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단평. 리뷰
꽃잎 소리
시: 김명리
시평: 김세영
해거름
절집 뒷마당에 웅크리고
제 그림자 그늘에 파묻히는 동백 꽃잎 본다
명지바람이 자국눈 밟는 소리
숭어리 숭어리째 꽃잎 지는 소리
세상의 모든 슬픔은 물소리를 내는지
흐르는 것들의 폐장 속
저토록 깊게 팬 울음 자국들
못날에 부대껴도
긁힌 데 하나 없는 상처의 물살,
단숨에 무간지옥 위로 떠가는 저 꽃잎 소리
천둥소리마저 숨죽여 귀 기울이네
구만리장천에서 떨어지는
실과 바늘의 소리!
-『문학․ 선』 (2008년 겨울호)
이 시는, 동백꽃이 숭어리째 꽃잎 지는 소리를 극사실주의로 형상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꽃들은 가지에 매달린 채 시들어가며 꽃잎이 하나씩
떨어진다. 그러나 동백꽃은 꽃잎이 시들기도 전에 숭어리째 툭 떨어지고 만다. 사람의 임종 시 마지막 큰 숨 한번 들이쉬고 숨을 뚝 멈추듯,
심장모니터 상의 맥박곡선이 별안간 사라지고 일직선만 쭉 그려지듯, 그 처연함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천 삼백오십 년 전 백제 멸망
시 꽃다운 나이의 궁녀들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지는 모습이 떠오른다. 프랑스 혁명 시 단두대의 꽃이 된 ‘마리 앙뚜아네뜨’가 생각나기도 한다.
평자도 시「붉은 아리아」에서 마량리 동백숲의 꽃잎 지는 모습을 “충혈 된 눈알 번뜩이는 / 망나니의 긴 칼날 위에 / 태연히 목대를 걸친 붉은
목숨“으로 형상화 해보았다.
김명리 시인은 동백 꽃잎 지는 소리를 “명지바람이 자국눈 밟는 소리” “구만리장천에서 떨어지는 실과 바늘의 소리!” 라고 “천둥소리마저
숨죽여 귀 기울이”고 듣는 낙화의 소리를 초고감도의 청력으로 듣고 이미지화 하고 있다. 숭어리째 떨어져 뒹구는 붉은 목숨들은 물소리 내며
“흐르는 것들의 폐장 속 저토록 깊게 팬 울음 자국들”이라고 극사실주의 기법의 세필화처럼 형상화하고 있다.
“무간지옥 위로 떠가는 저 꽃잎 소리”는 ‘못날에 부대껴도 긁힌 데 하나 없는 상처의 물살“로 체념한 듯 흐르기도 하고, 구만리장천에서
아뜩하게 떨어지는 바늘 실처럼 극미의 소리 파동만을 잠시 남기고 무심한 듯 사라지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슬픔은 물소리를 내는지”
해거름의 파도가 부딪혀 통곡하듯 부셔지며 파 놓은, 동백 숲 벼랑의 울음 자국들은 화인처럼 가슴에 새겨져 아직도 선명한 통증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무심한 사실적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여 쉽사리 상처받는 연하디 연한, 애벌레의 속살 같은 마음이여!
(김세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