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계단을 막 오른다. 고대하던 부석사의 모습이 아니다. 무량수전 앞마당은 인파로 어지럽다. 그리 보고 싶었던 배흘림 기둥도, 공민왕이 썼다는 '무량수전' 현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소 실망하며 고개를 돌리니 안양루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남자가 눈에 든다.
그와 나 사이엔 이미터 남짓한 공간이 있다. 그 틈새로 수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간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저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 열심히 스케치하고 있다. 옆모습을 훔쳐보니 그의 빛나는 두 눈은 어딘가에 꽂혀 있고, 한 손은 종이 위에서 현을 켜는 듯 춤을 춘다.
문득 그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진다. 남자의 뒤로 살그머니 다가가 그림을 엿본다. 그의 대상은 내로라하는 무량수전이 아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코앞에 오래된 석등이다. 남자의 손놀림이 빠르게 움직인다. 실크 천이 주름진 모양일까. 아마도 보살의 옷을 그리는 중인가 보다. 남자의 시선은 석등 중앙에 자리 잡은 화사석에 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석등의 둘레를 탑돌이 하듯 돌아본다. 멀리서 보았을 땐 보지 못했던 무늬가 아닌가. 연꽃 받침 위 화사석 무늬는 면면이 다르다. 만면의 미소를 지은 보살은 한손에 약 단지를 들고 있거나, 다른 면은 얼굴에 훼손되고 합장한 모습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니, 미소 지은 얼굴에 두 손에 무언가를 소중히 안고 있는 형상이다. 마지막 화사석도 얼굴 부분에 푸른 이끼가 돋아 표정을 알 수 없으나 한 손은 허리춤 아래로, 다른 손은 가슴께 자리한다. 보살은 하나같이 중생 구제를 위한 모습인 것 같다. 돌 위에 도드라지게 새긴 우아한 보살 입상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석등에 불 밝혔을 선인의 손길을 떠올린다. 전등도 없던 시절이라 등불을 켜는 일도 하나의 일거리였으리라. 어둠이 내리고 석등에 불이 켜지면, 팔각의 화사석 창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 사방으로 퍼지리라. 그 빛은 무량수전 법당을 오르는 댓돌을 비추고, 가지런히 놓인 스님의 고무신을 하얗게 비추리라. 그리고 독경하는 스님의 자태가 꽃살문에 고고히 자리하리라.
또 하나 있다. 산사에 오르면 제일 먼저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래, 자식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드리던 어머니의 실루엣도 석등의 불빛에 드러나리라. 학창 시절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백팔 배를 드리던 당신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여념 없이 절을 하다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흔들리던 당신의 실루엣을 석등은 고이 간직하고 있으리라. 수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세월이 흘러 잊힌 나의 기억을 석등은 내 앞에 불러놓았다. 그동안 소중한 부분을 잊고 살았다는 느낌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생전에 당신의 육신을 챙기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다. 저기 법당에서 딸을 위하여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신의 기도가 하늘을 감동시켰기에 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고, 멋진 자리에 건강하게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자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나의 소중한 기억을 일깨운 무량수전 앞 석등은 국보 제17호다. 남자의 그림을 엿보느라 한참을 이곳에서 서성였지만, 남자 외에는 아무도 석등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저 무량수전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나 또한 그림 그리는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남들처럼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얼굴을 남기느라 정신없었으리라.
다시금 화사석을 살핀다. 삼 미터 남짓한 석등은 팔각형의 화사석 사면에는 불빛이 새어 나오도록 화창火窓을 만들었다. 남은 네 면에는 자애로운 보살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무심코 석등의 뚫린 창을 바라보니 현판의 '무량수전無量壽殿'서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참으로 놀랍다. 석공은 아마도 낮이고 밤이고 석등을 놓을 자리를 고민했으리라. 깜깜한 밤, 무량수전 앞을 거닐다 문살에 어린 독경 읽는 스님의 자태도, 불공을 드리던 어머니의 모습도 보았으리라. 무엇보다 화창을 통하여 보이는 글자를 상상하며 이 자리를 선택했으리라. 그 무량의 빛을 석등을 빌어 그분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선인의 놀라운 관찰안과 훌륭한 솜씨에 경탄해 마지않는다.
만인의 염원이 깃든 단아한 석등이다. 거기에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진다. 잠시 사람이 많다고 실망스런 얼굴을 보였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지금 당신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아마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무량수불을 향하여 두 손을 모으리라. 어머니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석등도 불을 밝혀 돌아서는 당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리라.
(이은희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