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 예스24
이 책은 「장자」의 철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이 책은 무작위적으로 모아놓은 듯한「장자」의 문학적 일화들, 신비적인 경구들, 비밀스러운 암시들 근저에는 하나의 심층적인 인지 구조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최초의 장편 저작이다. 앨린슨은 신화와...
www.yes24.com
서론
『장자』의 근본 주제는 영혼의 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임. 이는 자신의 인격과 관점이 변화하는 것이고, 특정 관점의 변화라기보단 모든 관점을 넘어서는 바뀜을 말함. (그럼 영혼보단 자기변화self tranformation 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괜히 영혼이라고 하니까 신체와 구분되는 영혼을 지칭하는 것 같음.)
1편의 제목인 '소요유'가 영혼의 변화가 추구하는 목표임. 유(遊)는 꿈꾸는 곳이면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 갈 수 있는 마음의 절대적 자유를 가리킴. 영혼의 변화는 의식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적 변화와 다르고, 우주와 하나 된다는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적 변화와도 구분됨. 논리적 연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성적이지도 않음. 그보다 노에시스적(noetic)임. 인식의 한 면을 해결하고 그러한 변화를 경험적으로 환원하는 심리학적 통찰과 달리 영혼의 변화는 모든 심리적 장애 상태로부터 갑자기 풀려나며 경험적 환원이 불가하다는 점에서 그와도 다름.
*noetic: noesis는 현상학에서 말하는 의식 활동으로서, 대상을 지향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지향적 대상을 성립하게 하는 작용을 말함.
저자는 그 중 장자가 쓴 것으로 간주되는 「내편」(1-7편)을 다루었으며, 「잡편」과 「외편」이 내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위작이라고 보겠다고 밝힘.
『장자』가 문학적 형식을 활용하고 은유, 일화 등을 사용한 이유는 모두 독자의 분석적인 정신을 무기력하게 하는 동시에, 직관적이고 전일적인 정신 기능들을 강화힉 위함임. 지적 습관의 저항이 클수록 영혼의 변화를 위해 거쳐야 할 단계도 복잡해짐.
1장. 새들의 울음소리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말에는 말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만약 말해지는 바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말은 실제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말이 갓난 새의 삐약거리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차이가 있을까, 아니면 없을까? 도(道)가 무엇에 의존하기에 참과 거짓이 생겼나? 말이 무엇에 의지하기에 옳고 그름이 생겼나? 어떻게 도가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어떻게 말이 존재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는가? 도가 작은 성취에 의지하고 말이 헛된 겉치레에 의지할 떄, 유가가 말하는 옳고 그름[是非]과 묵가가 말하는 옳고 그름[是非]이 있게 된다. 한 쪽에서 옳다고 하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그르다고 하고, 한 쪽에서 그르다고 하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옳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그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고 싶다면, 그때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밝음[明]이다.
2편 제물론 중
장자의 최종적 관점은 상대주의가 아님. 일단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에 결국 자신은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 특히 장자가 상대주의라고 가정하면 사람 소리랑 새 소리랑 구분 가능하냐고 묻는 대목에서 장자는 아니다라고 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 텍스트는 그저 새의 지저귐이 됨. 즉 텍스트 자체가 성립되지 않음. 그런 초보적인 자기논박으로 끝나는 글이라고 보기 어려움.
장자는 답정너처럼 질문하고 있음. '너 아까 점심 먹지 않았어?'와 같은 질문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뻔한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임. 새 소리와 인간 소리가 구분 가능하냐는 질문은 이런 식임. 실제로 장자는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말에는 말해지는 무언가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음.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에서도 유가와 묵가가 서로의 주장이 올다고 할 때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밝음'이라고 말하고 있음. 즉 본문의 완결성을 고려할 때 새소리와 인간 소리가 구분 가능하냐는 질문은 '구분 가능하다'라는 독자의 뻔한 대답을 얻기 위한 의문이었음.
말이 충돌되는 이유는 진리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하는 각각의 관점을 갖기 때문임. 그렇다면 두 견해는 모두 이해가능해야 함. 물론 이 말이 피론주의처럼 각 견해가 동등하게 타당하기 때문에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님. 이어지는 구절은 다음과 같음.
옳은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곳에는 그른 것에 대한 인식도 있어야 한다. 그른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곳에는 옳은 것에 대한 인식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런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하늘[天]의 빛에 따라 모든 것들을 비춘다.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 天)
Watson, the complete works of Chuang Tzu, 40
즉 모든 것들을 비출 무언가가 있음. 장자는 우리가 옳고 그름의 인습적인 기준을 넘어서, 더 높은 차원의 옳음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하늘이라고 표현함. 하늘로 표현한 이유는 더 높은 차원의 옳음이 일상을 초월하는 준거 체계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임. 따라서 장자를 상대주의자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
2장. 신화와 괴물: 은유의 기술
장자는 정신의 분석적 기능을 잠재우고 직관적 기능을 일깨우기 위해 이항물음, 신화, 괴물 및 은유의 형식을 택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함.
이항물음
'말은 실제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처럼 어느 한 편에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제기하고 있음. 이항 모두 어느 정도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제시된 경우 뭔가 논리적 해답이 없는 것처럼 보임.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그 물음을 제기한 것으로부터 논리적으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해답을 기대하게 된다.
이항물음에서 호기심이 발생했다면, 정신에는 개념적 차원과는 다른 차원이 존재함을 암시함. (저자는 뇌 우반구의 상상작용과 관련된 인식 능력과 좌반구의 개념 형성작용과 관련된 인식 능력 모두 인간이 갖추고 있음을 상기하며, 과학적 사실이 뭐든 간에 우리가 이런 별개의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분석적 능력 외의 다른 능력이 있음을-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할 필요 없다고 말함) 이항 물음은 분석적 수준과 심미적 수준 모두에서 물음을 제기하는 것임, 단순한 부정은 분석적인 기능을 만족시키지만, 부정이 그에 대립하는 긍정을 동반할 때 분석적 기능은 해체적으로, 심미적 측면은 협력적으로 작용함.
신화
플라톤의 대화편은 신화를 중간 혹은 끝부분에 삽입하는 반면, 장자는 말 머리에서 신화를 사용함. 신화의 기능은 플라톤이나 장자나 비슷하지만, 장자처럼 쓰는 것이 훨씬 효과적임. 신화는 분석적 기능을 잠재우고 동화 듣는 데 익숙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갖게 함.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면 비판적 지성의 범주들로 즉각 번역하려고 할 경우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음. 신화를 맨 앞에 배치함으로써 통상적인 독해 양식(비판적 자세)을 차단함. 신화 자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다른 차원에서 어떤 진리치를 갖는 것으로 이해됨. 즉 신화도 이항물음처럼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함. 분석 능력은 해체적으로, 심미적 능력은 협력적으로 작용하여 지성에 습관적으로 의지해서 얻어지는 이해와는 다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음.
장자의 주요 논의는 2편인 「제물론」에서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등장하는 1편인 「소요유」가 안 중요한 건 아님. 우리는 성인으로서 신화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참된 내용을 들려줄 거라고 생각함. 우리는 진리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음을 무언중에 이해하며 장자를 읽는데, 이 과정 속에서 장자의 맨 앞부분은 없어서는 안 될 허구라고 할 수 있음.
은유와 유비
은유는 앞서의 신화, 이항물음에 비해 시도가 요란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음. 분석적 정신을 해체하는 데 있어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이며, 신화에 거부감을 가진 독자에게 호소력을 지닌다는 점에서 신화보다 유리함. 장자에서 은유를 사용하는 이면에 깔린 전략은 정신의 직관적이고 전일적인 인지 능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신으로 하여금 그림을 들여다보는 데 익숙하게 만드는 것임. 파악은 이해의 단계이지, 설명의 단계가 아님. 즉 우리가 파악한 것을 분석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이해되지 않았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음.
괴물
괴물이라는 말은 좀 심하긴 한데, 무시무시하진 않아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괴물이라 할 수 있음.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음에도 내용은 심오하며, 우리의 직관적 정신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음. 주어진 의미를 습관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전부임. 괴물이 특히 가치 있는 것은 괴물에 의해 메세지가 전달되는 순간과 정확하게 일치해서 기존의 이해 양식도 차단됨.
3장 신화의 내용
북쪽의 어둠[北冥] 속에 물고기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다. 곤은 너무나 거대해서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모른다. 그는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 크기는 가로질러 몇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솟아올라 날아갈 때는 그 날개가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같다. 바다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이 새는 남쪽의 어둠[南冥]을 향해 출발한다. 그 남쪽의 어둠은 하늘의 못[天池]이다. …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이것을 비웃으면서 말한다. "우리는 애써 날아올라봤자 느릅나무나 다목나무까지 이를 수 있다. 때로는 그렇게 하지 못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남쪽으로 구만 리나 갈 수 있다는 것이냐!" 가까운 푸른 숲에 갈 때에는 세 끼니를 가져가도 배부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백 리를 가려면 그 전날 밤에 곡식을 빻아야만 한다. 그리고 천 리를 가려면 석 달 전부터 미리 양식을 모으기 시작해야만 한다. 이 두 생물이 무엇을 이해하겠는가? 작은 이해는 큰 이해에 미칠 수 없고, 명이 짧은 것은 명이 긴 것에 미칠 수가 없다.
제1편 소요유 중
(다른 버전도 있는데 거기선 곤이 썰 하나, 붕이 썰 하나 해서 곤이랑 붕이랑 서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묘사된다 함. 왜 불일치하는 두 버전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저자는 곤이가 붕이가 되는 이야기가 진짜라고 생각함.)
어둠: 인식론적 출발점. 선입견과 개념들을 모두 배제한 채 논의를 시작해야 함
물고기에서 새가 됨: 생물은 자기 안에 변화 가능성을 가짐. 즉 우리도 변화 가능성을 내부에 가지고 있으며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음. 물고기라는 잡을 수 있는 생물에서 자유와 초월을 연상시키는 새로 변화하는 것은, 우리의 변화가 무지에서 앎으로 향함을 의미함.
매미와 작은 새: 회의주의자로 이 책을 읽은 독자의 첫번째 반응을 의미함. 이들은 여행 가능성에 대해서만 회의할 뿐 생물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음. 이들의 회의는 상식, 과학적 법칙(이만큼 가려면 식량 이만큼 모아놔야 함) 등 경험적 사실에 근거함.
매미와 새에 대한 평가절하: 장자는 미물들이 뭘 알겠냐고 비판함. 즉 붕의 관점이 더 나은 관점임을 분명히 밝힘.
매미와 새는 정신적 눈멂에 비유되기도 함.
우리는 눈먼 사람이 아름다운 무늬를 감지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고, 귀먹은 사람이 종과 북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눈멂과 귀 먹음은 몸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이해에도 역시 눈멂과 귀먹음이 있다. 지금 네 말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1편 소요유 중, 왓슨, 33
아름다운 것을 통찰하는 능력은 그것을 보는 당사자의 자기 역량임. 하지만 눈 먼 사람도 자신이 눈 멀었음을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의미는 일거에 포착될 것이라는 자기 변화의 암시도 담겨있음. 논증해야 할 것을 오히려 가정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치부될지 모르겠지만, 이는 논제가 진리임을 입증하려는 시도에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감지하는 데 있어 독자 자신의 역할이 중요함을 환기할 목적으로 제시된 것임.
송나라에 손 트는 것을 방지하는 연고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자가 있었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물 속에서 비단을 표백하는 기술로 생게를 꾸렸다. 한 나그네가 그 연구에 대해서 듣고는 백금에 그 처방을 팔라고 제의했다. 그 사람은 가족들을 다 불러놓고 회의를 했다. 그가 말한다. "우리는 대대로 비단을 표백하는 일을 해오고 있지만 수입이 몇 금도 되지 않는다. 지금 비방을 판다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백 금을 벌어들일 수 있다. 그러니 이 비방을 그에게 팔자!" 그 나그네는 연고를 받아, 월나라 때문에 곤란을 겪던 오나라 왕에게 그것을 소개했다. 왕은 그에게 군대를 맡겼고, 그 해 겨울 그들은 월나라 사람들과 수전을 벌여 월나라 사람들을 크게 무찔렀다. 그 나그네에게는 상으로 정복한 영토의 일부가 봉해졌다. 그 연고가 손 트는 것을 방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한 사람은 그것을 사용해서 봉토를 얻었고, 다른 한 사람은 비단을 표백하는 일을 면치 못했다. 이것은 그들이 연고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1편 소요유 중
정신적 눈 멂과 귀먹음에 대한 언급 뒤에 나오는 대목으로 저자에 따르면 소요유의 극치를 보여줌. 우리는 모두 동일한 기본 장비는 가지고 있음. 다만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짐.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이익만 얻은 가족은 궁극적으로 땅이라는 선물로 상징되는 영원한 어떤 것을 얻은 사람과 동일한 가치론적 수준에 있지 않음.
4장. 은유로서의 괴물
여기서 말하는 괴물은 무서운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의 정상성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함. 괴물은 공포나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정확히 반대로 의식의 전환을 이루는 관건이자 우리의 자연스러움[자연, spontaneity]을 구체화한 것임. 괴물에 대한 '정상인'의 기피는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분명 현존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기보단 공공연하게 드러내서 이해하고 논의하여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삶으로부터 추방해야 함.
괴물은 문화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정상성에 대한 살아있는 반례임. 괴물에게 철학적 구절들이 할애되면 괴물은 철학자가 됨. 규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괴물이 가진 특징은 자연스러움임. 이미 공포의 대상이라 공포스런 관점을 채택한다고 잃을 것도 없고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도 무사할 수 있음. 괴물의 이미지는 괴물 특유의 추함과 괴물이 전달하는 메세지으 아름다움/참됨 사이의 대비를 가져와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음. 괴물을 가치의 담지자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의식적인 판단을 끊어야 함.
공문헌이 오른쪽 지휘관을 보고는 깜짝 놀라 말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사람인가? 어떻게 해서 발이 없는가? 하늘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그 지휘관이 말했다. "이렇게 만든 건 하늘이지 사람이 아니오. 하늘은 내게 생명을 주면서 내가 외발이가 되도록 만들었소. 사람의 모습에는 두 발이 있기 마련인데 말이오. 그래서 나는 이것이 하늘의 작품이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아오. 못가의 꿩은 열 보 걸어가서 한 입 쪼아먹고 백 보 걸어가서 한 모금 마시면서도 새장 속에 갇히기를 원치 않소. 아무리 왕처럼 대접해준다고 해도 그 영혼은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오."
제 3편, 양생주 중
불구자를 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민을 가짐. 심지어 군 지휘관이라는 직책을 고려하면 부상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쉬움.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다리 하나 없는데 군복무해서 지휘관까지 가는 건 어렵기 때문에 부상이 맞을 것임. 따라서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대목은 선천적으로 다리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이 그에게 준 운명과 관련지어 해석해야 함.
여러 괴물 중 불구자가 먼저 나온 이유는 불구자는 연민의 대상이 된다면 이후 등장하는 괴물들은 공포 혹은 혐오의 대상이기 때문..ㅋㅋ
지리소라는 자는 턱이 배꼽에 가려져 있고, 어깨는 머리 위로 솟아 있으며, 땋은 머리는 하늘을 가리키고, 오장은 꼭대기에 있으며 두 넓적다리는 갈비뼈를 누르고 있다. 그는 바느질을 하고 빨래를 해서 충분히 먹고 산다. 또 키질을 하고 좋은 쌀을 골라내어 열 사람을 족히 먹여 살린다. 당국에서 군대를 소집할 때 그는 작별의 손을 흔들며 군중들 사이에 서 있따. 당국에서 큰 부역을 일으킬 때, 그는 만성적인 병약자라는 이유로 면제된다. 그리고 당국에서 병든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줄 때에는 큰 됫박으로 세 되의 곡식과 열 단의 땔나무를 받는다. 그는 불구자의 몸으로도 자신을 잘 돌보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럴진대, 그가 불구의 덕을 가졌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제 4편, 인간세 중
장자에는 나무 이야기의 원형(무용한 나무가 결국 안 잘리고 천수를 누렸다-)이 자주 등장함. 지금까지 나무의 무용함이 우용함이었다는 논점에 대해선 논의되어 왔지만, 나무가 무용할 수 있었던 이유 즉 정상성에서 벗어났음에 대해선 주목하지 못했음. 나무는 대체로 개못생기고 울퉁불퉁하고 핥았더니 물집 생기고 등등 안 좋은 말들이 다 붙어있음. 대신 이러다보니 천수를 누려 크고 두껍긴 한 듯.
저자는 지리소의 '소'와 나무 이야기 속 등장하는 나무 이름 '저'의 중국식 발음이 같다는 점, 나무 이야기 바로 뒤에 지라소 얘기가 등장한다는 점, 나무와 지리소 모두 말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연관지어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말함. 괴물같다는 한 가지 사실은 평가절하의 이유가 되기도, 높이 평가받는 이유가 되기도 함. 즉 같은 것에 대해 서로 대립된 해석이 내려질 수 있음. 신인(神人)에 따르면, 생물에게 가치 있는 것은 생명 보존임. 따라서 신인의 관점에서(생명 보존의 관점에서) 괴물같은 모습은 높은 가치를 가짐. 반면 즉각적인 이득의 관점에서 괴물같음은 무용하기 때문에 평가절하됨.
절름발이에 곱사등이며 입술이 없는 남자가 위나라의 영공에게 유세하였다. 영공은 그가 너무 마음에 들어, 정상인들을 볼 때면 그들의 목이 너무 야위고 말랏ㅅ다고 생각했다. 항아리 크의 혹을 가진 사람이 제나라 환공에게 유세하였다. 환공은 그가 너무 마음에 들어, 정상인들을 볼 때면 그들의 목이 너무 야위고 말랐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덕이 뛰어나면, 형체는 잊혀질 것이다. 사람들이 잊혀질 수 있는 것을 잊지 않고, 잊혀질 수 없는 것을 잊을 때 - 이것이야말로 참된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제 5편, 덕충부 중
입술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음. 사실 본문 뒤에는 입술 없는 사람이 위나라 영공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쓰여있지만, 그가 위령공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한 줄도 보고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이 하는 말은 너무나 신비한 것이라 통상적인 보고를 넘어선다는 점을 입술 없음을 통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따라서 이들에게 대사를 주지 않는 것이 적절하며, 그렇게 해서 장자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종류의 언어가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음.
입술 없는 사람은 곱사등이나 내반족(발 안쪽으로 휨) 등의 기형보다 충격적으로 기괴함. 특히 장자는 기형적 특징에 대해 점잔빼지 않고 노골적으로 서술해 우리의 감수성에 충격을 줌. 우리는 분명 괴물의 입술이 없다는 점을 잊을 수 없음. 이는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정신의 한 측면을 완전히 정지시킬 때 잊을 수 있음. 후술하겠지만 참된 망각은 우리가 그렇게 한다는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할 때 할 수 있음.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위나라에 추남이 한 명 있는데, 이름이 애태타라고 하오. 그런데 남자들은 그의 곁에 있더니 그만을 생각하며 떠나질 못하고 여자들은 그럴 보더니 자신들의 부모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하도. '나는 다른 사람의처가 되느니, 이 분의 첩이 되겠어요.' 그런 경우가 십수명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하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주도했다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소.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만 할 뿐이오. 그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군주의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배를 채울 식량을 쌓아두지도 않았소. 게다가 그는 온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추하다오. 남에게 동조하기만 하고 결코 주도하지 않으며 자기 바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만을 안다오. 그런데도 남자와 여자들이 그에게로 떼지오 몰려드오. 내가 보기에 그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오. "
제 5편, 덕충부 중
추남이 불구자보다 정상성에서 덜 벗어났으니 가장 앞에 와야 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음. 하지만 장자는 이상적 유형의 괴물들이 등장할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존경할 만한 괴물 유형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단순히 추하게 생긴 사람이 첫 번째 유형으로 등장하지 않은 것임.
추하기만 하다는 단순성 때문에 개념적 방어기제들이 쉽게 깨지고, 추함은 아름다움과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우리의 기대를 강력하게 저버리고, 이 사례가 심미적 가치평가와 결부될 때 최대치의 혼란을 야기함.
공자가 초나라를 방문했을 때, 초나라의 광인 접여가 공자가 머문 집 문 앞을 서성이며 외쳤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너의 덕이 쇠하였느냐! 미래는 네가 기다릴 수 없고, 과거는 네가 좇을 수 없다. 세상에 도가 있을 때에는 성인은 성공하지만, 세상에 도가 없을 때에는 성인은 살아남는다. 지금 같은 때에는 형벌이나 면하는 게 낫다. 행운은 깃털만큼 가벼운 것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가질 줄 모른다. 재앙은 땅만큼 무거운 것이지만 아무도 가기서 떠날 줄 모른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아라. 사람들에게 덕을 가르치는 짓은! 위험하고 위험하도다. 땅에 금을 긋고 뛰어가는 짓은! 어리석고도 어리석도다. 내가 가는 걸 망치지 마라! 나는 구불구발한 길을 간다. 내 발을 밟지 마라! 산의 나무들은 스스로를 해치고 등불의 기름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서 베어지고, 윷나무는 쓸모가 있어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유용한 것의 유용성은 알지만, 무용한 것의 유용성은 아무도 모른다. "
제 4편 인간세 중
광인은 정의상 멀쩡한 소리를 할 수 없음. 털학적 맥락에서 광인이 공포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논리 규칙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임. 그리고 정신적인 책임이 없기 때문에 불구자보다 훨씬 자유로움. 가장 대담하게 진술할 수 있는 인물임. 앞서 지라소 얘기에서 '그가 불구의 덕을 가졌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고 말하며 광인의 등장을 얘견함. 그런데 광인이 말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함. 장자는 광인을 내세워 그 당시 권위적이었던 공자를 비판함. 이런 모습 뭔가 시장에 나와 큰 소리로 외쳐대던 <차라투스트라>의 광인을 떠올리게 함.
미래를 예기하고 과거를 좇으려 한다는 이유로 공자를 질책하고 잇음. 즉 장자가 보기에 올바른 선택 방안은 현재를 체험하는 일임. 광기는 인습적 기준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혜와 한층 더 강한 연관성을 가지며, 이때 지혜는 인습으로부터의 자유가 참된 본성을 빛나게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