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터
신현숙
보풀을 잡아당기면
사라진 문이 열릴 것 같아
이런 밤엔 차가운 귤을 죽은 사람과 나눠 먹는다
언니는 빨간 스웨터를 한 번의 겨울 동안만 입어보았다
너무 빨리 자라서 몸에 구멍이 났던 거라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믿을 수 없는 말
창문을 깨부수던 겨울바람 때문이라고
엄마는 스웨터를 풀어 장갑을 만들었다
한 개의 사슬에서 다른 사슬을 엮어 눈이 빨개지도록
목숨이라도 될 것처럼
대문을 열어두고 밥을 덥혀 놓고
마루에 쿵쿵 발소리를 냈다
장갑을 끼지 않으려고
겨우 내내 도망치는 동안
눈이 오고 사람이 가고 장갑 속에서 빨강이 녹았다
사라지면
사라진 자리에 새집을 짓는 손
폐허에서 돌멩이를 줍는 손을 보았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끝없이 날라다 놓는 밥처럼 희고 둥근
저 안개 속 벼랑 아래
누군가 손가락을 녹여 사슬을 뜨고 있다
실타래를 끌어당겨
시린 발을 덮고 죽은 발을 다시 짜고
구멍 난 몸뚱어리에 숭숭 빛이 다가오면
등이 따뜻해졌다
꽃의 기원
저 섬에는 한 집 밖에 안 살아요
다 육지로 나갔다니까요
거제 고래호 선장님
파도 같은 목소리에
동백나무에서
꽃송이 후두둑 떨어진다
붉은 핏덩이가
빗물 고인 웅덩이에
덩어리 채
첨벙
아까워
성긴 빗자루에
무른 몸을 기대고
동백 알을 살살 모으는 한 사람
바다 한번 보고
쓸다가
지나는 배에 손을 흔드는데
벼랑을 껴안는 파도
파도를 부수는 벼랑 사이에
붉은 마음들
수북하다
마음이 있다
시가 나를 붙들었다 오늘.
독자로만 남기로 마음먹었다. 식탁 위에 놔두곤 했던 시집들을 책장에 꽂았다. 가방에 넣어 다니던 시집도 서랍에 두고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다.
대왕 소나무 군락지로 가는 산길은 쉽지 않았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숨을 고르며 돌아갈까, 생각했다. 조금만 더 가자고 말해주는 그를 따라 몇 굽잇길을 더 걸었다. 왼쪽에 벼랑을 두른 능선엔 햇살이 쏟아졌다. 솔 향기 짙어지네, 하는 순간 망토처럼 펼쳐진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놀랍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나무들 사이를 노루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여행은 여정을 마친 사람에게 한 줄의 답장을 준다고 했던가.
돌아온 날 저녁 늦게 당선 소식이 왔다.
시가 내 옷깃을 슬쩍 잡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이제부턴 팔짱 끼고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벼랑으로 데리고 가 세상의 끝을 보여주어도 좋겠다. 어스름 저녁 여우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깊은 숲속으로 가도 좋겠다.
발을 떼면 날아갈 것처럼 들뜨는 마음이 있다.
금세 부서지고 흩어지는 슬픔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뜨거운 희망의 언어로
삶의 후미진 구석마다 불을 밝혀주고 싶다.
오늘의 환대를 머리맡에 오래 걸어 두고 싶다.
그 빛으로 등불을 삼아 아직 쓰지 못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매우 절실하고 매우 소중한 일이 내게 있음을,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음을 감사하며 적막한 삶을 어루만지고 싶다.
시와 함께 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