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五感)의 사람(사울) vs 육감(六感)의 사람(바울)
일반적으로 오감(五感: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이란 몸에 있는 다섯 개의 감각기관을 의미합니다.
인체 해부학적으로 볼 때에도 “촉각”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감각기관이 얼굴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고, 또한 12개의 “두뇌신경”과도 직접 또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오감이 중요한 것은 이 기관들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후 1-2개월이 된 아기가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고 또는 3-4개월이 지나면서 형제자매들의
이야기 소리에 방긋 미소짓는 귀여운 모습도 아기의 시각(1)과 청각(2)의 발달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증표입니다.
이렇게 갓 태어난 아기의 시각과 청각의 발달은 엄마의 젖을 빨면서 미각(3)과 후각(4)이,
그리고 또 엄마의 따듯한 손과 가슴에서, 가녀린 그러나 예민하고 민첩한 아기의 촉각(5)이 성장 발달됩니다.
사람의 5감기관은 마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안테나”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즉, 외부로부터의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여 “두뇌”로 전달하면 두뇌는 오늘날 우리 모두 생활
필수품쯤으로 여기고 애용하는 컴퓨터처럼 그 모든 정보들을 일종의 “파일”로 또는 “전기회로”로
혹은 “기억장치”들을 만들어 그 속에 정보(지식)들을 간직(기억)하게 됩니다.
이 “기억장치”속에는 현명한 엄마의 태아교육을 시작으로 부모의 가정교육, 그리고 정규교육,
즉 초기 인생의 모든 정보(지식)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컴퓨터와 좀 다른 점도 있습니다.
즉, 사람의 두뇌에 들어있는 정보(지식)는 정보지식 자체뿐만 아니라 정보를 통하여 “긍정적 힘”이나
혹은 “부정적 힘”으로도 쌓여 간다는 점입니다.
이 두 영역의 힘은 생명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두뇌와 마음속에서 축적과 방출을 되풀이하며
미래의 방향과 높고 낮은 우리의 인생길을 줄기차게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다 더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정보(지식)를 취득하고자 더 많은
공부와 연구를 통하여 학위를 받고 전문가가 되려는 것도 결국, 자기 안의 힘(energy)을 축적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지닌 5감기관 중 저는 “시각(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눈은 우리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마음속에 축적되어 있는 “에너지”
곧, 느낌이나 감정이 우리의 눈을 통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눈은 외부의 정보(지식)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일을 하고, 또 5감기관 중 유일(?)하게
내부(속)의 느낌과 형편을 밖으로 암시하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그중 한 예로 잘못을 저질은 아이가 엄마의 눈을 피하는 모습입니다.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호소하는 눈물은 그 아이의 아름다운 마음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여러 곳에서 장애인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요한복음 9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9:14,16)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요9:1)”을 만나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육신의 눈보다 영적인 눈이 더 중요함을 말씀해 주십니다(9:39-41 참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오감만을 갖고 살아가는데 반하여 어떤 특출한 분들은 여섯 번째의 감각기관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보통 사람들이 접하지 못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헬렌켈러” 여사는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상실했던 분이었지만, 그분은 19-20세기에 걸쳐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수많은 시각 및 청각장애인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나누어 주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맹인 “Fanny J. Crossby”여사도 평생동안(1820-1915) 8,000여개의 “성시(聖詩)”를
지어 그중 다수의 성시가 우리 찬미가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러, 화가 레오라도 다빈치, 독일의 음악가 베토벤, 그리고 17c
영국이 낳은 수학자 뉴톤 등등 이루 헤아릴수 조차 없이 많은 “천재”들이 보통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제6의 감각기관 내지 “영감”을 받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들의 생애에서 이룬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이야기하는 “육감의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천재성”을 지닌 사람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오감을 지닌 평범한, 그러나 당시 매우
훌륭한 가문의 지성인이요, 지도자급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6).
위의 성경절은 사도 바울이 개심한 후 자신을 회고한 내용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즉, 5감 기관만을 통해 살았던 “사울”이라 부르는 이름을 갖고 화려(?)하게 지냈던 추억(?)들...
오늘날도 회심의 경험 없이(5감만으로) 겉으로 보기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사울)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각종 성경교리를 비롯해 과정공부도 잘 가르칠 수 있고, 집사나 장로의
직분은 물론, 또 신학을 전공해 교회 목사님도 될 수 있고, 심지어 신학대학 교수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감으로 살던 사울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롬8:2)”
그를 해방시켜 “성령으로 거듭나”(요3:3-8)는 체험을 하게 되었을 때
그의 옛사람 “사울”에서 새 사람 “바울”로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그후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부모로부터 받은 5감의 감각기관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몸에 품어 제6의 감각기관을 지닌 사람으로 살 것을
그의 편지서 14권을 통해 강권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감동시켜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 시키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불교의 명상/참선이나 요가등을 통해서도 활성화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없이도 영적인 경험과 치유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없는 영적치유문제를 잘 분별해야 하기도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카스다/Changmyoung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