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건 몰라도..... 경부선의 속도향상에 대한 부분은..... 볼만하네요..
만주까지 이어지는 철도.....아- ㅜ_ㅜ
철도창설의 배경
19세기 중엽 이후, 우리나라에 서구의 과학ㆍ기계문명이 점차 도입됨에 따라 철도는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7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는 여행기 ‘일동기유’에서 기차의 경이로움을 ‘화륜거’란 이름으로 소개하였고, 1880년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은 국가 운영상 철도가 가지는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882년 서구 열강이 철도부설을 요구하자 당시 한국 정부의 재정 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고종에게 국고의 부족을 이유로 이를 연기할 것을 건의하였다.
1885년 8월 서울~인천 사이에서 전기통신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철도에 관한 관심은 더욱 넓게 확산되어 갔다. 1887년 2월 9일 뉴욕의 한국영사는 공문을 통하여 서울~인천간의 철도부설을 건의하였다. 또한 1889년 당시 주미 조선공사였던 박정양은 정교한 철도 모형을 입수한 후 귀국, 고종과 대신들에게 철도의 편리성과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890년대에 이르러 철도 건설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892년 고종은 미국인 모스(J. R Morse)를 초청하여 이완용과 이하영에게 ‘철도창설조약’을 체결토록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쳐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당시 선진 열강들은 우리나라에서 철도를 건설하려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일본은 1885년부터 이미 철도노선에 대한 사전 답사를 시작하였다.
1892년 8월에는 철도기사 ‘가와노 텐스이’가 보조원 3명과 함께 약 2개월에 걸쳐 서울~부산간의 측량을 실시하였다. 또한 1894년 7월 청일전쟁 당시에 병력과 군수물자를 원활히 수송하기 위해 일본 외상 ‘무츠 무네미츠’는 ‘다케우치 츠나’를 파견하여 서울~인천간, 서울~부산 간의 철도 부설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본은 경복궁을 습격하여 친일 내각으로 개편한 후 내각의 공무아문에 철도업무 중추기구인 철도국을 설치하였다.
1894년 8월 20일 일본은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고, 경인, 경부철도를 부설할 것을 약정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이 계획은 연기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이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주도록 압력을 가하고 한국에서 철도의 주요 이권을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이때부터 한국에서의 일본 세력은 다소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7월 우리 정부는 철도의 부설ㆍ감독ㆍ관리를 담당하는 철도사를 설치하고, 국제표준규격에 따라 철도를 건설할 것을 규정한 ‘국내철도규칙’을 제정ㆍ공포하였다.
독립협회 등의 조야에서도 철도 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가하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철도를 건설하자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이에 따라 1898년 우리정부는 서울~목포, 서울~원산~경흥, 원산~평양, 원산~진남포의 철도건설을 검토하였다. 그 후 박기종 등이 회사를 설립하여 우리의 손으로 철도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자금 부족과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을 비롯한 선진 열강이 국내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각축을 벌이는 동안 을미사변으로 일본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뒤이어 친일 내각이 물러나고 새 내각이 들어섰다.
이때 미국인 모스는 서울~인천간의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여,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898년 모스는 자금이 부족하자 한국정부의 허락도 없이 일본 정부와 재벌이 결성한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부설권을 매각하였다. 부설권을 인수받은 일본은 공사를 계속하여 완공시켰고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 구간에서 임시영업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이 땅에 첫 기적이 울리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의 철도 교통 시대의 막이 열렸다.
한편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대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한반도 종단철도(부산~신의주)의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경부철도가 한국 남부지방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ㆍ경제적 세력을 확대하는 유효한 수단이라 판단하고, 이의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국정부 및 러시아와 부단한 교섭을 거듭하였다. 1898년 9월 8일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자본가들이 중심이 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1900년 8월 경부철도 부설공사를 착공하였고 1905년 1월 영등포~초량 간을 개통하였다.
1896년 7월 한국정부는 프랑스와 ‘경의철도계약’을 체결하고, 부설권을 피브릴르사에 제공하였다. 그러나 피브릴르사는 건설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데다가, 국제 정세의 변화로 경의철도 건설의 필요성이 감소하자 3년 만에 한국정부에 부설권을 반환하였다. 이때 박기종 등은 1899년 7월 6일 대한철도회사를 설립,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선로 답사를 하는 등 경의선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한국정부는 동년 9월 궁내부의 내장원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고 국가 자본으로 경의선을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서북철도국은 1902년 3월 서울~개성간의 건설공사를 착공하였으며, 동년 5월 8일 서대문 밖에서 기공식을 성대히 거행함으로써 경의철도를 우리 손으로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국내ㆍ외에 과시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도 자금 부족에 직면하여 공사는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이때 러일전쟁을 앞두고 대륙침략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은 한국측에 차관의 굴레를 씌워 경의선 부설권을 확보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의 철도문제 등을 주요 쟁점으로 하여 대립한 결과, 마침내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앞두고 경의선을 일본 군용철도로 부설할 것을 결정하였고, 동년 2월 21일 임시군용철도감부를 편성하였다. 일본은 동년 2월 23일 한국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고 경의철도를 일본의 군용철도로 부설할 방침임을 통고해 옴으로써 경의선은 일본 군대가 직접 부설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기간 중 일본은 조기에 공사를 끝내기 위하여 광대한 철도용지를 수용하였고, 또 수많은 한국인 노동자를 공사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1905년 4월에 용산~신의주간 연락운전이 개시되었고, 1906년 4월 3일부터는 용산~신의주간 직통운전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 당시 삼량진~마산 사이의 철도는 일본의 군용철도로 부설되었다.
1906년 7월 1일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통감부 철도관리국을 설치하여 우리나라 철도 전체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는 경부선을 매수하는 한편, 군용철도인 경의선과 마산선을 통감부로 이관함으로써 마침내 우리나라의 철도를 모두 국유화하였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만주에 대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이와 접속되는 한국철도를 연결고리로 적극 이용하였다. 일본이 많은 비용을 투입하여 한국에 철도를 부설한 것은 그들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를 확보하려는 팽창정책의 일환이었다. 경부선과 경의선을 개통함으로써 남북 종단철도망을 확보한 일본은 식민지 지배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남서와 동북을 연결하는 교차철도망인 경원선, 호남선, 함경선 등을 차례로 건설하였다.
당시 경원선은 1899년 9월 한국정부 궁내부 내장원에 설치한 서북철도국에서 관장하였다. 이때 프랑스와 독일이 부설권을 요구하였으나, 우리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박기종 등의 국내 철도용달회사에 부설권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동 회사가 자금 조달에 실패하자 1903년 일본은 경원철도 차관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철도부설권을 장악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경원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하고자 했으나, 전쟁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게 되자 경원선 부설을 중단하였다. 그 후 일제의 한국 강점기인 1910년에 다시 착공하여 1914년 9월 16일 용산에서 원산까지 경원선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1896년 프랑스는 호남선 철도부설권을 요구하였으나, 한국정부는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1904년 6월에는 호남철도주식회사를 통하여 강경~군산간 철도와 공주~목포간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호남철도주식회사는 주식 공모로 자금을 마련함으로써 우리 손으로 직접 철도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군사상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경목철도(호남선)를 자신들이 건설하고자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부설권을 취소하도록 하였다. 그 후 호남선은 일본에 의해 착공한지 4년만인 1914년 1월 22일 개통되었다.
일본은 함경남ㆍ북도의 지하자원과 산림을 개발할 목적으로 1914년 10월 1일 함경선을 착공하여 1928년 11월 25일 개통하였다. 이로써 흔히 5대 간선이라고 하는 경부ㆍ경의ㆍ호남ㆍ경원ㆍ함경선이 모두 완공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대전을 기축으로 하여 한반도의 사방을 대각선으로 종단하는 간선철도망의 완전한 모습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곧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식민지 지배 체제를 확립한 일본은 식량과 자원을 수탈하고, 대륙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철도망 확장사업인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수립ㆍ추진하였다. 1927년부터 시작된 이 계획에 따라 도문선, 혜산선, 만포선, 경전선(진주~전주, 원촌~담양), 동해선(원산~포항, 울산~부산)이 전부 또는 일부 완공되고, 사설철도인 경남선(마산~진주), 전남선(송정리~담양), 경동선(대구~학산), 전북철도(익산~전주), 도문철도(회령~동광진) 등이 국유화되었다. 한국의 주요 광산지대와 공업지대를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철도망이 확충됨에 따라 한국철도는 군사철도에서 산업철도로 성격이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만주 침략을 위하여 일본은 가장 단거리로 일본~한국~만주를 연결하는 제2의 대륙간선철도망으로 일본~동해~「북선3항」(나진ㆍ청진ㆍ웅기)~「북선철도」~길회철도(중국)를 연결하는 「북선루트」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사설철도인 도문철도를 매수하여 표준궤도로 개축함으로써 한반도 북부지역과 동북 만주일대의 철도는 동일 궤도상에서 직접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평원선(평양~원산)은 한반도 북부지역의 동서를 연결하는 주요 철도로 1926년에 착공되어 1941년에 개통되었다. 이 철도는 서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공산물과 중부의 광물 및 동부의 수산물, 공산물 등의 수송로로서, 또 동해를 건너 일본과 연결되는 선로로서 중시되었다.
중국침략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 후반 일본은 또 하나의 한반도 종단철도인 중앙선을 부설하였다. 「조선 중앙철도 부설계획」을 수립하고, 청량리와 경주를 연결하는 경경선(중앙선)을 1936년에 착공하여 1942년 4월 1일에 개통했던 것이다. 이 철도는 태백산맥 인근의 지하자원과 삼림자원을 반출하여 대륙으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것이다.
1937년에 발발된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철도의 군사적 성격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즉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간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함경선의 복선화를 추진하였다.
당시에 열차의 운행속도와 운행빈도는 갈수록 증가하였다. 경인선 개통시 인천에서 노량진간에는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고, 1일 1~3회 운행되었으나, 1905년에는 1일 4~6왕복으로 증가되었다. 경부선에서는 개통 당시 서대문~초량간 1일 남행과 북행의 2개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편도 약 30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성능이 향상된 급행열차의 투입으로 소요시간은 점차 단축되어 1905년 5월 1일부터는 14시간, 1906년 4월 16일부터는 11시간만에 주파가 가능하게 되었다.
경의선에서는 1905년 3월 10일 용산~신의주간에 1일 1왕복의 열차가 운행된 후 동년 4월 28일부터 연락운전이 개시되었고 1906년 4월 3일부터 직통운전이 시작되었다. 1908년 4월 1일부터는 부산~신의주 간 직통 급행열차인 「융희호」가 운행되었다. 1911년 11월 1일에는 압록강 가교가 완공되어 만주의 안동역까지 연장운행이 되었고, 남대문~장춘 구간에서는 1주 3회 직통 급행열차가 운행되었다. 이어서 1912년 6월 15일부터 부산~장춘 간 직통 급행운전이 개시되었다.
이 후 열차의 운행속도는 급속히 향상되어 갔다. 1932년 7월 1일부터는 서울~부산 구간이 8시간만에 운행되었고, 12시간 소요되던 서울~신의주 구간은 8시간 54분으로 운행시간이 단축되었다. 1934년 11월 1일부터 부산~장춘 구간에 직통 급행열차 「히카리호」, 부산~심양(봉천) 구간에 「노조미호」가 투입되었다. 1936년 12월 1일부터는 부산~서울 구간을 6시간 45분만에 주파하는 「아까쓰끼」호가 운행되었고, 1938년 10월 1일부터는 부산~북경 구간(2,068km)을 38시간 45분에 주파하는 직통급행 여객열차가 운행되었다.
한편, 1907년부터 경부~경의철도와 연안항로의 항구를 매개로 하는 연락운수가 시작되었으며, 1908년부터는 일본철도의 전 선로의 각 역과의 연락운수가 실시되었다. 이 때부터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관부연락선이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락운수는 1911년 11월 만주 장춘까지 확장되었고, 1915년 이후에는 만주뿐만이 아니라 중국 국유철도 6개선으로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 후 대륙과의 연락운수는 만포선ㆍ함경선 등이 개통되면서부터 더욱 확산되었다.
일본은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패전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극도의 물자 결핍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에서의 철도 건설사업과 개량사업은 중단되거나 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경북선ㆍ안성선의 레일을 철거하여 병기재료로 전용하고, 차량의 부품을 철거하여 군수품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에는 광주선(광주~담양), 경북선(점촌~안동), 경기선(안성~장호원), 충남선(홍성~장항), 금강산 전철선(창도~내금강) 등을 철거하여 군수물자로 전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 때부터 한국 철도는 점점 황폐화되어 갔다.
일제침략기 한국의 간선철도는 한국과 만주의 원료 및 곡물을 일본으로 수송하고 일본의 공업제품과 군대 및 이민을 한국과 만주로 운반하는 파이프 라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역할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일본은 특별운임제도를 마련하는 등 한국철도에 대한 두터운 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거점도 개항장과 포구로부터 철도노선상의 신흥도시와 정거장으로 옮겨졌다.
일제 침략기의 운수상황은 대체로 1930년대 중반을 계기로 크게 변하였다. 즉 전반기(1915~1923) 운수실적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여객이나 화물이 모두 급증하였으나, 중반기(1928~1932)에는 경제공황의 여파로 양자 모두 대폭 감소하거나 답보상태를 유지하였다. 반면에 1932년 이후에는 한국에서의 공업화와 한국ㆍ일본ㆍ만주간 경제 블럭의 형성으로 인하여 철도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