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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금요일. - - 사울을 따라 회개의 여정을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5:3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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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24 05:35
- 사울을 따라 회개의 여정을
오늘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울의 회개와 관련하여
그의 행위랄까 동작을 가지고 오늘은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미 가담한 사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로 갑니다.
어제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에 관해서 봤고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 믿음 대로 갔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지요.
그러므로 회개 이전의 상태랄까 단계는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또는 자기 생각이나 믿음 대로 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섬긴 사울인데도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고 죽이러 간다는 것입니다.
살기를 내뿜은 것을 보면 그의 맘에 증오가 마음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증오심으로 예수님 상 머리를 망치로 부순 이스라엘 병사처럼 사울도 증오심으로
죽이러 가면서 옳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하느님 뜻이라고 믿었을 겁니다.
요즘 고백성사 주며 자주 듣는 고백이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죽었으면,
죽기 바라는 것은 너무한 것 같아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신자들이 훌륭하고 올바른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 죄가 크고 악해도 죽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맡기지 않고 내 뜻대로 되길 바라는 것이 되는 거지요.
둘째로 이런 사울을 하느님께서는 엎어지게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 스스로 엎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 엎어졌거나 스스로 엎어졌다고 생각했다면 사울은
회개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자책이나 하다 끝났을 겁니다.
셋째로 사울은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주님께서 엎어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엎어짐으로써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게 되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께 여쭙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이때까지 사울에게 하느님은 저 높이 초월적으로 계시는 분이지 땅에까지 오시어
엎어트리기도 하시고 눈이 멀게도 하시고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자기 삶 안으로 들어오시어 직접 개입하시는 주님임을 처음 체험합니다.
넷째로 사울은 사흘 동안 눈이 멀었고 식음을 전폐한 뒤에야 다시 보게 됩니다.
새로운 눈이 열리려면 사흘이 필요합니다.
이 사흘은 물리적인 사흘이 아니라 새로운 눈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이고,
주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난 사흘을 뜻하는 것으로서
부활의 사흘이요 영적인 사흘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바오로 사도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다시 봤지만
우리는 3년이 될 수도 있고 삼십 년 사십 년이 될 수도 있겠지요.
빨리 완전히 죽으면 빨리 살아날 텐데 그러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다섯째로 세례받고 밥 먹어 기운을 차린 뒤 며칠 제자들과 함께 지낸 다음
사울은 곧바로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화해하는 것 다시 말해서 공동체와 화해하는 것,
이것이 회개의 한 결과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회개의 다른 결과입니다.
유심히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넷째까지는 ‘됩니다.’의 계속이었고,
다섯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하셨다고 했듯이
바오로 사도의 회개도 시작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게 된 것이고 그런 다음에
공동체와 화해하고 복음을 선포함으로 주님이 시작하신 회개의 은총을 완성합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은총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완성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있음을 자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울의 회개와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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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의 은총을 인식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매일 우리는 창조된 세계를 통해 하느님과 다시 일치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하느님의 은총을 인식하기!
2026년 4월 22일 수요일
리처드 신부는 성경과 교회의 지혜를 바탕으로, 창조 세계 안에 깃든 하느님의 은총과 현존을 경외하며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교회의 박사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 [1] 라고 가르쳤습니다. 은총은 자연을 그 본래의 거룩함으로 이끌며, 인간의 마음 안에서 그 성스러움을 일깨웁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동물들을 "형제"와 "자매"라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은총과 자연의 깊은 일치에 있습니다. 다양한 피조물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우니베르수스: uni-versus)—곧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실"—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가 그 중심을 "하느님"이라 부르지만, 굳이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 실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이렇게 이어서 말합니다. "온 우주 전체가 그 자체로서, 개별 피조물 하나하나보다 더 완전하게 하느님의 선하심을 나누고 드러낸다." [2] 이는 곧 창조 세계 전체가 함께 모여 하느님의 선을 반영한다는 뜻이지요.
사도 바오로도 이미 오래 전에 같은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 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9–20).
인간은 자신들이 유일하거나 주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오직 인간만을 돌보신다고 확신했습니다. 모든 창조 세계는 인간의 드라마를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곧 자기중심적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로부터 영혼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자연은 단지 우리의 소비와 이용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를 창조 세계와 깊이 단절된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거룩한 공간이 아니었고,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땅을 유린하고, 동물을 학대하며,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본래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마치 우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존재인 양 행동했습니다.
매일 우리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평범한 일출, 전깃줄 위의 찌르레기, 공원의 나무, 하늘의 구름—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과 다시금 일치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러한 영성은 학문적 지식이나 신앙의 형식적 고백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순한 "현존"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때로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 오히려 학식 있는 신앙인들보다 더 깊이 창조된 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는 그런 이들을 만나며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몇 년 전, 저는 프란치스칸 수녀이자 세네카 원로인 호세 홉데이 수녀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은 지구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며, 우리가 오염을 멈추고 자원을 남용하지 않을 때 지구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로 수녀님은 쿠야호가 강(Cuyahoga River) 을 들었습니다. 오염이 중단되자 강은 다시 살아났고, 그 안의 모든 생명들도 되살아났습니다. 그녀의 메시지는 우리도 “어머니 지구”의 치유를 도울 수 있다는 희망을 제게 주었습니다.
—Anne C.
References
[1] Thomas Aquinas,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Summa Theologica, I, 1, 8, ad. 2.
[2]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I, 47,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Soul, the Natural World, and What Is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09).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iska Vrijburg, untitled (detail), 2017, photo, Netherlands.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나무와 빛, 사슴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을 존중한 다음에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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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먹고 마신다는 것은 곧 동화(同化)를 의미합니다!
삶의 프로그램으로서 이렇게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모든 사물을 내 몸처럼 보고, 모든 사람을 나 자신처럼 바라보는 것. 단 한 순간이라도 그렇게 경험한다면,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체험이라도,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삶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 중간 단계로는, 모든 사물을 내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처럼 아끼고,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나를 생각하여라." 혹은 "나에 대해 말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면, 우리의 생각과 말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됩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곧 동화(同化)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동화되어, 그분의 몸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숨 쉰 것이 지금 우리의 몸과 피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이 가르침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콜로 1,18)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고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로마 12,4-5)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코린 12,13)
이 가르침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시도해 온 것은 "중간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훌륭하지만, 이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에 머물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은 우리를 온전히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길을 걸으라고 초대하며 촉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가톨릭 사제를 찾아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을 조롱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교회의 성체성사에 관한 이해를 비웃고자 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평범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습니까?"
사제는 차분히 대답했습니다. "매일 먹는 음식이 당신의 몸과 피로 변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렇게 하시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또 물었습니다. "그 작은 성체 안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온 몸이 담길 수 있습니까? 너무 유치하게 들립니다!"
사제는 미소 지으며 답했습니다. "넓은 풍경 전체가 당신의 작은 눈 안에 담기지 않습니까?"
그 말은 그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같은 그리스도가 모든 성당의 성체 안에 동시에 계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사제는 거울을 가져와 그에게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떨어뜨려 여러 조각으로 부수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한 사람뿐이지만, 깨진 거울 조각마다 당신의 얼굴이 비치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제는 일상의 단순한 비유를 통해 성체의 위대한 신비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체성사, 즉 예수님의 몸과 피는 교회가 자녀들에게 주는 가장 큰 보물이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는 오해와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한 말씀은 큰 분열과 오해를 낳았고, 많은 이들이 그분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반복해서 하시는 걸까요? 사실 먹고 마시는 것 말고는 달리 당신과의 일치를 설명하실 길이 없으셨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니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셔 그분과 하나 되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그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반복해서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변모가 가능하다고 확언해 주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받아 모심으로써 말입니다. 이것은 은총이라는 것 말고는 달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은총에 의해, 즉 하느님께서 거져 주시는 당신의 생명력을 통해 그분으로 변모해 가는 여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는 그분으로 변모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과 음료가 우리의 몸과 피가 되듯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로 변모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신비를 의식하고자 한다면 그 의미가 우리 안에서 진정한 생명력으로 자리잡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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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해 하신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다툼이 벌어진 유대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4-5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살)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교로 예수님과의 유대와 일치된 생명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지셨던 사랑으로 맺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일치와 유대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 곧 ‘순명’이라는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증여되고, 선사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의 신비로,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의 꽃을 피우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건네시는 이 크신 사랑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저를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그 그윽한 사랑의 숨결로 저를 적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요한 6,55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불사불멸의 명약이요 죽음에 대한 해독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저를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로 저를 적시오니,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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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살면서 우산도 없는데 갑자기 비가 내릴 때가 있습니다. 급한 김에 처마 밑에 있기도 하고, 심한 비가 아니면 비를 맞고 걷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포트워스 본당 신부님의 초대로 포트워스 본당 교우들과 함께 1박 2일 여행을 떠났습니다. 장소는 본당 교우가 만든 시골의 별장이었습니다. 신부님과 저는 같은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모닥불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았습니다. 저는 평소 습관대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새벽에 누가 옆에 누워서 저는 신부님인 줄 알았습니다. 옆 침대인데 착각한 줄 알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옆 침대에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별장의 주인인 형제님이었습니다. 거실에서 자던 형제님은 화장실에 갔다가 평소대로 본인이 주로 자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가서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형제님은 미안해했습니다. 저도 거실에서 잠을 자면서 방을 기꺼이 내준 형제님께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44년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생이었습니다. 본당 여름 행사를 마친 후에 보좌 신부님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안면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숙소로 가기 전에 안면도 해수욕장에서 잠시 바다를 보면서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교사 한 명과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걸었습니다. 차가 있던 곳으로 왔더니 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행은 우리가 차에 있는 줄 알았고, 차는 숙소로 떠났습니다. 저와 교사는 숙소는 몰랐지만, 근처에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배가 고프니 수박을 하나 사서 나눠 먹고 아카시아 잎을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나뭇잎을 하나씩 떼어내면서 걸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논두렁에 차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의 차였습니다. 차는 길을 잘못 들어 뒤로 빼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연락할 방법이 공중전화밖에 없었기에 난감했었는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생각하면 아름다웠던 추억입니다.
오늘 독서는 더욱 난감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니아스에게 ‘사울’를 만나서 안수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예수님께 걱정을 말했습니다. 사울은 바리사이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길 가다가 비를 맞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서 여기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을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울을 만나 안수해 주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만들었던 사도 바오로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법으로 구원의 계획을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삶을 이끌었던 신념을 버려야 했습니다. 바오로는 정통 바리사이파로 가졌던 모든 권위와 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신념과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바오로는 벼락 맞는 것처럼 삶의 여정에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성서는 그런 극적인 순간을 하느님의 부르심, 예수님의 부르심이라고 전해 줍니다. 그러나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서에서 전해 주는 극적인 ‘부르심’의 순간은 기억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몇몇 분에게 물어보았지만, 벼락 맞는 것 같은 극적인 ‘순간’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극적인 순간은 없을지 모르지만, 세례를 받는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고향 땅을 떠나지 않을지라도, 모세처럼 위험한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을지라도, 첫 번째 제자들처럼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버리지 않을지라도,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을지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오히려 극적인 순간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2018년 12월 20일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부르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길이 막혀 지하철을 타고 교구청으로 갔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맡아서 일하면 어떤지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늙은 나이에 고향 땅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고, 모세처럼 위험한 땅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제 삶의 신념을 바꾸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벼락 맞는 것 같은 극적인 순간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어느덧 신문사의 일을 마쳤고, 지금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불러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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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성인(聖人)은 또 다른 사람들을 성덕의 길로 견인합니다!
1800년대 이탈리아 북쪽 피에몬테ߵ토리노 지역은 수많은 성인성녀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사람의 탁월한 성인의 등장은 절대로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한 성인(聖人)은 또 다른 사람들을 성덕의 길로 견인합니다.
저희 수도회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가 바로 피에몬테 지방 출신입니다.
돈보스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성인들이 탄생합니다.
그의 영적 스승 요셉 카파소는 재소자들의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돈보스코의 제자 도미니코 사비오가 시성되었습니다.
살레시오 수녀회 공동 창립자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도 그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토리노를 중심으로 한 성덕의 온상에서 무럭무럭 성장해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한 사람의 성인의 탄생이 무척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성인이 탄생하면, 그의 선한 영향력이 즉시 효과를 발휘합니다.
나와 함께 살았던 그가 그 길을 걸었는데, 나도 그 길을 걷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냐며, 그 길에 참여합니다.
은혜롭게도 저희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출신으로 그 은혜로운 길에 접어든 분들이 몇분 계십니다.
노숭피 로베르토 신부님, 원선오 빈첸시오 신부님, 이태석 요한 신부님 등등...가까운 곳에 그런 좋은 모델이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돈보스코와 이웃사촌처럼 지내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극진히 섬겼던 성인이 계십니다.
요셉 꼬톨렌고 성인입니다.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에서 걸어서 3분이면 그분의 사업체 피꼴라 까사가 나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입니다.
말마디 그대로 처음에는 아주 작게 사회사업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대단위 종합사회복지시설이 되었습니다.
저는 종종 점심 식사 후 산책 삼아 그곳을 들렀습니다.
안에 들어가면 수많은 부랑인들, 중증 장애인들, 불치병 환자들, 정신질환자들 등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수용되어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 와있는 환자들이 많다 보니 여기저기 시끌벅적 요란스럽습니다.
그런데 한 번씩 분위기가 숙연해지며, 동시에 환자들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편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15분에 한 번씩 천정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세상 부드러운 여성분의 편안한 소리가 흘러나올 때입니다.
따뜻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듣는 모든 사람들의 긴장된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줍니다.
그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 우리 곁에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이 대명제는 이론이나 희망 사항이 절대 아닙니다.
명확한 실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권능과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셀 수도 없이 강조되어온 임마누엘 하느님 신탁을 종결하는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제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매일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 제정으로 이제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안에 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말마디만 생각해도 감사의 정이 솟구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우리 가운데 탄생하신 메시아께서는 이름부터 너무나 은혜롭고 감지덕지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신데,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보니,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육화강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임마누엘 주님 현존 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 남은 날들이 외적으로 볼 때는 조금은 우울하고 슬플 것입니다.
여기저기 탈이 나고, 점점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한명 한명 떠나가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우리네 삶은 온통 회색빛일 것입니다.
그럴수록 꼭 기억해야 할 대상이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꽃다운 이팔청춘 내 인생에도 함께하셨지만, 쪼그라든 노년기의 삶에도 굳건히 함께하십니다.
힘겨운 병고의 순간, 우리 인생을 총정리하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임마누엘 주님께서는 반드시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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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6,52–59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서로 다툽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깊이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겉모양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분과 하나 되는 신비라고 보았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도
삶이 여전히 분열과 교만과 냉담 안에 머문다면
아직 그 신비의 깊이를 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시고
나도 주님 안에 머무는 생명의 결합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주님을 멀리서 존경하는가,
아니면 내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는가?
존경은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양식은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바꿉니다.
예수님은 단지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 안에 내어 주시는 분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에
이 말씀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평화는
갈등이 전혀 없어서 오는 고요가 아니라
주님과 하나 되어 내 안의 분열이 치유될 때 오는 은총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는
흩어진 내 마음을 모으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게 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인내는
주님과 하나 되는 이 길을
하루아침의 감정으로 끝내지 않고
매일의 충실함으로 살아가는 힘입니다.
성 치릴로를 기억하는 오늘,
이 성체의 신비는 더욱 깊습니다.
성모님을 통해 육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바로 그 몸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육화와 성체는 멀리 떨어진 두 신비가 아니라
한 생명의 흐름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사람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체는 단지 위로의 상징이 아니라
강생하신 주님의 실제적 자기 증여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습관인가, 체면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주님의 몸과 피가 주시는 생명인가?
주님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내 삶의 중심이 바뀌는 일입니다.
내가 나만을 위해 사는 자리에서 벗어나
관계를 살리고, 용서하고, 내어 주고, 함께 살아가는 자리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성체는 우리를 고립에서 꺼내
하나의 몸으로 엮어 주십니다.
바로 이 친교 안에서
평화는 자라고,
인내는 깊어집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몸과 피를
습관처럼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살아 있는 생명의 신비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 안에 머무르며
평화로 관계를 살리고
인내로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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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이윤경 루카 님
■ 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님 - 내려가는 길에서 다시 돌아오는 길로
오늘 제 마음에 머문 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영덕 복사꽃 길
사진 이상각
그들은 길을 떠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합니다.
그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무너진 마음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믿었던 것이 무너졌고,
희망했던 것이 끝났고,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분이
무언가를 바꾸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자신들의 삶까지 새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십자가 위에서 무너져 버립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담합니다.
어쩌면
믿음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자기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해 주시기를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했지만
상황은 그대로이고,
열심히 살았지만
결과는 기대와 다르고,
믿고 맡겼지만
오히려 더 어두워지는 순간을 만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이 들고,
실망하고,
낙담하고,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조금씩
엠마오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실망한 사람이 조용히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두 사람이
실망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다가와
같이 걸어가십니다.
골롬바 뮤지엄
사진 이상각
그런데
그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모릅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오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분은
낙담한 사람 곁에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지친 사람 곁에
말없이 걸어오시는 분입니다.
실망한 사람의 길 위에
동행자가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우리 삶의 상처와 슬픔과 아픔을,
우리 안의 어둠과 죄와 죄책감을
그분께 말씀드릴 때,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남양성모성지 누워 계신 십자가
사진 이상각
주님께서는
그들의 대화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 물음은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하시는 물음입니다.
그들 안에 쌓여 있던 실망과 상처를
꺼내 놓게 하시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주님은 성경으로 답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으셔야 하지 않았느냐.”
주님은
그들의 실망을 꾸짖기보다
그들의 실망을 새롭게 해석해 주십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십자가가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고통이 없는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그들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들어
그들의 기대와 실망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굳어 있던 마음이 풀리고,
식어 있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깊이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비추고,
우리를 깨우고,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변화된 것은
어떤 심리적인 위로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걸으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남양성모성지 자비로우신 예수님 상
사진 이상각
그런데
날이 어두워집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며 말합니다.
“저희와 함께 머무르십시오.
저녁이 되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저희와 함께 머무르십시오.
저희 집에 들어오십시오.
저희 식탁에 함께 앉아 주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저녁은
하루 해가 저무는 저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저녁이 찾아옵니다.
마음이 쓸쓸해지고,
그리움이 밀려오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도
피할 수 없는 저녁들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병,
실직,
자녀의 문제,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과 흔들림.
그런 시간이 오면
사람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자기 힘만으로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말하게 됩니다.
주님,
저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주님,
저희 집에 들어오십시오.
주님,
이 어두워지는 시간에
저를 혼자 두지 마십시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부활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께 머물러 달라고 청할 때,
그분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집으로,
우리의 식탁으로
들어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는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가정으로 들어오시고,
우리의 식탁에 앉으시고,
우리의 외로움과 불안과 슬픔 한가운데
함께 머물러 주시는 분입니다.
두 제자는
그분과 함께 빵을 나눕니다.
그때
그분이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곧 그분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십니다.
그러나
사라지신 것은
떠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눈으로 붙잡는 방식이 아니라
더 깊은 방식으로
그분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내려오던 사람들이
다시 올라갑니다.
실망하며 떠났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부활은
바로 이런 희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고,
내려가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올라가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집에 머무시는 주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우리의 눈은
어떻게 열릴 수 있을까요.
아마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우리도 빵을 떼는 자리에서
그분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성찬례 안에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고,
빵을 떼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그러나
미사 중에만
그분을 알아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남양성모성지 묵주기도길
사진 이상각
우리의 일상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시간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식탁에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에,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
지친 얼굴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서
주님은 이미 함께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안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닫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 열릴까요.
감사할 때입니다.
빵을 들고
감사드릴 때입니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하루를
선물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할 때,
그때
우리 눈이 조금씩 열립니다.
또 우리의 눈은
나눌 때 열립니다.
내 것을 움켜쥘 때보다
내어놓고 나눌 때
주님은 더 선명하게 드러나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마음을 떼어 주고,
시간을 떼어 주고,
용서를 떼어 주고,
사랑을 떼어 줄 때,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은
사랑할 때 열립니다.
같은 집에 살아도
마음이 굳어 있으면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합니다.
식탁에 앉아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보고,
조금 더 오래 들어 주고,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하고,
조금 더 참아 주고,
조금 더 품어 줄 때,
우리의 집은
그냥 집이 아니라
주님이 머무시는 곳이 됩니다.
어쩌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대단한 신비 체험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 속에서
그분의 현존을 알아차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내 식탁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
내가 돌보아야 할 가족,
내가 들어 주어야 할 한 사람,
내가 용서해야 할 한 사람,
내가 다시 사랑해야 할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르십시오.
저희 집에 들어오십시오.
저희 식탁에 앉아 주십시오.
저희 눈을 열어 주십시오.
말씀으로
저희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빵을 떼어 나누는 사랑 안에서
저희가 주님을 알아보게 하십시오.
그래서
내려가던 저희 마음이
다시 올라가게 하시고,
실망하던 저희 삶이
다시 희망을 품게 하시며,
저희도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기쁜 소식을 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기쁨은
자기 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기쁨은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흘러넘치는 기쁨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기쁘게 길을 떠났습니다.
기쁨을 안고 돌아갔고,
기쁨을 전했습니다.
부활은 기쁨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기쁨이고,
절망을 넘어서는 기쁨이며,
무너진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은
결코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밖으로 흘러갑니다.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세상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넘쳐흐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이 기쁨이 있는가.
정말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이 있는가.
이 기쁨의 원천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성체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도
바로 그랬습니다.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졌고,
빵을 떼실 때
눈이 열렸고,
마침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내려가던 사람들이
올라갔습니다.
실망하던 사람들이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
기쁨을 지닌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사랑이 되어
다시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위의 글은 이상각 신부님의 블로그 글입니다.
[출처] 내려가는 길에서 다시 돌아오는 길로. 엠마오로 가는 길|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 블로그https://blog.naver.com/rsony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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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 내가 가톨릭 신자 이구나 느낄때..
** 내가 가톨릭 신자 이구나 느낄때..
생각해보면, 어렸을때부터
예수님과 이어진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예수님이 누군지도모르고 개신교회에 종종 나가고
미션스쿨 고등학교 1학때 예수님을 십자가 수난을 통해 나를 구원하신
분으로 깨닫고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장통합 계열의 개신교회에서 활동하고..
잠시 나홀로 신앙 생활을 하다가..
대학교때 영세를 받고 가톨릭에서 활동하고..
지금까지 쭈욱 신앙생활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 믿는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온 것인데
개신교 장로교회, 가톨릭 천주교회 라는
종교활동 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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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가톨릭 신자 이구나 하고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1) 영성체를 해야 미사 드린것 같다
미사는 인간이 할수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라 생각합니다
물론 개신교회 다닐때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천주교회의 미사는 좀 느낌이 다릅니다
특히 사제의 성찬전례는...
아무튼 미사를 오랜 기간 드리다보니
미사 드리면서 영성체를 하지 않은 때가 몇번 있었습니다
물론 고백성사를 보고 다음 미사 때는 영성체를 햇지요
아무튼 요즘에는 영성체를 하지않으면 미사를 드린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사도 당연히 주일미사 참례하지만
평일미사도 좀더 참여하려고 합니다
매일미사가 가장 좋은데 언젠가는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개신교회에서도 성찬식을 하긴 합니다.
부활절 예배 때 성찬식을 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또한 저의 경우에는 세례받을 때 성찬식을 한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미사를 드리면서
반드시 성찬식을 하고 있습니다
2) 묵주기도를 드리면 기쁘다
가톨릭 천주교회에는 여러가지 공식 기도들이 있지만
저는 하느님 자비심 기도와 묵주 기도를 가장 좋아합니다
솔직히 하느님 (예수성심) 자비심 기도를 더 자주 드리지만
묵주기도를 드리고 나면 묘한 기쁨이 있습니다.
개신교회 다닐때도 여러가지 기도를 드렸지만
하느님 자비심기도와 묵주기도가 좋은것 같습니다
물론 내가 작성한 기도문으로 종종 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모님에 대한 마음은
가장 아름다운 신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느님에 대한 흠숭이 가장 고귀한 신심 이듯이..
3) 고백성사를 보면 영혼이 깨끗해진 느낌을 받는다
한두달에 한번 정도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봅니다
개신교회 다닐때도 회개의 기도를 기끔 드렸는데
고백성사를 드리면 좀더 좋은것 같습니다
성사 보기전에 성찰과 통회기도를 하니까요.
저는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하는데
가톨릭 신자라 생각하게 되는 경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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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섭리는 우리가 가늠할수 없을정도로
넓고 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 나를 믿는자는 구원을 받을것이다 "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 이든, 개신교도 이든
정교회 신도이든, 성공회 신도 이든..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 또는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종교에 관계없이 구원을 받을수 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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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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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45 추가.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요한 6,52-59).>
1) 예수님께서는 앞의 35절에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40절과 47절에서는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7절의 ‘나를 먹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먹는다.’는 ‘믿는다.’를 강하게 나타낸 표현이고, 믿음으로써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생명력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나를 먹는
사람”보다 더욱 강한 표현이고, 이 말씀도 역시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베드 2,2).” 라고 권고합니다.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받아먹는 것은, 엄마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는다.’이고, 그것은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받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결합과 일치에 초점을 맞추면,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 엄마와 한 몸을 이루면서 엄마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 경우에 태아가 엄마를 먹는다고 표현해도 별로 이상한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먹는다, 또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에 초점을 맞추면,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명력을 만들지 못하고, 밖에서(위에서), 즉 창조주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3) 지금 ‘영원한 생명’이 핵심 주제이긴 한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영원’은커녕 단 한 순간도 살아 있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현실적으로 ‘영원’은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의 생존이 더 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5-6).”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이처럼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인데,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영원’을 알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믿게 되었고,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는 것도, 또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도 모두 주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4) 무신론자들이나 믿음 없는 자들은 “예수를
몰라도(안 믿어도) 나는 잘 살고 있다.” 라고 큰소리칩니다.
그런 자들을 겨냥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2코린 2,15-16).”
신앙이 없어도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잘 살 수 있겠지만, 그 인생은 죽음과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생이고, 그것은 하루살이와 다르지 않은 인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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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4. 부활 제3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9:50 추가.
요한 6,52-59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본질에 대해 묵상하는 ‘생명의 빵’ 주간도 어느 덧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시면서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말씀을 하시지요. 우리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비로소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이 말씀을 물질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큰 혼란에 빠져 주님께 실망하고 그분 곁을 떠나게 되었지요. 우리도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즉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과 희생 덕분에 살아가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실존 양상을 예수님은 ‘말미암아’라는 단어로 설명하십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누구로 말미암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우리를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부모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으며 성장해왔지요. 다시 말해 그분들의 사랑과 희생 덕분으로 살아왔으니, 그 사랑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삶으로 증명해야만 합니다. 나를 보시는 부모님의 마음이 흡족하고 기쁠 수 있도록,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울 수 있도록, “일신우일신”의 자세로 성장하고 성숙하여 완성에 이르러야 합니다. 또한 삶에서 정말 소중하고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런 점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부모로 말미암은 것보다 훨씬 더 큰 부분을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서 숨을 쉬는 것은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삶이 주는 기쁨과 행복들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우리 삶과 세상을 당신 정의와 자비로 섭리하시는 하느님 덕분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헛되지 않았음을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를 보시는 그분 마음이 기쁘고 흡족해 지도록 최선을 다해 그분 뜻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존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과 축복이 우리 안에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지향’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이 자기들에게 바라신 소망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이뤄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주님의 몸을 받아 먹음으로써 그분을 내 안에 모시게 된 우리는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신 뜻을 마음에 새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모의 소망을 이루려는 노력이 부모에게는 기쁨되고 자녀에게는 보람이 되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노력이 주님께는 기쁨과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실이 되지요. 그러니 주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그분의 뜻과 사랑 안에 깊이 머물러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내가 받아모신 성체가 육신의 빵으로 그치지 않고 생명의 양식이 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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