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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묵상글 (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듯.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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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25 04:32
-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듯
저는 오늘 축일 독서의 기도 두 번째 독서 곧 성 이레네오의 저서
<이단자를 거슬러>의 한 구절을 가지고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태양이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은 것처럼 진리의 선포도
세상 어디에서나 빛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이고 같은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불리지 말아야 하고
또 이야기를 적게 할 수 있는 사람도 그것을 축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즉시 우리 노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은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의 각 구절에 세종이 그에 맞춰 한글로 지은 찬불가
‘달이 즈믄 가람에 비친 노래’를 다시 한자로 바꿔 이름 붙인 것인데 저는 여기서
월인천강 일체동(月印千江 一切同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지만 일체가 하나)라는
뜻만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지요.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지만 달은 하나이지요.
반대로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바치고요.
하느님도 하나이고,
하느님의 진리도 하나이지만
수천의 사람이 수천의 말로 수천의 나라에 전할 것입니다.
하느님도 하나이고
하느님의 사랑도 하나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수천의 사람에게 맞게 수천의 색깔과 모양으로 전해집니다.
예수님도 하나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하나이지만
복음사가들이 각기 다르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다르게 전하였지만 모두 한 가르침이고 한 가르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복음 가운데서 한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을
우리 교회는 이단의 가르침이라고도 하고 위경이라고도 하였지요.
이런 뜻에서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에서 읽은 구절은
달을 묘사할 때 앞뒤와 위아래와 좌우를 각기 보고 묘사하지만
그럼으로써 결국 달 전체를 묘사한 것이듯,
네 복음사가가 쓴 복음도 다르게 쓰였지만 한 가르침이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전체를 전해주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부풀리지도 축소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제 생각에 네 복음서 가운데 마르코 복음이 가장 그러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는데
제 생각에 마르코 복음의 부활 사화처럼
부활 사화를 간단하게 전하는 복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Fact Check(사실 확인)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마르코 복음의 부활 기사야말로 사실만 딱 전해준다는 느낌입니다.
맛으로 치면 담백한 맛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담백한 복음을 전해 준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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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지구라는 가정에서의 환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땅의 어느 한 모퉁이를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고 계십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지구라는 가정에서의 환대
2026년 4월 24일 금요일
성공회 사제이자 열정적인 조류 관찰가인 레이건 서터필드는 다양한 형태로 자연을 환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성찰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이해에서 환대는 모든 존재의 중심이며, 곧 창조 자체입니다. 어떤 것도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께서 창조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신 넘치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아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곧, 참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을 위해 공간을 열어주는 데 있습니다. [1]
레이건 서터필드는 우리가 자연을 상품화하는 흐름을 끊고, 환대의 영성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제안합니다:
정원을 가꾸고, 습지를 조성하는 일은 끝없는 경제 성장과 콘크리트로 가득한 세상 앞에서는 작은 행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환대의 행위가 바로 창조를 향한 사랑의 응답이며,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피조물을 돌보는 길입니다. G.K. 체스터턴이 말했듯, 산업 자본주의가 작은 가게와 농장을 잠식하는 현실 속에서도, 작은 공간을 지켜내는 일이 곧 자유와 희망을 지키는 증언이 됩니다.
하지만 환대는 단순한 저항을 넘어, 성사적 실천입니다. 곧, 야생의 생명들 안에서 거룩함을 인식하는 길이지요. 웬델 베리는 "거룩하지 않은 장소란 없습니다. 오직 거룩한 곳과 훼손된 곳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화해의 생태학을 실천한다는 것은 세상을 단순한 풍경이나 욕망을 위한 추상적 배경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 깃든 거룩함과 관계를 맺는 행위입니다.
에티오피아의 정교회들은 성당 주변에 숲을 보존하여 새롭게 회복된 에덴을 닮게 합니다. 그 성스러운 숲은 이제 황폐해진 땅을 되살리는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당과 도시의 변두리, 성당과 일터를 성스러운 공간으로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지금의 야생을 환대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환대의 원천이 됩니다. 각자의 작은 마당이 지구의 미래를 품어, 언젠가 우리의 착취적 삶의 환상에서 깨어날 때 세상을 다시 씨앗으로 되살릴 수 있는 생명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몇 년 전, 저는 프란치스칸 수녀이자 세네카 원로인 호세 홉데이 수녀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은 지구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며, 우리가 오염을 멈추고 자원을 남용하지 않을 때 지구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로 수녀님은 쿠야호가 강(Cuyahoga River)을 들었습니다. 오염이 중단되자 강은 다시 살아났고, 그 안의 모든 생명들도 되살아났습니다. 그녀의 메시지는 우리도 “어머니 지구”의 치유를 도울 수 있다는 희망을 제게 주었습니다.
—Anne C.
References
[1] Ragan Sutterfield, Watch and Wonder: Birding as Spiritual Practice (Broadleaf, 2026), 38.
[2] Gilbert Keith Chesterton, The Outline of Sanity (Methuen, 1928), 95.
[3] Sutterfield, Watch, 51–5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iska Vrijburg, untitled (detail), 2017, photo, Netherlands.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나무와 빛, 사슴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을 존중한 다음에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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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기쁜 소식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의 주도하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전해집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습니다. 또한 가장 빠른 박자를 지닌 듯, 언어와 전개가 매우 역동적입니다.
이는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긴급성을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주님 오심의 때와 시기는 알 수 없기에(마르 13,35-37), 늘 깨어 있고, 악에 맞서 준비하며,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또한 인생의 짧음을 묵상하게 합니다. 복음의 각 장과 절처럼, 우리의 매 순간을 오직 주님을 맞이하는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참된 복음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됩니다(마르 15,39).
마르코 복음서는 박해와 고통 속에 있던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고통과 시련을 견디시며 아버지의 뜻과 하느님 나라의 사명에 충실하셨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참된 모범으로 받아들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과 유혹을 겪으시면서도 끝까지 아버지께 충실하셨습니다(마르 14,36).
또한 우리 삶의 고통과 불합리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 위에서조차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마르 15,34)라고 외치신 주님을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이 복음서는 전통적으로 성 베드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의 삶과 체험을 담아내며, 그의 실패와 부족함까지도 숨기지 않고 기록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담대히 직면하도록 초대합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주님의 뜻을 거스르며, 열정적이면서도 게으르고, 심지어 주님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앞서 가시며(마르 16,7) 우리 삶을 아름답게 빚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실패와 깨어짐 때문에 낙심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도록 이끌어 줍니다(마르 14,72).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행적과 베드로의 흔들리는 삶을 나란히 보여주며, 우리가 의지할 것은 우리의 공로나 힘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상처와 은총임을 증언합니다.
본래 마르코 복음은 부활에 대한 매우 불완전한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마, 본래 마르코 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나며, 여인들이 무덤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큰 반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잃어버린 결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마르코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후대에 덧붙여진 결말로, 2세기 초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를 정경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문체는 마르코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덧붙여진 내용의 메시지가 분명하기에 교회는 이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기쁜 소식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의 주도하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바람만 갖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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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코(‘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사도 12,12-15).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사도들이 자주 모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서학자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라고 말합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제1차 전교여행을 했고, 사촌 형인 바르나바와 함께 전교하였으며,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골로 4,10),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로 전교활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베드로는 그를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활동했으며, 목에 줄을 매어 시내를 돌게 한 다음에 참수 당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오히려 믿고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시고 승천하시는 장면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그러니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먼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혹 “복음”이 아닌 다른 것, 곧 자신의 가르침이나 자기 자신을 선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대체 무엇인가요?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 하실 때 선포하신 것이요, 또 하나는 공생활을 마치면서 사도들이 선포하신 것입니다. 곧 첫 번째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요, 두 번째 복음은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루카 24,6)는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하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든 가야하고, 누구에게나 전해야 하고, “모든 피조물”에게 전해야 할 일입니다. 곧 “온 세상” 어디든지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이며, 누구나가 그리고 모든 자연과 피조물이 함께 응답해야 할 구원의 짝지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고, 이를 강요하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셨다.”(마르 16,20)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며, 동시에 함께 하시는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정녕, ‘함께 일하시는 그분과 함께 하는 일’, 바로 그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말한 것처럼, 늘 함께 하시는 그분,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셨다.”(마르 16,20)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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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맛집을 다니곤 했습니다. 이름하여 ‘원조’입니다. 신당동 떡볶이에도 원조가 있고, 장충동 족발에도 원조가 있고, 의정부 부대찌개에도 원조가 있습니다. 종로의 닭 한 마리에도 원조가 있고, 교대 곱창에도 원조가 있고, 광장시장 빈대떡에도 원조가 있습니다. 원조 집은 늘 사람이 붐비기 마련입니다. 비록 집이 낡았어도, 비록 주차 공간이 좁아도 사람들은 기꺼이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조 집이 있기에 옆에 있는 음식점도 낙수효과를 누리기 마련입니다. 음식의 맛에 큰 차이가 없기도 하고, 바쁜 현대인은 기다리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원조의 입맛에 익숙해진 어른들은 기꺼이 원조 맛집을 찾지만, 인공 감미료에 익숙한 세대는 원조의 맛은 심심하다고 좀더 자극적인 맛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제가 가끔 가는 평양냉면 집도 그렇습니다. 저는 삼삼한 것이 좋은데 후배 신부님은 그냥 그렇다고 합니다. 오히려 색다른 맛을 찾아서 다른 평양냉면을 찾기도 합니다. 뉴욕에 있을 때도 가끔 맨해튼엘 가면 ‘큰집’이라는 원조 한식집을 가곤 했습니다.
교회는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이라는 4 복음서를 남겨 주었습니다. 어쩌면 이 4 복음서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한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원조 복음 이외에 다양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많이 소개되고 있는 도마복음이 있었고, 베드로 복음, 유다 복음, 마리아 복음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교도권은 여러 복음서 중에서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4 복음서 중에서 굳이 원조를 이야기한다면 마르코 복음이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조 평양냉면이 삼삼하듯이,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르코 복음은 마태오 복음처럼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도, 동방박사의 경배 이야기도 없습니다. 루카 복음처럼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마리아의 노래도 없습니다. 요한 복음처럼 말씀에 대한 찬가도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처럼 참된 행복에 대한 선포도 없고, 루카 복음처럼 돌아온 탕자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도 없고, 요한 복음처럼 착한 목자 이야기도 없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핵심은 3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도 간결합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마치 원조집의 조리법을 다른 맛집이 따라 하듯이 마르코 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기적과 표징은 다른 3 복음서에도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마치 원조집의 맛에 색다른 맛을 내듯이 다른 3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십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를 고쳐 주는 것입니다. 마치 원조집 근처에 새로운 맛집이 생겨나듯이 다른 3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풍요롭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엠마로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제자 이야기도 있고, 베드로 사도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묻는 이야기도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힘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두려움에 숨어 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제자들은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였고, 순교로 신앙을 완성하였습니다.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서 이야기했듯이 21세기의 복음은 환경과 생태계를 지키고 보존하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던지려고 했던 남성들로부터 부정한 여인을 보호하고 용서하셨듯이 21세기의 복음은 성, 직업, 신분, 이념, 세대, 지역의 갈등을 해소하는 평등한 복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셨듯이 21세기의 복음은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아는 사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용서로, 희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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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집필한 복음서!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매일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제가 지니고 있는 신념이랄까 의식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입니다.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내 기쁨, 내 영예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기 위해 쓴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직제자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서 지속적인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이 소중한 생명의 말씀,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 역시 저와 똑같은 신념과 의식을 갖고 복음서를 기술했을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기 위해, 갖은 고초와 시련 속에서도,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해 복음서를 집필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큰 노고와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오늘 우리 손에 이 아름답고 값진 생명의 말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인해, 2천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르코가 자신의 삶 전체, 생애 전체, 목숨까지 걸면서 기술한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백번 천번 감사하면서, 세상 둘도 없는 보물처럼 여겨야겠습니다. 복음서는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로의 동료 바르나바의 조카였으며, 성전에 따르면 예수님 최후의 만찬 장소이자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성모님이 성령 강림을 맞이한 장소가 마르코의 집 다락방이었다고 추정합니다.
마르코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람 들 중 가장 인지도와 영향력이 큰 두 인물,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람과 밀접하게 엮여있는데 특히 으뜸사도인 베드로가 마르코를 깊이 신임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 전서 5장 13절에 베드로가 마르코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때 마르코를 자신의 아들이나 다를 바 없다고 지칭합니다.
이후 삼촌 바르나바와 사도 바울로의 제1차 선교 여행 시 통역으로서 동행하지만 키프로스 섬까지만 동행하고 정작 본무대인 소아시아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리고 마는데 이게 후일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갈라서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이로 인해 마르코는 바오로 사도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모양새입니다.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마르코가 바오로와의 선교 여행길에 모종의 이유로 자진 이탈해 그에게 실망을 안겨줬기 때문입니다.
후에 바르나바가 바오로에게 건립된 교회 사목 방문시 마르코도 함께 데리고 가자고 제안했을 때, 바오로가 극구 반대했고, 이 문제로 둘이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영웅적인 초기 교회 사도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인간적 나약함이나 미성숙이 남아있었다는 흔적을 확인하니 실망하기보다, 그분들도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결국 바르나바는 바르나바 대로 마르코를 데리고 출발하고가 바오로는 실라라는 새로운 협력자를 구하게 됩니다. 그 이후 마르코는 로마 제국 선교 당시 베드로 사도의 일행으로 동행하였고, 당시 베드로에게 직접 배운 가르침을 충실히 기록하여 마르코 복음서를 잘 정리하였습니다.
물론 사도 바오로의 말년에는 둘 사이의 감정이 풀어져서 바오로는 누구보다 마르코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따르면, 바울로가 감옥에 갇혀서 고초를 당할 당시 마르코가 바울로의 곁에서 끝까지 함께하며 그를 위로해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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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 16,15–20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이 말씀은 참으로 넓고 깊습니다.
복음은 일부 사람만을 위한 소식이 아니고,
어떤 민족이나 문화 안에만 머무는 진리도 아닙니다.
복음은 온 세상으로 향하고,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울려 퍼져야 하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복음 선포를 단지 말의 전달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복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세상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되
그들만 홀로 보내지 않으시고
당신이 함께 일하시며
표징으로 그 말씀을 굳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선포는 내 능력을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앞서 가심을 믿고
겸손히 협력하는 순명의 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히 마음에 남는 구절은
“모든 피조물에게”라는 표현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영혼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를 향한 하느님의 뜻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개인의 구원으로만 끝나지 않고
온 창조를 새롭게 하시는 시작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산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더불어
피조세계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평화/인내 주간에 이 말씀은 더욱 깊게 들립니다.
평화는
좁은 울타리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온 세상으로 보내시는데
어찌 내 관심이 나 자신에게만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평화는
이웃에게, 공동체에, 피조물에게 흘러가며
더 넓은 생명의 질서를 세웁니다.
인내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
다른 종교를 지닌 이들,
그리고 말없이 신음하는 피조물 앞에서
성급히 판단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겸손과 경청, 존중과 돌봄으로 머무는 힘입니다.
오늘 토요일 이웃종교/생태의 날에
우리는 이 말씀을 더 넓게 받아들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다른 이를 억누르거나 지배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복음은 폭력이 아니라 생명이며,
강요가 아니라 초대입니다.
또한 “주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세상은 넓고 문제는 많으며
내 힘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우리에게만 떠넘기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함께 일하시고,
당신이 앞서 가시며,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생명의 길을 열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결과를 움켜쥐는 일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걷는 충실함입니다.
바로 그 충실함이 인내입니다.
주님,
저를 좁은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향한 당신 마음을 배우게 하소서.
제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중과 경청, 돌봄과 평화로
복음의 향기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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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4:50 추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5-20ㄴ).>
1) 여기서 ‘모든 피조물’은, 동식물을 포함해서
자연계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이, 동식물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뜻은 아니고, 세상 전체가 복음화 사업의 대상이라는 뜻이고, ‘메시아의 나라’는 세상 전체가(또는 우주 전체가) ‘새롭게 변화된 나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모든 것이 처음의 상태로(천지창조 때의 상태로) 원상 복구된 나라입니다.
<종말의 ‘메시아의 나라’는 ‘구원받은 사람들’만 들어가서 사는 나라인데, 그런데 그 나라에 동식물은 하나도 없고, ‘사람들’만 있다면, 많이 이상할 것입니다.
온갖 동식물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환경 문제와 생태계 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는, 최후의 심판 때의 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7-18ㄴ).”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런데 신앙과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곧 심판을(단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 일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이 시작된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잘 가야 합니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죽기 전에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표징들(기적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일들을 요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것은,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원래 계시던 곳, 즉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곳으로 가셨다는 뜻이고, 하느님과 동등한 자리로 복귀하셨다는 뜻입니다.>
2)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는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함께 있겠다는 것은 보호해 주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신앙인들이)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도와드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 사업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신앙인들은 주님을 도와드리는 조력자들입니다.
그리고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는, 우리가 경험하는 기적들(표징들)은, 우리가 믿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또는 보증하는 강력한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항상 ‘믿음’이 먼저입니다.>
3) ‘피조물’이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땅’도 저주를 받았습니다(창세 3,17-18).
<그 이야기에서 ‘땅’은 ‘모든 피조물’을 뜻합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계 전체가 저주받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어떻든 ‘죄 때문에’ 세상 전체가 고장 났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과 고장 난 세상을 고치는 일을 모두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 전에 하신 일은 ‘시작’ 단계이고, 지금도 그 일은 진행 중이고, 재림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그 ‘완성’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그날이 올 때까지 인내하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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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9:25 추가.
마르 16,15-20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이천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기적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그분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자격이 모두에게 주어졌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그분이 전하신 복음은 채 이뤄지지 못한 슬픈 소식이 되었습니다. 곧 실현될 것 같았던 하느님 나라는 머나먼 남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을 따르던 이들은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자기 믿음이 무슨 소용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구심과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곱씹어 보면서, 그분께서 하신 일들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두려움과 걱정을 이겨내고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오늘은 4가지 복음서 중 마르코 복음서를 집필한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삶과 신앙을 기념하는 축일이지요.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매우 역동적입니다. 그분이 복음을 선포하는 장소는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길거리’로 묘사됩니다. 하나의 상황 혹은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는 빠르게 다른 장소, 다른 상황으로 전환되지요. 그렇게 미적거리거나 망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그 한가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입니다. 복음서를 읽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사가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복음’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시며 평화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홀로 남겨질 제자들이 용기와 힘을 내도록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아직 부족하고 약한 제자들의 믿음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깊고 단단해지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소명을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대목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요.
그런 주님의 사랑에 제대로 응답하려면 그분께서 맡겨주신 복음선포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저 말로만 그분 말씀을 떠들 게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과 실천으로 주님 말씀과 뜻이 이 세상에 실현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써 내려가는 열정적인 ‘복음사가’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께 대한 우리 믿음이 더욱 분명해지고 굳건해질 것입니다. 그 단단한 믿음의 반석 위에 구원이라는 집을 튼튼하게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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