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개 외 1편
조창환
앞 못 보는 개가 문간에 앉아 있다
눈빛이 진녹색이다
녹내장이란다
당뇨도 있고, 고지혈증도 있어
앞 못 보는 개는 거기서 움직이지 않는다
병은 이상한 권력이 되고
체념은 눈먼 개를 길들인다
권력과 체념과 눈먼 개가
적막한 불안 속에 웅크리고 있다
나비와 노파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에서 화순군 백아면 맹리 가는 길
맹리 마을회관 못 미처 맹리교 부근
인적 없는 삼거리에서 보행기 밀고 걷는 노파를 만난다
휘어진 낫 같은 허리춤에 진달래 한 묶음 꽂혀있다
흰나비가 팔랑팔랑 뒤따라간다
낮달 희미하게 걸려있고 들판에 왜가리 꼼짝 않고 서 있다
느티나무 그늘 뒤편으로 희미한 아지랑이
시루떡 찌는 부엌처럼 하늘 저쪽으로 아른아른 번져간다
마을 뒷산으로 낮까지 날아가며, 푸득푸득
산목련 번져가는 밝은 그늘을 흔든다
멈추어 선 노파 등에 흰나비 앉았다
나비와 노파는 호박琥珀 속에 화석처럼 정지된 그림이다
볼우물 엷게 파진 얼굴 같은 봄날
하느님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다
그분도 호박 속에 화석처럼 정지된 그림이므로
― 조창환 시집, 『나비와 은하』 (도서출판 도훈 / 2022)
조창환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후 같은 과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빈집을 지키며』, 『라자로마을의 새벽』, 『그때도 그랬을 거다』, 『파랑 눈썹』, 『피보다 붉은 오후』, 『수도원 가는 길』, 『마네킹과 천사』, 『벚나무 아래, 키스자국』, 『허공으로의 도약』, 『저 눈빛, 헛것을 만난』 및 시선집 『신의 날』, 『황금빛 재』, 『황량한 황홀』 등을 펴냈다. 그 외 『한국현대시의 운율론적 연구』, 『한국시의 넓이와 깊이』, 『한국 현대시의 분석과 전망』 등의 학술논저와 『여행의 인문학』, 『2악장에 관한 명상』, 『시간의 두께』 등의 산문집을 발간하였다. 박인환상, 편운문학상, 한국시협상, 한국가톨릭문학상, 경기도문화상 등을 수상하였고, 현재 아주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