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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소녀는 최고의 기생 됐다…전설의 미녀, 이난향
중앙일보 입력 2025.02.23 21:0 이경희 기자
이난향(1901~79)은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습니다. 평양 출신인 난향은 열셋에 서울에 와 스물다섯에 조선권번의 취체 자리에 오릅니다. 명기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기생조합 조선권번, 요즘으로 치면 하이브나 YG에서 일종의 교장 역할을 맡은 겁니다.
70대에 접어든 이난향은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명월관’을 연재합니다. 기생이 남긴 기생의 역사라는 흔치 않은 기록이었습니다.
오늘의 '추천!더중플'은 55년 전의 원고를 디지털 버전으로 다듬은 이난향의 '명월관'(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64)입니다. 조선왕조·대한제국의 몰락으로 궁중 나인과 관기가 내몰리면서 급격히 변화한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제1화. 기생이 되자, 아버지는 일평생 외면했다
안개가 자욱이 낀 1913년 여름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평양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어머님 말씀은 임금님 앞에서 춤과 노래를 보여드리는 진연(進宴)이 곧 열리며 이 진연에 내가 뽑혀 꼭 참석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연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다만 처음 타 보는 기차와 차창에 비치는 낯선 고을에 눈이 서려 신기하고 즐겁기만 했을 뿐,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무한한 고비를 앞에 놓고 있다는 것은 과연 짐작도 못 했다.
그때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평양 기적(妓籍·기생등록대장)에 올라 난향이란 기명을 갖고 있었다.
나는 평양에서 1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는 아버님이 좌수(座首·지방자치기구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집안 살림이 넉넉했으나 아버님께서 물산 객주업을 하시다 실패함으로써 집안이 기울었고, 오빠와 언니들이 모두 결혼한 다음 어머님께서는 나를 의지해 살기 위해 열두 살인 나를 기생양성소라고 볼 수 있는 평양의 이름난 노래 서재에 보냈다. 이것이 내가 기생으로서 첫발을 디디게 된 동기였다. 이때 평양에서는 여염집에서 딸을 기생으로 만드는 것이 그렇게 큰 허물이 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내가 노래 서재에 다니기 시작한 지 13일이 지났을 때였다.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가 노래 서재에 나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아버지와 오빠는 크게 노하시어 나를 불러다 꿇어 앉히고 야단이셨다. 그러나 이미 13일 동안이나마 기적(妓籍·기생등록대장)에 올라진 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문에 발을 드리운 채 일평생 나를 면대해 주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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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소녀는 기생이 되었다…전설의 이난향, 그가 겪은 시대
중앙일보 2025.01.03 에디터 이경희
이난향의 ‘명월관’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양금 잘 띄우기로 그 당시 장안의 남자들은 어느 누구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난향(李蘭香)은 얼굴 잘나고, 거동 곱고, 말소리가 맑을뿐더러 하나 물으면 열을 아는 재주덩어리였으니 그것은 난향의 맑은 두 눈동자와 넓적한 이마에 그 재주가 들었다고나 할 것이다. 글 잘하는 사람들도 난향이요 돈 잘 쓰는 궐자*들도 난향이었다.
-‘명기영화사, 조선권번’, 『삼천리』 제8권 제6호, 1936년 6월 1일자.
*궐자(厥者): ‘그’를 낮잡아 이르는 말
해어화(解語花) - 말을 알아듣는 꽃, 기생(妓生).
이난향. 국립민속박물관.
이난향(1901~79)은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다. 평양 출신인 난향은 열셋에 서울에 와 스물다섯에 조선권번의 취체 자리에 오른다. 명기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기생조합 조선권번, 요즘으로 치면 하이브나 YG에서 일종의 교장 역할을 맡은 것이다. 30대 초반에 신문기자 남상일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지만 가곡과 가사 등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는 등의 예술활동은 이어간다.
70대에 접어든 이난향은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명월관’을 연재한다. 비록 말을 알아듣고 글 쓸 줄 알았으나, 기생임을 자랑스레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였다. 이난향의 글은 흔치 않은,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다. 조선왕조·대한제국의 몰락으로 궁중 나인과 관기가 내몰리면서 급격히 변화한 저잣거리의 풍속사이자,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하다.
더중앙플러스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 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이난향이 쓴 내용 중 팩트가 명확지 않아 후대에 입증되거나 반박된 부분, 여러 등장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고 재구성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제1화. 기생이 되자, 아버지는 일평생 외면했다
안개가 자욱이 낀 1913년 여름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평양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평양역 전경이 담긴 사진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어머님 말씀은 임금님 앞에서 춤과 노래를 보여드리는 진연(進宴)이 곧 열리며 이 진연에 내가 뽑혀 꼭 참석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연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다만 처음 타 보는 기차와 차창에 비치는 낯선 고을에 눈이 서려 신기하고 즐겁기만 했을 뿐,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무한한 고비를 앞에 놓고 있다는 것은 과연 짐작도 못 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4651
제2화. 나라 잃은 ‘마지막 군주’의 서글픈 진연(進宴)
진연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 중 하나다. 임금이 직접 나오는 엄숙한 잔치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는 잔치인 만큼 기생들이 빠질 리 없다. 진연이 있을 때에는 몇 개월 전부터 뛰어나거나 재질이 특출한 기생을 서울로 뽑아 올렸다. 정악원에서는 이들 기생들을 만에 하나 어전에서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 맹연습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연에 뽑힌다는 것은 기생으로서는 더없는 영광이다. 진연에 참가했다가 대감들의 눈에 들어 대감이 떼들이면 금방 마나님으로 불렸다. 양반이 기생을 사랑해 맞아들이는 것을 ‘떼들인다’고 했다.
기생은 이들 재상들과 함께 맞담배질도 할 수 있었으니 자연히 ‘기생재상’이란 말이 생겨 나오기도 했다.
대감의 눈에 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연에 참가한 기생에게는 나라에서 피륙 등 선물을 내렸으니 이 선물을 갖고 고향으로 내려가도 ‘진연에 뽑힌 기생’으로 뽐낼 수도 있었다. 진연은 기생들의 과거를 보는 곳이라고나 할까. 어떻든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전회에서도 적은 바와 같이 나는 이 진연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갔고, 장악원 봉상시에서 약 3개월 동안 진연에 관한 예행연습을 했다. 이 연습대로 실시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연습한 진연의 순서와 모습을 잠깐 적어 볼까 한다.
제3화.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조선 요릿집 명월관
융희 3년(1909년)에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지방과 궁중의 각종 기생들이 발붙일 곳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에는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과 인물이나 성품 및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연히 장사도 잘되고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이 됐다.
명월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요릿집*이다.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명월관을 본 것이 1913년,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때 명월관은 황토마루 네거리(황토현), 지금(1970년)의 세종로 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자리에 있었다. 회색빛 2층 양옥으로 된 명월관은 울타리가 없었고 대문은 서쪽으로 나 있었다. 2층에는 귀한 손님들을, 아래층에는 일반 손님을 모시는 것이 상례였으나 꼭 그와 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실이란 이름을 가진 특실의 방이 하나 있어 아주 귀한 손님이나 그윽한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공됐다.
아래층은 온돌이었으나 2층은 마룻바닥에 일부는 양탄자, 일부는 돗자리를 깔았고 겨울에는 숯불을 피운 화로가 방 가운데 놓여졌다.
처음 명월관 주인은 안순환씨. 그는 지금부터 61년 전인 1909년에 명월관을 열었다**. 안씨는 원래 상인이 아니었다. 궁내부 봉임관 및 전선사장으로 있으면서 어선과 철연을 맡아 궁중 요리에 반평생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순종을 모시고 창덕궁에 있을 때 이미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순종에 대한 일인들의 간섭이 너무나 심한 데 분통이 터져 사표를 내고 벼슬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안씨는 명월관을 개업해 궁중 요리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게 됐고, 술은 궁중 나인 출신인 분이가 담그는 술을 대 쓰는 바람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분이의 성명은 잘 모르나 그 무렵 그의 술 만드는 솜씨는 상류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이름났었다. 처음에는 약주·소주 등을 팔았지만 나중에는 맥주와 정종 등 일본 술을 팔았다.
이 무렵 융희 3년(1909년)에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지방과 궁중의 각종 기생들이 발붙일 곳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에는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과 인물이나 성품 및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연히 장사도 잘되고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이 됐다.
제4화. 의친왕부터 이완용까지, 명월관에 드나든 거물
초기의 명월관 손님들은 조정의 높은 벼슬을 지녔거나 현직 벼슬을 갖고 있는 사람 등 대감이라 불러야 하는 신분이 높은 분들이었다.ㅡ제일 높은 신분이었던 어른은 의친왕 이강공.
평양감사를 지냈고 후에 이왕직장관을 지낸 민병석, 순정효왕후 윤씨의 아버지이신 윤택영 부원군, 철종의 사위이며 개화파의 기수였던 박영효, 민충정공의 아우 되신 민영찬 대감, 조 대비의 조카 되는 조남승, 참판을 지낸 구용산, 친일파 거두 이완용·송병준·이지용, 이름 높은 화가 김용진 등 당대의 거물급은 거의 모두 드나들었다.
내가 만난 초기의 명월관 손님들은 조정의 높은 벼슬을 지녔거나 현직 벼슬을 갖고 있는 사람 등 대감이라 불러야 하는 신분이 높은 분들이었다.
제일 높은 신분이었던 어른은 의친왕 이강공. 평양감사를 지냈고 후에 이왕직장관을 지낸 민병석, 순정효왕후 윤씨의 아버지이신 윤택영 부원군, 철종의 사위이며 개화파의 기수였던 박영효, 민충정공의 아우 되신 민영찬 대감, 조 대비의 조카 되는 조남승, 참판을 지낸 구용산, 친일파 거두 이완용·송병준·이지용, 이름 높은 화가 김용진 등 당대의 거물급은 거의 모두 드나들었다.
이들 인사들과 만나는 것은 이분들이 명월관에 찾아와 부르시는 경우와 토요회 구성원들이 사랑놀음에 부르는 경우였다. 사랑놀음이란 명사들이 자기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기생을 부르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곳에 참석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사람 됨됨을 옆에서 듣고 보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체가 높은 분들이라 기생들은 이들과 합석할 때 무척 신경을 써야 했다. 의친왕 앞에 나아갈 때에는 “문안 아룁니다.” 이렇게 인사를 올려야 했고, 대감들 앞에 나갈 때는 “문안 어떱쇼”라고 문안 인사를 가려 써야 했다. 이뿐 아니라 나를 가리킬 때에도 의친왕 앞에서는 꼭 ‘소인’이라고 해야 했으며, 대감들에게는 ‘제가’라는 식으로 했다.
이처럼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가져야 했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연석에서 넘나드는 상스러운 언사는 고사하고라도 수틀리면 동석한 여자가 “이 새끼…” 하면서 호통을 치고 점잖은 손님은 오히려 여자의 기분을 맞추어야 한다니 세상은 바뀌고 또 바뀌었다.
제5화. 의친왕의 항일
의친왕이 명월관에 나타나시면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미와(三輪) 경부가 사복 차림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옆방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의친왕께서는 겉으로는 주색을 가까이하는 것 같았지만, 항상 친일파와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있었고 일인(日人)들도 이 점을 특히 경계했던 모양이다.
토요회는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모인 모임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친일파가 있는가 하면 배일파(排日派)도 있고, 사적으로도 서로 영합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인사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기미 3·1 독립선언 거사를 하기 직전 의암 손병희 선생께서도 명월관에서 열렸던 토요회에 참석하시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니까 토요회는 친일파든, 배일파든 일단 나라가 망하고 서로가 나라 없는 백성이 되자 무기력해지고 허탈한 상태에서 그저 만나 술이나 들고 환담이나 즐기는 목적 없는 당시 명사들의 모임이라고나 할까. 별다른 뜻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명월관 초기의 손님 중에서 잊히지 않는 분은 의친왕 이강공이시다. 의친왕은 고종황제의 아드님으로 숙원 장씨의 소생이었다. 순종이 후사가 없어 아우들 중에서 다음 계승자를 뽑아야 할 때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가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의로 미국·일본 등지에 외유를 하다가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등극,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후에야 서울로 돌아와 사동궁(寺洞宮)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의친왕은 구(舊)한국정부의 육군부장이었다. 합병 후에는 육군 중장이 되었고 무척 승마를 즐기던 분이었다.
⑥ “개돼지” 친일파에 침 뱉었다 … 기생들 놀라게 한 ‘상해마마’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2113
⑦ 더벅머리 창부 낀 술판에 분노 … 기생도 1·2·3패 ‘급’이 달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3749
⑧ 남다른 특기, 판사가 가르쳤다 … 양반댁 시집간 기생의 기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5373
더중앙플러스 이난향의 '명월관'의 새로운 에피소드는 매주 금요일 발행됩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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