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동과 장미
오규원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 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1978)
[작품해설]
오규원은 이 시대의 가장 개성 있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무의미한 언어에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 ‘일상적인 감각에 대한 거역’이라는 시적 방법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비슷한 경향의 시인인 이승훈이 비대상의 시를 추구하는 것이나, 정현종이 철저하게 개성적인 이미지에 의지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그는 사물의 존재를 감각적 인식에 따라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적는 것을 거부하는 동시에, 감각적으로 인식된 것을 뒤집어 놓음으로써 보이는 것을 감추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전도(顚倒)된 언어 속에서 역설의 원리에 따라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발견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감각이나 인숩화된 개념을 벗어 나기 위한 시적 방법으로, 결국은 그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도 관련된다.
이 시는 이질적인 두 존재인 ‘개봉동’과 ‘장미’를 한 자리에 공존시켜 양자 사이의 내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여기에서 ‘장미’는 순수와 신비와 아름다움과 생명을, ‘개봉동’은 공장과 도시와 문명과 공해의 표상이다. 그로므로 이 시는 순순한 삶을 훼손 ⸱ 파괴시키는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동시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첫째 연에서 ‘장미’는 ‘개봉동’ 입구의 길을 왼쪽으로 굽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존재로 나타난다. 비록 ‘장미’가 나약한 존재일지라도 그가 가진 순수함은 ‘개봉동’ 입구의 길마저도 굽게 한다는 의미 있는 말을 첫 구절에 배치시켜 생명의 위대성을 제시한다. 그와 함께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서 있는 장미를 뒤이어 보여 줌으로써 장미가 개봉동의 길에 흡수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개봉동의 길이 장미의 길로 이어지게 하는 생명의 존엄성을 나타낸다.
둘째 연에서는 이 ‘장미’가 ‘개봉동’ 주민으로 섞일 수 있는 한편, 서울 속에 피어 있으면서도 서로 다은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모순된 삶의 모습을 ‘개봉동’과 ‘장미’라는 이질적인 두 존재를 통해 보여 준다.
셋째 연에서는 ‘장미’의 비밀스러운 가치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순수와 아름다움과 신비와 생명의 표상인 장미야말로 이 시대 인간들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세계이며, 그러한 세계를 수용하거나 만나지 않는 한, 우리 시대의 막힌 문들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에게 있어 개봉동에 피어 있는 장미는 쉽사리 그 존재가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탓으로 그는 이러한 장미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붚렴한 비림의 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분명한 것은 길 밖에서 길을 이끌고 있는 장미와 세계를 소생시킬 때라야만, 이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도 바람직한 제 길을 찾을 뿐 아니라, 닫혀 있는 문도 활짝 열릴 것이라는 점이다.
[작가소개]
오규원(吳圭原)
본명 : 오규옥(吳圭沃)
1941년 경상남도 밀양 출생
부산사범학교 및 동아대학교 법학과 졸업
1968년 『현대문학』에 시 「우계(雨季)의 시(詩)」, 「몇 개의 현상(現像)」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82년 제27회 현대문학상 및 연암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사랑의 기교』(1975), 『왕자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쓰여지는 서정시』(1981), 『희망 만들며 살기』(1985), 『가끔은 주목받는 생(生)이고 싶다』(1987), 『하늘 아래의 생』(1989), 『사랑의 감옥』(1991), 『꽃 피는 절망』(1995),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순례』(1997), 『한 잎의 여자』(1998),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