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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담합, 못하는 게 바보?…'나만 살고 보자'
"오늘 (처방)약 있습니다. 아래층 약국에서 약 사드시면 됩니다."
서울 강남지역의 한 병원. 카운터에 있는 20대 여성이 친절하게 안내한다. 처방전에는 종근당아목시실린캡슐500mg과 대화이부프로펜정400mg 등의 약들이 기재돼 있다. 너무나 기계적이면서 자연스럽다.
5층 병원이 친절하게 안내한 약국은 해당 건물 1층에 위치한 곳이다. 처방전을 많이 수용하는 탓에 시간이 없어서 그런지 약사의 복약지도도 ‘식후 30분 복용’이 끝이다.
이는 한 40대 남성이 최근 들렀던 병원과 약국에서 경험한 사례다. 환자는 병원이 안내한 약국이 아닌 다른 약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행여 처방약이 없어 괜한 헛걸음을 할 것만 같아 1층약국에서 조제를 했다. 다른 환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좀 점잖은 편이다. 전국적인 브랜드를 갖고 있는 한 소아청소년과의원의 경우 처방을 빈번히 변경함으로써 특정약국과 밀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의료기관과 담합을 하고 있는 약국 외에 신생약국이 생겼을 때, 주로 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는 같은 건물에 위치한 약국에 처방전을 몰아주기 위해 인근 다른 약국에는 처방변경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A시럽제를 B시럽제로 변경하면서 같은 건물에 있는 약국에는 정보를 알려주면서도 경쟁약국에는 알려주지 않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경쟁약국은 처방전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단골환자까지 놓치는데다 재고부담까지 떠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담합약국은 의료기관에 선 지원을 했거나 사후에 사례를 하는 방식으로 답례를 하고 있다는 게 정설로 인식되고 있다.
일부 이비인후과의원이나 내과의원의 경우 특정약국에 처방전을 몰아주고 그 건수에 따라 사례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본지 기자기 10여년전 취재한 바에 따르면 '1건당 500원'의 사례비 공식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직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한 지역약사회장은 "이비인후과의원 등에서 처방을 낸 이후 그 건수를 출력해 구체적으로 사례금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면서 "나에게도 그런 제안이 있었지만 단박에 거졀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의사들 커뮤니티에서는 (약사로부터 처방을 대가로) 지원금을 못 받으면 바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라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개탄했다.
의약담합은 이웃약국으로 처방전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혼자 독식하겠다는 말이다. 이웃약국이 죽건 말건 나 혼자만 살면 된다는 비루한 의식 탓이다. 대신 의사와의 관계는 과거의 수직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갑을관계이거나 심하게는 주종관계인 셈이다.
"이웃약국을 죽여라" 조제료 할인과 난매
이웃약국을 죽이기 위한 전형적인 행태는 바로 조제료 할인과 구입가 미만 판매행위다. 가격으로 이웃약국과의 차별성을 내세우며 환자를 유인하겠다는 의도다.
구입가 미만 판매행위, 즉 난매현상이 주로 발생하는 경우는 신규 약국이 개설됐을 때다. 처음부터 단골환자를 끌 수 없는 만큼 낮은 가격으로 환자를 유인하는 수법이다. 서울지역 한 약사회에 따르면 신규개설 약국은 영업 차원에서 초창기 3~4개월 정도 난매를 하는 것은 상식수준이라고 귀띔했다.
보통 대형약국이 OTC품목을 낮은 가격으로 대량 구매한 뒤 소비자에게 이웃약국보다 싼 가격으로 판매하는 행태가 지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구입한 가격 밑으로 판매하지 않는다면 불법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보다는 약국이 밀집돼 있고 유동인구 많은 시장통 인근 지역에서 가격경쟁을 벌이거나 신규 약국이 치고 들어와 가격경쟁이 촉발되는 경우가 난매를 부추긴다고 할 수 있다.
난매는 어느 지역이든 약사사회의 골칫거리다. 대표적인 난매품목이 있을 정도다. 유명 잇몸치료제나 위장약, 변비약 등이 그렇다. 한 약국에서는 2만원에 판매하는데, 다른 약국에서는 1만5000원에 판매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유통과정에서 제약사가 가격질서를 제대로 잡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약사가 유명품목을 미끼로 환자를 유인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게 정설이다.
한 지방약사회 관계자는 “할증 등으로 대량 매입해 정상사입가 미만으로 판매하는 행태들이 시장통 약국과 대형약국 등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약사들은 조제료 할인과 관련 ‘약사의 조제수가를 깎아먹는 행위로 약사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경쟁을 기본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존심보다 생존이 우선이다. 살아남기 위해 이웃약국과 경쟁해야 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조제료 할인 등 불법행태를 일삼는 것이다.
몇백원부터 몇천원까지도 할인해주는 사례가 있다. 어떤 환자는 노인할인이 없냐며 은근히 조제료 할인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일부 약국에서는 "차비라도 하라"며 조제료 할인을 해주는 것이다.
비공식적이지만 실제 조제료 할인을 하는 약국으로 인해 인근 약국이 어느 정도 피해를 보는지 조사된 적도 있다. 부산지역 한 약국의 경우 조제료 할인 약국이 들어선지 몇 개월 되지 않아 기존 수입의 1/3이 줄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부산지역 한 약사회 관계자는 "약국간 경쟁과 환자 요구로 조제료 할인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약사가 인수한 약국에서 무자격자가 일반의약품을 판매하고 있다. |
한약사에 약국 넘기는 약사, 돈 앞에 '자존심'마저
약사사회의 '나만 살면 된다'는 의식은 다른 직역과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몇 년 사이 약사는 한약사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약사사회는 한약사가 약사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보건당국에서는 규정미비로 규제할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약사에게 약국을 넘기고 그 곳에서 근무약사로 일하는 약사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서울 강북지역의 A약국. 이 약국은 같은 곳에서 20년 이상 자리를 지켜왔다. 대로변에 놓여 있어 유동인구가 많다. 처방건수는 하루 20건 내외로 적지만 매약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최근 이 약국 자리에 '한약국'이 들어서면서 지역약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약국을 운영하던 B약사가 지난 6월 한약사에게 1억~1억5000만원의 권리금을 받고 약국을 넘긴 것으로 전해진 때문이다.
약사가 한약국 개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한약사에게 약국을 넘겼다는 점과 그 한약사 밑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했다는 점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계약 문제를 지역약사회나 개별 약사가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33㎡(10평) 남짓한 약국 규모와 20건 내외의 처방건수 등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높은 권리금인데다 D약사는 이것 때문에 자존심을 판 것이라고 지적받고 있는 것이다. 결국 B약사는 이런 비난 탓에 1개월만에 한약국 근무를 그만뒀다.
지역약사회는 "약사가 한약사에 약국을 넘기는 것은 물론 근무약사로 일까지 하는 모양새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본인만 살겠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新 양육강식의 시대, 선량한 약국 설자리 없다
약국간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선량한 약국들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서울 남부지역의 C약국. 한 자리에서 30년 이상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인근에 의료기관은 없었지만 유동인구가 많은 위치여서 매약으로 수십년간 동네주민을 보살펴온 것이다.
지난 7월 이 약국은 폐업했다. 대표약사가 여러 번 바뀌었고 시대가 바뀐 탓도 있겠지만 몇 해전 이웃건물에 가정의학과의원과 F약국이 나란히 들어선 때문이었다.
2층 가정의학과의원에서 나오는 처방전은 1층 D약국에서 대부분 흡수했고, C약국은 처방전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매약에 의지해오던 E약국은 매약 환자마저 D약국에 빼앗기게 된 것이다.
가정의학과의원과 D약국의 담합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D약국은 처방약을 갖춰놓고 있고 C약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상호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서울지역 한 약사는 "환자가 없는 곳에서 약국이 살아남기 어렵다"면서 "양심적으로 약국을 운영하는 사람만 바보 취급 받는 세상이 됐다"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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