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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장 22~43절의 말씀을 주의 깊에 읽어보신분은 혈루병 걸린 여인의 사건과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 서로 분리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발견 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시고 딸을 고치러 가시는 길에서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옷자락을 만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리어 많이 간구를 합니다. 당시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회당장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종교 지도자 겸 국가
공무원이자 지금으로 따지면 목회자+신학자+정치인+공무원 이 4가지 직분을 겸한 것과 흡사합니다.
회당장이란 직분은 당시 다수가 바리새파 지지 세력이거나 그들과 교류가 잦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직분이 아니었습니다. 나이도 어느 정도 되어야 하고 지역 유지에다가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회당장 직분을 맡았던 야이로가 자기 딸이
죽어가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당시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이가 상당히 안좋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바리새인
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우리말로 의역하면 개X끼들)이란 욕설까지 하시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고
논쟁 하셨던게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회당장이 예수님을 만나고 접촉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과 친분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트집 잡힐 빌미 거리를 제공하기 딱이었지요
그런데 야이로는 자신의 계급장을 떼버립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함이었지요 당시 회당장의 나이는 최소한 40~50대였습니다. 또한 회당에는 회당장 뿐만 아니라
장로와 율법교사, 총무나 서기라고 할수 있는 하짠(Hazzan)과 헌금 징수원 및 통역사 등 여러 사람이
직무를 분담하고 있었지만 회당장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읽고 낭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어, 아람
어, 헬라어 보통 3개국어 이상을 할줄 아는 소위 엘리트 그룹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돈도 많은
부자에다가 지역사회 영향력 있는 가문에 신학도 공부한 목회자급 인물인 것입니다.
이런 반면 예수님께선 지금으로 보면 세상적으로 아무것도 가진게 없으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30대
이셨습니다. 야이로에 비하면 나이도 훨씬 어리고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은 지금으로 따지면
강원도 산골같은 깡촌에 학벌 역시 낮으며 당시에 천대받았던 일용직 노동자 목수출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야이로는 이런 예수님 앞에 자신의 계급장을 떼고 엎드린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이유는 단 한가지 였습니다!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함이었지요! 야이로는
자신의 딸을 살리는 것이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품위와 명예같은 것은 죽어가는 딸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직위와 명예, 품위를 위해 가족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심지어 자식까지도 버려버리는
이 시대 가운데 회당장 야이로는 사랑에 사로잡힌 성경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러분의 가족중에 영육간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내 딸이, 사랑하는 내 아들이, 사랑하는 내 남편이, 사랑하는 내 아내가, 사랑하는 내 가족이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영육간에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야이로처럼 우리가 가졌던
모든 계급장을 떼고 그 영혼을 위한 사랑에 사로잡혀 그를 위한 구원의 간청기도를 드리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의 집으로 향하셨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을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도중에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뒤로 몰래 와서 옷자락을 만집니다.
마가복음 5장 27절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왜? 이 여인은 야이로처럼 예수님 앞에 나와 "내 사정이 이러이러 하니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또는 다른 병자들 처럼 "내 병이 이러이러하니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라고 하지 않고 무리 가운
데 섞여 뒤로 몰래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일까요?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것은 바로 구약의 엄격한 정결법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는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일단 '혈루병'은 한자로 피 '혈'(血)과 새어나올 '루'(漏)의 뜻을 합친 '혈루'(血漏), 피가 새어나오는
병이란 뜻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만성자궁 출혈 증세'입니다. 레위기 15장에 의해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은 소위 '부정한 자'(더러운 자)'로 낙인 찍히게 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격리되고
따로 지내게 됩니다. 이는 위생문제를 비롯 전염 예방과 영적 교훈 등 여러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정결법'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병에 걸린 사람이 타인을 만지면 만짐을 당한 사람도 같이 부정해지는 원리입니다.
가령 똥으로 휴지를 닦으면 똥이 깨끗해지지 않고 휴지가 더러워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 여인이 처한 상황은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는 2000년전 입니다. 멘스(menstruation)
를 1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있었습니까?
지금처럼 휴대용 생리대는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여인이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이 병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대에 여자가 중병에 걸린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당시 여자를 재산으로까지 여기던 시대에 최소한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존재이유 마저 박탈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전 재산을 탕진하기 까지
이 병을 고치려고 모든걸 걸었던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받는 고통도 극심한데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도 보지 못하고 더불어
아이까지 낳을 수 없는데다가 가는 곳마다 "더러운 여자", "더러운 X"이란 소리를 들으며 멸시와 천대
를 온몸으로 당하는 수모를 겪여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 몸이 스치거나 닿으면 정결법에 의해 몸을 닦고 씻어야 하며 이런 저런 것들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몹시 귀찮아집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이 근처에만 와도 욕하고 돌 던지며 기피하기
일쑤 였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부정한 병에 걸린 자가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접촉을 하려고 하면
중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여도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혈루병에 걸린 여인은 예수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고 예수님을 만진 행위 자체가
돌맞아 죽을 짓이기 때문에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찾으셨을 때도 이러한 이유로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주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마가복음 5:33)
그런데, '정결법'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법칙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정결법의 원리는 부정한 것이 정한 것과 접촉하면 같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닿으면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역으로 정하고 정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출애굽기 29장 37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네가 칠일 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리니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그곳은 바로 성막의 제단입니다! 제단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365일 죄의 대속을 위한 어린양
의 피가 짐승의 피가 흥건하게 적셔져 있고 피가 마르지 않는 곳입니다. 때문에 구약 성경을 살펴
보면 이 정결법의 원리가 등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이사야서 6장입니다. 당시 성전 환상을
본 이사야가 자신의 입술의 부정함을 고백하자 스랍(천사)이 제단의 핀 숯을 취하여 이사야의
입술에 대자 죄가 사하여 집니다. 이 장면은 찬송가 271(495)장 '익은 곡식 거둘 자가'의 후렴 가사
로도 유명합니다. "제단 숯불 내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
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장 5~7절
다른 경우도 있지만 특별히 '제단'은 어떠한 부정한 것이 닿든지 반대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이 정결법의 법칙을 인지한 상태에서 혈루병 걸린 여인의 사건과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 정결법의 법칙에 의하면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예수님은 정결법에
의해 부정해져야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역으로! 여인의 혈루병이 낫게되고 여인이 정결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5장을 읽었던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보고 무릎을 치며 깨닫습니다! 바로 알아챕니다!
"아! 예수님께서 바로 제단의 어린양이시구나!"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장차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자 예표이며 동시에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많은 영적 교훈들을 담고 있습니다.
12년간 더러운 X이란 소리를 들으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피폐해 졌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꺼내신 첫마디가 무엇이었을까요? 마가복음 5장 3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마가복음 5:34
앞서 말씀드렸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혈루병에 걸리거나 여자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신의 저주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병에 걸린 자들은 '저주 받은 인간', '더러운 인간'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은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모욕과 멸시함을
지금껏 받아 왔었습니다. 그랬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꺼내신 첫마디는 바로 '딸'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육체적 질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치유는
우리의 가슴 속의 깊은 상처까지도 만져주시는 영혼의 전인격적인 치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혈루병 여인을 만나고 있는 와중에(마가복음 5:35)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을 가리키어 흔히 뭐라고 부르나요? '시체'나 '송장'
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야이로의 딸은 죽었습니다. 곧 '시체', '송장'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 역시 민수기 19장에 있는 정결법에 의해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11절
정결법의 법칙이 똑같이 적용되는 경우였습니다. 곧 사람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금하였으며 시체를 만진자는 반드시 정결법에 의해 정결의식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야이로의 딸 시체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마가복음 5장 41절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율법을 어기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정결법 원리에 의해 예수님께서 시체를 만지심으로 부정해져야 되는데 정
반대로 시체가 살아남으로서 부정한것(시체)이 정결(산 사람)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 시키신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살아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보며 유대인들은 또 무엇이라고 탄성을 질렀을까요?
"아! 정말로 예수님은 제단의 어린양이시구나!"
이렇게 제단의 어린양되신 예수님께서, 보혈의 본체이시자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 곧 시체에 손을 대시니 살아난 것입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29)
여러분 이 이야기가 단순히 2000년전의 이야기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과 야이로의 죽은 딸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우리 인생이 어떠한 영적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적날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영적 교훈과도 같습니다. 살았으나 죽은것 과도 같은 혈루병
걸린 여인의 인생, 또한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가진 야이로와 같은 아비의 심정, 이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인간이 지닌 영육간의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사건은 동시에 우리에게 여러가지 영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 왔듯이 또한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찾아 가셨듯이 신앙생활은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이 아닌 우리와 주님의 양방통행 곧 상호간의 인격적 '소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주목할 점은 혈루병 걸린 여인도 아이를 갖을 수 없었고 야이로의 딸도 아이가
죽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마귀는 이처럼 다음 세대와 오는 세대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신앙이 끊어지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있어야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쳐주시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는 죽어가는 다음 세대를 예수님의
피뭍은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살려내야합니다. 생명의 복음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합니다.
보혈의 본체이자 생명의 능력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제단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 마지막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다시오심을 선포하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주님 오심을 예비하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저: http://blog.naver.com/ysmcn7
첫댓글 이 말씀을 늘상 보면서도 불치병에서 나음으로..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렇게 그저 능력의 예수님으로만 알았는데
율법의 완성이요, 제단의 어린양되신 예수님의 깊은 뜻이 숨어있었네요. 참으로 오묘합니다.
'딸아'라고 불러준 예수님 사랑을.. 저는 손톱만큼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의 그 사랑에 눈뜨고 제 마음에 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은혜로우신 예수님...
눈물이...핑 돕니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찬송받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