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 배포한 자료에서 100% 출제하였습니다.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여러분들은 몇번 문제에서 걸려 넘어지셨나요?
나머지 문제도 한번 풀어보십시오~
문1) O X 문제입니다. 만해스님은 타국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조선땅에서 사시다 가셨다. (X)
문2) 다음 중에서 만해 선사님의 저술이 아닌 것은 몇 번일까요? (2)
① 조선불교유신론 ② 시일야방성대곡 ③ 불교대전 ④ 불교와 고려제왕
※ ②는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
문3) 벽산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지었습니다. 만해스님은 이곳에서 입적할 때까지 말년을 보냈는데,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지은 서울시 사적 제7호인 이 집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심우장)
문4)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만해스님의 이 저술은 당시 조선불교의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조선불교유신론)
※1913년 5월에 발행
문5) 1996년 대한불교청년회가 주최가 되어 독립기념관에서 이것을 세우게 됩니다. 다음 중에서 무엇일까요? (3)
① 만해동상 ② 만해기념탑 ③ 만해어록비 ④ 만해기념관
문6) 1931년 6월, 당시 유일한 불교잡지인 이것을 인수하여 ‘유심’지에서 못 이룬 종교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 잡지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습니다. 이 잡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불교)
문7) 만해 선사님은 조선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해 선사님이 입적하신 연월일은 무엇일까요? (1944. 6 .29)
문8) 만해 선사님은 한공 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해스님의 출생지를 도, 군, 면까지 정확히 써주십시오. (충남 홍성군 결성면)
문9) 1927년 5월, 만해스님은 조선불교청년회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칭하고 제자들과 함께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에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중에서 당시 이 일을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닌 사람은 몇 번일까요?
① 김상호 ② 김법린 ③ 최범술 ④ 손병희
문10) 만해 선사님은 1904년 26세 되던 해, 연곡스님을 은사로, 영제스님에 의해 수계를 하게되는데, 당시 만해 선사님이 출가하신 절은 어디일까요? (백담사)
문11)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만해 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물을 접하던 중 만난 조선의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며 불교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누구일까요? (최린)
문12) 만해스님은 심우장에서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다가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습니다. 이 때가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이었는데, 세수 66세, 법랍39세 였습니다. 그렇다면 만해스님이 안장된 공동묘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망우리 공동묘지)
문13) 이 조직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입니다. 만해스님은 이 조직의 영수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일제는 국내의 애국애족 단체 및 활동에 대해 무자비한 침탈을 감행하였으며 이에 국내 모든 단체는 해체 및 파괴를 당하게 된다. 따라서 국내 모든 항일 운동은 지하(비밀 조직화)로 잠복하게 되며 불교계 역시 비밀결사 조직인 이것을 만들게 됩니다. (만당)
문14) 만해스님은, 조선은 앞으로 꼭 해방이 될 것인데 해방후 혼란이 있을 경우 그 혼란을 수습할 사람은 이 사람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서대문구치소에서 옥사하자 만해스님이 달려가 그 시신을 업고 심우장까지 걸어와서 크게 울며 5일장을 지냈습니다. 호가 일송인 이 분은 누구일까요? (김동삼)
문15) 만해 한용운 선사님은 본관이 청주이고, 호는 만해입니다. 그렇다면 만해를 한자로 써 주십시오. (萬海 or 卍海)
문16) 만해스님의 훌륭한 저술 가운데 ‘불교대전’이 있습니다. 스님은 이 책에서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 책의 편찬을 위해 통도사에서 그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일일이 열람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이 책을 발행한 절은 어디 일까요? (범어사)
문17) 이 잡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1918년 9월에 창간한 이 잡지는 3.1운동의 전위지로서 불교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으로 역사의 어둠을 밝혔던 월간지였습니다. (유심)
문18) 만해스님은 1919년 3월 1일, 경성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옥중에서 3대 원칙을 정해놓고 철저하게 항거했습니다. 옥중에서 거부한 3대 원칙 세가지를 적어주세요. (변호사, 사식, 보석)
문19)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이 신문의 폐간으로 50회로써 중단된 만해스님의 장편소설은 무엇일까요? (후회)
문20) 1919년 7월 10일, 재판장이 ‘피고는 이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만해스님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것을 적었습니다. 이 글에서 스님은 조선독립의 목적을 옥중에서 당당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침략 강점의 일본 군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문21)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1925년 이 사람의 ‘십현담주해’를 읽고 마음에 새로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만해스님도 직접 이 분이 지었던 십현담주해의 주와 비교, 대조하면서 또다른 십현담주해를 지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매월당 김시습)
문22) 만해스님은 1896년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김복한, 이설, 임한주 등이 일으킨 홍주의 이 의거에 가담하게 됩니다. 결국 이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스님은 설악산 백담사 등지로 전전합니다. 홍주의거라고도 하는 이 의거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을미의거)
문23) 1938년 만당 당원들이 일제 검거되는 등 만해스님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던 때 만해스님은 조선불교사를 정리하려는 구상으로 연대별로 고려불교사의 자료를 정리 편찬하려고 자료를 뽑기 시작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은 이 저술은 무엇일까요? (불교와 고려제왕)
문24) 이 사찰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1939년 민족독립운동의 비밀집회장소였던 이 사찰에서 김법린, 최범술 등 몇 명의 동지와 후학들이 베푼 회갑 축하연에 참석하여 기념 식수를 한 곳입니다. (다솔사)
문25) 만해스님은 1936년 조선일보에서 받은 원고료로 이 사람의 묘비를 세웁니다. 오세창의 글씨로 세운 이 묘비는 누구의 묘비일까요? (단재 신채호)
문26) 만해스님은 1920년 5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였습니다. 이 때 강연의 제목의 무엇이었을까요? (철창철학)
문27) 1967년에 만해스님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용운당 만해대선사비’가 건립됩니다. 이 비가 건립된 공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탑골공원)
문28) 만해스님은 1931년 전북 전주에 있는 이 사찰에 보관되어 있던 금강경, 원각경 등 한글 경판 원본을 발견 조사하였습니다. 이 사찰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안심사)
문29) 만해스님이 입적하신 4년 후에 ‘만해 한용운 전집간행위원회’가 결성되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다음 중에서 당시에 간행위원회 위원이 아닌 사람은 몇 번일까요? (1) 조오현은 199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회장
① 조오현 ② 최범술 ③ 박영희 ④ 장도환
문30) 만해스님은 1917년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견성한 후 오도송을 남깁니다. 오도송 가운데 나오는 이 꽃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복사꽃)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 그 몇 사람 객수(客愁)속에 길이 갇혔나 / 한 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 / 눈속에 OO꽃 붉게 붉게 피네’
문31)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만해선사는 1931년 9월 24일 나병 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여 나병 구제에 온 정력을 쏟으셨는데, 이 일을 진행할 때 신흥우 등과 함께 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11년 105인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변절하여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윤치호)
문32) 만해 선사는 우리의 국토가 일제에 의해 간교하게 착취되는 것을 보다 못해 일본에서 최첨단 기술의 측량술을 배워와서 서울에 이 강습소를 개설하여 측량기술에 대한 강의를 하게됩니다. 이 강습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경성명진측량강습소)
문33)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1911년, 당시 해인사 주지이며 친일승이었던 이 사람은 한국불교의 일본불교 예속화에 앞장 섰던 장본인입니다. 결국 이 사람이 주동이 되어 ‘한읿불교동맹조약’이 체결되는데 만해 스님은 이를 분쇄하고자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이회광)
문34) 만해 선사님은 백담사에 계실 때 연곡스님에게 받은 이 책을 통하여 중국, 일본 외에도 보다 넗은 세계와 많은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됩니다. 세계의 지리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 <영환지략>과 함께 읽었던 이 책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이 책은 청조 말 구국의 큰 뜻을 품은 대학자 양계초의 계몽서적입니다. (음빙실문집)
문35) 만해스님은 1931년 10월 ‘불교’지에 여러편의 논설을 발표하였습니다. 여러편의 논설 가운데 하나의 논설 제목을 정확히 써주십시오.
(중국불교의 현상), (조선불교의 개혁안), (불교개신에 대하여)
문36) 1918년에 창간된 ‘유심’지 창간호에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 ‘고통과 쾌락’ 등을 비롯하여,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인 이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시의 선구를 주요한의 불놀이로 보지만 만해스님의 이것은 그보다 1년 앞서서 발표되었습니다. (心)
문37) 1932년 계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만해스님은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만해스님이 무려 422표를 얻었고, 2위는 18표를 얻는데 그쳤습니다. 그렇다면 18표를 얻은 2위였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방한암)
첫댓글 선전이 기대되었던 류상영 직전회장님이 8번 문제에서 '결성면'이 생각이 안나 탈락했다는 전설이 아직도 용호동에 떠돌고 있습니다.^^
저두 결성면이 생각이 안나서요..ㅠㅠ
이제 결성면은 평생 못잊을거야요. 퀴즈대회 우승 작전 프로젝트팀을 한번 결성합시다~
다시 봐야겠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