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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4,43-54
이적과 표징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모세가 장대에 구리뱀을 달아 올린 것처럼 당신도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만 함을 설명하십니다.
구리뱀이 없었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만 뱀에 물렸더라도 구리뱀을 바라본 이들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 13일, 포르투갈의 파티마 근처 코바 다 이리아 들판에서 일어난 태양의 기적은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 될 정도로 수천 명의 사람이 목격한 기적이었고 성모 마리아를 여섯 번 보았다고 주장한 세 목동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날 비가 오고 있었는데, 구름 중간이 뚫리며 그 밖으로 태양이 성체 모양으로 땅에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당시 모였던 사람들은 종말이 온 줄 알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땅은 말라버렸고 옷도 말라 있었고 병이 들었던 사람들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실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기적을 보았던 사람이 모두 구원받았을까요? 여전히 기적에 반대하던 이들은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그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분명히 많은 수가 다시 냉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지만, 표징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에서 기적이나 이적, 그리고 표징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갈릴래아 지방 사람들은 처음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예루살렘에 다녀오고 나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으킨 많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표징은 오늘 카나의 혼인 잔치에 이어 두 번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분명 기적과 이적, 그리고 표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기적과 이적은 어느 정도 믿음은 줄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주지 못합니다.
반면 표징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줍니다.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기적은 누군가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려주는 표징이고 이적은 나도 그 누군가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하는 표징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표징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의 믿음이 아니었으면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치 않는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일꾼들이 정결례 항아리에 물을 붓는 믿음도 요구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적이 인간의 믿음의 순종이 개입하였기에 나도 그렇게 순종하면 나를 통해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게 합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왕궁 관리는 믿고 떠나야 하는 시험을 받습니다.
하루가 지났을 때 집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나 그 기적이 일어난 시간이 예수님께서 종의 병이 나을 것이란 시간과 일치함을 알고 온 가족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궁 관리는 자신의 믿음으로도 표징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면 기적은 어떤 누군가가 “나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니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고 너희는 못 하니까 나에게 순종해야 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에서 이런 일들을 하며 사람을 모읍니다.
그러나 참 믿음으로 성정하지는 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표징이라 말합니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주는 믿음의 행위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기적에 당신 제자들을 참여시킴으로써 누구나 그 기적을 이루는 주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태생 소경을 고치는 장면에서도 소경이 믿음으로 흙을 실로암에서 씻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표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라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의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레지오 단원이 함께한 묵주기도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마귀가 쫓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징이 누군가에게 믿음을 줍니다.
기적은 ‘그분이니까 할 수 있고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표징은 ‘저들도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겠네!’라는 믿음을 주어 본성이 상승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이사야 65,17-21
요한 4,43-54
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 원거리 비대면 치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의료진이 환자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진료는 물론이고 치료까지 하는 시스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원거리 비대면 치료를 실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 머무시는 동안 한 왕실 관리가 황급히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보니, 한걸음에 달려온 것입니다.
왕실 관리는 아들이 처한 위기 상황 앞에 체면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예수님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복음 4장 49절)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들의 상태는 위중한데,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카나와 환자가 누워있는 카파르나움은 33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도보로 간다면 적어도 7~8시간은 걸릴 거리였습니다.
낙타나 나귀를 타고 간다할지라도 네다섯 시간은 잡아야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즉시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치유와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원거리 비대면 치료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복음 4장 50절)
한 인간 한 인간의 개인적인 필요성에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가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달려오느라 기진맥진한 아버지를 눈여겨보십니다.
아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믿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아직 예수님 당신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왕실관리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는 아직 한참 낮았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의 기적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든지 다 현존하시는 멀티 플레이어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33km나 되는 장거리를 죽어라고 뛰어가지 않으셔도 원격치유가 가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였기에 예수님을 향해 집요하게 같이 가달라고 졸라대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졸라대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늑장부리다간 아들과는 영영 이별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탁이 아니라 거의 협박수준입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왕실 관리였지만, 그의 간절한 눈망울과 그의 찢어지는 가슴을 예수님께서는
차마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확인한 가족들과 종들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실관리에게 알리기 위해 동네어귀까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비탄으로 가득 찼던 집안은 순식간에 축제분위기로 돌아섰습니다.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눈앞에서도 똑같이 벌어질 풍경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견뎌나가고 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슬픔에 잠겨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십자가에 허덕이고 있지만, 머지않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큰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4주간 월요일 강론>
(2024. 3. 11. 월)(요한 4,43-54)
<예수님의 권능, 자비, 우리의 믿음>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46-53).”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자비’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고, 어떤 왕실 관리를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병을 지배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고,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 ‘자비’는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그냥 베풀어 주는 은총입니다.
<사랑하니까 사랑만 주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순전히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요한 5,13), 몰랐으니까 믿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을 믿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가 전부입니다(요한 5,6.8.14).
<그런데 그 병자는 치유의 은총을 받은 뒤에 믿음으로 응답하기는커녕 곧바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요한 5,15).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신 은총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의 9장에 나오는 ‘어떤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도 믿음과 상관없이 치유의 은총을 주신 이야기입니다.
그 눈먼 이도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요한 9,36).
그렇지만 벳자타 못 가의 병자와는 다르게, 치유의 은총을 받은 뒤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한 9,38).
3) 48절의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거절하시는 말씀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기적만 바라지 말고 나를 믿어라.” 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믿지 않으면 은총을 줄 수 없다.”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시기로 작정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네 아들을 고쳐 주겠다. 그러니 앞으로는 기적만 바라지 말고 나를 믿어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50절의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라는 말은, 그가 원하는 것을 아직 얻기 전인데도 예수님 말씀을 믿었음을 나타내고, 예수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기적만을 바라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금방 그렇게 변화된 것인지, 시간이 좀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그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라는 53절의 말에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온 집안’은 그의 증언을 듣고, 또 그의 아들의 병이 치유된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이미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믿음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5) 이 이야기의 전개 구조를 보면, ‘어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와(마태 15,21-28) 비슷합니다.
그 여자는 자기 딸 때문에 예수님께 왔다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는 ‘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청했던 것도 받았고, 청하지 않은 것도 받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어떤 왕실 관리’도 그의 아들이 치유되는 은총과 함께, 그 자신이 신앙인이 되는 ‘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도 은총’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은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받았으니까, 또는 받고 있으니까 믿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