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우취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 한다.
[작품해설]
천양희의 시에는 일상의 삶 속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자기를 반성하며 앞날의 길을 모색하는 평범한 자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작품 속의 화자는 삶의 고통에 절망하는 왜소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삶의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둥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화자의 어조는 차분하고 사색적이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화자의 발성에 젖어들게 하고, 화자의 아픔과 기대에 공명(共鳴)하게 하기도 한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절망적인 현실 상황과 맞서 싸우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진실된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일상적인 소재를 선택하여 간단하면서도 적절한 비유로 인간의 절박한 내면세계를 한계령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한계령’은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을 연결하는 해발 917m의 준령(峻嶺)으로 설악산의 안뽁에 의치해 있다. 이 곳 정상에 있는 휴게소에 잠시 차를 멈추고 내려서면, 그야말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느껴질 만큼 장쾌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처럼 눈보라도 몰아치는 한 겨울이라면, 세상과 단절된 어느 곳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ㅇ느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한계령’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극한 상황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한계령’의 원 이름은 ‘차가운 계곡’이란 뜻의 ‘寒溪’이지만 이 시에서는 ‘사물의 정하여진 범위’라는 뜻의 동음이의어 ‘限界’로 치환되어 극한(極限)의 이미지를 강화시키고 있다. 결국 시인은 ‘한계’의 이 두가지 의미를 겹쳐놓기 위해 작품 제목을 한자 표기 없이 한글로만 표기해 놓은 것이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한계령, 마치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는 듯한 풍경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며,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극한 상황의 ‘한계령’, 이것이 바로 화자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구체적 형상들로,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 그야말로 존재의 한계와 마주친 한 인간의 서늘한 내면 풍경인 셈이다. 그러기에 화자가 온몸으로 느끼는 극한 상황은 ‘한밤중’에 ‘혼자 깨어’ 고독한 자기 존재를 만날 때로, ‘세상의 / 온도가 내려가’고 ‘간간이 / 늑골 사이로 / 추위가 몰려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한계령 바람소리’가 ‘내 안에서 마주칠’ 때, 그 상황을 거부하거나 회피라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그것에 맞섬으로써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천양희(千良姬)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시 「화음」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96년 제10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8년 제4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1983) 『사람 그리운 도시』(1988), 『하루치의 희망』(1992), 『마음의 수수밭』(1994), 『몸 굿』(1995), 『낙타여 낙타여』(1997), 『독신녀에게』(1997),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1998), 『오래된 골목』(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