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리
우리가 키 큰 나뭉하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애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 1986)
[작품해설]
이 시는 ‘물이 되어 만난다면’이라는 미래 가정법 형태로 시작하여 생명력의 합일에 대한 희구를 ‘물’과 ‘불’의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물’은 ‘나’와 ‘그대’라는 고립된 개체들을 ‘우리’로 합일시킬 수 있는 매개체이자, ‘가뭄’으로 표상된 삶의 고독을 해소시킬 수 잇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또한 ‘물’은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는 생명의 기원인 동시에, 다른 것들과 섞여 ‘아직 처녀인 / 부끌운 바다’로 흘러감으로써 삶의 다은 세계를 마보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물’로 상징되는 조화로운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ㅇ르 깨끗이 태워 버릴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기에, 3연에사 ‘불’로 만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한다. 여기서 ‘불’은 삶의 기본 원리가 되는 ‘물’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것으로, 현실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에 맞서는 대결의 정신을 의미한다. 그 때,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음을 발견한 시인은, 이 불이 지나가고 난 후, 모든 사람들이 ‘만 리 밖’의 ‘넓고 깨끗한 하늘에서 마침내 ’흐르는 물‘로 만날 것을 확신하게 된다. 시인이 지향하는 ’넓고 깨끗한 하늘‘이란 바로 완전한 합일의 충만한 생명을 맛 볼 수 있는 곳으로 새로운 창조적 만남의 공간을 상징한다.
이 시는 ’물‘과 ’불‘이라는 상징적인 시어의 이미지 대립에 의해 전개된다. 물과 불은 모두 물질의 원초적 형태요 근원적 질료이다. 그로나 ’물‘이 ’생명 ⸱ 깨끗함 ⸱ 정화 ⸱ 화합 ⸱ 조화 ⸱ 만남 등을 표상한다면 ‘불’은 ‘죽음 ⸱ 더러움 ⸱ 갈등 ⸱ 투쟁 ⸱ 이별’ 등을 상징한다. 이러한 물과 불의 대립은 ‘우르르 우르르’와 ‘푸시시 푸시시’라는 유성음과 파열음의 음운론적 대립으로싸지 연장되고 있다. 그리고 물과 불 사이에 ‘가뭄’이 놓여 있는데, 이는 메마름과 정체(停滯)를 상징한다. 이렇게 본다면 화자가 가뭄이나 불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물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는 불의 상황이며, 화자는 그 길은 상황이 모두 미래의 어느 순간에 흐르는 물로 만날 것을 노래하고 있다. 그 곳은 화자가 부정적으로 인시가고 있는 현실을 인내한 후에 도달할 수 있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결국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는 ‘불’이 소멸되고 ‘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하늘’인 것이다.
[작가소개]
강은교(姜恩喬)
1945년 함경남도 홍원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 및 국문과 대학원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의 짐」이 당선 되어 등단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92년 제37회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동아대학교 국문과 교수
ㅅ집 : 『허무집(虛無集)』(1971), 『풀잎』(1974), 『빈자일기(貧者日記)』(1978), 『그대 곁에 머무는 말은』(공자, 1980), 『소리집(集)』(1982), 『붉은 강』(1984), 『우리가 물이 되어』(1971), 『바람 노래』(1987), 『순례자의 꿈』(1988), 『슬픈 노래』(1988),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1989),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89), 『하나 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이어라』(1989), 『누가 지구를 별이라 했냐』(1989), 『어느 미루나무의 새벽노래』(1989), 『그대는 깊디 깊은 강』(1991), 『벽속의 시집』(1992), 『어느 별에서의 하루』(1992), 『등불 하나가 걸어 오네』(1999),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