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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있는 배중손장군 사당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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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손 장군 사당의 정면(동상 사당 출입문 그리고 비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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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손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담장 밖에 있다. |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진도 답사를 하는 동안 진도의 구석 구석 많은 문화유적을 보았다.
처음 시작은 울돌목 명량해전의 현장과 벽파진 이순신장군의 전적비로 시작한
진도의 역사여행은 참혹한 전쟁의 상처로 안타깝기도 하였고,
또한 긍지를 느끼기에도 충분하였다.
고려 중기에 당시 세계최강의 몽골군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결사항전을 하였고,
중앙 정부는 항복한 상황에서도 삼별초를 중심으로한
장병들의 항전 또한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삼별초는 강화도의 임시도성이 함락하자
1,000여척의 배에 병사들과 유민들을 싣고서
1,500리 뱃길을 통하여 이곳 진도까지 내려와 또 다시 몽골에 항전할 뜻을 품고,
용장산성에 행궁을 지었다.
이후 한동안 남해지방의 세금을 거두어 장병을 훈련시켜
본토회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으나,
몽골에 항복한 고려의 원종과 몽골 연합군에 의하여 용장산성이 함락하고
남도석성에서 싸우다가 제주로 가기 위해 굴포 항구에 왔다가
배를 타지 못한채 결국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후 진도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곳에 당을 짓고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배중손장군과 삼별초군을 위로하는 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런데 1959년 사라호 태풍에 배중손장군을 모신 당집이 무너지고
그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
그런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한 이곳출신 한국화가 곽남배 씨가
주민들을 설득하여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성금을 걷어 이곳에 배중손장군 사당을 세웠다.
이때는 1996년이다.
이후 배씨 대종회에서 성금을 거두어
1999년 배중손장군의 동상과 비석을 세워서 오늘에 이른다.
국가가 전쟁에 휩싸이면 이를 지키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그러나, 전쟁은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일이고, 전쟁에 패하면 자신 뿐 아니라,
가족 친족 마을사람들이 죽어가는 참혹한 현실이 기다린다.
따라서 더러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다음을 기약하기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죽을 지언정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기로 끝까지 싸우다 죽어간 이들도 있다.
과연 누구를 따라야 할 것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결의와 실천이 있고,
이를 모든 군인들이 따른다면, 과연 어느 나라도 침략을 결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만난 배중손장군 또한 그 죽음을 감수하고 끝까지 싸워서
그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기에,
그의 장렬한 죽음이 이곳 굴포리 주민들과 뜻있는 이들을 감동시키고 있으며,
그 정신을 후세도 이어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곳에 사당을 짓고 동상을 세워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겠다고,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리고 위기시에 가장 먼저
비행기타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아닌 세상이 되어야
그 나라는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배중손장군의 사당에 들어
잠시 장군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극락왕생을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