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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9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루카 7,11-17
나쁜 재료를 주며 좋은 물건으로 돌려받기를 바란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복음만 읽어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 과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살려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왜 불쌍하게 죽는 이들은 모두 살려주시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도 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마음이 없는데 선물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어머니의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이 말에 어머니의 큰 믿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돌려주셨다”라는 말 안에는 어머니가 예수님께 먼저 “맡겨드렸다”, 혹은 “봉헌하였다” 라는 말이 전제됩니다.
맡겨드렸다는 말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인의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맡긴다는 말은 ‘죽여서 봉헌한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자기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죽여서 맡기지 않고 살려서 맡기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고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요즘 선생님 신자들에게 엄마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학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연도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선생님에게 보낸 문자입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곰곰이 생각 좀 하다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 내내 서 있게 한다’라고 아이가 말하더라고요.
‘엄마 근데 나 도덕책을 잃어버렸어.’ 그날 밤 아이는 경기를 일으켰는데, 경찰서에 문의해보니 아동학대라고 하는데, 편법으로 아이들을 조지시면 편법으로 선생님을 조질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겠어요 ^^”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오늘 아이들에게 확인해 보았는데요.
제가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엄마들은 아이들이 이상해지는 것을 선생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맡기지 않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20대 교사가 안타까운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구타당해도 선생님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편이 없어? 교사가 죽었는데!” 라고 울부짖는 동료 교사의 말은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일까?’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동료 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프로필 사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들 어린데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큰 영향을 준다는 거 아시죠? 아직 사실관계도 판명 나지 않은 일로 이렇게 추모한다는 걸 드러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으니 언급 자제 부탁드려요.”
이 댓글 때문에 파문이 일자 또 이러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선생님 제 문자를 여기서 볼 줄 몰랐어요. 너무 당황스럽네요. 개인적인 문자 내용을 유포하셨으니 각오는 되신 거죠? 학부모 회의안건으로 올릴게요. 너무 치욕스럽네요.”
어머니들이 이렇게 교육을 잘할 줄 안다면 왜 학교에 보내는 걸까요? 본인이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애 아빠가 지금 참고 있어요. 내가 말렸어요!”라는 등으로 협박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선생님들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와 선생님들을 위한
솔루션에서 “실제의 실천적인 변화가 오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에 어느 유명 교육 전문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세요.”
예를 들어 놀이터에서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타려다가 다치면 엄마는 왜 자기 아이가 줄을 서지 않게 키웠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선생님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애 마음 얼마나 읽어주셨어요?”
교육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변화시키게 만들려면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말은 봉헌한다는 말입니다. 봉헌한다는 말은 죽인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다시 스마트폰도 빼앗을 수 있고 아이를 돌려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정상적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믿지 못하면서 자녀를 맡긴다는 말은 학교 교육으로 내 자녀가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변화시키고 싶다면 맡겨야 합니다.
.........................................................................,
살아 있는 것을 주면서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맡기려면 완전히 맡기십시오.
완전히 맡겼다는 말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제에게 성당을 맡겼는데 교구가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목소리에 휘둘리면 어떨까요?
사제는 그 성당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사제가 봉사자를 뽑았다면 그 봉사자가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도록 해야 합니다.
책임은 그 봉사자를 뽑은 사제에게 있습니다.
물론 사고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맡기려면 제대로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봉헌하여 좋은 것으로 돌려받으려면 죽은 제물을 바쳐야 함을 잊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9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티모테오 1서 3,1-13
루카 7,11-17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타볼산을 만나게 되고 에스드렐론 평야로 접어듭니다.
좀 더 내려가다보면 사마리아 지방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 길가에 나인(Nain)이라는 작은 성(城)이 있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40Km, 나자렛에서는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오늘 날까지도 네인(Nein)이란 이름의 작은 마을로 남아있습니다.
‘나인’(Nain)이란 말의 의미는 원래 ‘기쁨’ ‘환희’ ‘즐거움’이었습니다.
결국 나인성은 ‘기쁨의 고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카파르나움을 거쳐 나인성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날은 고을 전체가 기쁨, 환희, 즐거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울적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나인성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직 갈 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외아들이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유족이라고는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요절했고, 동시에 외아들마저 요절했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인생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해도 해도 너무한 통념이 하나 있었는데, 요절을 죄에 따른 벌로 간주한 것입니다.
안그래도 남편과 아들을 잃고 슬픔이 하늘을 찌르는데, 중죄인 취급까지 당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사실 남편이 요절한 이후 어머니에게 외아들은 삶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 삶 전체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냉랭하고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저 아들만 바라보며 견뎌왔습니다.
그런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인생 역시 끝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인성을 들어설 때 마주쳤던 상황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기쁨의 고을이란 이름의 나인성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름이 지닌 바처럼 환희로 가득 차있어야 할 나인성은 한 인간 존재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죽은 외아들의 관을 메고 걸어오던 사람들의 얼굴 역시 비통함과 상실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절묘하게도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에서 ‘딱’ 마주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언행을 유심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혹독한 현실 앞에, 그 누구도 입 하나 뻥긋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 과부를 위로해 달란다거나, 외아들을 되살려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나서신 것입니다.
그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는 한 인간 존재 앞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을 느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다거나 도움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당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행동하십니다.
관으로 다가서선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복음 7장 14절)
예수님에 의한 죽었던 외아들의 소생 사건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조차 지배하고 주관하시는 참 메시아시며, 참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 안에 이미 죽은지 오래 된 사람 조차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입증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은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이심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음보다 더한 큰 슬픔에 잠긴 한 인간을 향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다가오시고,
어떻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시는 가를 세밀하게 보여준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니신 모든 능력을 오로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자비로운 소생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나인성의 과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다양한 슬픔과 시련, 작은 죽음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한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거듭 부서지고 허물어져, 한없이 비참해진다 할지라도, 그 비참함을 묵묵히 견디다보면, 또 다시 새벽이 밝아오고, 또 다시 작은 희망의 문이 살짝 열릴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강론>
(2023. 9. 19. 화)(루카 7,11-17)
<일어나라.>
“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루카 7,11-17).”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또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은 죽음의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신(희망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들은, 죽은 그 사람만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적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그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군중을 위한 기적이기도 하고, 지금 복음서를 읽고 있는 우리를 위한 기적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흔히 무심코 지나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루카 8,54)”
“예수님께서 ......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나인’이라는 고을에서도 죽은 젊은이에게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신 것은,
죽은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대로 움직일 수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은 당사자의 응답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음은 ‘긴 잠’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울지들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루카 8,52).”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무생물’처럼 되어버린다는 생각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어도 ‘무생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살아 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우리가 바치는 기도도 들을 수 있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연도’는 죽은 사람의 안식과 구원을 주님께 부탁드리는 기도이고, 동시에 유가족을 위로하는 기도이고, 그리고 죽은 사람 들으라고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을 때,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의 심정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히 예수님이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떤 심정일지, 살아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증언하고 고백할 수 있는 첫 번째 증인은 바로 그 당사자들입니다.
<복음서에는 당사자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한 당사자의 증언과 고백은 목격자들의 말보다 더 생생한 증언과 고백이 되었을 것입니다.>
라자로는 살아난 뒤에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야이로’ 라는 회당장의 딸과 ‘나인’ 고을의 젊은이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살아난 뒤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울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ㄹ-4ㄴ).”
“일어나라.” 라는 말씀은, 이야기 속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서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서 생명을 향해 나아가라.”
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죄입니다.
정말로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죽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겨우 살고 있더라도,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일수록 더욱더 주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난 그 젊은이는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 ‘진짜’ 라고 증언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죽은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으로 해석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