모양의 삶을 비난하거나 정죄하고 싶지 않다. 단편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여러 요소로 얽혀 있다.
트렁크 안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트렁크 안에 불편한 것들을 담아 눈앞에 치워버린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트렁크 안 내용물들을 조금씩 정리해 갈 수 있는 용기와 위로와 안정이 우리의 내면에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