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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2월 21일
제44회 베를린영화제서
`화엄경` 특별상 수상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이 1994년 2월
21일 제4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폐막식
에서 특별상인 `알프레드 바우어 상`을
수상했다. 우리 영화가 베를린 국제영화
제에서 경쟁부문 본선에 진출, 상을
받기는 지난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
이래 33년만이었다.
시인 고은의 동명 소설 `화엄경`을 원작
으로 한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에 대해
모리스 드 하벨른 집행위원장은`영화예술
의 새로운 시각을 연 작품`이라고 평가
했다. 이 상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운동을
주도한 알프레드 바우어의 업적을 기려
1982년에 제정된 상으로 영화예술창안상
으로 불린다.
`화엄경`은 장감독의 독특한 해석력과
유려한 촬영으로 높이 평가돼 수상했다.
베를린영화제 대상인 금곰상의 영예는
영국-아일랜드 합작영화인 `아버지의 이름
으로 `(짐 쉐리단 감독)에 돌아갔으며, 2등
상 격인 심사위원 특별상은 쿠바의 `딸기 초콜릿`
(토마즈 퀴티에레즈 아레아)이 차지했다.
▶2011년국정원,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잠입사건
국정원 직원들이 지난 16일 오전 9시27분께 롯데호텔 19층 인도네시아 특사단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가지고 가려다 인도네시아 직원과 마주치자 노트북을 놓고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세훈 국정원장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이날 "국정원 직원들이 국익(國益) 차원에서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협상 전략 등을 파악하려 했던 것"이라며 "직원들이 발각된 것은 뜻하지 않은 실수"라고 했다. 남자 2명, 여자 1명의 국정원 팀은 16일 오전 9시27분쯤 롯데호텔 19층 인도네시아 특사단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만지다 인도네시아 직원과 맞닥뜨리자 노트북을 돌려주고 자취를 감췄다. 국정원 직원들이 노트북의 정보를 USB(소형 이동식 저장장치)로 옮겨 가져갔는지는 불투명하다. 당시 하따 라자사 경제조정장관(부총리급) 등 장관급 6명을 포함한 인도네시아 특사단 50여명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로 떠난 직후였다.
국정원 직원들이 수집하려던 정보는 국산 고등 훈련기인 T-50, 흑표 전차, 휴대용 대공미사일 '신궁' 등을 수입하려는 인도네시아의 가격 조건 등 내부 협상 전략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T-50은 인도네시아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기 앞서 러시아의 Yak-130과 막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T-50의 첫 수출 길을 열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아랍에미리트(UAE), 싱가포르와의 협상이 잇따라 무산된 후 인도네시아에 공을 들여왔다. T-50은 1대당 2500만달러이며 2030년까지 T-50 1000대 수출 계획을 세웠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정원이 T-50을 꼭 수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무리수를 둔 것 같다" 고 했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다른 나라 대표단이 방문했을 때 고도의 첩보전을 벌이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니냐"면서 "국정원이 이번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노력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후, 한나라당 지도부에서는 원세훈 국정원장 경질 등 국정원 쇄신론이 급부상했다.
청와대는 국가정보원 직원의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잠입 사건과 관련, 김남수 국정원 3차장에 대해 지휘 책임을 묻기로 했으며, 사건을 일으킨 국정원 직원들은 3차장 산하 산업보안단 소속 실행팀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러나 야당과 여당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원세훈 국정원장 교체론에 대해서는 "말단 직원의 실수까지 원장이 책임지라는 것은 무리한 주장" 이라며 "이 대통령의 원 원장 재신임 방침이 확고한 것으로 안다" 고 말했다.
▶2007년미즈메디병원 배아줄기세포 연구 중단 선언
황우석 박사의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던 미즈메디병원이 배아(胚芽)줄기세포 연구 중단을 선언했다. 현재 연구 진행 상황으로 봐서는‘맞춤형 줄기세포’를 실용화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에서다. 줄기세포는 장차 인간의 모든 조직과 장기로 자라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세포를 말하는데, 수정란 다음 단계인 배아에서 얻은 줄기세포가 배아줄기세포다.
미즈메디병원 노성일 이사장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현재 기술로는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로 환자를 치료할 날은 요원하다”며 “환상을 키우는 연구가 아니라 기본에 충실한 연구를 하겠다”고 말했다.
▶2007년이라크서 독가스 테러
▶2001년한덕수 재일 조총련 의장 사망
▶1999년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씨 별세
▶1998년서방선진7개국(G7)
한국에 10억달러 지원합의 발표
▶1995년영국-아일랜드,
북아일랜드 평화안 공식승인
▶1994년제44회 베를린영화제서
`화엄경` 특별상 수상
▶1992년김기훈, 사상 처음으로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
1992년 2월 21일 새벽 프랑스 알베르빌 아이스홀. ‘왕눈이’ 김기훈이 물기 가득한 눈으로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든 채 얼음판을 돌며 환호했다.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처음 나선 뒤 한국이 44년만에 사상 첫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순간이었다. 김기훈은 이틀 뒤에 열린 남자 5,000m계주에서도 또 한번의 감동을 연출했다.
한 손에 태극기를 든 채 얼음판을 돌며
환호하고 있는 김기훈 선수
이준호, 모지수, 송재근에 이어 마지막 주자로 나선 김기훈은 절묘한 코너 워크로 마지막 10m를 남기고 캐나다 선수를 0.04초, 40cm차로 제치며 감동의 금메달을 따냈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첫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 2개를 따며(은1 동1) 10위를 했다.
한국 쇼트트랙의 시작은 미약했다. 1986년 제1회 삿포로 동계아시안 게임에 대비해 1985년 대표팀을 급조했을 정도였다.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것도 캐나다의 입김 때문이었을 정도로 국제적 영향력도 미미했다. 하지만 한국은 알베르빌에 이어 2년 뒤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 김기훈이 또다시 금메달을 따내며 강국의 입지를 굳혔다. 이후 채지훈, 전이경, 김동성으로 황금 명맥을 잇고 있는 한국 쇼트트랙 은 `동계스포츠 10대 강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92년한국-아르메니아 국교 수립
1984년소련의 소설가 숄로호프 사망 -
▶1982년이념서적 35년만에 시판허용
▶1979년영국, 이집트, 이스라엘 3국대표
78년 11월이래 중단된 평화조약협상 재개
▶1978년동일방직 인천 공장의 `똥물 투척` 사건
▶1973년이스라엘 전투기,
리비아 여객기 격추 1백여명 사망
▶ 1972년 2월21일,
닉슨 중국 방문
미국 닉슨 대통령이 1972년 오늘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 본토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처음 트인 정치적 물꼬였다. 미국은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 이후 공산당 정권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외교를 펴왔었다.
손은 미국이 먼저 내밀었다. 베트남 전쟁, 인플레이션 등의 어려움에 놓여 있던 닉슨은 두 공산 강국인 중소와의 관계개선에 눈을 돌리게 된다. 두 나라는 이념분쟁중이었다. 중국의 손을 잡으면 소련이 자발적으로 데탕트의 손을 내밀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으로서도 모스크바에 대치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필요했다. 만리장성은 2.5g의 탁구공이 먼저 넘었다. 1971년 4월 미국 탁구선수단이 중국을 방문했다. '핑퐁 외교'였다. 이어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다.
양국은 정상회담에서 주권존중, 내정불간섭, 평등호혜 등을 골자로 하는 ‘상하이(上海)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우호의 상징으로 한쌍의 팬더와 사향소를 교환했다.
국제정치 주역인 미국이 중국과 손잡았다는 사실은 외교기준의 변화를 의미했다. 중국의 세계화에 결정적인 계기였음은 물론이다. 놀란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서둘러 1972년 9월 국교를 수립한다. 이에 앞서 중국은 1971년 10월 UN총회에서 회원국이 되면서 국제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양국은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7년 가량 지난 뒤인 1979년 1월1일 정식 수교했다. 이에 앞서 미국은 1978년 12월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 2001년 3월에는 중국에서 키신저와 중국 부총리가 핑퐁외교30주년을 기념하는 탁구시합을 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2년남북적십자회담 첫 실무회담 개최
▶1968년북악스카이웨이-인왕스카이웨이 착공
▶1965년말콤X 피살
전투적인 흑인 지도자 말콤X가 1965년 2월 21일 뉴욕 할렘에서 ‘아프로·아메리카통일기구(OAAU)’ 집회도중 피살됐다. 일요일 정례집회에 모인 약 5백명의 흑인청중을 향해 “여러분에게 평화를!”하는 순간 돌연 3명의 흑인남자가 연단으로 돌진, 약3미터 거리에서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말콤X는 얼굴과 가슴에 20여발을 총탄을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 39세의 나이였다. 그가 피살된 자리는 바로 1년전에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이라고 연설했던 곳이라 마치 죽음을 예견한 듯 했다.
비폭력주의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폭력에 의한 흑인의 권리 획득을 주장했던
미국 흑인운동 지도자 말콤X
그는 마틴 루터 킹과 함께 1960년대 미국의 흑인운동을 대변했으나 전술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달랐다.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거쳐 목사가 된 킹과는 달리 말콤X는 어둠속에서 자랐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세살때 아버지가 백인들에게 무참히 죽자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그는 마약 절도 등으로 밑바닥을 헤맸다. 하지만 절되죄로 감옥생활을 하면서 말콤은 새롭게 변화했다. 이슬람교를 처음 접하고 술과 담배, 마약은 끊게 됐으며 지독한 난시가 될 정도로 독서하면서 흑인들의 현실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됐다.
1952년 가석방 후 그는 원래의 이름인 말콤 리틀의 성인 ‘리틀’을 ‘X’라고 개명했다. 백인이 붙여주기 마련인 흑인의 성도, 흑인여성들이 백인남자들에게 당해 자신의 핏줄에도 흐르는 백인의 피도 거부하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수년간 목사로 또 앨리하 무하마드가 이끌고 있는 흑인 회교단체의 주요 대변자 가운데 하나로 활동했으나, 무하마드와의 불화로 말콤은 그 단체와 결별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단체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인 OAAU를 조직했다. 두 단체는 결국 서로 반목했고 총격사건에까지 이르렀다.
말콤X
그만큼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한쪽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흑인 운동의 아버지’라며 칭송했다.
1959년 미국 흑인운동가 말콤X가 TV에 처음 출연해 “백인은 악마다”고 외치자 백인은 물론, 온건한 흑인들까지 아연실색했다. 말콤은 당시 과격하고 타협 없는 운동으로 악명 높았다.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에 대해서도 ‘흑인의 탈을 쓴 백인’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굴곡 많은 그의 삶은 운동 노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6세 때 목사였던 아버지가 백인들에게 살해되고 어머니마저 미쳐버리자 갱단의 일원이 됐고 마약장사, 강도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이슬람교를 접하고부터 술과 담배, 마약을 끊고 남은 인생을 흑인들의 삶을 위해 바쳤다. 이때부터 ‘리틀’이라는 성(姓)을 버리고 ‘X’로 썼다. 그들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이 즉흥적으로 붙인 것을 쓰기 싫지만 원래 성은 잘 모른다는 의미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호소력 있는 연설로 지지세력을 넓혀갔으나 1965년 오늘 뉴욕에서 연설을 하다 흑인 3명이 쏜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40세 때였다. 아직도 미연방수사국(FBI)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1964년필리핀 여객기 민다나오섬에 추락 31명 사망
▶1963년중앙정보부장에 김재춘 발령
▶1961년혁신계, 유엔보장하의
중립화통일추진운동으로 500만 서명운동 전개
▶1958년이집트와 시리아가 합병해
아랍연합공화국 수립, 초대 대통령에 나세르 취임
▶1957년농림부 청사 전소
▶1954년반공포로 76명 인도 도착
1954년 2월 21일 인도 남단 마두라스항에 오스트리아 국적의 여객선 아스투리아스호가 도착했다. 인천항을 출발한지 12일 만이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 대부분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인도군이었으나 일부는 더위에 지치고 낯선 타향땅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찬 표정의 한국인 반공포로 76명이었다. 느닷없는 전쟁으로 망가져버린 인생을 되찾기 위해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남쪽에서 받을 빨갱이 신분에 대한 두려움과 북한체제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반공포로들의 모습
인도는 경유지였고 최종 목적지는 멕시코였다. 처음에는 반공포로들을 받아들이겠다는 멕시코 정부의 말만 믿고 고국을 떠나 인도에 도착했으나 2년이 다 되도록 정작 멕시코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반공포로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왔다. 이들은 2-3년간의 대기 기간을 거쳐 브라질로 50명(1956년 2월), 아르헨티나로 11명(1957년 5월)이 떠나가고 인도에는 15명만이 남았다. 이들 대부분은 빈털터리로 출발했지만 갖은 고생끝에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1952년북대서양조약 국방위원회
NATO군 창설계획 승인
▶1946년군정청, 일본은행권 동결
▶1944년한글학자 한징 사망
▶1941년총독부, 조선청년단 조직
▶1938년헤일 망원경(1948)을 개발한
미국의 천문학자 헤일 사망
▶1936년단재 신채호 옥사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36년 2월 21일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충청남도 대덕 출생으로, 18세 때 전 학부대신 신기선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그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했고, 1901년 향리 부근의 문동학원 강사로 신규식 등과 계몽운동 및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황성신문의 기자·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나 황성신문이 무기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 한편 양기탁· 이동녕· 안창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했고 논설을 통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을 거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광복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베이징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고,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의원이 됐다. 1928년 무정부주의 활동과 관련, 체포되어 1930년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중 병사했다.
▶1930년런던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해군 군축회의 개최
▶1925년조선일보, 색채인쇄윤전기 설치
▶1925년조선일보 최초의
러시아특파원으로 김준연 파견
▶1918년서당에 관한 규칙 제정
▶1916년독일-프랑스 간의 베르됭 전투 발발
프랑스 뫼즈강변에 위치한 베르됭을 독일이 기습공격한 것은 1916년 2월 21일 새벽이었다. 기습공격에 대한 소문은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공격해 오리라고는 프랑스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베르됭 전투는 패자만 있을 뿐 승자가 없는 전쟁이었고, 독일을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한 1차대전의 분수령이었다.
집중포격을 퍼붓고 있는 독일군
1914년 9월 마른전투 이후 스위스에서 북해에 이르기까지 국경선을 따라 형성된 서부전선은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요새화되어 어느쪽도 돌파가 어려운 상태였다. 이 와중에 독일군이 베르됭을 전격 침공한 것이다. 독일군은 먼저 막대한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방어벽을 분쇄하고, 이어서 보병으로 요새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독일군은 8마일 전선에 1천4백문의 포를 집결했다. 독일군은 이날 새벽부터 12시간 이상에 걸쳐 그 좁은 지역에 1천4백문의 포가 매 시간당 10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폭격이 계속되면서 24일에는 프랑스군 제2방어선이 무너졌고 25일에는 베르됭 전방에서 최후의 보루였던 두와몽 보루가 함락되었다.
4일간의 전투에서 프랑스군 병력손실이 무려 10만명에 달하자,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을 급파, 지휘책임을 맡겼다. 페탱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26일부터 29일까지 베르됭 사수에 전력을 다해, 독일군의 공격도 둔화되고 있었다. 독일군은 3월 28일부터 다시 공격했지만 프랑스군의 방어도 완강했다. 마침내 5월 독일군이 뫼즈 강 서안을 장악함으로 프랑스군은 위기에 빠져있었으나 영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 솜강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솜강쪽으로 병력을 이동하며 베르됭에서는 수세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8월, 베르됭에서 실패한 팔켄하인을 해임하고 힌덴부르크를 후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힌덴부르크가 베르됭 공격을 중지하자 프랑스는 실지를 모두 탈환함으로써 10개월에 걸친 베르됭 대전투의 막을 내렸다. 2월부터 8월까지 양측 손실은 프랑스군 44만 2천명, 독일군 33만 4천명이었다.
▶1911년미일통상항해조약 조인
▶1836년프랑스 작곡가 들리브 출생
▶1823년아일랜드의 시인 찰스 울프 사망
▶1791년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카를 체르니 출생
▶1677년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 사망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1677년 2월 21일 사망했다. 45세였다. 스피노자는 포르투갈계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1632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
유태교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감염된 탓에, 그리고 회개를 거부한 탓에 스물네살에 유태교회에서 파문됐다. 심지어는 암살의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당시의 암스테르담은 데카르트주의자들을 경윈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1973년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정교수로 초청했지만, 응하지 않고 말년까지 결혼도 않고 연구와 집필에만 몰두했다. 지적 자유라는 개념이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취급되던 도그마의 시대에 그는 독립적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독립의 대가는 고립이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