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잡아라!”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 등 의약계의 대선 행보가 구체화되고 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선출되고, 대통합민주신당이 본격적인 경선 레이스를 시작하면서 의사, 약사들도 ‘호랑이(대권주자)’를 찾아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공약에 담기 위한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아직 여권의 대선후보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선거 때마다 재연됐던 특정 후보를 향한 ‘줄서기’는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고 있다.
무엇보다 의료계에서는 “예년처럼 특정 후보에 올인하다 뒤통수 맞는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물론 일각에서는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러 열기가 뜨거워지거나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릴 경우 결국 자의반 타의반 줄서기 행태가 재현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특히 의료계에 있어 이번 대선은 ‘정치권 로비파문’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 열리는 첫 선거인데다 그동안 정치권 창구역할을 해온 의정회, 치의정회 등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의료계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지가 관전 포인트다.
◇ 이명박 후보 초청한 선진회의
다음달 17일 의료와사회포럼, 뉴라이트의사연합 등 의료계를 중심으로 한 15개 단체들이 한국의료의 선진화를 표방한 네트워크 조직인 ‘선진건강복지공동회의’(이하 선진회의)를 출범한다. 특히 이날 창립식과 함께 열리는 토론회에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초청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단체는 사실상 대선을 겨냥하고 있다.
이 단체의 박양동 공동대표는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의 물꼬를 트고, 평등과 획일주의 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의료정책을 타파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날 토론회 주제를 ‘한국의료 선진화를 위한 정책방안’으로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간사를 맡고 있는 우봉식 의료와사회포럼 공동대표는 “대선 공간에서 의료 선진화를 위한 각종 정책을 후보 공약에 반영토록 할 것”이라며 “지금은 이명박 후보만 결정됐기 때문에 이 후보만 초청하지만 범여권 대선 후보도 확정되면 직접 토론자로 초청해 보건의료정책의 방향을 놓고 격론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에서는 일부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선진회의 출범이 그동안 의사 중심의 보건의료정책에서 벗어나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의사협회 전직 임원인 L씨는 “그동안 의사 중심의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이슈화가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지는 등 일정한 한계를 드러낸 만큼 이를 시민사회단체로 확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 “특히 대선을 앞두고 의정회가 사라진 의협의 공백을 메우는데도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 젊은의사들을 중심으로 선진회의의 조직구성이 자유시민연대, 뉴라이트의사연합 등 보수일색이라며 반대하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
◇ 의협 “전면 안나선다”
의약계 대표단체 역시 대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과거처럼 정치세력화 움직임보다는 제도와 정책을 중심으로 한 사안별 ‘각개전투(1:1전투)’ 양상이 두드러진다. 이 역시 정치권 로비파문의 여파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치권 로비파문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의사협회는 최근 성분명처방 시범사업과 의료법 전부개정안을 중심으로 제도화 문제에 주력하고 있다.
당장 다음달 17일로 시행일자가 잡힌 성분명 처방의 경우 이달 31일 오후 집단휴진에 이어 시범사업 진행 추이에 따라 사실상 총파업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성분명처방 시범사업을 막는 것은 물론 대선을 앞두고 의사들의 표심을 전달하겠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도 설득을 얻고 있다.
다만 이같은 현안을 제외하고는 대선을 직접 겨냥한 움직임을 자제하는 모습이다. 박경철 의사협회 대변인은 “실리적으로 국민건강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찾아 후방에서 측면지원할 뿐 과거처럼 특정후보나 선거에 올인해서 목숨거는 일은 이번 선거에서는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선을 앞두고 의료계 타 단체와의 연계문제에 대해서는 “의료법을 제외하고는 서로 얽히고 설킨 게 많아 손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의사협회를 비롯해 치과의사협회, 한의사협회, 간호조무사협회 등 범의료계 4단체장들은 협의를 통해 각 당의 대선 후보초청 토론회를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 사안별 대응 치협·한의협, 2만명 모이는 약사
의사협회와 마찬가지로 최근 치의정회 해산을 결정한 치과의사협회는 조만간 ‘치과의료정책연구소’를 설치해 그 역할을 흡수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정치권 창구역할보다 정책연구용역사업을 중심으로 한 대외활동이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자연치아 아끼기 운동본부’(상임대표 윤홍렬)와 함께 자연치아 아끼기 운동을 대선 공약에 반영될 수 있도록 협회 차원에서 측면지원키로 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구강보건팀이 해체되는 등 정부 내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치아의 중요성을 알리는 방식으로 대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
한의사들은 방어적 측면이 강하다. 의사와 보완대체의학 양쪽으로부터 공격받고 있어 말그대로 ‘샌드위치’ 신세다. 기존 의사들로부터는 침술(IMS)이 위협받고 있는데다 카이로프랙틱, 봉침 등 유사의료행위 단체로부터는 보완대체의학이란 이름으로 기존 영역과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사협회는 이같은 상황에서 사안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대선 정국을 해쳐나간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지난달 26일에는 대한침구사협회를 비롯한 민중의술살리기국민운동전국연합회, 한국봉침협회, 대한카이로프랙틱총연합회 등 138개 단체가 한국보완대체의학총연합회 출범식을 갖고 이번 대선과 내년 총선에서 유사의료행위의 합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약사들은 다음달 30일 일산 킨텍스(KINTEX)에서 2만 여명이 뭉친다.
형식은 제4회 전국약사대회이지만 약사회원은 물론 약대생,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국민 이벤트성 대규모 행사다. ‘국민과 함께, 건강한 세상을!’을 슬로건을 내건 이번 행사는 사실상 대선을 앞두고 약사들의 세 결집의 성격이 짙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성분명처방 시범사업을 놓고 의사협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시점에서 진행되는 것도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