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커피∥【02】
“하~암, 오늘따라 더 막히는거 같네.”
흰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며 해빈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침 6시 30분.
일이 잡힌 시간보다 넉넉하게 일찍 나왔는데, 다른 이들은 한창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도저히 나아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앞에서 바뀌어버린 신호등도 초록불이 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해빈은 계속 시계를 확인하며 핸들을 한 손으로 툭툭 쳤다.
지루함에 해빈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고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검정, 회색의 정장에 바쁜 듯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뭐, 해빈도 그닥 다르진 않지만, 그들이 답답해 보였다.
“어…”
해빈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한 소녀를 자세히 보았다.
파스텔 톤의 노랑 원피스를 입은 긴 갈색머리의 소녀였는데, 마치 동화책 속에서 빠져 나온 공주님의 모습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외모에 눈을 떼지 못하겠다.
뭐 이런게 아니라 그녀의 차림이나 그 모든 것들이
건물과 사람들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랄까.
확실히 흑백이 대부분으로 쌓인 이 공간에 그녀만이 너무 색채감 있게 다가왔고
해빈은 그녀의 행동을 계속 눈으로 쫓았다.
빵빵!!!!!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해빈은 신호등을 보았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고 옆 차선의 차들이 움직이며 해빈의 뒤에 있던 차들은 빵빵거리고 있었다.
“어휴-”
해빈은 드디어 그 자리를 빠져 나왔고 천천히 속력을 높이려 했다.
이제야 뚫리는 구나 하며 핸들을 잡았던 해빈은 다시 앞 차와의 간격이 좁혀지는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교통지옥 같으니.
해빈은 다시 창문을 보았다.
마침 노란 원피스의 소녀도 해빈과 가는 방향이 같았는지 옆 보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종이가방들을 양손에 가득 들고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하아-하아- 어휴, 진짜 많다 많아. 대체, 이번 감독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많은 컨셉으로 간다는 건지. 하-아!!! 정말!!! ”
혼자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잔뜩 골이난 표정으로 걸어가던 소녀는 종이가방들을 툭 내려 놓았다.
그리곤 옆의 도로에 잔뜩 서있는 차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마침 그녀 앞에 있던 은색포르쉐에서 멈춘 소녀는 한 손으로 그 창문을 똑똑- 하고 쳤다.
“저기요.”
그때, 막히는 도로 위에 있던 은색의 포르쉐의 창문이 열렸다.
불투명한 색으로 선탠이 되어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 차 안에는 해빈이 있었다.
해빈은 소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흥미롭기도 해서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저 좀 태워다 주실래요?”
해빈은 순간 헛기침이 나올 뻔 했다.
차에서 여자에게 태워다 준다고 작업은 걸어봤어도, 밖에서 먼저 이러는 경우는 처음인지라 황당했다.
“타요, 그럼.”
하지만 곧 재미있다는 듯 몇 번 웃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가는 여자 막지 않을뿐더러 오는 여자도 막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해빈이기에.
조수석에 몸을 싣고 한가득인 종이가방은 모두 뒷자석으로 밀어 넣었다.
여자는 이미 뒷자석의 손님인 해빈의 물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진 무진장 좋아하시나 봐요. 이렇게 많은 카메라를 들고 다녀요?”
“뭐, 일이니까요.”
“아아-그렇구나- 아! 간다 간다!! 이제 뚫리나 봐요”
소녀는 해빈의 카메라들이 신기한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낯가림 같은 건 없는지 모르는 남자의 차에 타 놓고는 아무런 경계심도 안드나보다.
해빈은 그녀를 옆 눈길로 보고는 이내 운전을 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서야 도로가 뚫리기 시작했다.
그 곳을 빠져나온 해빈은 천천히 차를 몰았다.
“어디로가면되요?”
“가까워요. 이 근처인데… 아! 저-기 보이는 건물이요. ”
“으음- 방송일 하나봐요?”
“쪼꼼 연관된 일이요. 아! , 이름 여쭤봐도 되요?”
해빈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창문을 통해서 본 것보다 그녀는 어리게 보였다.
피부가 하얗고 눈도 동글동글하고 또렷한게 아기자기한 인상이다.
하지만 귀찮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여자는 취향이 아니다. 더군다나 너무 어리다.
고등학생이나 막 졸업한 아이 같았다.
성숙한 다람 쪽이 훨씬 그의 취향이랄까.
“본인 이름부터 밝히는게 예의가 아닐런지.”
소녀는 눈을 더 동그랗게 뜨더니 손뼉을 딱 쳤다.
“아- 죄송해요, 헤헷, 보림이요. 하보림. 그ㄹ..”
그녀가 막 해빈의 이름을 물어보려는 순간 차가 멈추었다.
해빈은 운전석에 앉아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어어-”
보림은 갑자기 다가오는 해빈 덕분에 순식간에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하지만 해빈은 단지 조수석 쪽 문을 밀어서 열고는 다시 운전석에 기대어 핸들을 잡았다.
“그럼 안녕히 가시길.”
딱딱한 해빈의 인사에 보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 자석의 종이가방을 빼낸 뒤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곧 보림은 환하게 웃으며 해빈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바쁘신 와중에 태워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그리고 보림은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는 아까처럼 큰 종이가방을 들고 끙끙대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해빈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으며 다시 차를 움직였다.
해빈이 양복자켓을 벗어 한 손에 들고, 반대 손에는 사진기가 들어있는 묵직한 가방을 여러 개 들고 3층짜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들어서자 제각각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해빈을 향해 인사를 했고, 한 남자가 해빈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강혜라씨 오셨어요.”
“아, 그래? 사무실에?”
“네, 이한휘씨는 9시쯤에 도착한다니까, 예정대로 10시부터 촬영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럼 스튜디오 어서 준비해놔”
“옛설 캡틴! ”
에어컨이 틀어진 해빈의 개인 사무실 안의 소파에 한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윤해빈감독님.”
해빈이 사무실에 들어오며 그 둘에게 인사했다.
매니저가 황급히 자리에서 있어났지만 인기가수인 강혜라는 다리를 꼬고 앉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해빈은 잠시 그 둘을 놔두고 흰 종이가 마구 널려있는 책상 위에 카메라 가방을 놓고는 커피포트에서 블랙커피 한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머그잔을 들고는 뻘줌하게 서있는 매니저와 강혜라의 맞은편 소파에 가서 앉았다.
해빈이 아무 말없이 혼자 커피만을 마시고 있자 매니저는 당황스러워하다 이내 다시 소파에 앉았다.
“강혜라씨와는 초면이네요. 윤해빈입니다.”
혜라는 좋은 음색의 목소리를 듣고는 해빈의 얼굴을 보았다.
너무 젊다.
이런 자에게 촬영을 맡기다니, 혜라는 톱스타로서의 자존심같은게 구겨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갑자기 뜬 스타가 가지게 되는 오만함일 뿐이지만.
“솔직히. 난 별로 맘에 안드는데. 당신이 감독이란 거.”
“왜죠.”
혜라의 매니저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해빈은 여전히 여유롭게 커피만 홀짝이고 있다.
“당신, 경력은 얼마나 돼? 이 세계에 대해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 거 같은데?, 당신 같은 초짜한테 이 중요한 거 맡기고 싶겠어?”
“하하- 나 이 바닥에서 좀 유명한데.”
“뭐,뭐라ㄱ..”
“그러니까, 그쪽세계가 어떻든지, 이쪽바닥은 내가 강혜라씨보다 더 잘 안다고요.”
혜라는 잠시 할 말이 없어졌다. 분명 해빈의 말은 맞다.
하지만 혜라는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해빈의 말에 수긍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지ㅁ…”
“촬영할 때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봅시다, 그럼. 이제 준비들 해줘요. 이한휘씨도 온 거 같으니”
해빈은 혜라의 말을 툭툭 끊으며 자신이 할 말만을 해버렸다.
그리곤 머그잔을 탁자에 탁 놓더니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혜라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일어나 개인 메이크업 실로 향했다.
혜라의 매니저는 고분고분 준비하러 나가는 혜라를 보고 놀라워했다.
그렇게 다루기 힘든 혜라를 말 듣게 만들다니, 젊은 사람이지만 역시 감독을 맡고 있는걸 보면 뭔가가 다르긴 하다.
“여- 한휘형. 일~찍온다.”
“내가 좀 늦었나? 하하”
해빈보다 약간 더 큰 남자가 멋쩍은 듯 웃으며 다가왔다.
그 남자가 데리고 온 무리는 꽤 많아서 그런지 홀이 꽉 찬 느낌이 든다.
한휘는 24살의 유명영화배우로 매 해마다 애인하고 싶은 남자 1위의 영광을 안게 되는 복 많은 남자다.
한휘와 해빈은 함께 메이크업 실로 향했다.
혜라는 옆방에서 분주하게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고, 한휘는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곳으로 들어가 편한하게 앉았다.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이 한휘를 둘러싸고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했다.
해빈은 적당히 한휘의 얼굴이 보이는 곳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제 봐도 역시 적응안돼.”
“뭐가?”
“… 형의 변신장면.”
“니 개그도 만만치 않게 적응 안되는거 알고 있냐.”
한휘는 해빈을 보고 웃었다.
저런 태연한 얼굴로 거는 농담은 그 농담 때문이 아니라 저 표정 때문에 웃기다는걸 해빈은 알까?
해빈은 슬슬 현장을 준비를 체크하러 분장실을 나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옆으로 갈색머리의 소녀가 지나갔다.
“선배님, 이건 어디다 둘까요?”
“저기, 탈의실 옆에다 둬.”
풍성한 웨이브 진 갈색머리. 노란 원피스.
오늘 아침에 본 낯가림이라곤 없는 소녀.
“어? 어어 어어!!! 당신은!! ”
보림은 옆에 서서 자기를 쳐다보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고,
아침에 본 남자란걸 안 순간 손가락으로 해빈을 가리키며 괴성을 질렀다.
“뭐야, 해빈이랑 아는 사이?”
한휘는 고개를 돌려 해빈과 보림을 쳐다보며 한 소리 했다.
“아니. 별로 아는 사이는 아닌데.”
해빈은 짧고 냉정하게 대답해버리곤 분장실을 나갔다.
분장실 안은 순가 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곧 분주한 움직임들로 바빠졌고,
보림만이 멀뚱멀뚱 서있을 뿐이었다.
해빈은 촬영실로 가는 복도에서 한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았다.
왠지는 모르지만 보림을 본 순간 기분이 좋아졌고, 그게 왠지 부끄러워 재빨리 분장실을 나온 것이다.
“아- 뭐야 이거.”
해빈은 왠지 모를 감정이 일어나는 것에 짜증을 부리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블랙커피∥【02】
한새〃
추천 0
조회 153
08.07.27 01:46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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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연재할게요:-D
너무재미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