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6월6일 수. [(녹)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제1독서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입니다. 1,1-3.6-12
복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27
◈ [서울]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지난 화요일에 잠실 야구장엘 갔습니다. 두산과 SK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바보의 나눔’에서 초대를 하였고, 교구청의 신부님들과
함께 갔습니다. 아쉽게도 경기는 3회를 끝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야구는 규정상 취소된 경기의 기록과 결과는
모두 없어진다고 합니다. 홈런을 쳤던 선수는 아쉽지만, 자신의
기록에서 취소될 것입니다. 홈런을 맞았던 투수는 홈런을 맞았던
기록이 취소될 것입니다. 비록 경기의 기록은 취소되겠지만 경기장을
찾았던 관객들, 경기에 최선을 다했던 선수들의 열정은 기억될
것입니다.
저는 그날 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을 보았습니다. 선수들이 등장하면
선수들을 위한 응원 노래가 있습니다. 팬들은 선수들을 위한 응원
노래를 모두 외우고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가운데도 소리를 높여
응원의 함성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팀과 선수를
위해서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내는 팬들이 있었습니다. 의무감으로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좋아서 일하는 사람이 더 열정적인 것
같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팬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서는
의무감은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면서 감옥에
갇히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과 고통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디모테오에게도 당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뜨겁게 불태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명동 거리에는 솜사탕을 파는 사람, 뽑기를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려한 색의 솜사탕이 되기 위해서, 설탕은 뜨거운 회전판에서
녹아야 합니다. 설탕이 녹지 않으면 저렇게 예쁜 솜사탕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뽑기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불 위에서 설탕은 녹아야
하고, 여러 모양의 뽑기가 되기 위해서는 늘어진 판 위에서 쇠도장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부활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고통에서 즐거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는 부활의 의미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기에
불의한 죽임을 당한 이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마카베오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하는 어머니와 아이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티아티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제사를 거부하고
순교를 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의 충실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불신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민족과 계층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으로 지금 이곳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이 사는
삶의 자리에서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
또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뜻을 우리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우리가 죽은 후에 어찌 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규범과 기준이 똑같이 적용되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규범과 기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천으로 취소된 경기의 내용은 기록으로 남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게 된다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살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문을 넘어 또 다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단 한 번 살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헌신은 의무감보다는 열정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의 불이 태우는 것
2018년 나해 6월6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 12,18-27
<성령의 불이 태우는 것>
“케빈 두런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의 멤버. 당신이 NBA(미국
프로농구)의 가장 가치 있는 사람(MVP)입니다. 축하드립니다.”
2013-2014 MVP를 수상한 케빈 듀런트, 그의 수상소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귀감을 주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나의 어머니에게... (약간 울먹이며... 어머니도
울먹이고...) ... 어머니, 우리가 해낼지 몰랐어요. 엄마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 형을 가지셨죠. 그리고 3년 뒤 제가 태어났죠.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어요. 두 아이를 가진 미혼모였던
엄마는 겨우 21살밖에 안 됐죠. 우리가 여기저기 쫓기듯 이사를 다닐
때, 아무도 우리가 이 자리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죠. 우리의
힘으로 말이죠. 저의 가장 소중한 추억 중 하나는 우리가 처음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였어요. 침대도 없고 가구도 아무 것도 없었죠.
우리는 그저 거실에 앉아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해냈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좋은
일이 생길 때면 무엇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는지 돌아봅니다. 엄마는
무더운 여름,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제가 언덕을 뛰어넘게 하셨고
팔굽혀펴기를 하게 하셨습니다. 코트의 바로 옆에서 8-9살인 저를
목 놓아 응원해주셨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을
때에도 엄마는 끊임없이 믿음을 주셨고 길거리에 노숙자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따뜻한 옷을 입혀주시고, 식탁에 음식을
차려주시고, 아무 것도 드시지 않았을 때에도 엄마는 배부르다며
너희들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굶주린 배로 잠에 드셨죠.
어머니는 저희를 위해 항상 희생하셨어요. ... 어머니가 MVP(가장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아들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청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어머니를 위해 기립박수를 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성령과 같습니다.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불과 같습니다. 뜨겁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여러 번 성령은 ‘불’로
상징되어 나옵니다. 하지만 불은 무언가를 태워야 살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불타는 떨기나무가 그렇고 하늘에서 내려와 제단 위에 소를
불사르는 것도 그렇고 신약에서는 불혀의 모양으로 내려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불은 무언가를 태우지 않으면 소멸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이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합니다
(1테살 5,19). 성령의 불을 끄지 않으려면 불이 계속 타도록 탈 수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제공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무언가는
떨기나무일 수도 있고 소일 수도 있으며 사람의 혀일 수도 있습니다.
소나 혀나 나무는 모두 자아를 상징하고 인성을 상징하며 우리
자신을 상징하고 좁게는 육체적 욕망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영과
육은 반대인 것입니다. 육의 욕망을 채우면 성령의 불이 태울 것이
없어져 우리 안에서 성령의 불은 꺼져버립니다. 혀는 언어를 말하는데
혀가 자아의 상징인 이유는 바벨탑을 쌓을 때 혀(언어)가 갈라진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아는 교만인데 교만은 그 언어로 서로
갈라져 싸우게 만듭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말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듣게 됩니다. 자신의 혀가 불살라지고 하느님의 혀로
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은혜를 불태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령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성령을 내려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간직하셨습니다. 은혜가
불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살라지고
있어야합니다. 성령은 불이고 제단은 십자가이며 그 제단에서
불살라지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케빈 듀런트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새벽부터 일어나서 자신의 욕망을 불살랐던 것과 같습니다.
만약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우리 안의 욕망들은
불타고 있어야합니다. 우리 각자의 십자가 위에서 성령으로 불타
우리 자신이 봉헌되고 있어야합니다. 음식이 성령과 같은데 그것으로
육신을 괴롭혀 근육을 만들지 않으면 살만 쪄서 오히려 건강에 해를
끼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있다는 증거는 바로 그분의
뜻을 위해 내 욕망이 얼마나 불살라지느냐에 있습니다. 기도는 편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운동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태우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육체가 남는 것처럼 성령도 우리를
불태워 매우 가치 있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만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반드시 고난이 오는데 그 뜨거움으로 우리가 자신의
더러움에서 정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6-8)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VIP 증후군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6월6일 수요일
VIP 증후군
오늘은 “VIP 증후군”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 24장 23절 말씀에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VIP 증후군”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용어는 의사가
일반 환자들과 달리 특정 환자를특별하게 신경 써서 치료하려다
오히려 실수가 발생해 병이 심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VIP 증후군은 의사가 유명 인사나 자신이 잘 아는 지인,
가족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짐으로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과잉진료나 편리를 봐주다가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거나 잘못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병원에서 아는 의사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잘 봐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 의사뿐입니까? 특히 재판관들도 자신과의 친분과 이익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을 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 결과 어떻습니까?
더 큰 죄를 방조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의 길로 가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재판할 때 사람 봐 가며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그 순리대로 사는
것 가장 최선이며 옳은 길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수도회] 나는 비록 지금 감옥에 갇혀있지만...
2018년 나해 6월6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나는 비록 지금 감옥에 갇혀있지만...
베드로 사도와 더불어 초대교회를 떠받치던 든든한 기둥이요 착한
목자, 탁월한 웅변가이자 수려한 문학가였던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은
언제 읽어도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러 편지들 가운데 티토서와 티모테오 1,2서는
‘사목서한’으로 분류됩니다. 이 편지들은 다른 서한과는 달리 사목자
개인에게 보내졌습니다. 사목서한을 통해 바오로 사도는 양떼들을
위한 사목자로서의 정신, 태도,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디모테오 2서의 경우, 주님 때문에 옥에 갇힌 바오로 사도가
애제자였던 디모테오에게 보낸 ‘옥중 편지’로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겹습니다.
혹시 ‘옥중편지’ 비슷한 것을 써보신 분들은 크게 공감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제한된 옥중에서 쓰는 편지이기에, 다른 글에 비해 더욱
각별할 것입니다. 그 내용이 더 진실되고, 더 정성스럽고, 더 절실할
것입니다.
디모테오 2서를 집필할 당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수인(囚人)의 몸이었기에 그는 더 이상 복음을 선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옥중에서 그는 이단자들이 교회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도 느낌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디모테오를 향한 메시지는 더욱 특별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 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주님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티모테오 2서 1장 3~8절)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바오로 사도의 초지일관 한결같이 의연한
태도입니다. 자신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지만, 복음이, 주님의 말씀이
갇힌 것이 아님을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자신은 비록 수인
신세이지만,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을 대리해서 더욱 열렬히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자신은 비록 투옥되었지만, 복음은
결코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더 멀리 퍼져나갈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옥중에서조차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한결같은
태도로 복음 전파를 위해 활활 타올랐던 바오로 사도의 생애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티모테오 2서 1장 7절)
이 세상에는 참으로 비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거철로 접어들면서
그런 사람들의 실체가 더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근거없는 비방이요 흑색선전입니다. 나중에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걱정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 그리 천박하고 몰염치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다시 ‘불사조’처럼 기사회생해서,
의기양양한 표정 지으며,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상식과 예의, 인성과 품위를
갖춘 분들이 우리 사회의 리더로 자리잡길 기도합니다.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갖춘 분들이 우리의 지도자로
간택되길 큰 관심과 더불어 지켜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청주] 진리는 언제나 살아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6월6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12,18-27)
진리는 언제나 살아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있었는가 봅니다. 그리고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12,25.2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부활 신앙을 지닌 이들의 관심사는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처럼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세월이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 는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틀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까?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행복하시고 그것이 영생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 곧 하늘 이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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