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상절리 여러 가지 생김새의 주상절리가 경주 양남에서 울산 강동에 이르는 바닷가에 모여 있다.
ⓒ 정명조
▲ 누워 있는 주상절리 천연기념물 제536호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의 일부다. 땔나무를 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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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채꼴 주상절리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주상절리다. 지질학자들도 감탄하는 생김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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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항 등대 정자항 방파제 끝에 귀신고래 등대가 있다. 고래 도시 울산을 나타낸다. 바다를 헤엄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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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궁과 월지 ‘역사를 품은 도시’ 경주의 밤은 화려하다. 동궁과 월지에 가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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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를 들으며 길을 걸었다.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의 일부다. 경주 양남 읍천항에서 하서항까지 1.7km 길이다.
20년 전,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날마다 출퇴근길에 바라보던 곳이다. 그때 출입 금지된 구간이 개방되어, 이제는 바다를 이웃하고 걸을 수 있다.
바닷가를 따라 주상절리가 모여 있다. 기울어지고, 위로 솟고, 누워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이다. 부채꼴 생김새도 있다. 2012년 천연기념물 제536호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으로 지정됐다.
오랜만에 바닷가를 찾았다. 저녁 찬거리를 위해 그물을 던지던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여름이면 즐겨 찾던 나만 알고 있던 곳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방학 때만 붐비던 정자해변 사택 가까이에 호텔과 큰 아파트촌이 들어섰다. 새벽마다 운동하며 찾던 정자항 방파제 끝에 있던 등대는 귀신고래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런저런 추억과 경주의 화려한 밤에 취해 꿀잠을 자고 난 다음 날, 용을 찾아 나섰다.
▲ 감포 용굴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 살았다는 굴이다. 네 방향으로 뚫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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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굴 가는 길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치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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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촌항 ‘감포깍지길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의 출발지다. 전촌항에서 송대말등대까지 3.3km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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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포 용굴
경주 감포 전촌항에서 해파랑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큰 바위에 구멍이 있다. 용굴이다. 1970년대 이곳에 간첩이 나타난 뒤 사람들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2015년 일부가 풀려서 알려진 곳이다. 군사작전지역이어서 지금도 해가 진 뒤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굴 입구로 들어가면 세 방향으로 구멍이 있다. 입구를 포함하여 네 방향마다 용이 한 마리씩 살았다. 죄를 지어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좋은 일만 했다. 옥황상제가 이를 알고 승천할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단념하고 용굴에 남았다.
굴 안은 물결이 제법 세다. 가까이 들어갈 수 없다. 마치 용이 위협하는 것 같다. 적의 침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노라는 경고를 하는 듯하다. 동해안에는 용에 관한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 경주 대왕암 문무왕이 죽은 뒤 화장하여 유골을 뿌린 곳이다. 용이 된 문무왕은 이곳에 머물면서 감은사를 오갔다. 사적 제158호 ‘경주 문무대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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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은사 문무왕이 짓기 시작한 절을 아들 신문왕이 마무리했다. 지금은 절터와 탑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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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견대 바다 위에서 대나무 두 개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보고 신문왕이 찾아갔다. 용이 대나무를 주었다. 이를 피리로 만드니, 만파식적이다. 멀리 대왕암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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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왕암
서기 681년, 신라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신하들이 화장했다. 유골을 빻아 봉길리 앞바다 큰 바위에 뿌렸다. 지금의 문무왕 수중릉 대왕암이다.
'君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俗傳王化爲龍仍其石爲大王石.'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세속에서는 왕이 용이 되었다고 전하니, 그래서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陵在感恩寺東海中.' (감은사 동쪽 바다에 왕릉이 있다.) <삼국유사> '葬以積薪滅粉骨鯨津.' (나무를 쌓아 화장하고, 뼈를 빻아 고래 나루에 뿌렸다.) <문무왕릉비>
여러 문헌에서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곳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도 어찌 된 까닭인지, 18세기경부터 경주 괘릉(掛陵)을 문무왕릉이라고 했다. 김씨 문중에서도 괘릉의 혼유석 옆에 문무대왕릉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러다가, 1967년 5월 삼산오악조사단이 대왕암을 발견했다고 밝힌 뒤, 같은 해 7월 '경주 문무대왕릉'이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여러 곡절 끝에 대왕암을 문무왕릉으로 공식 인정했다.
2001년 KBS 역사스페셜 팀이 조사하니, 대왕암 안쪽 여러 곳에 동그랗게 다듬은 자국이 있었다. 문무왕 시신을 경주 남산 능지탑에서 화장한 뒤, 유골을 갈아 대왕암에 뿌렸다. 시신을 모시지 않았지만, 문무왕 넋이 머무른 곳이다.
문무왕 아들 신문왕은 감은사를 완공하여 아버지 뜻을 이었다. 감은사 금당의 마루 밑에 공간을 만들고, 섬돌 아래에 구멍을 뚫었다. 용이 된 문무왕은 이 구멍을 거쳐 동해와 감은사를 오가고, 공간에 머물렀다.
문무왕이 죽은 이듬해, 신문왕이 이견대를 찾았다. 바다 위에서 대나무 두 개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보고 배를 타고 다가갔다. 용이 대나무를 주었다. 이를 피리로 만드니, 신비한 힘을 가진 만파식적이다. 피리를 불면 단비가 내리고, 왜적이 물러났다.
▲ 울산 대왕암 문무왕의 왕비 자의왕후가 용이 되어 자리 잡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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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암공원 바다 자의왕후가 자리 잡은 곳에는 바다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곳곳에 낚시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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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암공원 바위 불그스름한 바위와 푸른 소나무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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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븐개 대왕암공원 남쪽 해안이다. 1960년대까지 고래잡이배가 이곳으로 고래를 몰아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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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대왕암
울산에도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이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왕비 자의왕후도 세상을 떠났다. 문무왕처럼 왕비도 용이 되었다. 하늘을 날아, 경주 대왕암에서 100리 떨어진 울산 앞바다 큰 바위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 바위가 바로 울산 대왕암이다.
지자체에서 이를 그럴듯한 이야깃거리로 만들었다. 대단한 스토리텔링 관광 상품이다. 더 나아가, 2004년 울기공원의 이름을 대왕암공원으로 바꿨다. '천 년을 건너는 시간의 풍경'으로 울산 12경에 선정되었다.
울산 대왕암은 다리를 건너 쉽게 갈 수 있다. 규모나 웅장함이 경주 대왕암보다 뛰어나다. 대왕암공원도 한몫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소나무가 어우러져 사람들을 유혹한다.
▲ 슬도 등대 울산 대왕암에서 해안선을 따라가면 슬도가 있다. 한가운데에 있는 등대에서 파란 고래들이 헤엄치면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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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대왕암에서 해안선을 따라가면 슬도가 있다. 파도가 바위 구멍을 스치면 거문고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방어진항으로 들어오는 파도를 막아주는 바위섬이다. 바위에 구멍이 송송 나 있어 곰보섬이라고도 한다. 돌맛조개 작품이다.
슬도 한가운데에 등대가 있다. 하얀 등대에서 파란 고래들이 헤엄치고 있다. 해안선 너머로 망망대해가 이어진다.
▲ 경주 원성왕릉 무덤을 만들 때 구덩이에 물이 고여 관을 걸었다고 해서 괘릉이다. 50년쯤 전까지 문무왕릉으로 소개했다. 1963년 사적 제26호 ‘경주 괘릉’으로 지정했다가, 2011년 ‘경주 원성왕릉’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씨 문중에서 세웠던 비석은 없고, 받침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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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쯤 전, 문무왕과 자의왕후는 용이 되었다. 지금도 용 두 마리가 동해에서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이 우리를 함부로 업신여길 수 없는 이유다. 일본이 한반도를 넘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