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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댑싸리 공원, #고랑포구 역사관, #5사단 상승부대, #제1 땅굴, #철책 견학, #25사단 비룡부대,
#김신조 1.21침투로, #종로구 세검정 고개 전투, #최전방 안보 관광, #연천 8경, #김신조 침투로,
#우이령 고개, #25사단 안보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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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여행] 휴전선을 따라서 연천 25사 안보관광[DMZ], 1.21 김신조 침투로, 여행.........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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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여행] 휴전선을 따라서 연천 25사 안보관광[DMZ], 1.21 김신조 침투로, 여행.........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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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최전방 안보 관광[DMZ]을 다녀왔다. 상승 부대를 거쳐 이른바 25사 김신조 일당 1.21 침투로를 아우르는 최전
방 철책 관광이다. 원래는 연천 5경에 올라와 있는 태풍전망대를 예약하려 했으나 내부 수리 중인 관계로다가 방문이 안
된다는 연락을 받고 나머지만 관광하기로 하고 형님 내외분과 서울에서 출발하였다. 알겠지만 전방 철책 관광은 최소 7일
전에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방문할 사람에 대한 인적 사항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온라인이나 팩스로 제출하고 난 다음
허락이 떨어지면 방문하는 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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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에 따라 유랑자는 25사단 상승전망대를 먼저 방문 하고 두 번째가 김신조 일당 1.21 침투로와 비룡 전망대를 방문 하
려는 것이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07:00] 출발!. 1시간 10분여 정도면 관광지 도착할 거리인지라 10:00 입장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어 먼저 중간에 있는 공원을 들러서 가기로 한 것이다. 지난번 여행때 댑싸리 공원은 초가을이라 댑싸리가 완전 물
들기 전인지라 이번 기회에 물들어가는 댑싸리를 보기 위해 서둘러 갔던 곳, 댑싸리 공원!. 역시 예상대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을이 꽃처럼 피고, 댑싸리의 붉은 바다는 가을의 파도를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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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댑싸리 정원 붉은 물결은 파도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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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절정을 향해 흐르는 10월의 끝자락, 아침 이슬은 햇살을 머금고 꽃잎마다 스며들어 붉은 색감으로 빚어냈고, 바람
은 그 파도를 밀어 올려 눈앞의 풍경을 쉼 없이 출렁이게 한다. 유랑자는 순간을 놓칠세라 카메라 셔터로 그 순간을 붙들었
고, 찰칵, 하는 소리조차 이 풍경의 리듬에 어울려 또 하나의 선율이 되었다. 발길을 조금 더 안쪽으로 옮기자, 현실과 꿈 사
이를 오가는 듯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올가을에 피어난 붉음과 분홍이 어우러진 한 폭의 수채화가 완성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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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의 하루를 더 환하게 밝혀주는 풍경, 오늘의 이 풍경은 파도처럼 내 마음에 밀려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장면이
되었다. 이로써 유랑자는 지난 초가을 백일홍과 아스터에 가려져 있었던[참고] https://cafe.daum.net/b2345/9toB/2363
아쉬움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아무튼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괜스레 차에 떠밀려 도로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보다
는 이렇게 일찍 오니까 이런 호사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유랑자는 일찍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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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댑싸리는 물들고 유랑자는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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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시간 절약 차원에서 행하는 유랑자의 평소 여행 법칙이요 습관이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서양 속담에 일
찍 일어난 새가 모이를 많이 먹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본시 새들은 집안에 냉장고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창고가 있
는 것도 아니니 눈만 뜨면 배를 채우기 위해 또는 살기 위해 우리 인간들이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전에 깨어나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제 유랑자는 오늘의 목적지 안보 관광지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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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保[안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다른 나라의 침략이나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수단과 외교력도 필요하다.” 이것이 안보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남. 북한 대
치 상황이다. 같은 동족끼리 지금도 철조망을 경계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우리 백의민족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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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사 상승 전망대 가는길에 꿀사과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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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꿀백이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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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답답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엔에 가입된 국가 중 유일한 分斷國家[분단국가]이
다. 5천 년의 역사, 민족의 혼이 살아있는 한반도, 그럼에도 불구히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안고 살아가는 오
늘의 대한민국의 민초들이여 탄압과 멸시 속에 살아온 일제 36년 그 오랜 시간, 고난의 멍에 아래 강대국들의 싸늘한 시
선 속에서도 묵묵히 버티고 견디어 내었던 잡초같은 근성있는 우리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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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피박 받으면서도 겸허히 땀 흘려 쌓아온 우리만의 기술과 지혜!. 그리고 '있어도 없는 척' 내실을 다지며 가난 속에
도 빛을 잃지 않은 백의민족의 魂[혼]과 약한 자를 보호하고 德[덕]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 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대국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한계, 그리고 오늘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된 배경의 底邊
[저변]엔 역시 나약한 민족이란 낙인 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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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사 경례 구호는 '단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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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과 소련이 공동의 적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고, 일본 제국은 미국에 의해 두 개의 원자폭
탄을 폭격당하고,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전
에 한반도의 분단은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1910년, 한반도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고, 이후 35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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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 나라 팔아먹은 놈들! 친일행각을 벌린 乙巳五賊[을사오적]의 농간 때문이었지만….,참고로 “을사오적”이란 19
05년 제2차 한일 협약을 우리는 을사조약, 또는 乙巳勒約[을사늑약]이라한다, 이 乙巳條約[을사조약] 체결에 참여한 다섯
놈의 매국노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외부대신 반남박씨 박제순, 내부대신 전주이씨 이지용, 군부대신 전주이씨 이근택,
학부대신 우봉이씨 이완용, 농상공부 대신 안동권씨 권중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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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 안보 관광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딱 여기 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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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포춘리에서 제1땅굴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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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의
분단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해방은 진정한 독립을 의미하지 않았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한반도의
미래는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러시아]에 의해 결정되었고, 이는 결국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미국과 러시아[소련]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각
축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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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각각 남북으로 나누어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때 한반도를 나누는 경계선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38도선이다. 38도선 설정은 한반도 분단의 첫 번째 단계로, 미국은 남
쪽을, 소련은 북쪽을 각각 점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 분계선으로 합의한 삼팔선을 소련은 일방적으로 1945년 8
월26일 공식적으로 봉쇄하면서 남북 분단은 시작되었다. 이후, 이 경계선은 영구적인 분단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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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대에서 각각의 도시까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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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사단을 의미하는 숫자 25를 각지게 하여 표현했으며, 베이스인 오각형은 화랑의 정신인 인, 의, 예, 지, 신을 의미한
다. 그리고 바탕의 녹색은 평화와 이상, 백색은 단일민족과 백의민족의 순결, 마지막으로 외곽선은 철통 같은 방어진을 의
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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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남한과 북한은 정치적 이념을 중심으로 점차 갈라지기 시작했다. 남한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본주의를, 북한
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를 택하면서 두 나라의 정치적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각각의 지역에
서는 독립적인 정부 수립 움직임이 나타났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남한은 공식적으
로 독립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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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9월 9일,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는 완전히 남
과 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남과 북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독립 국가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남북 분단은 사실
상 영구적인 상황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남북 분단은 더욱 심화하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 전쟁은 남북 간의 군사적 대립을 본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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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고랑포구의 발전상, 당시 50.000인구가 넘게 거주했다. 화신 백화점 2호점이 생길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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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클리스 하사(말) *여행기 참조 https://cafe.daum.net/b2345/Lc8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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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외세의 지원을 받아 전투를 벌였으며,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1953
년, 한국 전쟁은 정전 협정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에 따라 남북 간의 군사적 경계선인 휴전선이 또다시 38도선을 중심으
로 형성되었다. 이 휴전선은 현재까지도 남북을 나누는 중요한 경계로 남아 있다. 한국 전쟁 이후 남북 간의 관계는 오랫동
안 냉전 상태를 유지했다. 남북 모두 서로를 적대시하며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었고, 한반도는 국제사회에서 동서 냉전의 최
전선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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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한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며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발전시켰고,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국가로 성장해 나갔다. 이에 따라 남북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그동안 몇 번
의 정상회담과 이산가족들의 만남과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의 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북 분단은 여전히 한
반도의 큰 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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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고랑포 역사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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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남북 간의 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하며, 분단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계속되어
야만 한다. 알겠지만 분단은 단순한 국경의 문제가 아니라, 백성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경제 전반에 걸친 많은 문제를 초래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남. 북 분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호 신뢰와 대화, 그리고 국제사회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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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국제적 시각이야 어찌 되었든 서로 다른 정부가 수립된 이래 긴 대치가 이어지면서 양측의 천문학적인 군비 지출이
이어졌고, 특히 체제 위기를 느끼는 북한은 WMD나 잠수함 같은 비대칭 전력 개발에 목숨을 걸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대놓
고 총력전이 벌어질 만큼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았으나, 정전 이후 전시나 준전시 수준의 군사적 충돌은 유엔 감시하에 통
제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남북 분단의 아픔이 오늘날 安保[안보]라는 이름으로 거듭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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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군대를 안 간 사람이나 일반인들은 전방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오늘 유랑자가 형님 내외분과 와이
프와 함께 철책 견학을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그 예가 오늘 유랑자가 방문하게 된 5사 & 25사 안보 관광의 목적인
철책과 김신조 사건의 시작점이다. 1968년 1월 21일, 한국의 서울과 가까운 지역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이 대한민국
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바로 김신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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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북한의 특수부대가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직접 목표로 한 대규모 침투 작전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친 대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쿠데타의 주인공 박정희가 집권 중인 시기로, 군사 정
권하에서 정치적 불안정성과 사회적 긴장이 존재했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틈타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적 침투를
감행했으며, 이들은 주로 서울 청와대를 목표로 한 특수부대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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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멱 따러 왔수다.”로 시작된 1월17일 밤 20시, 무장 공비들은 美 2사단 지역의 정면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기 시
작, 22시 정각에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에 도착했다. 이들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은밀히 침투를
시작했다. 북한 124군 특수부대 무장 공비들은 軍 GP들이 요소요소에 있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부터 임진강을 건너기까지
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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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 침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나 냄새까지 죽이며 지형의 그늘진 부분을 이용해 이동하는 特殊戰[특수전]
기술이다. 전방에서 수색이나 매복으로 근무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야간 침투 작전의 기본 기술이다. MDL[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던 유랑자 또한 이런 침투 작전 훈련을 무수히 받았었다.초소나 경비병 근처에서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한 시간에
수 m 정도만을 이동할 정도로 인내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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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사단 비룡부대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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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신조를 포함한 무장 공비들도 이미 훈련 과정에서 이런 능력을 배양했고, 야간 침투 중 인기척을 느꼈을 경우 부동
자세로 한 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상대방이 이쪽을 착시 현상으로 인해 사람으로 인식하
지 못하게 하는 훈련이다. 이들은 美[미] 2사단 구역을 통과하여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약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고 하며 먼동이 틀 때엔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파주군[시] 와 법원리 사이의 작은 산기슭
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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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그때까지 경비병이나 지뢰밭을 만난 적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만큼 우리 전방 경계 근무가 허술했었다는 이
야기도 된다.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 아니라 가장 추운 1월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서해로 연결된 임진강의 중, 하류가 시작되는 임진각 부근은 바닷물이 만조 때마다 밀
려 올라와 얼음이 비늘처럼 솟아오르고, 얼지 않은 바닷물이 곳곳에 고여 있어 도보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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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 공비 30여 명이 침투한 1.21 침투로가 제25보병사단 관할지역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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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침투로 모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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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고랑포 지역은 상류에 속해 겨울엔 수위도 낮을 뿐만 아니라 바닷물의 영향이 없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 있어 이
들이 적합한 침투로로 선정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또 추위 때문에 경계 근무도 허술했다는 점과 휴전선에서 고랑포
에 이르는 루트가 美軍[미군]이 관할 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었다. 미군 지역에서는 무장 침투 간첩을 한국군으로 誤認
[오인]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군 지역 철책이 구형 철조망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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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무장한 김신조 일당들이 나무꾼들에 의해 처음 발견돼 신고된 건 남파한 첫날인 1월 18일 파주 법원읍 삼봉산이었다.
하지만 국군과 경찰은 이들의 동선을 추적하지 못했다. 보통 우리의 군대는 완전 군장을 한 채 야간 산악행군을 할 경우 행
군 속도가 시간당 4km를 넘을 수 없다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들 124군 부대는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로 시간당 평균
10km씩 주파하면서 법원리 → 미타산 → 앵무봉 → 노고산 → 진관사 →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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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폭포에서 유래되어 비룡부대라는 애칭을 가지게 되었다. 경례 구호는 '단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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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멱 따러 왔수다.” 1968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었던 간첩 김신조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호경암은 1968년 벌
어진 1·21 사태 격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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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경찰은 파주시 법원읍에서 첫 간첩 신고를 접수하고도 이들을 추적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이 발각돼 총격전이
벌어진 곳은 청와대를 300여m를 남겨둔 지점, 종로구 세검정 고개였다. 최규식[당시 희생한 종로 경찰서장] 동상에서 남
쪽으로 약 900미터 떨어져 담장을 사이에 둔, 현 청운실버센터 일대였다. 이곳은 청와대와 마주하는 곳이다. 당시 총격전
으로 김신조가 생포되고, 30명이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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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한 명은 북으로 도주[추정]했다. 아군의 피해는 군경 23명 전사, 민간인 7명 사망, 그리고 군경 및 민간인 52명 부
상을 당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이 사건으로부터 딱 이틀 뒤에 일어난 사건과 연계해서 평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1.21사건, 이틀 뒤인 1968년 1월 23일, 미군 첩보한 푸에블로호가 동해 원산항 앞바다에서 나포되
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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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후 김신조는 김일성이 1967년 8월 민족 보위성(현 인민무력부) 정찰국 직속 특수부대인 124군을 창설했다고 밝
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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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무기 등이 없을 때다. 나는(김신조) 124군 1기생"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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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이 아닌 상황에서 군함이 적군에게 나포되기는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물론 민간 선박으로 위장했지만, 이 배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첩보함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영해를 침범함으로써 교전이 벌
어졌고, 결국 미군 한 명이 숨지고 82명이 생포됐다. 이틀 전 동맹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린 습격 사건에 대해 미온적이던 미
군이었지만, 막상 자국과 직접 관련된 사건에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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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이후 대한민국은 완전히 배제된 채 북미 비밀회담으로 전개돼 갔으니,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시쳇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게다. 결국 11개월간의 협상 끝에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 인정과 재발 방지는 물론이며, 푸에블
로호를 압수당하고 단지 포로와 유해만을 돌려받는 것으로 협상은 종결됐다. 덕분에 북은 그때 나포한 푸에블로호를 평양
대동강으로 옮겨와 반미 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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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한 김신조 외 30명이 자하문 일대에서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가 습격에 실패, 구진봉과
성북동 뒷산 방향으로 분산해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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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는(김신조) ‘김일성이 6·25전쟁 실패를 교훈 삼아 장기전 대신 단기(속도)전을 수행하기 위해 1만 명 규모의 특
수부대를 창설해 남한 전국 8도를 육·해·공으로 침투해 단기간에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라며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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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124군 부대에서 훈련받은 특수부대 요원 120명이 남파됐는데,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다. 푸에
블로호가 확인하려던 내 말의 진의가 입증된 것"이라며 "124군 부대가 창설됐다던 내 말을 믿지 않던 미국 정부가 이 사건
이 터지자, 한국에 대한 태도를 확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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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당시는 베트남전쟁 시기였고 이때 북은 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자
국의 최첨단 첩보함이 북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통신체계 등 1급 군사비밀이 적국에 넘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전
쟁에서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본 것과 같다. 한편, 푸에블로호가 전시됐던 대동강 수면 아래에는 이미 또 다른 미국의
선박이 수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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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자, 평양 사람들이 그배
를 불 지르고 수장시켰다. 이처럼 대동강 수면 위아래로 모두 미군의 배가 존재하고 있으니, 미국으로서는 북한에 최고의
반미교양물을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1968년 거의 동시에 발생한 1.21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을
두고 다르게 반응했던 미국의 행동을 눈여겨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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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은 한반도 방위를 적극 지원하는 의미에서 1억 달러의 원조금을 보내, 한국군의 전방 목책을 모두 철거하고
155마일을 철책선으로 깔고 탱크 저지선을 만들고 향토예비군제도·유격훈련도 그때부터 시행됐다. 군 복무도 6개월 연장
됐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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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루트’를 거쳐 남한에 정착한 뒤, 신앙인으로서 제3의 삶을 통해 ‘천국 루트’를 안내하는 소임을 맡게 됐다고 소개
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남한에 귀순한 뒤, 북한에 남겨두고 온 부모님이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에서 사람들이 지켜보
는 가운데 총살당한 소식을 듣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좌절을 겪은 사실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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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휴전 상태라는 점, 그리고 남쪽에서 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현재 미군만으로 이
뤄진 유엔군사령부라는 점이다. 헌법상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외 부속 도서'로 돼 있기 때문에 북이 붕괴하면 그
통치권이 당연히 우리에게 넘어온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말 그대로 그건 니들 생각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지난 해방 전.후
사를 되돌아보자. 일제가 전쟁에서 지고 해방이 되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당연히 자주독립 국가가 될 것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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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안 가 한반도엔 38선이 그어졌다. 남쪽을 지휘하던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 제1호는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
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였다.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해 군정을 실시했다. 각설하고 당시 무장 공비들은 청와대 앞 교전에서 패한 뒤 삼삼오오 모여 퇴각했
는데 김신조는 인왕산을 넘어 도망치다 홍제동에서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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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33대대 2중대는 호경암 일대를 수색하던 중 적을 발견하였고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교전 중 무장 공비 3명이
사살되었고 김신조는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다. 아군의 피해는 군경 23명 전사, 민간인 7명 사망, 그리고 군경 및 민간인
52명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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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총탄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는 호경암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를 짐작게 한다. 수십 발의
탄흔에서는 잔악성마저 느껴진다. 이 사건이 있고 난 뒤 이곳은 ‘서울속 DMZ’로 불리게 되었고 일반인에게 그 모습을 오랫
동안 통제 숨겨왔다. 그리고 어느 날 우이령 고갯길 개방을 딱 하루만 한다기에 2006년 4월 16일 개방된 날 유랑자도 첫날
우이령 고갯길을 친구와 함께 넘었던 기억을 더듬어 당시 여행기를 찾아보았더니 사진만 3장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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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당시 한국으로선 1968년 김신조 1·21 사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우리나라의 국방과 안보
는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왔다.일단 그 당시에 제대가 며칠 안 남았던 말년병장들이 제대가 취소되었다. 그리고 6개월이나
더 연장되어 군 생활이 36개월로 늘어났다. 이뿐만 아니다. 이 사건 이후로 우리나라가 많은 제도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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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복무 6개월[해/공군 3개월] 연장되었고, 2.없었던 유격훈련이 생겨났다. 3.예비군이 창설되었으며 4.동시에 북파공작
원 양성을 위해 설악개발단, UDU, 684[실미도 부대] 등의 보복부대 창설, 5.고등학교부터 교련 수업이 생겼다.
6.반공 웅변대회가 생겼고, 7.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 8.북악 스카이웨이[통행금지. 청와대 경비 강화용
건설]. 9.주민등록증이 생겼다. 10.5분 대기조와 천리행군, 11.휴전선 철책, 12.육군3사관학교, 육군과 해군 2사관학교 창설,
13.공군기술고등학교 창설 과 전투경찰대 창설, 14.대통령 경호 강화 및 보안 강화등등….15.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매년
1월 21일이면 수도방위사령부는 훈련명 '리멤버1.21'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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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김신조의 이력을 보면 조선 인민군 지상군을 거처, 민족 보위성 총참모부 정찰국 124 부대 복무를 했으며, 체포 후
성락상봉교회 목사를 거처, 구로구 신도림동 서울 성락교외 목사를 지냈다가, 2025년 4월 9일 김신조는 82세를 끝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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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댑싸리 공원 찾아가기*
-주 소: 경기 연천군 중면 삼곶리 423
-전 화: 031-839-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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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부대 찾아가기*
-주 소: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백령리 642-4(84-1)
-전 화: 031-839-2063,(연천군 안보 관광과)
-이용시간: 출입 시간: 10:00 ~ 16:00 (12시~13시 제외) *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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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부태 찾아가기(김신조 1.21 침투로)*
-주 소: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22
-전 화: 031-839-2063,(연천군 안보 관광과)
-이용시간: 출입 시간: 10:00 ~ 16:00 (12시~13시 제외) *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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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클릭: https://cafe.daum.net/b2345/9toB/2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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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관광 정보는 이곳에서 :
https://www.yeoncheon.go.kr/tour/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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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연천군청 관광과 (031)-839-2061
◼ 문의 대표전화 : (031) 839 - 2114(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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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9경
1경: 재인폭포,/ 2경: 호로고루,/ 3경; 임진강 주상절리,/ 4경: 연천 전곡리유적,/
5경: 태풍전망대,/ 6경: 전곡 선사박물관./ 7경: 연천 그리팅맨,/ 8경: 숭의전,/
9경: 차탄천 주상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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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군 여행 알차게 보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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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 연천에서 실속 힐링하는 체험 A코스(동선 최소)
►*첫째 날(09시 시작)
*전곡선사박물관/선사유적지→초성김치마을에서 김치체험→ 점심식사→ 임진강 주상절리→ 당포성→ 숭의전지→백학
자유 리조트(숙소:저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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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아침식사→두지리 황포돛배(농촌체험)→ 호르고루성→고랑포 역사공원→ 경순왕릉→ 점심식사→ 태풍전망대방문
(25/09말까지 보수중)→ 연강 갤러리→ 허브빌리지→ 귀가(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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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 연천에서 실속 힐링하는 체험 코스(동선 최소)
►*세째 날
*댑싸리공원→ 미라클 타운(커피)→ 그리팅맨→ 연천 급수탑(점심식사)→ 연천승마공원에서 승마체험→ 애심목장 치즈
낙농체험(2시간30분소요)→ (숙소)에서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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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째 날
*아침식사→ 5사단 열쇠전망대 방문(화:휴무)→ 신탄리역(구 경원선 철도중단점)방문→ 차탄천 주상절리→ 점심식사→
조선왕가(한옥 호텔/글램핑/카바나)→ 종자와 시인 박물관→ 한탄강 물문화관→ 제인폭포→ 귀가(연천 여행 끝)→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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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안내
‣방문지 사전 예약 안내
*열쇠전망대: 사전예약 필요없씀. 당일입장 가능함(단 매주 화요일 휴무)
*태풍전망대: 25인 이상 단체 방문 시, 출입 7일전 사전 출입 신청을 하셔야 합니다.
*출입 신청서, 서약서, 출입자 명단 신청(연천군청 관광과 [팩스] 031-839-2480)
*출입 시간: 09:00~16:00 [열쇠전망대, 태풍전망대]
*열쇠전망대, 태풍전망대 출입시 모두 신분증을 지참하셔야 합니다. (출입자 명단 지참을 요함, 신분증이 없으신 분은 출
입 불가)
*해설사 상주 상시 해설(경순왕릉, 숭의전,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전곡리 유적)
*허브빌리지는 사전에 별도의 예약이 되어야 해설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체험시설은 별도의 입장료 또는 체험비가 소요됩니다.
*숙소 또는 체험시설 이용 방법은 홈페이지의 체험 안내를 확인 및 사전 예약 후 이용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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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관광지 관리사무소(예약 안내): 031-830-0030
*조선 왕가: 031-834-8383(한옥호텔/글램핑/카바나)
*애심 목장: 031-834-3601(010-3724-9241, 010-8711-3601):치즈 낙농체험(2시간30분소요)
*연천 승마공원: 010-3187-0488(010-8775-1936)
*초성 김치마을: 031-835-0381(농촌체험)김치체험
*허브 빌리지: 031-833-5100.(010-4784-5105)
*나룻배 마을: 031-833-5005(농촌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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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안내
*입장료 안내 - 전곡선사박물관(일반/청소년/단체 및 비고),
*(요금):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전곡리유적=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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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빌리지 입장료(호텔,펜션)
*허브빌리지 예약 : 031-833-5100(010-4784-5105)
*입장료: 일반(중학생 이상):5.000원
*36개월 이상~초등학생:3.000원
*단 체 20~99명: 4.000원(100명 이상 3.000원)
*문 의:~연천군청 관광과 031)839-2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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