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의 꿈
쿠라냑 (예언자)
=1장=
푸른 초봄, 땅에는 아직 피다 만 꽃봉오리가 듬성듬성 보인다. 꽃샘추위기간이라 학교에 나가는 학생들은 꼭꼭 옷을 챙겨입은 모습이다.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오로지 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모습뿐이다.
문진 중학교는 서울 송파구의 어딘가에 있는 진돌거리에 있는 명문 중학교이다. 명문이라서 입시시험 정도는 볼 것 같지만 최근의 흐름에 따라 무작위 선출 제도를 도입했으므로 시험은 보지 않는다. 대신 이 학교에선 주변 초등학교의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정리한 뒤에 고루 배분하여 입학을 시킨다. 이 주변 일대에서는 모든 학교가 실행하고 있는 제도이다.
이 제도에 의해 명문에 수재가 모인다는 생각은 틀린게 되었다. 성적은 조정하는 체계가 법으로 정해져 있어 어느 학교나 고루 학생을 받아들이는게 의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제도가 명문인 학교의 물을 흐릴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수준높은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업적 아래에서는 후배들도 입을 벌리고 감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아무 곳에서나 무작위로 뽑은 아이들도 다른 학교와는 구별되는 훨씬 긍정적인 수업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지금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달. 이 학교도 새로운 신입생들과 선배들이 어우러져 약간은 흥분되고 들떠있는 기분으로 등교를 하는 중이었다.
=2장=
명문이란 이름 때문에 학생들이 전학을 와서 그런건지 아니면 이 지역이 원래 학생 수가 많은 건지 한 학년에 10개가 넘는 반들 중에서, 가장 윗층에 있는 3학년 1반 앞에서 가만히 서있는 한 여자아이가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은 한지혜. 중학교 3학년생에 1반으로 배정을 받고 가만히 교실문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모습을 보자면, 키는 또래들과 엇비슷하거나 혹은 약간 작은 편에 들만한 중간정도였고, 머리는 유난히 앞머리가 긴 특이한 스타일, 그리고 약간 야위어 보일 정도로 몸이 마른 편이라 체격은 꽤 작아보였다.
이 아이의 푸른빛 도는 검은 머리는 아주 단정한 단발이었는데, 그에 비해 앞머리는 오히려 너무 길어서 이 학교가 두발 자율화가 이뤄지지 않았었다면 단속에 걸릴 수준이었다. 어찌나 길게 길렀는지 얼굴 전반이 가려서 아무리 가까이서 보더라도 코 위로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지혜 자신은 또 어떻게 앞을 보는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얼굴은 약간 흰피부에 불그스름한 볼이 약간 귀여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눈이 드러나질 않으니 표정을 알아보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그렇지만 입에는 엷은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으며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혜는 문득 눈에 띄는 남학생을 발견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제각기 반에 들어가느라고 분주한데, 그 남학생만은 창가에 기대어 여유롭게 놀고 있었다.
이 남자아이는 이 곳에 있는 모든 학생들 중에 혼자서만 교복을 안 입고 있었다. 제멋대로 입은 검은 옷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정도로 눈에 띄는 데에도,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마에는 끈을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에도 전혀 다른 아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느긋하게 창가에 기대어 있는 모습에 지혜는 어리둥절해 했다.
"아, 지혜야. 기다리고 있었구나."
지혜보다도 키가 작은 여학생이 계단에서 올라오며 말했다.
이 학생의 이름은 이유애. 놀랍게도 이름 석자에 받침도 없거니와 자음은 더더욱 없었다. 이 이름 때문에 평소에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었지만, 이 아이가 변명하기로는 '유연하고 애정깊게 살라는 뜻'이 담겨있는 이름이었다.
모습을 말하자면, 키는 딱 보기에도 지혜보다 훨씬 작았고, 머리가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교복이 몸에 맞지 않게 커서 체격이 더 작아 보였다. 또 가방이 보통의 배낭식이 아닌 손으로 들고 다니는 딱딱한 가방이었기 때문에 뭔가 학생으로서 잘 맞지 않는 분위기가 났다.
갈색빛이 진하게 드러나는 검은색 갈랫머리는 끄트머리만 끈으로 살짝 묶여 있었다. 이 아이는 머리가 어찌나 긴지 허리를 넘어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머리감기에는 힘들겠지만 동시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람부는 길을 걸으면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얼굴이 매우 동그랗고 피부색이 희기 때문에 꼭 어린아이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무표정하고 왠지 할머니같이 깊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어른같은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나도 방금 왔어. 유애야 좋은 아침."
지혜가 반갑게 인사했다. 이 둘은 교실 안으로 아무말 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새학기라서 자리를 정해뒀을리도 없는데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창가쪽 맨 뒤에서 두번째자리에 앉았다.
이 두 여학생이 자리에 앉자마자 뒷자리에서 한 여학생이 지혜의 등을 툭 쳤다. 지혜와 유애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안경낀 여자아이가 얼굴을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안녕. 우리 서로 소개나 할래? 나는 김문영이야."
이 아이는 유애에 비하면 훨씬 짧지만 그래도 어깨아래로 내려오는 긴머리를 갖고 있었다. 역시나 다른 학교였다면 충분히 단속에 걸릴 만한 길이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겨 한묶음으로 묶었기 때문에 앞이마가 훤히 드러나는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상당히 예쁠것 같은 부드럽고 고운 모양새였지만 안경 때문에 전체적으로 딱딱해져 보였다. 게다가 약간 불만스런 입꼬리 때문인지 뭔가 어색해보이는 얼굴표정이었다. 평소에 한껏 멋을 내며 살다가 학교에 와서는 나쁜 시력 때문에 어쩌는 수 없이 안경을 끼고 단정한 머리를 만들어놓자니 스스로도 위화감이 느껴져서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유애는 완전 절벽, 지혜는 약간 가슴이 볼록 보이는 정도인데 비해 이 여학생은 가슴선이 또렷하게 보였다. 훨씬 성장이 빨랐다는 뜻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성숙한 분위기를 띈 모습이었다.
"나, 나는 한지혜라고 해. 얘 이름은 이유애야."
지혜가 황급히 대답해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쑥스러워서 얼굴에 열이 올라와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영이는 그런 모습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넌 아무한테나 말을 잘 거는가 보다?"
유애가 일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찌나 표정에 변화가 없는지 문영이도 잠시 주춤했다.
"글쎄, 난 그냥 내 앞자리 애들 정도는 꼭 이름을 알아놔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야. 그건 그렇고 저 앞에 있는 아이 말인데."
문영이가 손가락으로 살짝 창가 맨 앞줄의 남학생을 가리켰다. 그들과 그 남학생 사이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훤히 잘 볼 수 있었다.
그 남학생은 다른 남자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런데 의자에 앉아있는 그 아이를 본 지혜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남학생은 칙칙한 검은색의 동복을 매우 반듯하게 다려입고 있었다. 머리는 전혀 정돈이 안된 산발이었고,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왠지 밝고 쾌활해보이는 표정이었다.
"저 아이 말이야, 이름이 경식이거든. 성이 경이고 이름이 식. 두글자래. 그런데 전교 1등을 하던 녀석이지 뭐야."
문영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 전혀 몰랐었니?"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어."
유애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애는 그 남학생에게서 다시 고개를 돌려 문영이를 보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난 전교에서 뒤에 속하는 사람이라구. 성적을 보면 좌절할까봐 순위표는 전혀 보질 않았어. 그런데 너는 아주 잘 아네?"
유애의 말에 문영이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저런 타입의 남학생은 딱 질색이라서 알고 있는거야. 내 친구가 쟤한테 데이트 신청을 한 적이 있거든? 그런데 승낙을 해놓고서도 약속장소에 나오질 않은 거야. 이유를 물으니까 보충수업을 깜빡했었다고 하러 갔었대. 너무하지 않니?"
유애와 문영이가 한참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지혜는 그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고 다만 멍해진 표정으로 경식이란 남학생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경식은 잠시 이쪽의 세 여학생을 쳐다봤지만 곧 다시 고개를 돌려 대화에 열중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 지혜는 감격한 깊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렇구나. 경식이랑 같은 반이구나.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같은 반이 됬던 적이 없었는데. 그러고보면 놀이터에서 나랑 유애랑 경식이는 꼭두새벽부터 제일 먼저 나와 놀았었기 때문에 유달리 친했었었지. 경식이가 같은 반이었다니!"
=3장=
학기초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들떠있고 활기차던 분위기는 수업종이 치자마자 한결 가라앉기 시작했고, 선생님이 들어오자 이제는 거의 입을 열기 부담될 정도로 조용한 상태가 되었다. 선생님은 여자분이셨는데, 성미가 급한 사람인건지 칠판에 자기 이름 석자를 휙휙 휘갈겨 쓰고는 분필로 한번 쾅 찍고 아이들에게로 돌아보았다.
"여러분과 한학년을 함께할 주석화라고 합니다. 딴 말은 필요 없겠죠? 수업 열심히 들으세요."
놀랍게도 담임 선생님임에도 딴 좋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채, 그 분은 너무 짤막한 토막말 한마디를 마치더니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반에서 나가버렸다. 성미가 급하다기 보다는 뭔가 서둘러야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선생님이 저래? 하지만 학생들에게 관심없는 선생님이 담임이라면 일년간 편하겠네. 그렇지?"
문영이가 기분 좋은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잠시동안 유애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이에 지혜는 왠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어서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교문 바로 앞에는 삼거리와 넓은 도로의 공터가 있었는데, 그 앞에는 어릴 때부터 보아왔었던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백년이 넘게 살아왔다고 알려진 보리수나무였다. 그것은 사람 여럿이 둘러서도 못닿을 만큼 굵고 넓었으며, 옆으로만 퍼져서인지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나무였기 때문에 먹이가 자주 뿌려져서 비둘기가 잔뜩 모여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 보리수나무는 갈색빛이라기보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진갈색에 주황색을 섞은 듯한 색상, 그렇다고 완전히 섞였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무늬와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비둘기가 모여 있을 거라고 나무를 바라보았던 지혜는 나무 위에 사람이 앉아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눈을 떼지 못하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애와 문영이가 무슨일이냐고 물어오는 데에 대해서는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아직 제대로 정리가 안되서 그런지 그다지 수업답지도 않은 6교시까지를 모두 마친 후에 유애와 작별인사를 한 뒤 지혜는 황급히 그 나무로 달려가보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그 나무에는 언제나처럼 비둘기나 참새를 비롯한 각종 새들이 모여들어 놀고 있었다.
그런데 나무 위에는 지혜가 봤던 그대로 사람이 한명 누워있었다. 모자로 얼굴을 덮었기 때문에 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남자아이 같았다. 그 아이는 온통 회색 옷을 입고 있었으며 허리띠를 차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 것조차도 회색이라 오히려 눈에 띄었다. 얼굴을 덮고 있는 모자도 회색이었고 신고 있는 신발도 회색이었다. 온통 한가지 색으로 통일한 옷 같은 기분이었다.
지혜는 조심스럽게 그 나무 바로 아래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그 남자아이의 몸과 얼굴 위로 참새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 와중에 놀랍게도 다람쥐까지 한마리 보였다.
"저기... 그 나무 위에 올라가면 안돼."
지혜는 조심스럽게 위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말을 건넸다기 보다는 혼자 중얼거린 것 같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그런데에도 위의 남자애는 알아들었는지 손으로 모자를 치우며 고개를 들었다.
상당히 과묵할 것 같이 생긴 아이였다. 예상했던 대로 남자아이였지만 얼굴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가지고 있을 약간의 장난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울한 분위기를 조금 느끼게 만들어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혜는 저 아이에게 왜 동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사람에게 거의 접근을 하지 않고, 게다가 그렇게도 인간을 두려워해야할 작은 동물들이 전혀 경계심도 갖지 않을 정도라면, 신비스러울 뿐만 아니라 마치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같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자꾸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내려간 적도 없으니까 상관 없어."
그 남자아이가 귀찮다는 듯이 말을 내뱉고는 다시 누워서 모자를 덮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잠시동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쩔쩔매던 지혜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저기, 우리 인사라도 할래?"
지혜의 말에 다시 그 남자애는 모자를 걷었다.
"나는 한지혜라고 해. 너, 너는 왠지 신기한 아이 같아 보여서... 이 주변에서 동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거든..."
"안성복."
남자아이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나 더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혜는 그 말을 입으로 되새기며 이름을 말해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면 저 아이가 마음을 열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등 뒤로 들리는 기합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 소리는 학교 교문에서 정면으로 쭉 걸어가면 있는 건물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간판은 그 건물 전체가 검도관 소유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 저... 나 나중에 또 올께. 그 때도 여기 있을거지?"
지혜가 이번에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잠에 들었는지 무시하는건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혜는 정면에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몇 번을 그 남자아이를 돌아보았지만 그 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지혜는 검도관 건물의 앞까지 다가오게 되었다. 길을 꺽고 집쪽으로 걸어가려던 이 아이는, 아침에 운동이나 해보는게 어떻겠냐던 유애의 말을 떠올렸다.
결국 한번 상담이나 받아보자는 생각을 하고 검도관에 들어간 지혜는, 안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기합소리에 여전히 깜짝 깜짝 놀라고 있었다.
=4장=
난생 처음으로 운동하는 사람을 만나느라 긴장이 된 지혜는 아무래도 그런 사람들일 수록 사람을 잘 때리거나 여자를 밝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안고 갔지만, 관장을 만나자마자 그 생각은 확연히 사라져버렸다. 이 검도관의 관장이라는 사람은 할아버지였는데, 기운은 넘치지만 전혀 자기 주관이 없고 착할대로 착한 사람이라 어린아이의 장난에도 잘 넘어가고 또 아이들과 친하게 잘 놀아주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왠지 검도관의 분위기도 밝고, 운동하는 아이들도 대부분 자기 또래들이 다이어트와 체력관리 삼아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지혜는 한번쯤 한가지 운동은 꾸준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관장님께 곧장 가입신청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다."
관장님이 가입신청서 서류를 한장 건네주며 말했다. 그다지 기록할 사항은 많지 않았지만, 지혜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관장님이 말한대로 부모님의 서명을 받아와야 하는 항목이었다.
다음날은 유난히도 시끄럽고 말이 많은 학교생활을 보냈다. 문영이가 자신의 꿈이었던 부자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고백에 이어서, 유애가 거기에 반박하여 하루종일 철학적인 설교를 늘어놓으며 어떤 남자를 사귀어야 세상을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지혜도 함께 옆에서 들어야만 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더러 졸지마라고 몇 번을 외쳐댔지만 수업시간마다 지혜가 확인해보기로서는, 맨 앞자리의 경식이와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곤 모두들 엎어져 자는 분위기가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 최상층에 있는 남자란 절정에 달한 무리들, 그런 녀석들은 자라면서 서서히 추락하기 마련이야."
유애가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도 했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이미 문영이는 입을 삐쭉 내밀고 기분나쁜 듯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들어주고 있었지만 지혜는 검도관에 대한 생각으로 유애에게 언제 말을 걸어볼지만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가 훤한 녀석들을 골라야지. 경식이 같은 애는 목표가 뚜렷하고 능력도 있으며 도전정신도 갖추고 있으니 이런 아이가 미래에..."
"딱 샐러리맨으로 썩어나기 좋은 타입이지."
문영이가 한마디 함으로 유애의 말을 끊었다. 유애는 문영이에게 화를 내며 자신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 논어를 읽어보라며 자신의 사각 가방에서 백과사전보다 두꺼워 보이는 책을 꺼내 문영이에게 건네주었다. 문영이는 그 책을 받아들기는 했지만 입이 쩍 벌어졌을 뿐 읽을 엄두는 전혀 못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휴... 그런데 아까부터 들고 있는 그 봉투는 뭐야?"
유애가 드디어 지혜의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말했다. 지혜는 한숨을 내쉬고 유애에게 살짝 귓속말을 하며 그 봉투를 건네주었다.
학교를 마치고 검도관을 가서 재빨리 가입비와 서류를 제시한 지혜는, 관장님이 부모님 확인란을 의심하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 대신에 사인을 써넣었다보니 관장님이 한번쯤은 물어보리란 것을 지혜는 잠시동안 잊고 있었다.
"서명하신 부모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니?"
관장님이 기분좋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보통은 보고 안심할만한 그 미소를 보면서도 지혜는 얼굴이 새빨개진채로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저... 사실은... 전 부모님이 안계세요."
지혜가 얼굴을 푹 숙인채로 말했다.
"아아, 그렇구나. 그럼 이 서명은 다른 보호자가?"
관장님이 잠시 묻더니만 지혜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장님은 수련중인 다른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렇군."
문득 지혜는, 아까부터 사무실에서 구석진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했다. 어찌나 인기척이 없었던지 지금까지 계속 있었는데에도 지혜로서는 전혀 눈치를 못채고 있었었다.
그 아저씨의 모습은 관장님과 정 반대의 딱딱하고, 엄격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연녹색 도복이었으며(지금까지 본적 없는 색상이었다.) 아직 젊어보이는 데에도 머리가 흰색여서 아마 염색한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했다. 머리는 군대갔다온 사람처럼 아주 짧게 깍아서 일명 '빡빡머리' 혹은 '도토리머리' 라고 불리우는 모양이었고, 얼굴은 무표정한 경지를 넘어서서 약간은 화나있는 듯하면서도 절대로 웃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혜는 유애의 무표정한 얼굴을 많이 봐왔지만 그 아이는 오히려 남들보다 감정이 풍부해서 그런 표정이 단지 어른스러워 보일 뿐이었지만, 이 사람은 감정조차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은 확실하게 운동의 숙련자인건지, 온 몸이 근육질이었다. 살짝 만져봐도 무척 단단할 것 같이 보이고, 또 눈으로 보기에도 거칠어 보이는 피부가 딱 '무술인'이라는 표시를 나타내어주고 있었다.
"아... 저기..."
지혜가 관장님께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하자, 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을 읽으면서도 지혜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관장님도 지혜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서더니 그제야 발견했다는 듯이 그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지혜에게 말해주었다.
"오, 그렇지. 이 분은 말이다. 나보다도 훨씬 실력자이시고 높은 직위에 계신 분이란다. 이름은... 음 비밀이지. 어쨌거나 여기서 몇칠간 계시면서 딱 한명을 골라 수련시키시기로 하셨단다. 그러니 신경은 쓰지 말거라."
그 날부터 지혜는 그 이상한 아저씨의 감시를 받는다는 기분을 느끼며 평생 처음으로 하는 수련을 시작했다. 관장님은 처음 봤을 때 분위기 그대로 기운 넘치고 너무나 착하신 분이셨다. 수련도 그런 상태로 진행됬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만한 것은 없었다. 쉬고 싶을 때는 얼마든지 쉬라는 식으로 느긋하게 수련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이기 때문에 지혜는 기본적인 동작들을 익히면서 이론을 주로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계속해서 반복수련만 하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지혜는 관장님께 죽도의 여러 요소들과 그 명칭을 들었으며, 도복 입는 법과 호구 사용에 대해 들었고, 기본 동작들의 이름과 그 뜻, 그리고 주의해야 할 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발과 다리의 자세를 하나하나 알아가며 연습하니 꽤 흥미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만."
아까까지 계속 구경만 하던 그 아저씨가 관장님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
"다른 녀석들은 충분히 봤지만, 나는 이 여학생을 데려가고 싶군."
그 사람은 지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관장님은 약간 당황해서 쩔쩔매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학생이라서... 검도는 취미삼아 시작한 것입니다. 으,으음. 아무래도 제대로 제자로 삼으시고 싶다면 저 아이들 중에서 진짜 검을 목표로 가진 아이로 고르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지혜로서는 오히려 더 늙은 관장님이 존댓말을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흰머리아저씨는 신비주의로 휘감긴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말투가 워낙 사무적이라 딱딱할 뿐만이 아니라 일체의 억양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투는 마치 아나운서들처럼 또박또박했지만 티비의 아나운서들에 비하면 감정이 일체 실려있지 않아있었다. 이런 사람이 뭐가 높다고 관장님은 존댓말을 꼬박꼬박 써가며 대화를 하는 것일까?
"취미라. 그것도 좋지."
그 아저씨가 말했다. 그는 지혜를 잠깐 내려다봤는데, 지혜는 그 때 잠깐동안 아저씨의 눈빛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뒤에 다시 보자 여전히 냉정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학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할 거라면 그것도 좋지. 이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것만이 목표가 되어버렸으니까. 나는 이 아이의 학업에 일절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수련할 것을 약속하네."
"아... 저기... 얘야."
관장님이 지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지혜는 죽도를 잡고 정면을 겨눈채로 서있었다. 관장님은 잠시 흰머리아저씨를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지혜에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미안하게 됬다만, 저 분이 앞으로 널 가르쳐주실 분이란다. 물론 계속 이 검도관에 나오거라. 여기에 계실 거니까. 하지만 너 하나만 다른 사부를 두다니 그게 좀... 음... 마음에 걸리지만... 어쨌든 저 분의 뜻이니까."
"아!"
그제야 지혜는 자기만 일대일 교습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쁨으로 미소를 지었다. 지혜는 검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흰머리아저씨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허리까지 꾸벅 숙여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잘 부탁 드립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머리를 긁으며 하품을 했다. 그리곤 뒤에 있는 벽에 기대며 한마디 했다.
"그리 정중하면 내가 오히려 부담되잖냐. 나는 '에이'라고 불러라. 미안하게도 이름은 말해줄 수가 없는 사정이라서 말이지."
=5장=
검도에 다니는 일도, 학교 공부를 하는 일도 꾸준히 진행되는 가운데,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혜는 학교에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문영이의 연애일기와, 유애의 지식전달 덕에 언제나 흥미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이 날은 또 운이 좋아서였는지,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오니 교실에 있는 사람은 경식이 밖에 없었다.
경식이는 아침부터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전교 수석 아니랄까봐, 아무래도 언제나 공부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아이는 학교 공부가 아니라면 전혀 관심도 없는 것인지 지금까지도 매일같이 이런 패턴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문영이가 질색이라고 말했던 것이고, 다른 아이들도 인간이 아닐거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혜로서는 그 모습이 멋있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에, 아주 옛날 일이긴 해도 경식이가 유애와 지혜에게 동시에 말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서울대에 들어가자.'
이 말에 당연히 유애나 지혜는 놀랄 뿐이었다. 서울대라는 갑작스런 말에 동의할 아이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게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서울대는 아무나 다 갈 수 있는 곳인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 지혜가 경식이의 집에 몇 번 놀러갔을 때 언제나 경식이는 서울대를 언급했다. 자신의 꿈으로 삼아버린 것이었다.
오늘 이 모습도,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경식이는 자신의 꿈에 도전하고 있는 노력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인 것이었다. 그래서 경식이를 좋아하게 된 지혜였다.
'나나, 유애나 다른 아이들은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겠다는 막연한 상상만 해보았을 뿐이지만, 그것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 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다지 노력하지도 않았었어. 하지만 그 때부터 경식이는 달라보였었어. 서울대를 들어가려면 무조건 최고여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 길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지혜는 잠시동안 경식이를 바라보며 제자리에 서있는 채로 생각에 잠겼다.
'중학생이 되면서 깨달았어. 저 아이는 최고 속도로 그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이제 출발하려던 나는 계속해서 가로막는 장애물이 생겨나 속도를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애초에 시작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질 못했다는 것을. 그래서 저 아이가 부러워.'
지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경식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경식이는 지혜가 바로 옆으로 다가와도 알아채지 못하고 교과서를 보고 입으로 내용을 중얼중얼거리며 읽고 있었다. 지혜는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미소를 지었다. 앞머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면 눈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저기 경식아."
지혜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경식이는 그제야 자기 바로 옆에 지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책을 덮었다.
"아, 언제왔어? 일찍왔네. 평소에는 이 시간이면 나밖에 없었는데."
경식이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마치 무한할 것 같은 인자함이 느껴지는 그 미소 때문에 지혜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다시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너는 언제나...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꿈에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거니? 나는 있잖아...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 꿈이나,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지를."
지혜가 약간씩 더듬거리며 묻자, 경식이는 머리를 긁으며 약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그냥 나는 어릴 때 이렇게 살라고 배웠어. 그냥 그대로 지켜온 거야. [삶에 목표를, 목표에 계획을, 계획에 실천을] 이게 우리집 가훈이었거든."
경식이에게서 좋은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지혜는 여전히 자신감이 없었다. 성적은 낮은 편이 아니었지만 더 올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또 경식이처럼 확실한 목표를 지니지 않는 이상은 아무것도 안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착잡한 기분으로 학교를 마치고 교문 밖으로 걸어나오니, 저번 주에 보았던 그 웅대한 나무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간 없어졌던 그 남자아이가 또 나무 위에 누워있었다. 지혜는 멀리서 보고도 그 때의 남자아이라고 확신해서 재빨리 달려가보았다. 예전과는 달리 모자는 배에 올려놓고 눈도 멀뚱히 뜨고 있었지만, 역시나 그 때처럼 여러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몰려서 남자아이의 몸 위에서 놀고 있었다.
"저기, 아! 안녕!"
지혜가 달려온 탓에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그 아이는 예전의 귀찮아 하던 태도와는 달리 지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지혜를 주시하였다.
"네가 언제 또 올까 기다리고 있었어!"
지혜는 잠시 가방을 뒤지더니 동물먹이가게에서 산 종합세트 봉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남자아이는 그것을 건네받더니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봉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넌... 동물하고 친한거 같아. 그렇지? 나도 친해지고 싶어!"
지혜가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지혜가 걸어가는 길에 있는 동물들을 모두 도망치느라 바빴지만, 아마도 이런 동물들을 가까이 해보고 싶은 마음정도야 어떤 아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장난의 수준이지만 동물에게야 목숨이 걸린 일이니 경계하지 않을리가 없고, 그래서 결코 이뤄지지 않을 일이기도 하기에 아이들에겐 언제나 상상만으로 남아있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건 문제가 아냐. 동물 따위 때문에 나한테 접근한게 아니겠지?"
그 남자아이가 말했다. 그는 동물 먹이 봉지를 뜯더니 한웅큼 쥐어서 새들에게 던져주었다. 새들이 그걸 받아먹느라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는 다시 지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조차 한명도 없었는게, 갑자기 왜 너는 두번이나 인사를 건넨거지? 내게 관심이 있나?"
"아니, 단지 네가..."
지혜가 약간은 동정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쓸쓸해보였어. 가만히 누워있는 모습이 좀 슬퍼 보여서..."
지혜가 말을 흐리자 가만히 듣던 남자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랬다가 잠시 웃는 것 같기도 하더니, 어느새 화난 표정으로 바뀌어서는 소리를 질렀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아무렇게나 동정하지 마!!"
그 남자아이는 나무에서 뛰어내리더니 땅바당에 먹이를 확 뿌리고는 봉지만 도로 지혜에게 돌려주고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6장=
그 후로 한참이 지난 날이었다. 지혜가 그 때의 신비한 남자아이를 생각하고 있다가 문득 집앞의 놀이터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밖에 나왔다. 시간은 밤 때여서 어둑어둑했는데, 오늘은 놀랍게도 하늘에 별 몇개가 보였다. 이 스모그에 휩싸인 서울에서는 별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맑은 날씨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경식이와 유애와 지혜는 어릴 때부터 어울려 놀곤 했었다. 그 습관은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아서 가끔 놀이터에서 마주치곤 했다. 이 날도 그런 이유 때문에 세 사람이 아무 약속도 없이 만나게 되었다. 지혜가 제일 먼저 상상에 잠긴 채로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경식이와 유애가 거의 동시에 반대방향에서 나타나서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세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 유애야, 경식아. 또 보네."
지혜는 두 사람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유애는 경식이에게 나머지 하나의 그네자리를 빼앗길 까봐 재빨리 달려와서 앉아버렸고, 그 모습을 본 경식이는 피식 웃으면서 기둥에 기대어 섰다.
"너 표정이 평소랑 다른거 같다?"
유애가 지혜를 보더니 그네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겠지만 지혜는 유애가 자신의 마음을 읽은 줄로 생각하고 깜짝 놀라며 당황해했다. 결국은 유애와 경식이의 심문을 몇 차례 받고서 진술을 내뱉게 되었다.
"이상한 아이를 봤어. 이상하긴 하지만 신비롭고, 뭔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아이 같았어. 딱 두번, 보리수나무에 앉아있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까 뭔가 시름에 잠긴 것처럼 슬퍼보였어. 그래서 어쩐 일일까 싶어서 말을 걸어봤는데 날 귀찮아 하는거 같더라구."
지혜가 말하고 나서 잠시 웃었다.
"아무래도 난 쓸데없는 참견을 했던 거 같애."
유애가 한숨을 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넌 그 버릇을 못고친단 말이야. 옆에서 본 난 기억하고 있지만, 넌 옛날부터 그랬었어. 내가 볼 때는 장점이니까 괜찮아."
"아 맞다!"
유애와 지혜가 왠지 서먹해져서 말을 중단했을 때, 갑자기 경식이가 두 손을 맞대며 손뼉을 치더니 매우 밝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초밥이나 먹을래? 내가 너희들한테 언젠가 한번 사줄려고 용돈을 모아왔거든. 나한테는 너희들밖에 친구가 없어서, 뭔가 하나쯤은 해주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그런 기분도 풀어보자, 응?"
그 말에 유애는 입을 벌리면서 놀라더니 초밥의 가격을 일일이 거론해가며 경식이에게 돈이 부족하지 않냐고 물었다. 경식이는 자신이 아는 일식집에서는 부담없을 거라면서 지혜의 손까지 붙잡고 끌고 갔다.
지혜는 아주 어릴 때부터 경식이가 뭔가를 잘 사주고는 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경식이가 공부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중하게 된 뒤로부터는 더 이상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친했던 친구인 지혜와 유애랑만 놀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 때 대부분 지혜와 유애는 경식이의 공부를 방해하거나 혹은 같이 공부하는 쪽으로 놀 뿐이었지만.
정말로 경식이는 유애와 지혜를 일식집까지 데려오더니 그것도 그 집에서 가장 고급의 종류를 특대로 시켰다. 지혜는 가격표를 보고는 3만원이 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초긴장 상태가 되어 있었다. 유애는 벌써 위압감과 부담감에 정신이 나가서 멍해져 있었다. 중학생인 경식이가 도대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곳에 데려온 걸까?
"너... 너 너, 말이야..."
유애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왠만해선 말을 또박또박 하는 유애인데에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부모님한테 안 혼날까?"
"유애는 특히 초밥을 좋아하잖아. 지혜도 좋아하는 음식이고. 그러니까 계속해서 생각해왔었어. 괜찮아. 마음 푹 놓고 먹어."
경식이는 초밥집에 들어온 뒤부터 간이 부은 사람처럼 계속 미소지은 채로 여유롭게 말했다.
"아, 아무래도 우리도 돈을 내야할 것 같애... 유애야."
지혜가 잠시 자신의 지갑을 뒤지면서 말했다. 그런 사이에 어느새 초밥은 나왔고, 알밥과 김밥 및 된장국 등으로 어우러진 부식도 따라나왔다.
유애는 초밥을 보자마자 인격조차 변해버린 것처럼 좋아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 아이가 유난히도 이 음식에는 약했던 것이었다. 지혜는 점점 더 부담을 가지며 음식은 아주 조금씩만 먹었지만, 유애는 경식이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자기 접시에 초밥들을 옮겨가며 먹어댔다.
"아하하하, 너희들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경식이가 진심으로 만족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유애는 그 순간 흠칫하며 먹는 것을 중단했고, 지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남들이 알아볼 수 없게 미소를 지었다. 옛날부터, 이렇게 확연하게 다른 세 사람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면서 살아왔던 것이었다. 게다가 세 사람이 모두 부모님 없이 자란 고아이기 때문에 더더욱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그래. 나는 결코 이 아이들과 떨어져선 살 수 없을거야. 유애랑 경식이야 말로 내 가족인거야. 우리들은 모두 똑같은 처지에 있었어. 버려진 아이들이었고, 고아원에서 자랐어. 그리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는 유애랑 나랑 경식이 모두 한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지. 앞으로도,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나에게 더 이상의 꿈은 없어도 됄 것 같아.'
지혜는 고개를 여전히 숙인채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유애는 혼자먹다가 전혀 먹지 않고 있는 지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몰래 지혜의 접시에 연어초밥을 옮기고 있었다.
"참, 우리들 있잖아."
경식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유애는 그 순간을 노려 마지막 남은 참치초밥을 가져오려 했지만 지혜가 젓가락을 들다 말고 그 초밥을 너무 먹고싶은 표정으로(사실 표정의 반도 보이지 않았지만)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애는 눈을 감고 잠시 헛기침을 했다.
"셋이서 꿈을 약속해보자."
"우리의 목표 말이야?"
유애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어느새 배불리 먹었더니 약간의 졸음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말이야... 예전에도 말했듯이 서울대의 졸업이 꿈이야. 이 꿈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어."
경식이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동안 유애와 지혜는 멍하니 경식이를 쳐다보고만 있었기 때문에 대답이 없었다. 경식이가 약간 쑥스러워졌는지 초밥을 하나 입에 넣었다.
"그래... 뭐, 그런거라면."
유애가 수첩과 펜을 꺼내들더니 뭔가를 적어내려가면서 말했다.
"내 꿈은 세상의 진리를 찾는 것, 모든 지식을 손에 넣는 것, 그리고 고아원 하나를 설립하는 것 정도랄까?"
유애가 말을 마치고 수첩을 딱 접어 넣은 뒤에 힐끔 지혜를 바라보았다. 지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로 잠자코 있었지만, 유애가 얼굴을 억지로 들자 새빨개진 채로도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저... 나는... 아..."
지혜는 잠시 자신이 평소에 생각해 왔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목표라고 말할 만한 것은 없었다. 최근에 시작한 검도를 어떤 장래희망으로 삼기도 좀 어중간하고, 그렇다고 학교 진학쪽을 생각하면 경식이를 따라 갈 만한게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혜는 홧김에 소리를 질렀다.
"나, 나는 경식이랑 유애랑 같은 학교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함께 들어가고 싶어!!"
"그럴려면 너나 나나 지금부터 죽을 정도로 공부해야 할텐데?"
유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수첩을 다시 꺼내서 적는 것은 잊지 않았다. 경식이는 지혜의 말을 듣고 아까보다도 더 밝게 웃고 있었다.
유애는 잠깐 화장실을 가겠다면서 슬쩍 빠지더니 화장실로 가는 중에 몰래 미소를 지었다. 지혜의 꿈이라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혜는 말을 해놓고도 스스로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인채로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좋을 거 같다. 우리 셋이 함께 갈 수 있다면."
경식이가 말했다. 그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좋을 거 같아... 정말."
FIW.
이 뒤의 내용도 있는데 정말 쓰기가 싫습니다.
시련의 내용이기 때문에 쓰는 사람도 괴롭거든요. 차라리 여기서 중단할까 하는것을 과감하게 고민해 봅니다. F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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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chi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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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편으로 나눠볼까 하다가 한편으로 올렸는데... 괜찮으려나?
우어어어, 잘봤습니다.[♡] 스토리가 조금은 러브히나 같기도 해요(...타앙!!)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으면 해요. 아직 그네들에 대해 모르는 점, 궁금한 점이 많으니까요. 좋은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