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2편
작성자 크로버
영희의 할머니는 며칠 동안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영희의 안부가 걱정됐다. 불러도 대답이 없었고, 단지 짜증낸 투로 가만히 놔두라는 말만을 되풀이 할 뿐이라서 그 이상의 호기가 없는 할머니는 더 이상 말을 붙여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지레 포기해 버렸다.
그 후부터 할머니는 영희의 식사를 쟁반에 받쳐 방 문 앞에 놔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씩 영희와 만나보려는 시도로서, 방문 앞에 먹을 것을 얹은 쟁반을 놓고 그 앞에서 지켜서 있어 보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영희는 꼭 그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 문 밖으로 나오려는 낌새조차 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화장실이라도 갔다 오거나 잠시 눈을 떼고 있는 사이면 금세 그 쟁반은 사라져 있곤 했다. 어딘가 귀신같은 느낌이라는 생각에 몸서리를 친것도 여러번이었다.
영희가 자신과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영희할머니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권유를 받아 영희를 정신 병원에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동네 아주머니는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영희가 자폐증일거라는 말만을 되풀이 했다.
영희할머니네 집은 따로 준비해 놓은 방문키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동네 남자들 중에 가장 문을 잘 딴다는 박씨 아저씨에게 영희가 있는 방문을 열어달라는 부탁을 했고, 다음날 박씨 아저씨는 얇은 철사와 몇 가지 도구들을 가지고 영희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영희할머니는 이상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어제 집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전에는 영희가 있는 방문을 볼 때마다 영희가 분명 안에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거나, 머릿속으로 영희의 영상이 희미하게나마 그려지곤 했었지만, 어제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는 그렇지가 않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할머니를 엄습했다.
박씨 아저씨는 철사로 방 문고리를 후볐다. 박씨 아저씨가 능숙하게 손을 놀리며 이것저것 도구를 매만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거의 2년간 볼 수 없었던 영희 방의 풍경이 천천히 열리는 문틈을 따라 할머니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할머니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간 듯 했다. 영희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자듯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묻고 있었다. 할머니는 떨리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속으로 안도하며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다가가 영희를 불렀다.
두세 번 영희의 이름을 부르던 할머니는 흠칫하며 잠시 얼어붙었다. 응당 숨을 쉬고 있어야 할 영희는 숨을 쉬지 않는 듯 몸이 들썩이거나 꿈틀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다급해진 마음에 영희의 접혀진 팔을 냅다 잡아들었고, 그 팔 뒤에 숨겨져 있던 영희의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차가운 얼굴이 드러났다. 도저히 산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영희의 얼굴엔 혈색은 없었고, 영희의 얼굴에 손을 대어봤을 때는 온기랄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무리 영희의 얼굴을 손으로 매만져 봐도 혈색이나 온기는 돌아와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허탈한 표정으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었다.
영희는… 도대체 뭣 때문에…
병원에서는 영희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판명을 내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병원 측에서도 그것만큼은 불명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그리고 병원 측에서는 여러 다른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영희가 심각한 자폐증상을 앓고 있었다는 것도 추가해 진찰서에 기재했다.
할머니는 침통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나 귀여워하던 손녀였는데, 이렇게도 허무하게 죽어버렸다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병원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도 거의 없이 쓸쓸히 영희의 장례를 치를 할머니는 홀로 병원 밖으로 나와 밤바람을 맞았다.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영희할머니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할머니의 눈에서는 허망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병원도 그만큼이나 난색을 표하는 영희의 사인에 대해서 할머니는 그 후 오랫동안 의문을 가져오고 있었다. 심장마비라는 그런 표면적인 원인만이 아니라 영희가 죽은 뭔가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영희할머니는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을 거의 확신해갔고, 결국 크리스트교의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주의 사람들의 입담을 받아 무작정 근처 용하다는 점집으로 향했다.
“손녀가 죽었군요?”
남자 무당의 뜬금없는 말에 할머니는 놀란 기색으로 무당의 얼굴을 흘긋 바라봤다. 무당에게 아무것도 말해준 바가 없는 할머니로써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역시 용하다는 소문이 괜히 난건 아닌 모양이었다. 처음에 점집에 들어섰을 때, 이때까지 떠올리던 무당의 모습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먼 무당의 모습을 보고 영 석연치 않아 했는데, 예상외로 이렇게나 잘 맞추는 것을 보고는 할머니는 안도했다.
이상하게도 남자 무당은 거의 평상복 차림이었다. 다른 무당들처럼 색색으로 만들어진 한복 같은 옷을 입고, 머리에 깃털이 달린 빨간 무구(巫䙔)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남자들이 있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말투 또한 다소 거만한 무당의 말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같은 경어를 쓰고 있었고, 인상도 옆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이라 영희할머니는 그를 영 믿을 만 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고 있는 곳만큼은 여느 무당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산신님이나 여러 잡신들의 그림들이 벽지처럼 뒷벽에 붙어있었으며, 가지각색의 천들이 천장과 벽에 걸려있었고, 무당 옆의 선반 위에는 방울이며 징이며 하는 것들이 올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잠시 죽은 손녀를 떠올린 듯 다소 격앙된 억양으로 대답했다.
“예, 맞아요. 무당양반, 내 손녀가 죽었다우. 병원에서는 심장마비로 죽었다는데, 아무도 그 이유가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답디다. 너무 애가 탄 나머지 여기까지 왔으니, 확연한 답이라도 주구려.”
남자 무당은 영희할머니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심장마비라면, 무언가를 보고 놀랐던지. 자는 도중에 쇼크가 생겼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까? 심장마비라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만한 사인인데요.”
영희할머니는 잠시 동안 점을 치는 게 아니라 단지 조금 심각한 논의 정도를 하고 있는 듯한 무당의 말투에 다시 한번 못미더운 눈초리를 했다. 그리고는 처음에 손녀가 죽은 일을 단번에 알아맞혔다는 것을 떠올리며 애써 그런 기우를 접으려 했다. 하지만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그 남자의 인상이 자꾸 할머니의 신경에 거슬렸다.
영희할머니는 뭔가를 떠올리듯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말했다.
“아닐 거요, 내 손녀는 전혀 겁이 없었는데, TV에서 전설의 고향 같은걸 해도 전혀 무서워 하지도 않았었고, 커다란 개를 보고도 전혀 놀라하지 않았다우. 뭔가를 보고 놀라서 죽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 말이우. 그리고 무당님이 말했던 수크인지 사크인지 그것 때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영희할머니가 심각하게 양 미간을 좁히며 강하게 부정하자, 무당은 잠시 생각하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천우는 오랫동안 깍지 않은 턱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느껴지자 자기도 모르게 세면실 수납장에 넣어둔 일회용 면도기를 연상해냈다. 이럴 때 잡념이라니. 그는 잡념을 떨치려는 듯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어떤 것을 생각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려 낸 듯 약간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그래 맞아.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내 손녀가 있던 방에 귀를 대고 있으면 내 손녀가 뭔가와 얘기하고 있었단 말이지. 영희의 방에 전화가 있어서 친구랑 통화라도 하나보다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아닌 것 같아. 아, 그러고 보니 고양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은데….”
무당이 사뭇 놀란 기색으로 갑작스레 말을 받았다.
“고양이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손녀 분께서 항상 혼자 있으려 했다고 하셨지요? 언제부터 손녀가 그랬지요?”
무언가 알아냈다는 듯, 날카로운 감이 서린 듯한 무당의 말투에 들뜬 할머니가 맞장구를 치듯 대답했다.
“아마, 2년 전쯤 됐을 거외다!”
무당은 다시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조금 전 보다 그의 손이 턱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조용한 정적이 흐르고, 한참 동안 무당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던 할머니가 조금씩 지쳐갈 때 즈음 무당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작은 소반 위에 손을 내려놓으며 침중한 얼굴로 결론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손녀 분의 사인은 단순히 심장마비 뿐만은 아닌 것 같네요. 이건 아마도 묘령의 이끎일 겁니다. 어렸을 적에 영희의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실종되었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아마 묘령이 쓰이기가 한결 편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은 어린아이들 마음속의 빈틈을 노리고 아이들에게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에 지친 어린아이들을 조금씩 달래주는 척 하다가 조금씩 아이들의 정기를 빨아먹기도 하고, 가끔 말단에는 아이의 령을 통째로 먹어버리기도 합니다. 음, 그리고 고양이 악령에게 쓰인 아이들은 세상과의 단절을 시도하곤 하는데요, 영희가 그랬듯이 문을 잠그고 그 속에서 나오질 않는다던지 어딘가에 숨어서 혼자 있고 싶어 다든지 하는 행동을 주로 하곤 합니다. 물론 그들은 타인과의 접촉도 매우 꺼립니다. 아마 의학계에서는 이런 경우를 자폐증 이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
긴 설명을 끝마친 무당은 목을 가다듬으려는 듯 약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할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남자 무당의 얼굴을 바라봤다. 옛날부터 귀신의 존재에 관해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던 할머니였지만 이것만큼은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무당의 말은 어딘가 비현실적이더라도 논리 정연하긴 했다. 영희할머니도 어렸을 적부터 어른들께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어쩌면 이해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영희할머니는 이왕 그렇게 받아들인 바에야 뭐라도 알아 두는 게 좋겠다 싶어 무당의 말을 들으며 생각해 뒀던 의문점을 꺼내 묻기로 했다. 할머니는 작은 숨을 들이쉬며 말을 꺼냈다.
“고양이 악령이란 게 뭐요?”
“음… 구태여 설명하자면 어미 고양이의 뱃속에서 죽은 고양이들의 령입니다. 그중 대부분은 성불하지만 그것들 중 소수, 세상에 미련이 많은 것들은 악령이 되어 구천을 떠돌기도 하죠. 아직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고양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에 나오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다른 여타 동물들 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성불하지 않고 악령으로 남아 구천을 떠돌다 마음이 약한 어린아이들에게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겁니다.”
영희할머니는 무당의 사뭇 친절한 투의 설명을 들으며, 갑자기 분노와 설움이 목구멍으로 자꾸만 치밀어 오르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영희할머니로서는 일부러 그것을 삭히려 하지 않았다. 이 무당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희가 죽은 이유가 다 태어나지도 못한 하찮은 고양이 때문이아닌가! 할머닌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것들을 격렬하게 표출하며 외쳤다. 무당은 얌전히 그의 설명을 듣던 할머니가 갑자기 반쯤 몸을 솟구치듯 일으키며 큰 소리를 내자 몸을 깜짝 놀라 흠칫했다.
“이런 몽땅 싸잡아 먹어버릴 고양이 같으니! 금쪽같은 내 손녀를 잡아먹고 기분 좋은 듯이 웃고 있구나! 무당양반! 어떻게 그 고양이 악령인가 뭔가를 잡아 죽일 방법이 없겠는가? 뭐든 해줄 테니 힘 좀 써주게! 부탁이네 무당양반!”
할머니의 다소 격렬한 반응에 조금씩 난처함을 느껴가던 무당은 할머니의 갑작스런 요구에 무당답지 않게 더욱 더 당황해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무당이라면 응당 그 일을 받아 어떻게든 이익을 챙기려 할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단 할머니를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을 들어 반쯤 일어난 자세의 할머니를 도로 앉혔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 다시 턱을 쓰다듬더니만 이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할머니, 제령을 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할머니께서 직접 고양이의 저주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위험해요 할머니. 그런다고 해서 죽은 손녀가 돌아오진 않습니다, 차라리 소혼을 해서 제가 손녀의 혼을 불러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별로 악령을 잡는 일을 권해드리고 싶지는 않네요.”
할머니는 믿고있던 무당의 부정적인 대답에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는 손녀의 혼을 부를 수 있다는 대목에서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영희할머니는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고, 재차 결연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영희할머니의 주먹이 어느새 불끈 쥐어져 있음을 힐끗 본 무당은 난처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안돼우! 절대 안돼우! 내 기필코 그 악령을 잡아 어떻게든 복수를 할 것 이네! 그러니 제발 부탁이네 무당양반, 한번만 도와주오! 내 그 은혜는 두고두고 잊지 않으리다! 내 손녀를 위해서라도 그 악령을… 꼭 잡아야 한다네!”
영희할머니는 흥분한 듯 거의 이야기 끝에서 무당의 손을 꼭 부여잡고는 거의 통곡하듯 말을 잇고 있었다. 무당은 간곡한 영희할머니의 눈에서 분노만이 아니라, 결코 꺾을 수 없을 듯한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그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지라도 할머니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악령을 잡아내려 할 것 같아 보였다. 불행하게도 그 무당에게는 이런 간곡한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 있을 만큼 모질지가 않았다. 일단 그는 너무나도 세게 자신의 손을 옭아매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렇다면 이것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이 일이 끝난 뒤에 제가 만들어 준 부적을 3개월 동안은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빼놓았다가는 할머니는 고양이의 저주에 걸려들고 말거에요. 약속해 주세요. 할머니.”
반쯤 허락하는 듯한 무당의 말에 할머니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렇게 어린애처럼 울고불고 하던 할머니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고는 그가 힘겹게 떼어놓았던 손을 다시 부여잡았다.
“물론이네! 당연허지 무당양반!”
영희할머니는 남자무당에게서 며칠 뒤 집으로 찾아가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뭐가 그리 피곤했던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외출복을 입은 모습 그대로 미리 깔아 놨던 이불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할머니는 잠들기 전 조금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60년 평생 귀신이라고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자신이 이렇게나 쉽게 악령이니 어쩌니 하는 것을 믿고 있으니. 하지만 영희할머니는 죽은 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거의 감은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달이 영롱하게 빛났다.
[할머니! 살려줘! 살려줘!]
나직한 음성이 날카롭게 귀를 쥐어뜯는 것처럼 할머니에게 전달되었다. 사방이 꽉 막힌 듯한 어둠이 팽배해져 있고, 저 멀리 겁에 질린 음성과 함께 영희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영희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했으나, 어느새 다리를 휘감는 어둠이 할머니를 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새 어둠 한 켠에서 나타난 어둠보다도 더 짙은 색의 털을 가진 거대한 고양이가 어둠에서 몸을 분리해 내듯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희할머니는 다소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것을 망연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가 갑자기 영희에게 다가가더니만 영희를 그대로 꽉 물어버리는 것을 보고 거의 기겁했다. 그 고양이는 우드득 씹어 영희를 삼켜버렸다. 할머니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며 영희를 불러댔지만, 이미 고양이의 주둥이 속으로 삼켜진 영희는 대답은커녕 비명소리 조차 없었다.
고양이가 서서히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할머니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를 휘감은 어둠이 통 놓아주질 않았다. 할머니는 이렇게 된 바에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꽉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별로 싸울 의사가 없는 듯 고양이는 할머니의 앞에 멈춰 서서 호박 보석 같은 눈으로 조소하듯 할머니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 동안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할머니는 땀이 솟구치는 것처럼 온 몸에서 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조소하는 듯한 고양이의 눈을 주시하던 할머니는 갑자기 고양이가 입을 벌리는 바람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충격이 고양이의 입속에 있었다.
고양이의 목구멍엔 영희의 무표정한 얼굴이 있었다.
영희할머니는 비명이라도 질러보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닫혀버린 듯 작은 소리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마치 자기가 자신이 아닌듯한 야릇한 느낌 속에 그녀는 속으로만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서서히 입을 닫은 고양이의 얼굴엔 마치 승리를 자신하는 듯한 비열한 장군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다음 날 영희할머니는 어젯밤의 불길한 꿈으로, 불안한 마음에 아침 일찍부터 어제의 그 점집을 다시 찾았다. 그 남자 무당은 마치 자신이 다시 찾아 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제 그 자리에 반듯하게 앉아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를 맞았다. 그리고 그 남자 무당의 한마디는 영희할머니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꿈을 꾸셨지요? 고양이가 나오는 꿈을 말입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무당의 말에, 할머니는 잠시 정곡을 찔린 듯한 뜨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할머니는 잠시 멍한 얼굴로 남자 무당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고, 사뭇 준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첫마디를 더듬으며 남자무당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작했다.
“마, 맞소이다. 사실 그 꿈 때문에 어제 한숨도 자질 못하고 날이 밝자마자 이곳으로 온 거라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이라도 좀 해주오.”
무당은 약간 겁에 질린 듯한, 하지만 대체적으로 담담해 하는 영희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역시 여태까지 살아온 연륜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필경 영희할머니가 어젯밤 꿈속에서 본 것은 거의 기절초풍할 정도로 충격적이고 끔찍한 것 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도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코로 길게 숨을 내쉬고는 닫혀있던 입술을 쩝 소리 나게 떼며 말을 시작했다.
“영희가 죽은지 벌써 일주일째 되는 날 이라면 그런 꿈을 꾸게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었습니다만, 이렇게 빠를줄은 몰랐군요. 음, 말하자면 일종의 비꼼이나 약을 올리는 것 정도랄까요. 그 고양이 악령은 어린아이를 잡아먹고 난 뒤 그 친족 중 한명의 꿈에 나타나곤 하는데요, 그 꿈속에서 고양이가 죽은 아이의 얼굴을 보여준다던지, 단지 씨익 웃어 보인다던지 하는, 주로 그런 행동을 많이 합니다. 한마디로 놀려 먹는 거죠. 고양이 악령은 그런 것을 즐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별 이유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할머니는 어젯밤의 꿈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런 끔찍한 장면을 꿈에서라도 목격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평생에 지고 가야할 그 어느 것 보다도 무거운 듯 했다. 무당이 말을 이었다.
“일단 제령에 나서기 전에 제가 알고 있는 동료를 부를 참입니다. 옛날부터 고양이가 요물로 알려져 있듯이 고양이의 저주나 그 외의 것들이 다른 악령들에 비해 무척 강한 편이기 때문에,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의 위험부담이 있거든요. 아마 이틀 후쯤이면 도착할 걸로 예상합니다. 아, 그리고 그 꿈은 두 번 다시 꾸진 않을 테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남자 무당은 걱정 말라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할머니는 어딘가 천진해 보이는 무당의 웃음을 보며 혼란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스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신뢰를 내비치는 애절한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무당 양반만 믿겠소이다.”
꽉 부여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는 할머니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그는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천우는 시골 간이역의 플랫폼에서 오늘 도착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 운행 시간표를 보니 이제 곧 도착할 듯 했다. 그는 잠시 대합실의 의자에 가 앉아 신문을 보다가 시간이 되었음을 알고는 다시 천천히 플랫폼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먼 곳에서 기차 하나가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천우는 기차가 진입하는 동안 잠시 뒤로 물러나 있었고, 곧 열차는 멈춰섰다. 그는 기차의 승차구를 두리번거리며 그가 찾는 인물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어이! 오랜만이야 천우오빠.”
줄곧 왼쪽을 바라보고 있던 천우는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듣고는 흠칫했다. 분명히 그가 찾는 인물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천우는 불길한 예감은 안고 천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낭패다’라는 느낌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쇼크가 그의 가슴을 저몄다. 낯익은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크고 똘망똘망한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소, 소미!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난 분명히 미희를 불렀는데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천우가 단숨에 소미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대며 소리치자 그녀의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소미가 내 손을 살짝 뿌리치며 싱긋 웃더니 말했다.
“엄마 아빠 허락 받느라고 고생 좀 했지. 후후후.”
“그딴 건 상관없어. 미희는 어디 있는 거야? 설마 너 혼자 온건 아니겠지? 설마 그때 전화를 받고 너 혼자 달랑 온 거야?”
소미는 말없이 헤헤 웃었다. 천우는 ‘골치가 썩는다.’라는 것을 몸소 느껴가며 다시 한번 주의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의 소미 외에는 작은 역사 안의 그 누구도 포착되지 않았고, 천우는 다시 한번 큰 낭패감에 사로잡혀 한숨을 내뱉었다. 저절로 그의 손이 관자놀이를 향했다.
예상치 못한 불운(?)에 그는 앞길이 막막해짐을 느꼈다. 물론 소미 또한 영적인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종합적인 능력에선 미희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녀는 또한 아직 13살 초등학생인 어린 여자아이였다. 경험도 별로 없는 이런 어린아이를 데리고 제령을 하러 갈 바에는 차라리 조금 위험하더라도 혼자 가는 것이 더 나을 듯싶었다.
“안되겠다. 넌 집에서 꼼짝 말고 있어. 내일 새벽 열차 타고 집으로 다시 내려가는 거다. 알았지?”
천우가 소미의 어께에 손을 올려놓고 타이르듯 금방전과는 다른 사뭇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자 소미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팩 돌렸다.
“흥! 웃기시네! 내가 여기에 무슨 고생을 하면서 왔는데!”
“에휴, 말버릇 하고는… 어쨌든 안돼! 절대 안돼! 그럼, 넌 집에서 꼼짝 말고 있어! 잠자코 말 들어 그래야 착한 어린이지. 알았지?”
소미가 한심하다는 듯 천우를 바라봤다. 내가 무슨 어린아이냐는 듯한 표정과 몸짓에 천우는 그럼 네가 어린아이지 뭐냐는 식의 시선을 그녀에게 쏘아 보냈다. 그렇게 얼마간 무언의 대화가 몇 번 오간 뒤, 천우는 일단 소미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수녀 사제복을 입은 소미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튀었기 때문이었다.
소미는 아이큐가 170이 넘는 천재였다. 그녀는 4살 때 영어와 불어를 떼고, 9살 때 7개 국어를 마쳤다. 독일에 있는 대학을 작년에 졸업했으며, 현재는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그냥 백수(?)와도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에 책을 어찌나 많이 읽었던지, 웬만한 박사보다도 더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고, 적어도 이 근방국가에서 만큼은 소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정받을만한 곳에서는 모조리 인정받은 13살짜리 천재 소녀였다. -아, 물론 TV에도 몇 번 출연했다.-
소미는 아직 수녀는 아니었지만 항상 사제복-수녀-을 입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아직 나이가 어려 정식 수녀가 아닌 말 그대로 견습수녀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녀는 일주일에 며칠씩 창평에 있는 교회에 머물러 있곤 했다. 그 교회에서도 소미를 거의 받아준 듯 했고, 이쁘장하고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그곳 수녀들 사이에선 인기였다.
소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물론 170의 아이큐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 보다 월등한 영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데 있었다. 게다가 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데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그 힘을 어느 특정한 것에 응용시키거나, 적용시키는 것에 무척 뛰어났고, 그래서 인지 그녀가 갖고 있는 퇴마 장비들의 대부분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것들과는 훨씬 특이했고, 참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감히 무식하다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젬병이었으니, 천우가 탄식 할만도 했다.
수미가 가져온 짐은 상상외로 많았다. 도대체 이곳에 얼마나 있다 갈 예정이었는지, 칫솔이며 옷가지며 거의 이사오다 시피 챙겨온 모양이었다. 여행용 트렁크에 거의 꽉 들어 차 있는 내용물을 보고 천우는 거의 기겁을 했다. 소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챙겨온 여장들을 풀어 정리하기 시작했고, 천우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짐들의 량을 보아서는 적어도 두 달 내지는 세 달이었다.
“내일이 그 악령을 제령 하는 날 이라면서 준비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거야?”
잠시 정신이 나가 벙 쪄 있는 천우에게 소미가 명랑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 소미는 자신의 속옷을 천우의 속옷 서랍에 같이 넣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소미의 행동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천우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도 없이 처벅처벅 다가와 자신의 속옷 서랍에 쌓아놓은 소미의 속옷을 꺼내어 그녀에게 떠넘기듯이 건네주고는 약간 격하고 절도 있는 몸동작으로 장롱 옆의 빈 서랍장을 가리켰다. 소미는 ‘아하’ 하는 약한 탄성을 내지르며 다시 콧노래를 시작했다. 역시 무언가에 시달린다는 것은 유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자기 자신에게 주지시키며 그는 슬슬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찍듯이 눌러댔다.
천우가 침담하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완전 악몽이로군.”
다음날. 오늘은 할머니와 굳게 약속했던 제령이 있는 날 이었다. 제령이 있을 저녁까지, 하루 종일 천우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소미를 떼어놓을까 라는 생각뿐이었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미는 싱글거리며 반대 방에서 사제복을 챙겨 입고 있었다. 수미의 성격상 어떻게든 떼어놓더라도 끈질기게 그를 따라올 것은 자명한 이치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어딘가에 가둬 놓을 수도 없는 일 이었고, 소미 때문에 약속한 제령을 그만둘 수도 없는 일 이었다.
“자 이거 받아, 일단 영적인 힘은 있으니까. 하급 악령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될 수겠지.”
소미는 아직 수녀도 아닌 주제에 천우에게 작은 십자가 한 개를 건넸다. 천우는 그것을 얼결에 받아들며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자신을 한탄했다.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소미는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싱글벙글해 있었다. 그녀는 목에 서너 개의 십자가를 걸고 허리춤엔 십자모양의 짧은 영검(靈劍)을 차고 있었으며, 십자가 모양이 새겨진 반지 또한 서너 개를 차고 있었다. 소미는 마치 힘이 샘솟는 듯 방 안을 이리저리 활보하며, 자꾸만 늦장을 부리는 천우에게 다그치듯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 참! 언제 갈 거야! 그 할머니랑 약속한 시간이 저녁7시였다며, 벌써 6시 반이라구! 얼른 준비해!”
소미가 천우와 함께 영희할머니 댁으로 간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우는 지금 체념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아까전부터 현재 자신의 집 쪽으로 다가오는 기운 하나를 감지해 냈으며, 그것이 낯이 익고 친근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 천우는 그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의 느낌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마도 그 사람은…
딩동-
하는 청아한 벨 소리가 천우의 집에 울렸다. 소파 위에서 폴짝폴짝 뛰던 소미는 누구냐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 거렸고, 가만히 방안에 앉아있던 천우는 구원을 만난 듯이 쪼르르 달려 나가 현관문을 활짝 열어 재꼈다. 천우는 문 앞에 선 다소 키가 크고 낯이 익은 인물을 보자마자 감개무량한 얼굴로 문 앞에 멀뚱히 서있는 인물의 손을 잡고 마치 어린아이가 기분 나빴던 일들을 엄마에게 일러바치듯이 어제부터 있던 일을 고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묻혔던 감정이 서서히 복받쳐 올라 쉴 새 없이 놀리는 혓바닥 끝으로 다다르고 있었다.
“미희! 잘 왔어!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다구! 소미 때문에 곤란해 죽을 뻔했어! 저 녀석, 내가 너한테 전화했을 때 저 녀석이 실실 웃는 게 좀 미심쩍어 했는데, 정말 저 녀석이 올 줄 몰랐거든. 요 하루 동안 저 녀석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 자기 속옷을 내 속옷 서랍에 넣어놓지를 않나, TV리모콘을 독점하고 재미없는 드라마만 골라서 보지를 않나… 그것 때문에 어제 있었던 축구 시합도 못 봤다니까. 꼭 나를 일부로 괴롭히러 온 것 같아.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어찌나 기뻐하고 있던지 천우의 정신은 거의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신이나서 말하던 천우는 미희의 익숙한 듯 담담한 표정을 보고는 정신을 차린 듯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미희는 집에 몸조차 들여놓지 않은 상태였다.
“어흠, 좋아. 어쨌거나, 미희가 이렇게 왔으니까 제령은 문제없겠지. 자 그럼, 미희가 준비 끝나는 대로 그 할머니 댁으로 가자.”
미희는 일단 현관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는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천우를 바라보며 요청했다.
“제령은 좋은데, 일단 이 손부터 놔주시겠어요?”
천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꼭 잡고 있던 미희의 손을 살짝 뿌리치듯 놓아버렸다. 잠시 헛기침을 하던 천우는 어딘가에서 따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느끼고는 애써 무시하려 헛기침을 더욱 크게 하며 뻣뻣한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쳇, 천우 오빠 바보!”
미희는 소미가 몰래 집을 나가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 여겨 곧 따라왔다고 말했다. 미희가 소미에게 부모님께 허락도 없이 온 거라서, 돌아가면 꽤나 혼 날거라고 타일렀지만 소미는 괘의치 않는다는 듯 유쾌한 몸동작으로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미희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집에 돌아가서 꾸중들을 것은 분명 미희 혼자일 것이었다.
미희와 소미는 자매였다. 미희는 24살로 소미와는 많은 나이차이가 있고, 검은 눈동자와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 외에 생김새 외에, 성격부터 어딘가 많이 틀려 보였지만 그 둘의 행동이나 언행, 그리고 그 외의 내적인 요인들이 그들이 자매라는 사실을 강하게 입증해내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로 그녀들과 조금 지내본 사람이라면 왜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거의 대부분 그 둘 사이의 정신연령이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하였으며, 미희가 어린애처럼 구는 건지 소미가 어른스럽게 구는 건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니 그 둘이 동기간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해서든 부정할 수 없을 것 이었다.
미희 또한 소미 못지않은 천재로서 소미보다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때 이미 6개 국어를 마쳤고, 소미와 비슷한 나이에 대학도 졸업했다. 현재는 모 방송국의 신문기자로서 여러 분야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조만간 신문기자도 그만 두려는 생각이었다. 너무 지루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미처럼 나이에 맞지 않는 방대한 량의 영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섬세하고 세밀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투시력과 영감(靈感) 뛰어났다. 그래서 그녀는 영과의 접촉이나 교감이 가능했고, 동물, 심지어는 식물과의 교감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그렇게 어두운 저녁 어스름의 시골 길을 걸어 그들은 서너 개의 주택이 모여 있는 작은 주택가에 다다랐다. 앞장서서 걷던 소미는 저 늘어선 주택들 중에 어느 것이 그 할머니의 집이냐고 묻는 듯 천우를 돌아봤고, 천우는 말없이 소미를 지나쳐 걸었다. 맨 마지막 집으로 향한 천우는 일단 초인종부터 누른 뒤, 뒤따라온 미희와 소미를 돌아보았다.
“아까 말했듯이, 이번에 제령 할 악령은 묘령(猫靈)이야. 특히나 그건 옛날부터 요물로 알려져 있던 만큼 다른 악령들 보다는 더욱 강하지. 뭐, 그래봐야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음…그래도 난 영 소미가 걱정이네. 괜히 대들다가 묘령한테 잡아먹히지나 않을까 몰라.”
장난스럽게 한 말에 금세 부풀어진 소미의 볼을 바라보며 천우는 피식 웃었다. 그는 소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봐야 기우일 테지만, 소미도 나름대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만일 어떻게 되더라도 미희가 잘 지켜줄 테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었다.
곧 현관문이 열리며 영희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할머니는 천우를 반색하며 맞으며 갑작스레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황한 천우는 급하게 신발을 벗으며 할머니를 따라 빠르게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섰고, 뒤에 있던 미희와 소미도 저 할머니와 천우의 관계가 의심스럽다는 둥의 실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현관으로 올라섰다.
천우가 거의 억지로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현관을 지나 거실에 다다랐을 때, 천우는 흠칫했다. 거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소녀가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 소녀의 얼굴은 굉장히 창백했다. 천우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 아이는 누구죠?”
그렇지 않아도 말해주려는 참이었다는 듯 할머니는 굳어있는 천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얼른 입을 열었다. 할머니는 다소 흥분한 듯 천우의 부여잡은 손등을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치고 있었다.
“무당양반에겐 사진도 보여준 적이 없으니 잘 모를게야. 저 아이가 내 손녀네! 돌아왔네! 돌아왔어!”
천우는 잠시 멈칫했다. 분명 영희라는 아이는 분명 죽었고, 그 시신까지 매장했다고 들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천우는 재차 물었다.
“네? 뭐라 구요?”
“나도 지금 믿을 수가 없네, 오늘 아침 자고 일어나니 영희가 있었어! 정말 영희야, 저 아이가 정말 영희라구! 하느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총을 내리신거여. 암! 그럼, 그렇고 말고!”
영희할머니가 은빛 십자가를 손에 꼭 쥐며 눈물을 글썽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매장까지 끝마친 시신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건가. 아침에 일어나니 있었다는 말은 천우로썬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만약에 병원 측에서 사망진단을 잘못 내려 살아있는 아이를 매장했다 하더라도 어린아이의 힘으론 그 관속에서 어지간해서는 빠져나올 수도 없었을 것 이었다.
할머니는 영희에게 다가가 손을 부여잡고는 퍼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길 다면 긴 기간동안 한과 설움이 많이 맺힌 듯 거의 목을 놓아 울던 할머니는 손을 들어 영희의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지금 세 사람의 눈엔 영희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에 눈만 띄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영희의 얼굴에는 전혀 혈색이 돌고 있지 않았고, 아까부터 쭉 전혀 감정이 없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던 것이다. 천우가 뭔가 낌새를 채고 눈썹을 찡그렸다.
천우는 미희와 소미를 돌아봤다. 미희가 천우에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분명 지금 저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저 육체 안에 령이 들어있기는 한데, 인간의 것도 아니고…, 아마… 그 천우씨가 말했던 묘령이 아닐까 싶은데.”
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희의 말이 맞았다. 지금 저 영희가 내뿜는 기운은 분명 보통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게선 죽은 자의 냄새가 났고, 인간이 아닌 것의 파동이 일고 있었다.
“기분 나빠 저 애.”
미희의 옆에 섰던 소미가 중얼거리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소미의 소리가 다소 컸던지 미희가 얼른 소미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다행히도 지금 정신없이 울고 있는 할머니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 했다. 영희할머니를 향하던 미희의 시선이 영희의 얼굴로 옮겨갔다.
잠시 영희를 바라보던 천우가 묵묵히 입을 열었다.
“일단 돌아가는 게 좋겠군. 혹시 모르니까 집안 몇 군데에 부적을 붙여놓아야겠어. 적어도 난동은 부리진 않겠지. 내가 지금 묘령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아. 돌아가서 일단 퇴마전록을 검토해봐야겠어. 그러면 대책이 나올 테지.”
천우는 안주머니에서 부적을 몇 장을 꺼내 방마다 돌며 그것을 붙였다. 영희, 아니 묘령은 천우와 눈이 마주치자 할머니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순간 인상을 찡그렸고, 천우도 그런 영희에게 냉엄한 시선을 보냈다.
천우는 마지막으로 현관 문에 부적을 붙이고는 마무리를 알리듯 손을 탁탁 털었다. 그들은 영희할머니에 작별인사를 고하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천우는 그곳을 나오며 몇 번이나 그곳을 돌아보다가 부적의 효능을 믿으며 걱정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부적이 있는 한은 별 탈이 없을 것은 분명했다.
천우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방 책상 아래에서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거실로 가져왔다. 소미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굼해하다가 천우가 보자기를 풀자 마자 그 궁금증을 버렸다. 그 무식하리만큼 두꺼운 책의 표지에는 퇴마전록이라는 글씨가 한자로 적혀있었다.
천우는 미희 소미와 함께 그것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대대로 퇴마 업을 하고 있는 천우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보로, 이곳에는 천우의 초대 조상부터의 업적이나, 퇴마 사건들을 기록해 놓고 있는 책 이었다. 그것에는 거의 모든 영적 현상에 대한 일들과 그 대처 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으며, 전대 사람들이 후손들에게 남긴 조언이나 충고들 또한 적혀 있어, 천우에게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훨씬 더 든든한 무기라 할 수 있는 것 이었다.
“아, 찾았다! 여기 있어. 음, 비교적 얼마 전에 일어난 일로 기록 되어 있는데? 시대로 따지면… 오! 우리 아버지 대의 일이로군. 음, 여차하면 아버지한테 전화라도 해볼 수도 있겠는데? 음, 어디보자… 묘령이 아이에게 빙의 했을 경우라…”
미희와 소희는 눈을 크게 뜨고 천우가 손가락으로 짚어가는 책의 구절을 눈으로 따라 읽기 시작했다. 소미가 책을 거꾸로 보는 게 어려웠던지 반대편으로 폴짝 뛰어넘어 천우에게 찰싹 달라붙고는 귀찮아하는 천우의 쑥덕거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천우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1972년 충남 보령.
보령에 잠시 발령을 나와 있던 나는 우연히 길에서 어떤 남자 아이를 마주치고는 이상한 낌새에 그 아이의 집을 찾게 되었다. 그 집에서는 그 남자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 둘 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몇 년 전 트럭 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 아이의 엄마는 그 아이가 오랫동안 밖에 홀로 나가있거나, 집으로 돌아오면 자신의 방구석에 앉아 오직 홀로 대화를 하듯 무언가를 중얼거렸다고 했으며, 사람과의 접촉을 무척 꺼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분명히 그 아이가 있는 방 안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자주 들린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이 사건을 묘령의 이끎으로 결론을 짓고, 묘령이 아이의 영혼을 잡아먹기 전에 일을 끝마치기 위해 조금씩 서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그 아이의 방에 결계 부적을 붙여 놓은 뒤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이가 돌아와 잠들어 있는 틈을 타 봉인의 서를 이용, 묘령을 봉인하는데 성공했으며, 아이는 별 탈 없이 평소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천우가 그 페이지의 마지막 구절을 소리 내어 읽자 소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랑은 좀 틀린데?”
천우는 걱정 없다는 듯 말없이 씨익 웃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참고
묘령이 이미 아이의 영혼을 먹어버렸을 경우.
묘령은 먹은 아이의 령을 보름동안 뱃속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소화기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아이를 구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그 묘령은 아이의 영혼을 먹어 버린 뒤, 시신이 땅에 묻혀 자신이 먹어버린 영 외에 아이의 혼령이 완전히 육체를 빠져나갔을 때를 노려 몸을 탈취하는데, 이러한 경우에 묘령이 빙의한 시신은 보통의 인간과 똑같은 조건이 되므로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이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를 제대로 구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신에 빙의된 묘령을 제령 할 시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살인으로 오인 받을 수도 있으며, 부도덕한 인간으로 찍히기 십상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령의 순차적인 방법을 말하자면, 첫 번째로 일단 그 묘령이 몸체의 바깥으로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예로 그것의 입 안에 악령들이 두려워하는 소금이나 붉은 팥을 넣는다던지, 그것의 발밑에 괘진을 그려 넣는 수가 있는데, 사견으로 나는 전자를 무조건 추천하는 바 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묘령을 몸체 바깥으로 유도해 내는 것이 성공했으면 그것을 포박하는 것인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포박의 술을 쓰면 그것은 쉽게 잡힐 것이니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끝으로 봉인의 서에 묘령을 봉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묘령이 빙의 해 있던 육체는 다시금 시체가 되어버린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봉인한 봉인의 서는 무조건 향을 태우는 불에 태워 없애야 한다. 향불 외에 다른 불로 태우면 봉인된 모령이 봉인의 서를 빠져나와 다른 인물에게 전령될 위험이 있으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향불에 태우는 것이 좋다.
의혹의 눈빛으로 퇴마전록을 훑어보던 소미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렇게나 상세히 나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소미였기에 그 놀람은 더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여기에 나와 있는 대로 제령의식을 취하는 것뿐이었고, 언뜻 보기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는 듯 보였다. 소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후후 하고 웃었다.
천우가 퇴마전록을 덮었다. 오랫동안 펴보지 않고 있었던 듯, 그것은 뿌연 먼지를 내지르며 텁 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천우는 자신감에 찬 소미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무조건 좋아할 수는 없어, 일단 제령의식을 하려면 할머니께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야 할 텐데, 할머니께 그것을 그대로 말씀해드린다면 틀림없이 크게 상심 하게 될 거야. 어쩌면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철석같이 손녀가 돌아왔다고 믿고 있으니… 게다가 안면이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걸 얘기한다고 치면 나밖에 없는 거잖아.”
천우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푹 고개를 숙이자 혼자 득의양양해 있던 소미 또한 약간 풀이 죽은 듯, 길게 끄는 신음 소리를 냈다. 미희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단아하고 똑 부러지는 외모를 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실제로는 냅다 이런 마음 아픈 진실을 폭로하기엔 마음이 좀 여렸다. 걱정을 떨쳐버리듯 팔딱 고개를 치켜든 소미가 팔짱을 끼며 야멸찬 어조로 말했다.
“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대로 놔두면 그 악령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고… 좀 할머니한테 상처가 되더라도 제령 하는 수밖에 없어. 뭐 어때! 그냥 할머니께 말씀드려버리자. 어차피 도와주려는 거잖아.”
소미가 스스로 말해놓고 스스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우가 그런 그녀를 야속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아무리 자기가 말 안한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막 말하는 게 어딨냐? 할머니랑 마주 앉아서 그런 얘기를 해야 하는 내 입장을 좀 생각해봐. …뭐 다른 방법 없을까?”
소미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팩 돌렸다.
“됐네요. 그런 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야?”
천우는 도움이 되지 않는 소미를 제쳐놓고 미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다른 방법이 없겠냐는 듯한 간절한 눈치이었지만, 그녀도 뾰족이 생각나는 것은 없는 듯 퇴마전록의 표지로 살짝 시선을 돌리며 천우의 간절한 시선을 살짝 피해 버렸다. 천우는 믿었던 미희까지 자신을 외면해 버리자 금세 울상이 되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끙 하는 긴 신음을 내뱉었다.
“앗?”
천우가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져있는 동안 혼자서 퇴마전록을 펼쳐보고 있던 소미가 뭔가 알아낸 듯 놀라는 소리를 하며 손가락으로 책의 어딘가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이것 봐! 아까는 그냥 지나쳤었는데, 여기에 보면 잡아먹은 아이의 령을 보름동안 뱃속에 가지고 있다고 써있잖아? 그렇다면 그 아이의 령을 묘령에게로부터 되찾아서 육체에 다시 정착 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 거 아니야? ‘구한다.’ 라는 표현을 쓴걸 보면 분명해! 영희가 죽은지 아직 보름이 되지 않았으니, 가능할거야!”
“아, 그래 맞아! 그런 수가 있었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우가 갑자기 기지개를 켜듯 웅크리고 있던 몸을 치켜 올리며 작게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반쯤 빠져나온 듯했던 그는 환호성을 지르다 말고 다시 탄식을 내지르며 다시 얼굴을 손으로 감싸버렸고, 소미는 그런 천우의 희극 같은 몸짓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왜? 왜 그러는데? 안돼는 거야?”
한참을 침묵하던 천우의 얼굴을 가린 두 손 사이에서 억눌린 듯한 벅벅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우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묘령이 먹어버린 령을 구출해 내는 방법을 난 몰라. 아, 이럴수가…”
다시 울상이 되어버린 천우의 슬픈 얼굴을 바라보던 미희가 대뜸 끼어들 듯 말했다.
“그렇다면 천우씨 아버지께 전화라도 해보는 게 어때요?”
천우는 미희의 말을 듣자마자 헉 하는 소리를 내더니 황황히 전화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서는 냅다 수화기를 들었다. 천우는 익숙한 듯 빠르게 전화번호를 찍어 누르고는 신호를 기다리는 듯 약간 초조한 얼굴로 전화기가 올려져 있는 선반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금방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고, 곧 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뒀던 메모지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통화가 계속될수록 천우의 굳어있던 얼굴이 점차 펴지고 있었다. 한참 뒤에 그는 통화가 끝난 듯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전화통화를 하며 무언가를 적던 종이쪽지를 미희와 소미 쪽에 펼쳐 보였다. 득의양양한 웃음이 천우의 입가에 머물렀다.
“음하하하, 이젠 다 해결된 거나 다름없어! 크, 이런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다니! 내가 바보였군. 좋아 이 방법대로만 하면…”
용기백배가 된 듯 껄걸 웃으며 방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소희가 한마디 했다.
“…바보 작렬이로군.”
천우는 곧 묘령 퇴치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천우는 한참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자신의 방에서 한창 전자오락에 힘을 쓰던 소미와 금방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말리던 미희를 급히 거실로 불러 모아 계획한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 둘은 천우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소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의아한 듯, 그리고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런데, 오빠가 직접 소혼술을 한다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오빠의 명이 직접적으로 깎이는 일인데, 언제 또 볼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소혼까지 하다니…”
소미가 말을 마치고 살짝 인상을 쓰며 입술을 쌜쭉 내밀었고, 천우는 괜히 뾰로통해져 있는 소미에게 달래듯 웃음기 있는 얼굴로 말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이 무당노릇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거고, 이런 능력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겠니. 그리고 소혼 외에는 영희의 령을 몸에 정착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아버지께서 천팔주(千八珠)까지 보내주신다고 했으니까, 그나마 덜 힘들 거야.”
“뭐, 그야 그렇겠지만…”
소미는 반쯤 수긍하는 듯 말꼬리를 흐리며 소파위로 주저앉듯 풀썩 앉아 버렸다. 소미가 아직 불만을 버리지 못한 듯한 얼굴로 살짝 눈을 찡그린 듯 감고 있는 동안 천우와 미희는 다시 작전계획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지금 그들이 세운 작전은 아까 퇴마전록에서 보았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일단 영희의 입 속에 팥이나 소금을 넣어 묘령을 몸체 바깥으로 끌어낸 다음, 천우가 포박의 술로 그것을 잡아내면 미희가 봉인의 서를 이용, 그것을 봉인하여 향불에 태워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마지막으로 추가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천우가 소혼으로 이미 묘령에게서 자유로워진 영희의 혼령을 불러내어 천팔주로 영희의 육체에 영희의 영혼을 다시 정착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영희가 죽은 지 보름이 넘지 않았기-사람의 영은 죽은 뒤 정확히 보름 뒤에 망령의 강을 건너 완전한 이승과의 단절을 한다.-에 가능한 일 이었고, 천우의 아버지가 보내주신 천팔주가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다.
그들은 일단 아버지가 보내주신 천팔주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그것은 다음날 오전에서야 택배로 도착했다.
작은 과자상자 속에 충격완화를 위해 빼곡히 구겨 넣은 신문지를 들추자 반짝이는 진주의 모양이 드러났다. 소미는 감탄사를 연발했고, 보석을 좋아하는 미희는 눈을 반짝였다. 천우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빼어들고는 바닥에 주욱 늘어놓았고, 그들은 소미가 그 안에 들어가 발을 뻗고 누워도-아무리 소미의 체구가 보통 아이들보다 작다고 해도 140cm는 넘었다.- 양 끝이 닿지 않을 정도의 크기를 지닌 그것을 보고 그 어마어마한 길이에 다시 한번 탄성을 내질렀다.
천팔주는 천 팔개의 진주를 꿰어 만든 목걸이로 그 무게만 해도 2kg이 넘었고, 물론 그에 못지않게 길이 또한 무척 길었다. 천팔주는 영혼을 포박하고 잡아끄는 효력이 있으며, 약간의 정화능력도 갖추고 있는 꽤 귀중한 아이템이었는데, 천우의 아버지도 무지 힘들게 얻은 거라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물품 중에 하나였다. 천우가 하도 사정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빌려주긴 했지만…
소미는 그것을 목에 걸어보고자 난리를 피웠다. 하지만 천우는 답지 않게 단호한 태도로 안 된다며 그녀를 제지했다. 천팔주는 그다지 위험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만일 그것에 흠집하나라도 나는 날엔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위엄 어린 경고의 메시지가 천우의 귓가를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천팔주가 원형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너의 뼈를 깎아 천팔주를 재현 할 테다.]
천우는 아버지의 노호한 얼굴을 떠올리고는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들 셋은 천팔주를 받은 바로 그 날, 모든 이가 잠들었을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제령에 필요한 모든 장비들을 챙긴 뒤, 영희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영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모든 일을 끝마칠 작정이었으며, 가급적이면 할머니조차도 모르게 일을 끝내고 싶었던 것 이었다.
며칠 전 걸었던 그 길을 똑바로 걸어 영희할머니의 집 앞에 도착한 일행은 긴장하고 있는 듯 나름대로의 릴렉스 방식을 선보였다. 천우는 자기 자신을 추스르려는 듯 가슴을 쿵쿵 두들겼고, 소미는 목에 건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며 기도를 읊었으며, 미희는 단지 작은 심호흡만을 했다.
몇 차례의 심호흡을 끝마친 미희는 천우를 힐끗 바라보고는 약간 의아함이 들었다. 천우는 현관문의 위편을 바라보며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 불안이 서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우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어리둥절해진 미희와 소미를 영희할머니 댁에서 약간 떨어진 길가로 그들을 내몰다 시피하고는, 그들을 향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현관 문 위편에 붙여두었던 부적이 누군가에 의해 떼어졌어.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누군가가 일부러 저 부적을 떼어 놓았다면, 필경 이것은 묘령의 소행이 분명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증거겠지.”
소미가 인상을 찡그리며 약한 탄식소리를 냈다. 미희는 차분한 얼굴로 계속되는 천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묘령이 제 아무리 육체를 얻었다고 해도 내 부적에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어. 그렇다면 남은 건 할머니뿐인데, 내가 할머니께 저 부적을 절대로 떼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고 나왔으니 일부로 떼어놓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야… 아무래도 내 생각엔 할머니마저도 묘령의 악술(惡術)에 걸린 게 아닐까 싶어. 아, 이걸 염두에 뒀어야 하는 건데…”
“그럼, 할머니가 묘령에게 조종당해 부적을 모두 떼어버렸단 말인가요?”
천우는 미희의 물음에 말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칼을 거칠게 흐트려 놓았다. 천우는 자신의 실수에 큰 비애감을 느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할머니까지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천우는 퇴마라는 일을 시작해오면서부터 타인이 이런 것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꺼려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할 때에는 남의 시선이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영희할머니가 이 일에, 그것도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휘말려 버렸으니, 천우의 기분이 침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미희가 다가와 천우의 어께에 손을 얹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어쩌면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도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잘된 일 일지도 모르잖아요? 일단 제가 투시력으로 상황을 알아볼 테니, 그 다음에 계획대로 일을 시작해요.”
천우는 미희의 위로에 마음을 추스른 듯 스스로 흩트려 놓았던 머리를 다시 정리하고는 굳은 얼굴로 미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희가 살포시 웃고는 천우와 소미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져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희할머니와 영희, 아니 묘령을 투시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미희가 직접 전에 그 둘을 만나본 바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투시하는 일은 꽤나 수월했고, 금방 그들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미희는 그들의 영상이 머릿속에 비치자 갑자기 무언가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강한 충격에 휩싸였다.
천우는 미희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고 식은땀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는 급히 미희를 흔들어 깨웠다. 미희는 놀란 듯 퍼뜩하고 눈을 뜨더니만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천우가 사뭇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미희는 무언가 끔찍한 장면이라도 목격한 듯 사시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고, 약 십분 정도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진정시키고 난 뒤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가… 주, 죽었어…”
투시를 마친 언니의 겁에 질린 모습에 긴장한 듯 바짝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미가 미희의 말을 듣자마자 얼른 귀를 막으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소미는 마음약한 13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천우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들이 다짜고짜 영희할머니 댁으로 쳐들어갔을 때, 영희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다만 붉은 선혈을 낭자하며 눈을 부릅뜬 채 무표정한 얼굴로 거실바닥에 쓰러져 있는 영희할머니의 싸늘한 시체만이 을씨년스럽게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미희는 소미를 현관에다 세워놓고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처참한 장면을 어린아이에게 보여준 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릇된 일 이었다. 미희는 곧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고, 천우는 주먹을 꽉 쥐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주먹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무언가로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호기심 어린, 그리고 사뭇 긴장된 듯한 투의 소미의 물음이 저편에서 들려왔을 때야 비로소 천우는 영희할머니의 시체에서 눈을 떼었다. 천우는 말없이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 미희와 소미를 지나쳐 문 밖으로 나갔다. 미희는 근심스런 얼굴로 손을 들어 그를 잠시 제지하려 했으나, 천우의 심상치 않은 노기를 느끼고는 천우의 어깨를 향하던 손을 멈춰 세웠다. 천우는 문 밖에 다다르자마자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천우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천우의 내달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흩어지듯 떨어져 내렸다.
천우가 없어진지 벌써 십여 분이 넘게 지나있었다. 미희는 일단 이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돌아가신 영희할머니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미리 경찰에 신고했다가 일이라도 크게 벌어지게 된다면, 곤란해질 쪽은 우리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미희는 소희와 함께 할머니의 집을 벗어났다. 막무가내로 뛰쳐나간 천우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그가 그토록 흥분해있던 상태라면 어떤 일을 벌일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천우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천우는 령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분명 미희가 그를 찾아냈을 즈음이면 천우는 묘령과 대치중이거나 혹은 전투중일 수도 있다. 묘령이 도대체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칫 천우가 흥분한 상태에서 실수를 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일단 묘령의 의도나 목적부터 파악한 다음에 슬슬 조여 나가는 것이 상책일 텐데, 그렇게 광분하여 뛰쳐나갔으니, 천우가 무슨 일을 일으킬 가능성은 농후하다고 미희는 생각했다.
미희는 천우가 뛰쳐나가면서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되새겼다. 물론 분하고, 슬펐기 때문에 흘린 눈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천우의, 세상에 대한 원망과 설움이 깃든, 표출되는 감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천우는 그것을 이미 운명으로 받아 들인지 오래였다. 자신이 퇴마 업을 하면서 일에 휘말리는 희생자는 분명히 나올 것이고, 그것이 누구의 탓이든 간에 그것은 분명 정해진 운명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왔고, 그 믿음으로 스스로를 지탱해왔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이렇게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면 천우는 비참한 그 운명이란 짐을 스스로의 어깨에 짊어졌고, 스스로를 한탄하며 계속해서 번뇌하고 고뇌했으며, 이런 기구한 운명을 낳게 한 세상 또한 원망했다. 어찌 보면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가뿐하게 벗어던질 수도 있을법한 그것을 천우는 스스로가 굵직한 쇠사슬로 몸을 묶듯 자책하고 죄의식에 몸을 떨어왔던 것이다.
미희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글썽였다. 소미는 미희의 눈물의 의미를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괜찮아, 잘되겠지 뭐.”
소미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명랑하게 말하자 미희도 소미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렇다. 어찌 보면 잘 될 것이 뻔할지도 몰랐다. 그래, 잘 되겠지. 미희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감아 천우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가 포착되었음을 느꼈을 때 그녀는 느릿하던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한가한 시골길의 그믐달은 마치 달을 띄워 보낼 적에, 달을 품고 있던 산이 누구도 몰래 그것을 한입 날카롭게 베어 물고, 어쩌다못해 그 남은 찌꺼기를 올려 보낸 것이라도 한 것처럼, 그것은 찡그린 눈썹의 형상으로 어둑어둑한 밤하늘에 한 색의 광채를 내 뿜고 있었다. 어찌 보면 평화로운 밤하늘의 풍경일지는 몰랐지만, 자세히 보면 그 어둑한 밤하늘엔 빠르게 휙휙 날아다니며 날카로이 교차하는 검은 두 물체가 그 평화로운 밤하늘의 단 하나의 오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천우는 일단 그 묘령을 주택가에서 넓게 펼쳐진 논밭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광분하여 뛰쳐나간 천우였지만, 이럴 때 만큼은 냉철하기 그지없었다. 천우는 헐렁한 품속에서 부적을 두장 꺼내 재빠르게 허공에 떠 있는 영희에게 날렸다. 두장의 부적은 저절로 불이 붙어 맹렬하게 영희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고, 영희는 허공을 걷기라도 하듯 다리를 놀려 그것을 잽싸게 피한 뒤, 유연하게 천우에게서 약간 떨어진 땅으로 내려앉았다.
“키야옹!”
하늘을 찢는 맹포한 울음소리가 공허한 밤하늘을 울렸다. 영희의 눈동자는 서서히 고양이처럼 길게 세로로 찢어지는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영희의 손톱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얼굴과 손바닥에 잔털이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다. 천우는 영희가 변하는 모습에 잠시 흠칫 했지만 다시 품속에서 부적을 몇 장 꺼내 손으로 펼쳐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뒤편 허리에 꽂아놓았던 단검을 스르릉 뽑아들어 그에 대응했다.
천우는 정신없이 달려 묘령을 추적한 끝에 마을 어귀의 좁은 골목길에서 영희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영희를 보고 극도로 흥분한 천우는 지붕에서 뛰어내려 무작정 영희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문득 어제 아버지와의 전화통화에서 끊기 직전 아버지께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던 얘기를 떠올리고는 급히 몸을 세웠다.
‘어떤 일이든 냉정하게 생각해라, 감정적이면 모든 것은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고 만다.’
천우는 부적을 꺼내기 위해 품속을 뒤지던 손을 다시 빼내고는 그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맞는 말 이었다. 감정에 너무 치우쳐 버리고 만다면 만만치 않은 힘을 지닌 묘령에게 빈틈을 줘 오히려 자신이 당할 수도 있는 일 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큰 소란을 피운다면 곤란한 쪽은 우리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덤을 뚫고 나온 영희의 정체를 설명할 길이 없고, 퇴마전록에 나왔듯이 섣불리 행동하다간 부도덕한 인간으로 찍힐 우려 또한 있지 않은가.
미희의 걱정과는 달리 천우는 그렇게 냉정하게 수긍을 하고는 천천히 영희의 동태를 살폈다.
‘그래, 냉정해져야 한다.’
천수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기척을 죽인 채, 묘령의 뒤를 미행하며 대략 삼십분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동안 묘령은 별다른 목적이나 의도가 없는 듯 자꾸만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만 할 뿐이었고, 간혹 자신을 보고 짖는 개들을 무참히 죽여 놓는 정도 외에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천우는 마을에 별로 피해를 입히지 않는 영희를 보며 한편으로는 안도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의도도 없이 아이의 몸을 강탈하고, 할머니를 죽인 묘령에게 크게 분노했다.
천우는 더 이상 그 분을 참지 못하고 적당히 영희를 공격하며 이 추수가 끝나 그 밑단만이 공허하게 남은 벌판으로 영희를 유인해 내 온 것이었다.
영희는 언제라도 덤벼들 듯 고양이처럼 낮게 엎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납게 그르릉하는 소리를 내다가 천우에게 위협을 주려는 듯 한번 크게 울었다. 절대 고양이의 음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자의 울음소리와도 비교조차 할 수조차 없는 맹음(勐音)이 사방으로 크게 울려 퍼졌고, 천우는 귀가 찌잉하고 울리는 것을 느끼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천우는 일단 침착하게 서너 장의 부적을 허공으로 살짝 띠웠다. 그러자 그 부적들은 주먹만한 불덩어리가 되어 천우를 맴돌기 시작했고, 천우는 검신을 고쳐 잡으며, 신중하게 영희의 빈틈을 살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천우는 영희에게 달려들다 말고 아차 하는 심정으로 뽑아들었던 검을 다시 허리 뒤춤으로 넣었다. 사람, 그것도 어린아이에게 검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 이었다. 자신은 냉정하다고 생각했으나 은연중에 흥분해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천우는 다시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우가 갑자기 멈춰 서서 뽑아들었던 칼을 다시 갈무리 하자, 영희는 약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하려 했다. 하지만 천우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칼을 허리춤의 칼집에 넣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영희에게 쇄도해 들어갔고, 천우의 몸 주위를 도는 불덩이를 보고 약간 위축된 듯 영희는 천우가 달려들자 뒤로 재빨리 물러나며 날카로운 손톱을 허공에 그어보였다. 일종의 위협이었지만, 그런 것을 겁낼 천우는 아니었다.
천우는 일단 영희를 제압해 놓기로 마음먹었다. 봉인의 서를 갖고 있는 것은 미희였지만, 미희의 능력이라면 금방 그를 찾아낼 것이었고, 조금만 영희를 제압하고 있으면 미희가 알아서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이 천우의 생각이었다.
“캬아앙!”
영희, 묘령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옴과 동시에 천우는 영희를 향해 매섭게 오른 발을 날렸다.
소미는 미희의 손을 꼭 잡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쾌활하게 얘기하던 소미였지만, 속마음만큼은 아직까지 13살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소미는 처음으로 살인이라는 것을 목격했고,-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모습만이라도 이정도로 침착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특하고, 야무진 일이었다.
미희는 영희할머니의 집을 나와서부터 집중하여 쭉 천우의 기운을 쫒아 소미와 함께 지저분한 골목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천우에게로 급히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소미가 자꾸 뒤쳐지는 바람에 초조하게 걸음만 빨리할 뿐이었다. 미희는 순간 천우와 영희의 사이가 매우 가까워 졌음을 느꼈다. 천우가 영희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희는 다급해진 마음에 무작정 소미를 떼어놓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소미는 미희가 예고도 없이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가자, 깜짝 놀라 급히 미희의 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뜀박질에 그다지 소질이 없던 소미는 금세 미희가 저쪽 골목길 어귀로 사라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멈춰 서서 울상 진 얼굴이 되고 말았다. 깊은 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어린아이를 달랑 하나 놔두고 말도 없이 달려 나갔으니, 소미가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소미는 미희가 사라진 곳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령을 감지하거나 투시하는 능력이 전혀 없는 소미로서는 막막할 뿐이었다. 어차피 미희가 금세 찾으러 올 테니 걱정은 없을 테지만, 소미는 좀 있다 미희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때려 주리라 마음먹고는 울먹거림을 참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미희는 골목길 어귀를 돌자마자 기겁할 정도로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천우와 영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형체를 잘 알아볼 수는 없는, 아마도 개의 시체 인 것 같은 조각 들이 사방에 갈기갈기 찢어져 널려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미희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던 것이다. 양 옆의 담벼락엔 붉다 못해 검어진 피가 참혹한 모양으로 얼룩져 있었다.
미희는 돌아서 갈까 생각하다 눈을 꼭 감은 뒤 개의 시체 덩어리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을 골라 살짝 뛰어넘듯이 그것을 지나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질을 쳤다. 왠지 등골이 쭈뼛해서 미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아무래도 영희와 천우가 지나간 길은 이곳이 확실한 모양이었다. 뒤쪽에 개가 죽은 것 외에는 그다지 큰 피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천우도 무작정 영희에게 무작정 덤벼든 것 같지는 않아 한편으로 미희는 안도했다.
미희는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몇 개의 시체를 더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미희는 눈을 꼭 감고 그것을 뛰어넘어 지나쳐 버렸고, 한번은 그것의 살점을 밟은 건지 발끝이 뭉클 하는 느낌에 가슴에 전기가 오른 듯 심하게 저며 오는 듯한 충격 때문에 잠시 굳어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뜀박질을 계속했다. 미희는 잠시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조금 더 달리고 나자 큰 폐가 앞의 약간 넓게 트인 공터에서 천우의 모습이 보였다. 천우는 맹렬히 그를 쫓는 영희를 피해 간간히 부적을 날려 영희를 유인해 마을 쪽을 벗어나고 있었다. 미희는 급히 천우의 뒤를 쫓으려다 한 가지 깜빡한 사실을 생각해 내고는 멈춰 서서 뒤돌아 달려갈 채비를 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소미를 그 자리에 그냥 두고 온 것이었다.
미희는 골목길로 다시 들어서려다 잠시 우뚝 멈춰 섰다. 그 끔찍한 곳을 다시 한번 지나야 한다는 게 그녀에겐 무척이나 겁나고 께림칙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아먹고는 골목길 안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미희의 얼굴은 답지 않게 울상이 되어 있었다.
너른 들판위로 쌩하니 바람이 불었다. 코끝이 시큰할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었지만, 천우는 개의치 않았다. 코끝을 시큰하게 만드는 찬 바람보다는, 영희의 손톱 더 그에겐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희의 손톱에 긁히면 필경 이렇게 시큰 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이었다.
천우는 일단 검술 외에 자신의 주특기인 각법(脚法)으로 영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천우는 빠르게 돌진하며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힘 있게 다리를 뻗었고, 영희는 살짝 뒤로 몸을 빼 그것을 피했다. 어린아이의 육체였지만, 역시 고양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것은 매우 민첩하게, 그리고 동작 하나 하나가 날카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희는 천우가 하는 빠른 발차기를 모두 피하면서도 간간히 천우에게 위협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우에게 경미한것이라도 상처까지 입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천우는 영희의 몸에 손가락 끝 하나도 대 보질 못하고 있었고, 계속되는 허공치기에 그의 체력은 급속히 떨어져 갔다.
영희의 손톱이 날카롭게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할퀴자, 천우는 자신도 모르게 ‘윽’ 하는 신음성을 내 뱉었다.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왼쪽 다리를 내 질렀지만, 영희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뒤로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하고는 네발로 땅에 내려앉아 천우에게 씩 웃어보였다.
싸움은 조금씩 천우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천우도 물론 쉽게 그녀를 제압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영희의 능력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에 있었고, 천우의 몸에 돌던 불꽃을 경계하며 몸을 움츠렸던 영희도 자신감이 찬 듯 과감히 먼저 선공을 하고 천우의 왼쪽 허벅지와 더불어 여러 곳에 상처를 내기까지 했다.
예상치 못한 고전에 천우가 잠시 냉정함을 잃은 듯 영희의 하단공격에 발목을 맞고 휘청거렸다. 다행히 그다지 힘이 세지 않아 넘어지진 않았지만, 지금 이 공격만도 매우 치명적인 것 이었다. 영희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의 얼굴 쪽으로 달려들었다. 천우의 두 손은 휘청거리는 바람에 아래로 쳐져 있었고, 영희의 공격을 막을 방도는 없어보였다. 천우는 한대 맞을 각오로 눈을 질끈 감았다.
천우는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몸 어디에도 베인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의아해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그러자 자신의 코앞에서 손을 휘두르려 하던 영희가 저기 멀찌감치 떨어져 분노한 얼굴로 천우가 아닌 천우의 뒤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고, 천우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아!”
천우는 약한 탄성을 내지르며 뒤에 선 인물들을 향해 씩 미소를 지었다. 그의 등 뒤에는 소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한쪽 눈을 찡긋 하고 있었고, 미희는 굳은 얼굴로 영희를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천우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우의 발치에는 몇 개의 흰 깃털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영희의 팔뚝에도 그것들이 꽂혀있는 것을 보니, 천우는 뒤에서 소미가 쏘아 보낸 일명 ‘천사의 날개’를 팔을 들어 가까스로 막아내며 뒤로 물러나 버린 듯싶었다. 미희가 도착한 이상 이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천우는 단번에 끝내버릴 심산으로 마음을 굳게 다잡아먹고는 일단 자신의 몸을 맴돌던 불꽃을 없앴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다시 한번 영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천우가 힘껏 내지르는 주먹을 피한 영희는 뒤로 몇 번인가 덤블링을 해서 그에게서 떨어지더니 더 사나운 얼굴로 으르릉거렸다. 천우는 품속에서 다시 부적을 몇 장 꺼내들며,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해야 영희를 잡을 수 있을 것인지를 차분하게 궁리하기 시작했다. 영희의 스피드는 천우가 따라잡기에는 너무나도 빠른 것 이었다. 영희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봉쇄하지 못하는 이상 영희에게 타격을 입히기란 거의 불가능 한 일인 듯 했다.
잠시 무언가를 궁리하던 천우는 갑자기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올리며 영희와 눈을 마주쳤다. 현재 영희는 소미와 미희의 출현에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소 불안해하고 있었고, 천우는 지금 지원병이 왔으니 의기양양해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이용해야 했다.
천우는 자신이 갖고 있는 여유를 한껏 영희에게 드러내 보이며 꺼내든 부적 한 장을 얇게 돌돌 말았다.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던 영희는 위협적인 위력을 보였던 부적을 그가 어떻게라도 사용하려는 듯하자 낮게 몸을 낮추며 경계했고, 곧 천우의 다음 행동에 폭발적인 화를 내며 크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역시 천우의 생각대로 아무리 인간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묘령이 빙의한 몸이긴 했어도, 무엇이 도발적인 행위인가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을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천우는 몇 년 전부터 담배를 끊었던 차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천우는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얇게 말은 부적에 불을 붙이고는 금세 바람을 훅 불을 꺼 버렸다. 그리고는 불이 붙지 않은 반대쪽 부분을 입에 대고 그 연기를 한껏 빨아들이며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한 뒤, 부적의 재를 떨어내며 영희를 향해 씩 웃었다. 천우는 상대편을 흥분시킨 뒤, 그 틈을 노릴 작정이었다.
영희는 극도로 흥분하여 천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어느 샌가 아까의 그 날쌔고 날카롭던 동작은 이미 사라져 있었고, 아까 와 비교하여 말도 안 될 정도로 영희의 자세는 엉성하고 동작이 커져 있었다. 영희는 천우에게 어느 정도 다가서자 높이 뛰어오르며 손톱을 곧추세웠다.
이 정도까지의 효과를 바라지 않던 천우는 예상외의 큰 성과에 한편으로는 약간 당혹스러워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때다 싶어 얼른 영희가 달려들기 직전에 빨아들였던 연기를 영희의 얼굴로 세차게 내 뱉었다. 그러자 그 연기는 갑자기 천우의 입 밖에서 불로 화 하여 영희를 향해 맹렬하게 쏘아져 나갔고, 영희는 힘겹게 하지만 유연하게 공중에서 목과 허리를 뒤로 재껴 그 불꽃을 가까스로 피했다. 하지만 갑자기 천우가 틈을 노려 영희의 발목을 냅다 차 버리는 바람에 영희는 거의 머리가 땅바닥을 향할 정도로 몸이 틀어지고 말았고, 천우는 기회다 싶어 빠르게 영희의 목덜미를 향해 힘차게 손을 뻗었다.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땅바닥으로 추락 하던 영희는 재빨리 몸을 회전시켜 네발로 낮게 땅에 안착하고는 급히 천우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경계하듯 몸을 낮췄다. 천우는 내지르던 손을 얼른 회수하고는 살짝 인상을 썼다. 고양이의 낙법은 정말 감탄 할만 것이었다. 공중에서 몸이 거의 반쯤 틀어져 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영희는, 아니 묘령은 허리를 급하게 틀어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도 천우의 찔러 들어오는 손을 피하기까지 하고, 땅에 네 발로 착지 한 것이다.
천우는 ‘음’ 하는 신음성을 내 뱉었다. 이번 기회를 놓쳤으니, 여간해서는 묘령이 틈을 보이려 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천우의 예상대로 역시나 영희는 상대편에게 말려들고 말았다는 것을 느낀 듯, 좀 더 신중한 눈빛으로 천우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천우의 주의를 돌며 그의 행동을 살필 뿐 섣불리 공격하려하지는 않았다.
천우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갈무리 해 두었던 칼을 허리 뒤춤에서 뽑아들었다. 조금 더 압박을 주어야 틈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영희를 칼로 벤다거나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천우는 영희가 자신의 주변을 돌던 것을 멈추자, 호기 있게 달려들며 먼저 품속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 잽싸게 영희에게 날렸다. 영희는 단지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굴려 그것을 피했고, 천우는 그것을 노렸다는 듯이 튕겨져 나가듯 방향을 틀어 영희가 부적을 피해 몸을 굴린 방향을 쫒아 검을 휘둘렀다. 스슥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까지 오는 영희의 머리칼이 반쯤 잘려나가며 허공에 날렸다.
영희는 당황한 듯 다급히 손톱이 날카로운 손을 휘둘렀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허공에 휘두른 검을 미처 회수하지 못한 천우의 얼굴에 거의 맞을 듯 맹렬하게 쾌접하고 있었다. 천우는 뒤로 몸을 날려 피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천우는 이런 위기촉발의 상황에서 날아드는 날카로운 손톱을 피하려는 시도 대신에 영희에게 뛰어들기 직전 미리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한웅큼 꺼내 쥐고 있던 손을 재빨리 영희의 입을 향해 내지르듯 뻗기 시작했다. 곧 살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시큰한 고통이 볼을 타고 코끝까지 전해졌고, 그와 동시에 천우는 영희의 벌려진 입 안으로 억지로 무언가를 쑤셔 넣었다.
“읍!”
뭔가 막힌 듯한 억눌린 소리가 영희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영희의 입을 가득 채운 것은 붉은 팥이었다. 영희는 고통스러운 듯 영희의 입을 틀어막은 천우의 팔둑을 마구 할퀴기 시작했다. 천우는 살이 떨어져 나가는 극심한 고통을 참으면서도 영희가 붉은 팥을 뱉어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붉은 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묘령은 영희의 몸을 빠져나올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영희의 작은 목젖이 무언가를 넘기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천우의 팔을 마구 할퀴어대던 영희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고, 천우는 그때서야 비로소 영희의 틀어막은 입에서 손을 떼었다. 영희의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붉은 팥이 영희의 입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천우는 심했던 것 같다는 생각에 머쓱해져 살짝 입술을 핥고는 쓰러지려는 영희를 받쳐 들었다.
멀리서 영희의 몸이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챈 미희는 소미가 들고 있던 봉인의 서를 건네받아 재빨리 영희와 천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천우는 이미 영희에게서 몇 걸음 정도 물러나 있었다.
영희의 몸 주변에서 일렁이던 푸른 물결 같은 빛이 서서히 머리 위편으로 모아져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곧 그것은 점차 허공을 향해 떠올랐고,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지점토 덩어리처럼 뭉쳐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씩 고양이의 얼굴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흉측해 그것을 바라보던 천우는 약간 인상을 찌푸렸고, 미희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천우가 미희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자 미희는 다시 눈을 떴다. 그것은 완전히 모양이 이루어져 가던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흉측했고, 비위가 상하기까지 했다. 그것에는 터럭이라곤 한 올도 있지 않았다. 그 얼굴 어느 곳엔 살점조차 없어 뼈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고, 눈알 또한 하나가 빠져나간 듯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엔 검은게 뚫린 구멍뿐이었다. 전적으로 푸른색이었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모든 색깔이 사실적으로 확연하게 드리워져 있었기에 그 흉측한 몰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의 하나 남은 눈알은 천우를 향한 증오심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천우는 합장하듯 손바닥을 마주 댄 뒤,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뒤 천우의 손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천우는 눈을 번쩍 뜨며 두 손바닥을 묘령을 향해 뻗었다. 천우의 손바닥에서 한줄기 금빛의 줄이 빠져나와 민첩하게 묘령에게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묘령을 포박하듯 휘휘 감아버렸고, 고통스러운 듯 묘령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그래봐야 몸통도 없고 머리뿐이지만.- 계속해서 날카로운 비명을 내 질렀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우는 침중한 얼굴로 미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희도 천우를 마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말려져 있던 두루마리를 묘령을 향해 쫙 펼쳐들고는 눈을 감고 무언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미희가 주문을 마치고 눈을 뜨자, 묘령은 서서히 한줄기 빛이 되어 봉인의 서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봉인의 서에 빨려 들어갈 때만큼은 외마디의 단말마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것의 최후는 한 점의 성냥불만큼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끝 이었다.
천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무언가가 천우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배고파, 가자.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새벽인데도 졸리지도 않아. 얼른 집에 가서 밥부터 먹어야겠어.”
소미의 투정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며 천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던 소미는 이제는 천우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우는 소미의 잡아당김에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우뚝 멈춰 섰다. 소미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고, 천우는 웃음기 있는 얼굴로 말했다.
“아직 한 가지가 남았어. 그것을 마치고 집에 가서 뭐라도 해 먹도록 하자. 저 달이 넘어가기 전에 이 일을 끝마쳐야해 별로 시간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소미가 ‘아’ 하고 약한 탄성을 내지르며 잡고 있던 옷소매를 놓아주었다. 천우는 소미에게 살짝 웃어보이고는 천천히 쓰러져 있는 영희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영희의 주변에 원을 하나 그리고 그 안에 이상한 도형들과 글자로 보이는 것들을 복잡하게 그려 넣기 시작했다.
천우는 너무 길어 목에 몇 겹으로 겹쳐서 걸고 있던 천팔주를 풀어 쓰러져 있는 영희의 앞에 동그랗게 늘어놓고는 그 안에서 가부좌를 튼 뒤 눈을 감았다. 품속에서 부적을 몇 장 꺼내 든 천우는 중얼거리듯 주문을 외우다가 그것을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 부적은 불줄기로 화하여 천우의 머리 위에서 별 모양을 그리며 기름을 부운 듯 활활 타올랐고, 천우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다가 눈을 부릅뜨며 무어라 크게 외쳤다.
천우의 소혼에 반응하듯 쓰러져 있는 영희의 몸 위에서 푸르스름한 물체가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천우는 그것을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그것이 영희의 령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주변에 늘어놓았던 천팔주를 움켜 쥔 뒤 재빨리 영희의 령을 향해 힘껏 내 던졌다.
천우에 의해 빠르게 내 쏘아진 천팔주는 말 그대로 영희의 령을 포박하듯 휘휘 감아버렸다. 영희의 령은 벗어나려는 듯 괴로운듯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영희의 령에게 다가섰다. 뒤에 있던 소미가 긴장되는 눈초리로 침을 꿀꺽 삼켰다. 깊은 적막 때문인지 소미가 침을 삼키는 소리는 꽤나 크게 들려왔다.
천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영희의 령을 포박한 천팔주의 헐렁하게 내려와 있는 부분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영희의 령을 내치듯이 바닥에 누워있는 영희의 몸을 향해 내던졌다. 영희의 령이 몸과 빠른 속도로 접촉하자마자, 푸른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밝게 빛나기 시작했고, 소미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소미는 의아해 하며 눈을 가렸던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 빛은 무척이나 밝았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그 푸른빛은 수그러드는 듯 점차 영희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희의 령은 영희의 몸속으로 들어간 듯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영희의 령을 포박하던 천팔주는 영희의 몸 위로 투둑 떨어져 내렸다.
천우는 갑자기 몸의 힘이 전부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고, 눈물까지 핑 도는 듯 했다. 천우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는 기듯이 영희에게 다가가 영희가 숨을 쉬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영희는 숨을 쉬는 듯 가슴이 들썩였고, 혈색도 점차 돌아오는 듯싶었다. 천우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듯 쓰러지려 하자 소미가 얼른 다가와 두 팔로 쓰러지려는 천우의 머리를 힘겹게 받쳐 그가 영희에게로 쓰러지지 않게 했다. 천우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염라대왕님께 또 미움을 사 버렸군, 죽어서는 도망만 다녀야겠어. 하하.”
천우는,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소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며 혼절해 버렸다. 묘령과의 혈투에서 힘을 많이 썼던 탓도 있겠지만, 이 소혼술로 영혼을 부른 것도 모자라 육체에 정착시키기까지 했으니, 그 노고함이 극에 달했을 것은 뻔한 일 이었다. 게다가 영희에게 긁힌 몸 이곳저곳의 상처는 아직도 꽤나 많은 량의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미희는 소혼술과 착혼술을 한꺼번에 행한다는 것은 수행자의 수명을 거의 1/3이상 깎아먹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미는 울컥 솟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소미는 천우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천우의 몸 이곳저곳에서 피가 흐르는 통에 불가피하게 하나뿐인 소미의 사제복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소미는 괜히 잡아줬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천우가 심히 걱정스런 눈초리였다.
미희는 고인 눈물을 얼른 훔치며 천우에게 다가가 소미 대신 그를 부축해 들었다. 미희는 천우보다도 키가 약간 더 컸던 덕분에 그나마 좀 수월할 듯싶었으나, 소미는 또래 아이들 보다 무척이나 키가 작았기에, 영희를 부축하는 것에도 쩔쩔 매고 있었다. 미희가 웃음기 있는 얼굴로 소미를 바라보다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달은 저 멀리 산등선 아래로 추락하듯 떨어져 가고 있었다. 단순히 눈을 찡그린 모양인줄로만 알았던 달은, 어느새 환하게 웃는 모양으로 탈바꿈 해 있었다. 어찌 보면 그들을 유혹하기 위해 눈을 찡긋 이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역시 시골이라서 그런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미희는 다시 한번 기분 좋게 웃었다.
장편으로 써보려다 단편으로 끝마친 이야깁니다. 쩝, 그다지 재미는 없네요. 길기만 딥따리길고 =_=.. 고 3이 뭐하는 짓인가! 라고 말한다면 애교 ;ㅁ;.. 제목 참 고민했습니다. 그다지 적당한 제목이 없길래 아래 단편의 2탄이라고 얼버무렸지만, 그다지 2탄으로 보이진 않아요. 그냥 소재만 같을 뿐입니다. 두개 붙이려다 말았다죠 =_=..
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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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one's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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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도 이건 장편으로 충분히 쓸 수 있는 글이겠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고3이시지만 나중에 또 재미있는 글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