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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6일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루카 6,43-49
나는 왜 결과만 보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과정보다는 지극히 ‘결과’만 보려는 마음이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말과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하시고, 또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라고도 하십니다.
얼마 전에 청년들과 이야기하다가 한 청년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만약 누군가 신부님 설거지를 도와주려고 하다가 접시 열 장을 깬 사람이 있고
또 누군가 몰래 신부님 접시를 하나 훔치려다 한 장을 깨 먹은 사람이 있다면 신부님 생각에 누가 더 잘못한 거예요?”
이 질문은 MBTI 성격유형 검사에서 목적과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인지, 상황과 과정에 중점을 두는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저는 가차 없이 “열 장 깬 놈이 더 잘 못한 거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확실히 ‘TJ’라는 것입니다.
성격유형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아니라지만, 저는 어쨌거나 저의 성격을 고수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그 감정이 어떠했던지, 그 과정이 어떠했던지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어날 때 가난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것은 너의 잘못이다.”
정말 짜증 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반박하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외는 분명히 있을 수 있겠지만, 평생 열심히 일했다면 죽을 때 가난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욕을 먹더라도 결과에 중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핑계나 변명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핑계나 변명이 들어오면 발전이 없습니다.
저는 억지로라도 결과만을 중시하려 합니다.
성당의 직원들과 봉사자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결과만 봅니다.”
만약 자연재해가 발생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것도 인간 행위의 결과일까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지금 시리아에 홍수가 나서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생겼습니다.
여기에 과연 인간의 잘못이 없을까요?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에 더불어 시리아가 무정부 상태로
두 세력이 싸움만 하며 민생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도 성적인 타락으로 인해 “그 땅도 부정하게 되었다.
나는 그 죄 때문에 그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주민들을 토해 내었다”(레위 18,25)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땅이 인간을 버리는 것 같지만, 성경도 그 원인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 좋은 결과가 일어나면 반드시 안 좋은 결과가 생기게 되는 원인이 존재합니다.
그 원인을 밝히기 어렵다고 결과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끝까지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 핑계를 대었습니다. 결과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느님도 결과만 보십니다.
거기에는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하면 무엇을 고쳐야 할지 알게 됩니다.
핑계는 고치지 않겠다는 뜻도 됩니다.
영화 ‘어 퓨 굿 맨’은 1992년에 개봉한 법정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미국 해병대 기지에서 일어난 한 병사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을 따릅니다.
병사 죽음의 경우는 두 명의 해병이 다른 한 명의 해병을 괴롭히는 ‘코드 레드’라는 불명예스러운
훈련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두 해병은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며, 미군 상사인 네이던 제서프 대령이 지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증명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대니얼 카피, 조앤 갤로웨이, 그리고 샘 와인버그로 이루어진 변호사팀이 이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굳이 사건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던 카피는 처음의 적정선에서 검사 측과 합의하고 마치려 합니다.
그러나 갤로웨이의 격려와 진실을 찾으려는 의지로 인해 점차 사건에 몰입하게 됩니다.
카피와 그의 팀은 군사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카피는 다소 독특하고 위험한 전략을 세우며, 재판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서프 중사를 증인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대면을 통해 그가 ‘코드 레드’를 지시한 사실을
밝혀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서프 대령은 유명한 “당신은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문장을 외치며 자기 행동이 당연하고 필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변명이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습니다.
군 기강이 바로 서야 나라가 지켜질 수 있고 자신은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은 살인입니다.
무엇으로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카피는 그의 거짓말과 책임 회피를 폭로함으로써 두 젊은 병사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음란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속이 건전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결과에 집중하지 못하면
그 결과를 합리화하는 수많은 핑계와 거짓말에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발전도 없고 계속 자존심만 세우게 됩니다.
속에 있는 것이 말로 드러나고 행동으로 나오는 법입니다.
그 결과를 뒤집을 아무런 핑계도 없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입시다.
그래야 고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이상한 면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마치 바퀴벌레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안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발전을 위해 먼저 자기 열매를 보고 지금 자신이 어떤 나무인지를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6일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루카 6,43-49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죄인,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회심 이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 바오로 사도의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놀라운 모습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더불어 이방인의 사도로서, 초대교회를 떠받치던 양대 기둥 가운데 하나요,
탁월한 지도자로 거듭난 그였지만, 평생토록 한없는 겸손의 덕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 이상 잘난 체 하거나 허세를 떨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교계 구조 안에서 최고의 자리에 계시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공동체 내에서
끝자리에 두고 교우들을 섬겼습니다.
틈만 나면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죄인들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제 강한 비바람에 수북이 떨어진 낙엽을 쓸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당 쓰는 일은 한번 하고 끝낼 일이 아니로구나. 낙엽이 쌓일 때 마다, 틈나는 대로 쓸고 또 쓸어줘야 되는구나.’
우리가 지난 시절 저지른 심각한 잘못, 그리고 일상적으로 짓는 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참회했다고, 한번 고백성사 봤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틈날 때 마다, 참회하고 또 고백하는 것이 맞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러하셨습니다. 그는 기회 닿는 대로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허물과 흑역사를 솔직히 고백하셨습니다.
때로 너무 부끄럽고 참담해 감추고도 싶으셨을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자신의 수치스런 지난날을 고백하며, 끝도 없이 성찰하고 참회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티모테오 1서에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티모테오 1서 1장 15~16절)
오늘 루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 폭풍우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가장 좋은 비결 역시
바오로 사도가 지니고 계셨던 한결같은 겸손의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여러 유형의 죄인들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친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칼보다 많은 죄 속에 파묻혀 살아가지만 손톱만큼의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고백할 줄 아는 겸손한 죄인,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죄인을 사랑하심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 일기(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진짜답게 살기….
어느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자매님이 형제님보다 늦게 귀가하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이 반갑게 맞아주길 바라는 것은 형제님이나 자매님은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매님이 무척 힘들게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먼저 귀가한 형제님은 아내가 신발을 벗자마자 “여보, 나 커피!”라고 말한 뒤 계속 TV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매님은 슬그머니 화가 났습니다.
힘들기는 서로 마찬가지인데 “힘들었지, 밥은 먹었어?” 라는 다정한 말 대신에, 커피 심부름부터 시키는 형제님이 야속하고 미웠습니다.
그러나 섭섭한 마음이 드는 순간 하느님께서 자매님에게 이런 생각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니야,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보니 커피 한 잔을 함께 마시고 싶었나 봐.”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자매님의 기분이 좋아졌고 부부는 행복한 커피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생각 차이에 따라 행복도 불행도 만들어진다는 깨달음을 가져 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쪽을 선택하느냐? 에 달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결과에 따라 그 좋은 열매를 먹거나 나쁜 열매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열매가 문제가 아니라, 나무가 문제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깊은 뜻은, 열매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마음에 믿음이 있으면 ‘선한 말’로 나타날 것이며, 그 마음에 말씀이 있으면 반드시 ‘순명의 행위’로 보일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면서 기도의 삶을 살지 않는 이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느냐?"
너무나 어렵고 힘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입과 머리가 아니라 지금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의 행위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살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바로 ‘진정한 행복’을 살아가는 것은, 먼 훗날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기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행복하기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기도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선한 말의 열매’와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지은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고운님들은 세례를 통해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예수쟁이’라고 불립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다. 교회에서 하느님께 미사성제를 올리기에‘신자’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고운님들은 예수쟁이다워야 합니다. 신자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쟁이답게’,‘신자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좋은 나무가 되고, 그리고 나무가 바라고 희망하는 싱싱하고 맛난 좋은 열매를 맺고 반석 위에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고운님들이 ‘예수쟁이답게’, ‘신자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삶을 살아 그렇게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다. 난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매일 행복해집니다.” 아멘.
저 두레박 사제도 ‘예수쟁이답게’,‘신자답게, ‘그리스도인답게’ 그리고‘사제답게’ 살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이‘춤추고, 사랑하고, 노래하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 지금 삶의 자리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반석 위에 튼튼한 집을 짓는 행복한 진짜 예수쟁이, 진짜 그리스도인, 진짜 신자가 되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