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 학살의 진상
-5월22일 주남마을에서는 무슨 임무를 수행했는가요?
“5월23일 08시경 주남마을에서 62대대 병력에 의해 시위대가 탄 버스가 총격을 받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희 부대원이 여단본부 지시로 매장을 하는 것을 지원해 준 사실이 있었을 뿐 그 외 다른 상황은 없었습니다.”
-당시 몇 명이 사망했는가요.
“정확한 숫자는 모르나 12~16명이 사망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위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홍남숙의 진술에 의하면 사망자는 15명이고, 부상자는 3명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저는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주남마을에서는 두 번에 걸쳐 주민학살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희 대대가 22일 새벽 가장 먼저 도착하여 24일 다른 대대와 같이 철수했으나, 그 동안 위와 같은 사고는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보병학교 교도대와 11공수 병력 간에 오인총격 사건이 있었지요.
“예, 5월24일 13시경 20사단 병력과 교대하고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는 도중에 13시55분경 맨 앞에 가던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해 교도대 병력이 총격을 가해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선두에 가던 장갑차와 트럭 2대가 완전히 파손되고 63대대 대대장도 부상을 입고 대대원 9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 사건이 있고난 직후 63대대 병력이 송암동 주민 4명을 사살한 사실이 있는데 알고 있었는가요.
“저는 여단장의 지시로 위 63대대의 사망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후송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몰랐고, 그런 사실은 광주청문회때 듣고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시위대에 대한 과잉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살상행위 등에 대해서는 그 상황을 31사단에 보고한 사실이 있는가요.?
“31사단에는 보고한 사실이 없고 여단본부에만 보고했습니다.”
-특히 실탄 분배 및 발포 사실에 대해서 조차 31사단에 사전보고 및 즉각적인 사후보고가 없었지요.?
“예, 없었습니다.”
-피의자 등 대대장들이 위와같이 여단본부에 보고했다면 본부에서는 이를 다시 31사단과 戰敎司에 보고해야 함에도 거의 보고된 사실이 없는데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요?
“솔직히 말해 공수부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예부대로서 여단장 정도 되면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외에는 후방에 있는 향토방위사단인 31사단이나 전교사령관 등을 가볍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희 대대장들도 31사단장을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있는데 사령관의 말을 듣지 힘없는 31사단장 말을 듣겠습니까.”
첫댓글 "시위대가 탄 버스"란 광주 외곽 경찰서들을 습격하며 무기를 탈취하던 무장 시민군의 버스를 가리킵니다. 5월 21일 도청을 점령한 후에 무장 시민군은 폭동을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겠다면서 트럭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경찰서와 파출서들을 습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버스안에서 사망한 15명의 사망자를 보시요.과연 그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러 가다가 죽었는지 확인 바랍니다.
그럼 총기 무장을 한채 광주 외곽을 돌아다닌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보아니야,민중봉기란 말도 안들어 봤니? 그럼 펜을 들고 돌아 다닐까?
역사학도;몰살당한 버스속 사람들이 총으로 군인들에게 반항한것으 아닌데, 사살했잖아요..아마 어린이들이 타있었으면 그아이들도 죽였겠지.저수지에서 놀던 아이들에게도 사격했으니
62대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주남마을 주민은 '시위대가 탄 버스'라고 대답하고 있군요. 시위대가 발포를 한 다음 시점에서 어떤 장소에 총기를 소지한 자가 끼어서 국군에 대한 호전적 슬로건을 외치며 버스에 타고 있었다면 사살할 수 있다고 봅니다. 63대대가 사살한 송암동 주민 4명도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거나 진압군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양민학살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쏘지는 않을 테고, 시민이 진압군을 살해한 다음 단계에서는 진압군은 자기들에게 사격할 자세가 보이는 상대에겐 먼저 쏘지 않으면 진압군이 죽는 처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