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memory)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주는 징검다리다.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물리적으로 98%나 다르다. 원자 수준에서 우리의 간은 6주, 피부는 1개월, 위벽은 5일마다 새롭게 생성되며,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뼈도 3개월마다 새 것으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매 순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일한 ‘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비밀은 기억에 있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주는 징검다리다.
심리학자 에빙하우스(Herman Ebbinghaus)는 무의미한 철자를 사용해 기억과 망각에 대한 실험을 했는데, 그 결과 망각은 학습 10분 후부터 시작되었으며 1시간 뒤에는 50%가, 하루 뒤에는 70%가, 한 달 뒤에는 80%가 기억에서 지워지는 망각곡선을 발견했다. 망각곡선은 우리의 기억이 시간에 따라 얼마나 지속되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기억 연구에서 중요한 과학적인 발견이었다. 심리학자들이 기억을 본격적인 연구 주제로 삼기 시작한 것은 인지심리학이 도래하게 된 1960년대 즈음이었다.
인간의 기억 과정을 설명하려는 여러 모형과 이론들이 있으며, 기억의 또 다른 측면인 망각에 대한 연구도 있다. 기억에서 가장 유명한 이론은 애트킨슨(Richard Atkinson)과 쉬프린(Richard Shiffrin)의 중다저장 모형(multi-store model)이다. 기억을 하나가 아닌 세 가지로 구분하는 중다저장 모형은 기억의 전반적인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많은 기억 연구의 토대가 될 만큼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중다저장 모형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곳은 감각 기억(sensory memory)이다. 시각이나 청각 등 감각 기억은 시각의 경우 영상 기억(iconic memory), 청각의 경우 음향 기억(echoic memory)이라고 한다. 영상 기억은 0.5초 이하, 음향 기억은 2~3초 정도로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되기 때문에 감각 기억은 감각 등록기(sensory register)라고도 불린다.
우리에게 친숙한 다른 그림 찾기는 바로 영상 기억을 이용한 놀이다. 다른 그림을 찾기 위해 그 누구도 첫 번째 그림을 오랫동안 보면서 완벽히 기억한 뒤 다음 그림을 보면서 찾지 않는다. 단지 두 그림 위에서 눈만 빠른 속도로 굴릴 뿐이다. 그러다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곳을 자세히 보면 역시나 다른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영상 기억 덕분이다. 망막에 찍힌 첫 번째 그림의 영상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 그림을 쳐다보면, 망막에 두 그림의 영상이 겹치게 된다. 이때 같은 그림과 다른 그림은 시신경을 다르게 흥분시키고, 우리는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감각 기억으로 들어온 정보 중에서 주의의 선택을 받은 정보는 단기 기억(STM ; Short-Term Memory)으로 넘어가고, 나머지는 사라진다. 단기 기억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보가 대략 20~30초 정도 짧게 머무르는 기억이다. 이 동안에 여러 차례 시연 혹은 되뇜(rehearsal)을 하면 정보는 그 다음 단계인 장기 기억(LTM ; Long-Term Memory)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내 사라지고 만다.
단기 기억의 용량은 얼마나 될까?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심리학자 밀러(George Miller)는 1956년에 발표한 「마법의 수 7±2」에서 단기 기억의 용량이 평균 7개, 개인차를 고려하면 5~9개 정도라고 했다. 이후 심리학자들은 여러 연구를 통해 단기 기억에서 처리하는 정보의 단위는 항목(item)이 아니라 청크(chunks)일 수 있음을 밝혀냈다. 청크란 여러 항목의 정보를 하나의 묶음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청크를 사용하면 단기 기억의 용량은 얼마든지 증가한다. 핸드폰을 개통할 때 뒷자리 네 번호를 정하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잘 암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배려다.
단기 기억의 정보를 20~30초 이내에 여러 번 되뇌면 그 정보는 장기 기억으로 이동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장기 기억의 지속 시간은 영구적이며, 용량은 무제한이다. 물론 모든 정보를 생생하게 기억해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정보들이 사라진다는 증거가 없을 뿐이다. 왜냐하면 당장에는 기억할 수 없는 정보라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단서를 제시하면 인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장기 기억에서의 망각은 인출 실패(retrieval failure)로 본다.
장기 기억의 용량이 무제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매우 놀라워한다. 다들 한 번쯤은 학창시절 머리가 가득 차서 더이상 공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느낌의 문제일 뿐이다. 더이상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가득 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
기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지속 시간이다. 이는 중다저장 모형에서 가정하는 기억의 이름(단기, 장기)에서도 알 수 있다. 중다저장 모형에서는 지속 시간을 단기에서 장기로 바꾸어주는 기제가 시연 혹은 되뇜이라고 했다. 주어진 정보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이 방법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암기법이다. 하지만 정말 이 방법이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바꾸어주는 유일한 기제일까?
심리학자 크레이크(Fergus Craik)와 로크하트(Robert Lockhart)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1972년에 처리수준 모형(levels of processing model)이라는 새로운 기억모형을 제안한 이들은 기억의 지속 시간이 정보를 처리하는 수준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주어진 정보를 깊은 수준에서 처리하면 오래 기억할 수 있고, 얕은 수준에서 처리하면 오래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이해하면 깊은 수준으로 처리하는 것이므로 여러 번 되뇌지 않고서도 오래 기억할 수 있고, 의미를 모른다면 얕은 수준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어 아무리 기계적으로 되뇌어도 기억에서 금세 사라진다.
일상에서 종종 경험하는 기억 현상을 잘 설명해주는 처리수준 모형은 한때 중다저장 모형의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깊고 얕다는 수준을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면서 순환논리의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오래 기억이 남았다면 깊은 수준으로 처리했기 때문이고, 깊은 수준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식으로 밖에는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과학에서 순환논리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다. 결국 이 이론은 현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처리수준 모형의 도전으로 중다저장 모형의 시연은 유지 시연(maintenance rehearsal)과 정교화 시연(elaborative rehearsal)으로 세분화 되었다. 전자가 기존의 단순 반복 혹은 되뇜이라면, 후자는 처리수준 모형에서 말하는 의미 중심인 깊은 수준의 처리다. 암기를 할 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유지 시연, 의미를 파악하거나 혹은 자신의 경험과 연관시켜 암기하는 전략은 정교화 시연이라고 할 수 있다.
크레이크와 로크하트가 중다저장 모형의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다가 본의 아니게 중다저장 모형을 수정 발전시켰다면, 뉴욕대학의 심리학자 배들리(Alan Baddeley)는 처음부터 중다저장 모형을 수정 발전시키려고 했다. 단기 기억은 정보가 잠시 머물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동시에 의사결정까지 담당하는 곳이니 작업 기억(working memory)으로 명명하자고 주장했다. 배들리의 주장과 연구 결과로 이제는 단기 기억보다는 작업 기억이라는 표현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중다저장 모형의 확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장기 기억을 다양하게 구분했다. 우선 명시(외현) 기억(explicit memory)과 암묵(내현) 기억(implicit memory)의 구분이 있다.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며 당장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것이 명시 기억이고, 비의도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어서 쉽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암묵 기억이다.
친구를 만나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마저 못한 말이 떠올라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데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옷이 눈에 띈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지만 확실히 생각은 나지 않는다. 의도적인 주의 집중으로 명확히 기억할 수 있는 친구와의 대화 내용이 명시 기억이라면, 명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친구 옷에 대한 정보는 암묵 기억이다.
분명히 친구를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친구의 옷 역시 보았을 것이다. 다만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명확히 기억할 수 없을 뿐이다. 이러한 암묵 기억은 우리가 원할 때 말로 표현되지는 않으나 그와 비슷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 알아차리게 된다. 지나가는 사람의 옷이 눈에 익숙한 이유는 바로 친구의 옷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암묵 기억은 데자뷔(deja vu) 현상을 설명해준다.
또 다른 장기 기억의 구분은 서술 기억(declarative memory)과 절차 기억(procedural memory)이다. 서술 기억은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억으로, 다시 의미 기억(semantic memory)과 일화 기억(episodic memory)으로 구분한다. ‘12월 25일은 성탄절’처럼 객관적인 사실이나 지식이 의미 기억이라면, ‘초등학교 2학년 때 갑작스럽게 배가 아파서 화장실로 뛰어가던 중 바지에 실례를 했던 경험’처럼 이야기로 풀어낼 수 기억은 일화 기억이다.
반면 절차 기억은 우리의 몸이 기억하는 운동 기억이다. 어린 시절에 배웠던 수영이나 스케이트는 수년 혹은 십년 이상 하지 않아도 적응할 수 있는 시간만 잠깐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예전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 절차 기억은 소뇌(cerebellum))에 저장되는 기억이라서, 대뇌에 저장되는 다른 기억들과 달리 쉽게 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기억상실증과도 무관하다. 또 언어와 무관한 소뇌에 저장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쉽다. 수영이나 스케이트 타는 방법을 말로 가르쳐주려 하면 표현하는 사람도 힘들고, 배우는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몰라 서로 짜증만 나고 싸우기 십상이다.
한편으로 장기 기억은 지식체계다. 우리의 지식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의미망 모형(semantic network model)이다. 이 모형은 우리의 지식 속에는 여러 개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연결 거리가 연상 정도와 관련성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한 개념이 자극을 받으면 그 주변에 가까이 위치한, 즉 연관성이 높은 단어들은 활성화되기 쉬운 것이다.
심리학에서 종종 언급되는 점화 효과(priming effect)는 의미망 모형의 증거다. 점화 효과는 먼저 제시된 자극(점화자극)이 나중에 제시된 자극(표적자극)의 처리에 영향을 주는 현상이다. 참가자들에게 ‘의사’라는 단어를 제시하고 ‘간호사’를 제시한 조건과, ‘빵’을 제시하고 ‘간호사’를 제시한 두 조건 중에서 ‘간호사’라는 단어에 대한 참가자들의 수행은 첫째 조건이 훨씬 뛰어났다. 이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의사와 간호사의 연결이 빵과 간호사의 연결보다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화 효과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자극들을 대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암묵 기억의 존재를 증명하는 실험 결과로 언급된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매우 정교하며 복잡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