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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궁정동의 총소리
6회. 한·미 갈등의 약한 고리 김재규
정상회담은 잘 짜여진 약속대련이다. 그런데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약속 따윈 존중되지 않은 최악의 정상회담이었다. 한국의 최고권력자 박정희는 미국 대통령까지 가르치려 들었다.
아슬아슬했던 한·미 정상회담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과 축배를 하고 있다. 이날 오전 살벌한 정상회담을 했으나 오후 들어 협상이 타결되는 바람에 만찬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중앙포토
당시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 회고록에 따르면, 어렵사리 카터 대통령의 철군 결심을 바꿔놓은 미국 외교관들은 박정희가 정상회담에서 카터를 자극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한국 측에 ‘박정희가 철군 관련 언급을 자제해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회담장에서 직접 작성한 육필 원고를 꺼내더니 무려 45분간 안보 강의를 했다. 주한미군은 북한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 등으로부터 한국과 일본, 나아가 미국까지 지키는 보루라는 요지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는 어리석은 결정이란 결론이었다.
카터 대통령이 예상치 못했던 강의에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떨기 시작했다. 배석했던 밴스 국무장관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박정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주한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겠다.
그리고 카터는 당초 예정됐던 ‘철군 중단’ 약속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원하던 말을 않는 대신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요구했다.
카터는 회담을 끝내고 미국대사 관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폭발했다.
카터는 자신의 리무진에 밴스 국무장관과 브레진스키 보좌관, 그리고 글라이스틴 대사를 같이 태웠다. 차를 타자마자 글라이스틴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삿대질까지 하면서 ‘철군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리무진이 대사관저에 도착해서도 카터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글라이스틴을 몰아세웠다. 밴스 국무장관이 글라이스틴 편을 들었다.
직속 상관의 지원을 받은 글라이스틴은 용기를 내 카터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철군의 대가로 박정희에게 요구하는 싶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라고.
답은 ‘괄목할 만한 인권 신장’과 ‘국방비 지출 증대(예산 6%)’였다.
글라이스틴은 즉시 청와대에 문의했다. 박정희는 두 가지 모두 ‘OK’ 사인을 보냈다. 카터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카터는 다음 날 회담장에서 박정희에게 “(미군 철수와 관련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면서 “인권 상황 개선은 양국 관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쐐기를 박았다. 미국은 3주 뒤 ‘주한미군 철수 연기’를 공식 발표했다.
카터, 김장환 목사를 박정희에게 소개
1973년 여의도에서 열린 부흥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김장환(왼쪽) 목사가 통역하고 있다. 김장환 목사는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란 별명에 걸맞게 한국 보수 기독교계를 대표하면서 보수 정치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중앙포토.
카터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서 길가에 늘어선 수십만 인파의 환송에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카터는 동행하던 박정희에게 뜬금 없는 질문을 던졌다.
“각하는 종교가 있습니까?”
박정희가 “없습니다”고 하자 카터는 “각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면서 “김장환 목사를 보내 우리의 신앙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김장환 목사는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플루언서다. 김 목사의 별명은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다.
빌리 그레이엄(1918~2018)은 미국 보수 기독교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목사다. 그는 네 차례 방한해 초대형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중에서 세칭 ‘100만 인파’가 여의도(당시 5·16광장)에 모였던 1973년 대회가 유명하다. 당시 그레이엄의 설교를 동시통역했던 목사가 김장환이다.
1973년 미국의 복음주의 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설교한 전도대회(여의도 광장)엔 세칭 '100만 인파'가 모이는 대성황을 기록했다. 중앙포토
김장환 목사는 “통역이 설교보다 낫다”는 극찬을 받으면서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 됐다. 김장환의 영어가 탁월했기도 했지만 그의 보수 성향과 정치적 영향력도 별명에 걸맞았다.
김장환은 미국 보수 기독교 지도자 및 정치인과의 깊은 인맥을 바탕으로 한국의 보수 정치에 영향력을 미쳤다. 박정희 대통령과도 만났지만, 전두환 대통령 이후 역대 보수 대통령 모두와 가까웠다. 2021년 당시 윤석열 대통령 후보를 조용기 목사 장례식장으로 불러 개신교 거물 목사들을 소개하고, 안수기도를 받게 해준 것도 김장환 목사다.
미국 보수 기독교 복음주의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계를 통해 한국 보수 정치권에 영향을 미쳐 왔다. 오늘날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광화문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이 미국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모습도 일맥상통한다.
박정희, 주한미군 사령관과 내통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한미연합군사령관에 부임한 베시 대장에게 사령부 기를 수여하고 있다. 사병으로 출발해 4성장군에 오른 베시 사령관은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했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만족했다. 카터가 탄 비행기가 떠나자 박정희는 드문 미소를 지으며 글라이스틴 대사를 가볍게 포옹했다. 주위가 모두 놀랐다.
박정희의 만족은 주한미군 철수를 막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일찌감치 주한미군 철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한미군사령관과 내통했기 때문이다.
미군 사령관 특별고문 하우스먼이 연결고리였다. 하우스먼은 5·16 직후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경력을 의심하는 미국 정부와 군부를 설득한 인물이다.
카터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공식화하는 명령서에 서명한 것이 1977년 5월 5일. 5월 17일 하우스먼이 김재규 정보부장 특보를 통해 연락해 왔다. 베시 주한미군사령관의 ‘주한미군 철수 반대’ 입장을 몰래 설명하면서 김재규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베시 사령관은 5월 19일 김재규와 만나 카터의 ‘미군 철수’ 고집을 꺾을 비방을 귀띔해 줬다.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가 공모, 미군 철수에 부수되는 보완조치(주한 미 공군 전력강화) 비용을 매우 비싸게 계산해 미국 의회에 내놓은 방안이었다. 이미 미군 철수에 반대하고 있는 의회이기에 보완조치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면 예산 지원을 거부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같은 날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주한미군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싱글러브는 “카터의 계획대로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반드시 전쟁이 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카터는 당장 싱글러브를 소환했다.
주한미군 고위 장성들의 조직적 반발이었다. 미군 장성들이 미군 철수에 반대하기 위해 박정희와 내통한 셈이다. 박정희는 이들을 통해 철군에 반대하는 미국 내 움직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국적 민주주의’에 막힌 인권 개선
문제는 인권이었다. 사실 박정희는 인권과 관련해 ‘조속한 시일 내 개선’을 약속했지만 내심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서구적 민주주의’ 반대말이다. 미국과 같은 서구 선진국들과 한국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민주주의 역시 다르다는 주장이다.
박정희는, 한국은 ‘북한의 위협에 따른 생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특수하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생존권은 국가존립의 기본 전제일 뿐 아니라 모든 개인적 기본권의 바탕입니다.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유 등 기본권을 수호해야 합니다. (중략) 국력 배양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길입니다.” (1974년 국민교육헌장 선포 6주년 기념식 치사)
박정희는, 한국의 처지가 다르기에 처방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에겐 유신헌법이 정답이다.
“유신체제는 자주적이고 자립을 위한 창의적인 체제이며, 유신체제의 정신적 기조는 주체의식과 애국심입니다.” (1974년 12월 26일 통일안보 보고회 치사)
박정희는 유신헌법 체제인 대한민국엔 인권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어떤 인권 문제가 있는가. 미국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답을 못 합니다. 인권침해란 법에 의하지 않고 재판도 않고 탄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유신)헌법에 따라 3심까지 재판해 처벌하는 것을 어떻게 인권침해라고 할 수 있는가” (1977년 5월 22일 비서진 오찬)
이처럼 박정희의 인권의식은 카터와 천양지차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미국에 약속한 ‘인권 개선’ 숙제를 풀 책임자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지목했다. 그런데 카터가 다녀간 이후 민주화 인사 석방 등 인권 개선 움직임이 일자 재야와 야당 정치인들이 기세를 올렸다. 박정희는 금방 강경으로 돌아섰다. 김재규는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민주 인사를 풀어주는 한편 강경해진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더 많은 민주인사를 잡아 가둬야 했다.
미국은 ‘인권 개선’ 책임자 김재규를 계속 압박했다. 김재규는 10·26 꼭 한 달 전인 9월 26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 정치 전망’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글라이스틴은 ‘두 가지 우려’를 말했다. 첫째, 정치적 대립이 첨예화돼 정치 불안이 조성될 수 있다. 둘째, 유신헌법 아래에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어렵다. 김재규는 “아주 정확하다”며 동의했다. 김재규는 미국 측의 주장과 압력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회고록에서 ‘박정희 암살에 미국이 개입한 것은 전혀 없다’면서도 ‘미국은 자신들의 행동과 말이 부지불식간에 박정희 몰락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고 적었다.
미국은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미국이 독재정권의 급소(인권)를 누르자 권부 핵심의 약한 고리(김재규)가 터진 셈이다. 철옹성 같던 권력이 순식간에 몰락했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 등장인물
◆그레이엄=빌리 그레이엄. 191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개신교(남침례교) 목사.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휩쓴 반공 보수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21세기까지 이어진 막강한 영향력으로 ‘개신교계의 교황’이라고 불릴 정도. 2018년 사망.
◆글라이스틴=윌리엄 글라이스틴. 1926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미국인. 예일대 졸업 후 30년간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 마지막 공직이 주한 미국대사. 1978년부터 81년까지 근무. 2002년 사망.
◆김장환=1934년 경기도 수원 출신.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들어가 일하던 중 미군 목사의 눈에 띄어 미국 유학, 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란 별명처럼 한국 보수 기독교계를 대표해 정치적 영향력 행사.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 극동방송 사장, 침례교세계연맹 총재 역임.
◆밴스=사이러스 밴스. 1917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변호사에서 외교관으로 변신. 77년 카터 행정부 국무장관으로 중동평화협정 등에 기여했으나 80년 이란 테헤란에 억류된 미국 인질 구출작전 실패로 사퇴. 2002년 사망.
◆베시=존 베시. 1922년 미국 미네소타 출신. 사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중 현지에서 소위 임관.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참전. 76년 주한미군사령관.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 레이건 정부 합참의장. 2016년 사망.
◆브레진스키=즈비그뉴 브레진스키. 1928년 폴란드 출신. 하버드대 철학박사. 정치학자로 카터 행정부 국가안보 보좌관. 미국식 가치관을 전파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외교 이론가. 2017년 사망.
◆싱글러브=존 싱글러브. 1921년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군인. 한국전쟁에 대대장으로 참전. 77년 주한미군 참모장(소장)으로 카터 대통령의 철군에 정면 반대하는 언론(워싱턴포스트) 인터뷰로 소환돼 1년 후 예편. 2022년 사망.
◆카터=지미 카터. 1924년 미국 조지아 출신. 민주당 출신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77년부터 81년까지 재직. 이상주의·도덕주의 정치를 강조하며 한국 내 미군 철수와 인권 상황 개선을 강조하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과 시종 갈등을 겪음. 퇴임 후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
◆하우스먼=제임스 하우스먼. 1918년 미국 뉴저지 출신. 46년 미군 대위로 한국에 파견돼 조선국방경비대 창설. 56년 주한미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 이후 81년 퇴임까지 최고의 한국군 전문가로 활동. 9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