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은 자연에서는 군데군데 한 집씩 떨어져 있습니다. 근친교배의 확률이 아주 낮습니다. 처녀왕은 봉장에서 멀리 떨어진 공중 지점까지 수 km를 날아가서 짝짓기를 하고, 12~20마리의 수벌과 교미해서 유전자 다양성을 확보합니다. 이게 자연이 수만 년에 걸쳐 진화시킨 근친교배 방지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키우는 양봉장에는 수백 통이 한 군데 몰려 있고, 대부분 한두 통에서 한 마리의 여왕벌이 낳은 알을 인공 왕롱에 옮겨 처녀왕을 만들고 같은 봉장에서 교미를 시킵니다.
자연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고, 이 방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계와 부계의 유전자가 단일화되는 근친교배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꿀벌의 근친교배는 다른 동물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런 방식이 가져오는 문제점은 다른 동물들은 근친교배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아주 낮고, 진행 속도도 더디고, 다시 외혼을 하면 문제의 원인이 바로 사라지지만, 인간의 집단 사육 방식으로 관리하는 양봉장에서의 근친교배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가 심해져서 붕괴의 속도도 똑같이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꿀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성염색체가 없습니다. 인간이 X · Y 염색체로 성별이 결정되는 것과 달리, 꿀벌은 단 하나의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학계에서는 이 유전자를 csd(complementary sex determiner, 성결정 유전자)라고 부릅니다. 이 유전자에는 자연 상태에서 100가지 이상의 글자(대립유전자) 종류가 있습니다.
규칙은 단순합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글자와 아버지에게서 받은 글자가 다르면 정상 일벌이 되지만, 같으면 비정상 수벌이 됩니다. 자물쇠와 열쇠가 다른 모양이어야 정상 일벌이 되고, 같은 모양이면 맞물리지 못해서 실패하는 셈입니다.
근친교배로 태어난 여왕벌은 일벌을 낳아도 비정상 수벌(이배체 수벌)이 많이 섞여 있고, 다 큰 일벌들은 유충으로 변한 다음 냄새로 찾아내서 전부 죽이거나 잡아먹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봉판에 빈 셀 이 듬성듬성 박힌 모양이 됩니다. 양봉가들이 흔히 "산란이 듬성하다", "여왕이 늙었다"라고 표현하는 그 패턴이 사실은 여왕의 잘못이 아니라 근친교배의 결과입니다. 여왕은 정상적으로 알을 낳았지만, 그 알의 상당수가 일벌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한국 양봉의 특수성
우리나라는 국토는 작지만 인접한 중국에서 저렴한 양봉 기구들이 수입되고 꿀 소비량도 높아 인구에 비해 양봉 농가가 타 국가 대비 월등히 높은 편입니다. 1990년 약 53만 봉군에서 2023년 약 257만 봉군으로 늘어나 세계 상위권 규모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양봉가들은 대부분 자기 양봉장의 산란력이 좋은 벌통에서 처녀왕을 만들고 교미상도 같은 봉장에 만듭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체 수가 급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여기서 가장 미묘한 함정은 "산란력이 좋은 벌통"을 골라 쓰는 행위 자체입니다. 산란이 좋다는 것은 그 봉군의 csd 글자 종류가 풍부하다는 신호인데, 그 한 봉군에서만 처녀왕을 양성하면 그 풍부함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좁은 풀에 갇혀 버립니다. 양봉가는 가장 좋은 혈통을 보존하려는 의도로 한 일인데, 결과는 정반대로 봉장의 csd 글자 다양성을 빠르게 좁히는 행위가 됩니다.
가속도가 붙는 이유
해가 지날수록 속도는 더 빨라집니다. 약한 봉군에는 응애가 더 잘 자라고, 온도 유지가 힘들어 질병에도 더 잘 걸립니다. 봉세가 약해지면 일벌 수가 부족해서 청소·양육 능력이 떨어지고, 그러면 응애가 더 늘어나고, 봉세는 더 약해지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처음 1~3년은 큰 변화가 안 보입니다. 양봉가는 "정상"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5년쯤 되면 봉세 회복이 명확히 느려지고, 7년쯤 되면 응애 통제도 어려워지고, 10년쯤 되면 봉장이 무너집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다음에는 급격하게 무너지는 가속 곡선입니다.
그러면 양봉가들은 문제의 원인을 응애나 질병, 이상기후로 지목합니다. 다시 돈을 들여 벌통을 사고, 더 좋은 응애 약과 질병 예방을 위해 비싼 약을 종류별로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근친교배를 또다시 반복합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응애도 기후도 농약도 분명히 봉군에 부담을 줍니다. 그러나 같은 응애 압력, 같은 기후 변화를 받는 양봉 선진국들의 봉군 손실률은 30~40% 수준입니다. 한국은 2022년에 56%였습니다. 같은 외부 압력에 한국만 유독 결과가 극단적이라면, 한국에만 있는 다른 변수가 있어야 설명이 됩니다. 그게 누적된 근친교배입니다. 응애·기후는 결정타였지 근본 원인이 아닙니다.
유전자 다양성을 높이는 4가지 방법
한 군데에서 많은 봉군을 사육하는 방식에서는 유전자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1. 부계가 서로 다른 분리된 교미장 운영
봉장 안에서 교미시키지 말고, 5km 이상 떨어진 격리된 부지에 교미장을 따로 만듭니다. 그곳에 출처가 다른 모계의 수벌 봉군 15통 이상을 두면 처녀왕이 다양한 부계와 짝짓기 할 수 있습니다.
2. 처녀왕을 만들 때 최대한 많은 통을 이용하기
가장 우수한 한 통이 아니라, 봉장에서 출처가 다른 5~10통을 정해두고 골고루 사용합니다. 같은 50마리를 만들어도 csd 글자 다양성이 5~10배 차이 납니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 효과가 큰, 양봉가가 즉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3. 처녀왕을 타 농가와 교환하거나 타 농가에서 교미 후 데려오기
5km 이상 떨어진 양봉가와 처녀왕을 서로 보내서 그 봉장의 수벌과 짝짓기 시키고 회수합니다. 사실상 무료 격리 교미장입니다. 양봉가 두세 명만 모여도 즉시 시작할 수 있고, 운반비 정도의 비용으로 봉장 csd 풀이 매년 갱신됩니다.
4. 더 전문적으로는 인공수정 방법입니다
꿀벌은 인공수정이 비교적 쉽고 성공률도 높습니다. 서로 다른 정자들을 수집하여 10종 이상의 정자를 섞고, 서로 다른 통에서 만든 처녀왕에 인공수정을 시키면 실패율은 거의 없으면서도 유전자 다양성이 높은 여왕벌을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인공수정은 자연 짝짓기로는 불가능한 일까지 해줍니다. 슬로베니아·뉴질랜드·독일 등 외국의 우수한 수벌 정자를 액체질소에 동결해서 한국으로 가져올 수 있고, 한 처녀왕에 외국 정자 5종 + 한국 정자 5종을 섞어 쓰면 봉장의 csd 글자 풀을 한 번에 자연 광역 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처녀왕이 모비행 중에 길을 잃거나 새에게 잡아먹히는 손실도 0%입니다.
시스템 차원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들은 시간과 비용, 복잡한 절차 등으로 인해 개별 양봉가들은 이론을 완벽하게 이해를 한다 해도 적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학계와 지자체, 양봉협회, 양봉가들이 서로 협력을 해야 하고, 정부에서 비용과 연구 인력을 두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슬로베니아가 좋은 예입니다. 인구 200만 명의 작은 나라이지만 EU 가입 조약에 자국 영토 전체를 카니올란 꿀벌 자생지로 보호한다는 조항을 넣었고, 농업연구소와 양봉가 협회와 정부가 함께 국가 육종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격리 교미장 네트워크를 만들고, 모든 여왕벌에 혈통 번호를 부여하고, 인공수정 기술을 양봉 학교에서 정규 교육합니다. 그 결과 봉군 손실률을 한국의 1/3 이하로 유지합니다.
만약 한국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꿀벌의 붕괴는 해를 더할수록 더 가파르게 심해지고, 어떤 해는 심각하게 꿀벌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받는 해도 있을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전에도 그런 해가 있었습니다. 2022년에 전국 농가 1만 8천 곳, 122만 4천 개 벌통에서 꿀벌이 사라졌습니다. 양봉가가 키우던 꿀벌의 56.3%가 한 해에 없어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이후에는 그보다 더 심할 가능성도 아주 높습니다.
꿀벌은 꿀과 화분, 로열젤리만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량 산업 전체가 꿀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과, 배, 딸기, 참외, 호박, 가지, 토마토, 블루베리 — 우리가 먹는 거의 모든 과일과 채소가 꿀벌의 화분 매개에 의존합니다. 꿀벌이 무너지면 먼저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고, 그다음에는 일부 작물의 생산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누군가는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시작해야 하는데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양봉협회도, 양봉가들도, 농진청의 전문가들조차도 문제의 원인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국 양봉 매체와 농진청 보고서 어디에도 csd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학계 일부에서 "유전적 다양성"이라는 일반론을 다루기 시작했지만, 그 다양성이 왜 봉군 붕괴로 직결되는지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한국어 자료는 사실상 없습니다.
앞서가는 선도 양봉가들이라도 이 문제의 심각성과 원리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양봉가들끼리라도 서로 처녀왕을 교환하고, 교미된 여왕벌도 교환하는 것을 상시적으로 행한다면, 맞교환 방식이기 때문에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근친교배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을 실천하는 농가가 늘어나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양봉협회나 지자체에서도 예산을 세워 적극 지원을 하게 되리라 봅니다. 정부의 변화는 항상 현장의 작은 성공 사례에서 시작됩니다.
새로 시작한 젊고 실천력이 높은 양봉가들이 이 포스팅을 읽고 실천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자기 봉장 한 곳이라도 csd 다양성을 관리하기 시작하면, 그 봉장이 5~10년 후에 한국에서 가장 건강한 봉장 중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주변 양봉가들이 그 봉장을 보고 따라 하게 되고, 그렇게 한 양봉가가 만든 작은 변화가 한국 양봉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응애 약을 한 종류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것보다, 봉판 한 장을 들고 빈 셀이 얼마나 박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더 큰 변화를 만듭니다. 그게 한국 양봉을 살리는 진짜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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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디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6년전만 해도 벌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큰 밤나무 밑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장관이었습니다 지금은 조용합니다
봉장에서 가장좋은 벌을
번식 사용 하는게
일반적인데
그게 근친 이라 않좋네요
진짜일까 ?
미물은 근친 관계 없는듯
좋은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