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 드라마는 집안일을 하면서도 볼 수 있을까?
2023.10.17
외국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갖는 궁금증은 흔히 ‘한국 여자들은 정말 드라마에서
처럼 시어머니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사느냐’ 라고 합니다. 시댁이라는 것이 기혼녀로 사
는 한국 여성들에게 영원히 껄끄러울 것 같은 화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에
등장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현실에선 흔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에는 결혼한 자
식 일에 간섭하지 않고, 명절에 며느리를 힘들게 하는 대신 부부끼리 해외여행 가는 현대적
인 시부모들도 많다고 하죠. 그렇다면 왜 현 세대의 가치관에는 맞지도 않는 가부장적인 가
족 드라마에서는 외국인들이 일반화 할 만큼 당연하고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걸까요?
원래 사회에서 드라마를 비롯한 모든 유행과 문화를 이끄는 건 젊은 세대입니다. 인터넷 등
공론의 마당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대개 젊은이들이고, 드라마의 주인공도 죄다 젊은이
들입니다. 그렇지만 시청률에 목숨을 거는 방송사들 입장에서 젊은이들은 결코 ‘갑’이 아닙
니다. 젊은이들이 놀러 나가거나 야근을 하고서 시청률로는 집계가 되지 않는 인터넷으로
지난 방송을 보고 있는 동안 조용히 실시간으로 시청률을 올려주는 이들은 주부, 특히 고령
의 주부들입니다. 옆에 먹을 것을 잔뜩 쌓아두고 텔레비전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카우
치 포테이토’들이 이끄는 미국 텔레비전 쇼 시장과는 사정이 다른데요. 그래서 첨단 유행의
옷을 입은 드라마들도 이전 세대를 산 주부들이 동의할 수 있는 가치관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드라마가 유난히 ‘친절한 것‘도 주부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한 번 말로 설명해주며, 많은 클리셰들로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합
니다. 눈요기가 되는 에피소드가 조밀하게 펼쳐지지만 큰 줄거리에는 별 진전이 없어 몇 시
퀀스쯤 건너뛰어도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화면보다 개
고 있던 빨래에 눈길이 더 자주 갈 만큼 느슨해진다 싶으면 상대에게 따귀를 올려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다가 끓는 찌개에 두부를 넣으러 가거나 걸
레질을 하느라 한눈을 팔아도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영화처럼 드라마
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면 불만일 수도 있는 면이죠.
한국 드라마는 보다가 갑자기 과일이 먹고 싶어져 냉장고를 뒤지고 와도, 가족과 배우들을
품평하다 대사 몇 마디 놓쳐도 친절히 기다려줍니다. 어느 순간부터 화면 앞에서 이야기를
즐기면서도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의식하게 해주는 이 열려 있음’이 편리하다고 느껴집니
다.
자기 일을 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항상 가사와 가족을 의식하고 있고 휴식 시간마저도 몰입
해서 즐기지 못하는 주부들의 현실이 상기되어 어쩐지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주부라면
누구나 어느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라마만 보면 뭔가 허전함을 느끼게 되어버린 이들에
게 이 대목에서만큼은 세대를 초월한 동지애를 느끼게 됩니다.
아마 오늘 저녁에도 주부들은 사소한 집안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드라마를 흘깃거릴 것입
니다. 다만, 이제 흔하디 흔한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좀 그만 보여줬으면 하는데요. 새롭게
진입하는 요즘 중년 시청자들은 나이 들어서도 자식 인생에 간섭하지 않고 멋있게 사는 시
어머니가 보고 싶을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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