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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참고말씀: 눅5:21
읽을말씀: 눅7:1-50
주제말씀: 눅7:18,19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첫째, 분명한 믿음을 가지되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1-35절).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눅7:18,19)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1절) 누가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렸습니까? 한 백부장입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2,3절)
그는 무엇으로써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렸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크고도 분명한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종을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 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6,7절)
예수님은 이를 들으시고 무엇을 칭찬하셨습니까? 그의 큰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9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실 줄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크고도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그 앞에서 날마다 간구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나인성에 들어가셨을 때는 무슨 행렬을 만나셨습니까? 장례식 행렬입니다. 누구의 장례 행렬이었습니까? 나인성 과부의 독자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11,12절)
그러나 누구를 만나자마자 이 행렬은 곧 기쁨과 환희의 행렬도 바뀌고 말았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그의 죽은 아들을 소생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13-16절)
우리의 고난의 행렬도 누구를 만나면 기쁨과 환희로 곧 바뀔 수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원컨대 이 시간도 우리에게 ‘일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참고로,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누구로 밝히 드러나셨습니까? 하나님의 큰 선지자입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밝히 증거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신다는 점입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16절)
이 같은 소식은 누구에도 들려졌습니까? 옥중에 있는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18절)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옥중생활로 말미암아 힘들어서 그런지 그 믿음이 어찌되고 말았습니까? 흔들렸습니다. 그가 잠시나마 흔들렸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까? 그가 예수님께 했던 질문, 즉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던 질문입니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19,20절)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이 하신 일들을 듣고서 알되, 흔들리지 말고 확고한 신앙을 가질 것입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귀 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21-23절)
그리고 잠시나마 흔들렸던 그를 어찌해 주셨습니까?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큰 자’로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보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26-28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누구든지 흔들릴 수 있고, 누구라도 잠시나마 그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원컨대 혹 우리 중 그런 분들이 있다면 빨리 믿음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전히 세례를 받기를 거부하고 있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에 대해선 무슨 비유로 교훈하셨습니까? 장터 아이들의 비유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30-32절)
이를 통해 그들의 어떤 태도를 질타하신 것입니까? 세례 요한을 통해서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어도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33-35절)
우리의 경우는 혹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들처럼 마음을 강퍅하게 한 채, 주의 말씀을 거부하고 또 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라도 속히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둘째, 받은 사랑이 귀한 줄 알고 감사와 헌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36-50절)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누가 와서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부어드리고 닦아드렸습니까? 그 동네의 한 죄 많은 여인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보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저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36-38절)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몬을 향해 무슨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까?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비유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바든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40-43절)
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역설을 친히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절)
실제로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지었던 것 같습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서...”(37절 상) 그래서 그만큼 적극적이고도 헌신적인 사랑으로 보답했었겠지요.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4-46절)
그러나 이 대목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 여인만 많은 죄를 지었고, 이 여인만 많은 죄를 탕감 받았느냐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바리새인 시몬 역시 이 여인 못지않게 죄인이었고, 그 역시 많은 죄를 사함 받았을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셨다는 점과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36절) 두 빚진 자 비유에서 두 사람 모두 탕감 받았다는 점 등입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42절 상)
아무튼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크고도 귀한 줄 알면, 주님을 그만큼 많이 사랑하게 되지만, 이를 알지 못하면 주님을 적게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도 크고도 귀한 줄 알고 그분을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랑이 귀한 줄도 모르고 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한편,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증거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신성, 곧 하나님의 아들 되심 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죄는 사하실 수 있는데, 이 여인을 향해 죄 사함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는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48,49절)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눅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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