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59분을 가리키다 드디어 10시를 지나버렸다.
늦은 밤인지 버스 안은 아직 한산했다. 아프다는 핑계로- 그리 믿는 눈치는 아니었어도- 평소보다 일찍 화실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뒤늦게야 화실도 선생님들도 좋아하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화실 한구석에 놓아둔 약봉지를 두고 나올 뻔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버스에 올라탔다. 평소엔 버스 뒷좌석에 앉으면 바로 잠이 쏟아져 내렸는데도 오늘은 그러질 않으니 더욱 그렇다. 오후에 낮잠을 잔 것도 아닌데. 잠시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버스에선 잠이 오지 않을 때 으레 하는 일이란 똑같다. 18살의 여학생의 눈에도 한심해 보이는 그런 세계를 말 그대로 한심하게 쳐다보는 나,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조금씩 잠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인지 극성맞은 누군가의 손짓인지 그만 일어나라 깨우는 느낌에 눈을 떴다. 순간 깜짝 놀라서 여기가 어딘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직 집까지는 한참 남았다. 겨우 10분 남짓 잤을까. 밤인데도 오히려 낮보다 더 활기찬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저 거리에 서 있을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리 급하게 나왔을까 생각하지만 풀 수 없는 의문에 머리를 흔들고 만다. 집으로 한번에 가는 차편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 시간이 꽤 걸리지만 이 시간 창밖을 내다보는 것은 때로는 유쾌하다. 화실 친구들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하는 빵을 파는 근처의 빵집, 안경을 끼는 친구들이 항상 이용하는 안경점, 손님이 뜸한 오후면 거리를 찍는 아르바이트생이 있는 사진관. 가끔씩 화실 근처의 거리를 스케치하다보면 보게 되는 풍경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창밖의 풍경이 된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벗 삼아서.
문득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한다. 부모님을 뵈는 날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동의를 바라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건만 처음엔 굳게 먹은 마음도 자꾸만 헝클어지는 것을 다잡을 여력이 없다. 학교에선 우등생으로 알려져 있던 내가 어느새 미술이란 것에 빠져서 미대 쪽으로 지원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대단히 반대하셨다. 사실 어릴 때에 그림을 그리는 것만 보아도 굉장히 화를 내셨기 때문에 친구 집에서 몰래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반대하셨던 것이 부모님이 대학 시절 아끼던 후배가 미대 졸업 직후 죽은 것 말고도, 사라진 듯 사라지지 않은 직업의 귀천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미대를 지원하면 힘든 일이 많다고 이미 선배들에게 들어왔던 터라 별 걱정은 없지만 부모님 생각만 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철렁하다. 갑자기 무언가 잊은 것이 있는 것 같아 무색하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순간 의도하지 않은 말이 나와 버린다. 그것도 한 자 한 자 끊어서 확실하게.
외로워.
외롭다.
정말로.
남의 귀엔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건만 얼굴이 화끈화끈, 무심코 내뱉은 입이 무색하다. 그리고 새삼스레 다시금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감싸 안는다. 딱히 외로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롭다’라고 하게 하는 이 느낌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듯, 조금은 힘들게 다시 슬픈 생각을 멀리멀리 날려 보낸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이다.
“외로워?”
순간 화들짝 놀랐다.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버스에는 어느새 나를 포함 한 세 명만이 남아있었고, 그나마 한 명은 곧 내려버렸다.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잠이나 청할까 하다 순간 깜짝 놀라버렸다. 수명이 1년은 줄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언니는 지금 빨리 집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
“여자애가 이런 시간에 돌아다니면 부모님께 혼나지 않아?”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여자아이는 아무 대답 없이 우리는 계속 걷기만 한다. 그러다 갑자기 여자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약간이지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과자 사다줘.”
귀여운 여자아이의 입에서 드디어 한마디가 나온다. 하지만 그 엉뚱함에 다시 난감해진다. 버스 안에서 갑자기 고개를 내밀며 놀자고 하는 여자애에게 이끌려 버스에 내렸지만 이 상황에선 집에 데려다주는 것도, 무엇도 할 수 없어서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만 흘러나온다. 이 아이를 어쩔까.
“과자 사다줘.”
“그러니까- 그런 건 내일 부모님한테 사다달라고 말하고,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면 엄마나 아빠가 걱정하지 않으시니?”
도대체 이 시간에 애를 돌아다니게 하는 부모가 누군지 궁금해지며 대책없다 한마디를 던져보지만 마음속으로 던진 말을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리 없다.
“과자, 먹고 싶어.”
‘이런 애는 정말 딱 질색이야.’라고 생각하지만 애를 데리고 버스를 내린 건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아이의 손을 잡고 늦은 밤에도 하고 있을 편의점에 데려갔다.
“자아, 이제 됐지? 응? 집이 어디니? 언니가 데려다줄게.”
갑자기 버럭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물어보지만 아이는 커다란 눈으로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쉰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니? 넌 아무래도 내 도움이 필요없는 것 같구나. 이렇게 부모님 걱정시키지 말고 집에 돌아가.”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많아봤자 초등학교 6학년이나 됐을 만한 애를 늦은 밤에 내팽개쳐두고 간다는 게 꺼림칙해서 마치 무슨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 같지만 이쯤 되면 거의 한계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를 두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저기."
"하아……. 뭐니, 대체.“
무언가에 잡혔다고 생각한 순간 뒤를 돌아보자 이번엔 내 옷깃을 꽉 잡은 채로 서 있다. 일단 뭐냐고 입을 떼긴 했지만 아무 말도 않고 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 그 순수에 져버려, 이쯤 되면 이미 이 아이를 떼어놓기는 불가능하다.
“놀아줘.”
귀여운 얼굴에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애를 지나칠 수 없어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고 있다.
“후우……,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는 건가. 그 대신 10분만이야.”
아이의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면서 어쩔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
어쨌든 일단은 근처 공원으로 데려왔지만, 아무도 없는 공원은 한적함을 넘어서 약간 으스스할 정도다. 가로등은 여전히 켜져 있지만 아무도 없는 공원에 그네 소리만 울려대서 옆에 아이가 없었다면 귀신과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문득 옆의 여자 아이를 본다. 이제 보니 키는 작지만 중학교 1학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귀여운 얼굴이지만 거기에 묻어있는 심각함은 자뭇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문득 친척들이 모인 곳에서 얼핏 본 먼 사촌 아닐까, 낯익은 인상에 의아한 마음이 든다.
“재미있는 이야기-.”
짧은 시간의 감상을 깨고 아이가 자시 채근한다.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줬건만 몸속은 액체 질소가 들어온 듯 몇 십도로 식는 느낌이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아이를 보았다.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희고 깨끗한 옷, 노란색 리본, 긴 머리. 평소엔 그다지 귀신을 무서워하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지금부터 무서워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삶 중, 18년 만에 드디어, 귀신에 홀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인가.
“하하, 농담이지?”
“응.”
무엇이 농담인지도 모르고 장난스럽게 대답한다. 5살이나 어린애한테 놀림당하는 것 같아 절망감이 들었지만 또다시 낯익은 미소에 당황한 웃음만 흘러나온다.
“조금 오래 걸려도 언니가 데려다줄게. 집이 어디야?”
“우리 집은 여기서 아주 멀어. 그래서 언니도 같이 가 줄 수는 없을 거야.”
여전히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지만 어린애가 말하는 먼 거리가 얼마나 멀겠느냐는 생각에 다시 말했다.
“괜찮아. 데려다 줄게.”
“아프리카.”
또, 또. 분명 작은 손과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생각은 역시 귀신에 홀린 게 아닌가 자포자기한다. 이쯤 되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 그래서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시시해.”
아직 주위는 어둡고 으스스하지만 상황은 동화에라도 나오듯 평화롭다. 귀신에 홀린 듯, 꿈을 꾸는 듯 아무 걱정도 들지 않는다. 어느새 정말로 같이 놀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꼬마는 잘하지도 못하는 말을 억지로 꾸며내어 자랑스럽게 흔한 마지막 멘트까지 마쳤는데 그 노력을 다시 무산시켜버리고 있다. 어렸을 때는 동화라던가 그런 것을 굉장히 좋아해서 누구에게든 이야기해달라고 졸랐었는데 내가 이렇게 말솜씨가 없었다니 절망스러울 뿐이다. 어쨋든 이 녀석은 귀신이 확실하다.
“다른 이야기 해줘.”
그리고 이 애의 몸엔 사실 늙은이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슬슬 막차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이제는 여유로운 생각까지 할 정도로 느긋하다. 막차시간이 되기 전까지 이 아이를 돌려보낼 자신이라도 생긴 걸까.
“옛날 옛날에……”
이쯤 되어서 상황을 타개해줄 구세주가 한명 나타나야 한다는,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상황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계속했지만 들으면서도 아무 미동이 없다. 순간 아이의 이름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이야기를 멈춘다.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야?”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자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진희.”
기억 속에 있는 듯한 이름이지만 머리는 다시금 그것의 회상을 거부한다. 나도 모르게 애써 지워낸다.
‘평생!’
누가 머리 속에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지럽다.
“예쁜 이름이네.
“다들 그렇게 말해.”
이제는 별 감흥도 없는 듯, 익숙한 듯 딴청을 피우며 가볍게 대꾸한다, 갑자기 대화가 끊기자 약간 어색한 마음에 아무 말 없이 진희를 바라본다. 그저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모습에 딸 아닌 딸이 생기는 게 아닐까 걱정되지만 순간 다시 생각해보아도 말이 안된다는 느낌에 웃음만 나온다. 그리고 어린애에게 금방 휘둘려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고 그만 실소를 머금고 만다. 사실 그다지 별 걱정은 없지만.
“언니 이야기 들려줘.”
밤중에 어린애를 그냥 두고 올 수도 없어서 일단 집으로 데려왔지만 믿어지지 않게 중학교 1학년이라는 진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또 이야기 타령이다. 도대체 이 아이는 나에게서 무엇을 듣고 싶은 걸까.
“안돼-, 일찍 자고 내일은 집에 돌아가야지.”
“그렇지만 잠이 안 오는 걸.”
“누워 있으면, 곧 잠이 올거야.”
“하지만, 어……, 이야기 해주면 내일은 말 잘 들을게.”
아까와는 달리 조금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또 약간은 조급한 말투로 이야기를 하니 또 진지하게 대꾸해줄 수 밖에 없다.
“글쎄……, 나한텐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는데.”
어쨌든 일단은 얼버무렸지만 역시 그 순수에 지고 만다.
“하긴, 찾아보면 얘기해줄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글쎄. 생각이 나지 않는 걸. 어렸을 때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기억하는 사람은 없잖아?”
“거짓말-,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서전을 써?”
하지만 방금 한 말은 정말 사실이다. 단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무마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면 그저 그런 평범한 기억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 첫사랑 이야기 해줘.”
순간 말을 잃고 만다. 뭐라고 이야기해주면 좋을까. 그 무언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하듯 딱히 입이 열어지지 않는다. 대체 무엇에 대한 거부반응일까. 곤란하다. 한숨을 살짝 쉬어보지만 진희는 여전히 별 말 없이 멀거니 바라볼 뿐이다.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본다 해도 나올 리 없는 이야기였건만 어느 새 대뇌 한쪽이 마비되어 버린 듯 내 입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말하고 있는 내 입과는 상관없이 나도 진희의 입장이 되어 경청하듯, 그 때의, 나의 입장이 되어서 그 상황을 감상한다.
딩동 댕동
종이 울렸다. 수업시간 시작인가? 아니, 수업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구나. 사실 어느 학교든지 종소리는 다 그게 그거지만 학생들은 나름대로 자기 학교의 종소리는 독특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학교도 그런 학교들과 별로 다른 점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중학교이다. 그리고 그런 학교들은 다들 누가 더하고 모자르다고 할 것 없이 활기차고 밝은- 일부만은 제외하자면- 학생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들 자신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변화가 많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걷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새삼스럽게 기억하자면, 지금과는 달리 난 조금 더 당당하고 활기 찬, 이른바 우등생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는 것보단 차라리 조를 짜서 가는 게 좋다고.”
“그러는 건 불가능해. 차라리 짝을 지어서 가는 게 더 낫지 않겠어?”
“그건 각자 자율에 맞기면 되는 거잖아. 곧 선생님 돌아오시니까 수련회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빨리 내일 출발 일정 정하자. 현주야, 여기 프린트 좀 나눠줘.”
“응. 아참, 아까 수학 선생님이 너 잠깐 오라고 했어.”
“아, 그래? 고마워.”
그리고 지금의 진희 못지않게 남들 앞에서 어른스러운 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기의 좀 비뚤어진 우월감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중학교에 막 올라가서 확실히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한 그 때는 반에서 임원 역할을 하기에, 또 선생님에게 모범적인 학생이 되기에만 여념이 없어서, 같이 어울린 아이들은 있었어도 역시 뭐가 뭔지 잘 몰랐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의 욕심에만 가득가득 부풀어 올라, 의도하지 않아도 적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그렇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지만.
“자아, 모두들 몸 조심히 다녀오길 바랍니다.”
학생들 사이의 3대 거짓말 중 교장선생님의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인 것을 보여주듯이 긴 긴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운동장 한쪽 구석에 모여 있는 15대의 버스로 달려간다. 그와 달리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사고를 당할까, 일정이 잘못 될까 계속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부단히 피곤하게 움직일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그런 사정은 뒷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학년 때에 가는 수학여행과 달리 1학년의 수련회는 비교적 간단하고 복잡한 절차가 따로 필요 없다. 사실 그 형식과 행사들은 초등학교 때 했었던 극기 훈련보다 조금 더 재미있고 수학여행보다는 조금 더 다를 뿐, 아이들이 타지로 가서 겪는 수련의 형태는 다들 비슷비슷하다. 그것은 아이들이 항상 밤에 자지 않고 꼭 한번은 진실 게임을 해보는 것, 감시하고 있는 선생님들을 따돌리고 하룻밤을 새다시피 해야 하며 선생님들이 생각지 못한 계획들을 실천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확실히 우리가 술을 가져간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몰라.”
“하긴, 작년에도 그래서 선배 몇이 징계 받았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러니까-, 술 대신에 여러 가지 음료수를 가져가보는 건 어떨까?”
“음료수?”
“그래. 여러 가지 음료수들을 섞어 마시면 취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현주 너도 이상한 이야기들을 참 많이 알고 있구나.”
“너에 비하려고.”
물론 그 계획들은 거의 실패하기 일쑤였다. 여러 가지 음료수를 가져가는 것 역시 아이들이 가져온 음료수의 종류가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마셔도 전혀 취하질 않았다.
“초등학교도 이쪽으로 왔었는데 말이야. 하여간 우리나라는 이래서 문제라니까. 일본이라던가, 하다못해 중국 쪽으로 가면 좀 좋냐고?”
“그건 그래. 매일 갔던 장소에 가는 게 얼마나 지겨운데.”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했던 그 엉뚱한 생각들- 학교의 재정상태라던가 수업 일수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을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그때는 정말로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아마 다른 아이들은 약간 싫어할 만한 말을 하기도 했었다. 그 때문에 굉장히 후회했었지만.
“내일은 산에도 일찍 올라가야 하니까 또 버스에서 자지 말고 일찍 자두는 게 좋아. 난 먼저 자둘 테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타지에서의 음식이 안 맞는 듯 아이들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끌벅적했었지만 왠지 그 때 그런 곳에 끼기가 싫어서 먼저 잠을 청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잠이 깨어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 차라리 일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하여간, 그런데도 세상모르고 자네.”
“냅둬. 여기 와서까지 잘난 척 하는 거 못 봤냐?”
“자기도 애인 주제에 무슨 어른인양.”
“그래도 반장이니까 얻는 건 있는 셈이지.”
“하긴, 근데 누가 걔를 반장으로 뽑았냐?”
“말하기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우리다, 우리.”
“그나저나 현주 너는 어떻게 저런 애랑 단짝이냐?”
“글쎄……, 어쩌다가 그렇게 됐지 뭐. 사실, 잘난 척만 아니라면 참을 만 하고 말이야.”
“하여간 저런 앨 좋아하는 남자애들이나, 선생님이나 똑같다니까 다들 머리가 비었어.”
“그러게 말이야.”
무슨 말이 들린다. 귓속의 고막이 울리고 달팽이관이 반응을 일으켜서 청신경이 대뇌로 그 소리들을 전달해주고 있지만 정작 내 머릿속은 그저 멍멍하기만 했다. 그때쯤 해선 이미 누구 말이 누구 말인지 몰라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평소에 즐겁게 이야기하던 친구들, 그리고 현주……. 무엇보다 평소에 존경했던 선생님까지 언급되는 걸 들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잠이 다시 빠져버렸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로 다음날이 되고 다른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와 같이 날 대하고 있었다. 전날의 이야기를 다 들으니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 특히 현주의 행동들 모두가 신경이 쓰여 그 날의 일정이 무엇이었던 간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아직은 어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충격이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눈물 한방울조차 나오지 않은 채 모든 것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담력 훈련을 하게 되었다. 남녀 2명이 1조가 되어 진행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공연히 표를 바꾸거나 했고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는 애들은 담력훈련을 하면서 고백을 하기도 했다. 전 같았다면 괜히 규칙에 민감한 성격 때문에 별로 바꿔줄 마음이 들지 않았겠지만 왠지 모든 것이 다 귀찮아져 그날 나는 한석훈이라는 남자애와 짝이 되었다,
“넌……, 이름이 뭐였더라.”
반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가끔 그 아이를 볼 때에도 자기 혼자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을 뿐 별다른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왠지 마이너한 성향의 아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별다른 생각은 가져보지 못했지만 설마 자기 반 반장 이름도 못 외울 줄은 몰랐다.
“너희 반 반장, 한선희야.”
“아, 그랬었지. 이해해라. 알고 있었다. 줄곧 ‘반장’이라고만 부르다보니 방금 잠시 잊어버렸던 것 뿐이니까.”
“아, 그래?”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아이였지만 벌어진 감정의 틈을 그것으로 메우듯 한번 입을 열자 말은 끊임없이 나왔다. 내가 상대방의 말에 어떤 대꾸를 하는지도 모르게. 그리고 그때 담력시험이란 매우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시험이었지만 나는 그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시험에도 쩔쩔맸던 것 같다.
“귀, 귀신!”
“……, 저건 그냥 나무잖아. 진정하라고.”
“시, 시끄러워.”
그 시절에 그나마 가장 무서워한 건 귀신이었다. 이상하게도 다른 것엔 별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었지만 귀신에게만큼은 꼼짝도 못해서 무서운 이야기나 그림이 텔레비전이나 책을 볼 때 나왔다 하면 벌써 그 날 잠은 다 잔거였다. 물론 전날의 그 상태 그대로였다면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려 담력시험이나 다른 것에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겠지만 사람이란 건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차츰 ‘잊어가는’ 것인지 그 녀석이랑 이야기를 하는 그 잠시 동안 나는 전날의 충격도, 슬픔도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잊을 수 있었다.
“헤에- , 뭐 별로 특별할 것도 없네.”
‘아까까지만 해도 꼼짝 못했던 주제에.‘
“뭐야, 그 얼굴은! 생각하는 게 다 보인다!”
“아아, 그래그래.”
“흥.”
중학교에 들어가고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인 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애였지만 사실 그 녀석은 그전부터 생각했던 것처럼 딱딱하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수련회가 끝나고 가장 친하던 아이가 가장 미워하는 애로 변해버렸을 때에도 그 녀석과는 친구가 되어서 지낼 수 있었다. 갑자기 왜 친하던 아이와 원수 사이로 변해버렸나를 잠깐 이야기하자면 그건 확실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흔하디흔한 악역들 중에서도, 또 상처가 있는 많은 사람들도 자신에게 아픔을 준 그 무엇을 미워하는 것이 자신의 상처를 애써 치료해내는 것보다는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쨌든 그 시기의 나는 다른 것보다 쉬운 그 방법을 철저하게 따랐을 뿐이다. 배신당했다는 슬픔을 미움으로 완벽히 채울 수 있도록 그 정도를 심하게는 못했더라도. 어쨌든 수련회가 끝날 즈음에는 그 애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나는 예전처럼 대하는 게 자연스러울 리가 없었고 그 애들도 짐작하는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떤 날은 하마터면 걷잡을 수 없을 뻔 했다. 그 날은 담임 선생님이 출장을 가신 날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없을 땐 반장이 앞에 나가서 조용히 시켜야 한다. 물론 한번 조용히 하라고 한 후에도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아서 몇 번은 더 소리를 질러야 조용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건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해!”
“또 시작이다, 또 시작. 다른 반 반장들도 대충대충 하는 일을 꼭 혼자서 튀면서까지 해야하나?”
“누가 아니래. 하여간 점점 더 한다니까.”
다 들린다고, 한껏 비꼬아서 말해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조용히 하라고.”
아마 이번에는 자기들도 어쩔 수 없는 아까보다 조그마한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채 5분도 가지 못했다. 웅성웅성. 소곤소곤. 내 자신도 아픈 목에 앞에 나가서 조용히 하라는 말 따위는 정말로 하기 싫었지만 어쨌든 간에 애들을 조용히 시키지 않으면 다른 선생님이 들어올 것이었다.
“조용히 좀 해.”
하지만 여전히 교실 안은 시끄러웠다.
아마 그 후로도 몇 번 더 조용히 하라고 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기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이들은 엄청나게 떠들어댔고 순간 나는 내 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조용히 하면 조용히 할 것이지 왜 잔말이 많아! 반장이라고 뽑아 놓으면 다야? 그렇게 떠들려면 학교 다니지 말고 집에서 공부하든가!”
그리고 벌컥 문을 열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가면서 애들이 하는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때는 별로 마음에 담아 두질 않았었기에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녀석이 따라 나왔기 때문에 그마저도 잊고 말았다.
“너도 참 재미있는 애야.”
“……."
"반장 하나에 그렇게까지 목숨을 거는 애는 너밖에 없을거다.“
“지금 놀리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가끔은 그런 게 좋기도 해. 흥미롭달까.”
순간 그 녀석이 당황해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런 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쯤 해서 머릿속에 남은 것은 ‘좋기도 해, 좋기도 해, 좋기도 해, 좋기도 해…….’ 뿐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건 전혀 느낄 수도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나중에야 어렴풋이 그때부터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던 거구나 했을 뿐. 어쨌든 같이 그렇게 나간 후에 들어온 건 꽤 후의 일이라서 다시 들어온 후 선생님의 꾸중도 듣고 아이들의 이상한 눈초리도 받긴 했지만 그때는 누군가의 말 때문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상태라서 그런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는 거지만 난 정말 심각하게 둔한 스타일이었나보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 그녀석의 여러 가지 면을 나도 모르게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을 찍어 봤어?”
“아무것도 없는?”
“응.”
“아무것도 없다면, 공허할 거 같아. 그림도 심심하고.”
“혹시 기회가 되면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봐.”
“……?”
그녀석의 꿈은 사진작가였다. 처음에는 몰랐었지만 그 녀석은 항상 모든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곤 했다.
“물건 하나를 봐도 저게 어떤 각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저절로 상상이 되어버려.”
항상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운 생각과 말에 항상 압도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이젠 매연으로 그나마 남은 별마저 사라져버린 하늘을 보라고 말한 그 때에도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녀석이 했던 말조차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다 잊고 있었는지, 밤하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가족 이야기, 꿈 이야기, 친구 이야기 등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새삼 생각해보면 그 말들을 대꾸도 없이 그저 듣기만 했었다. 그렇게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도 이상하지 않았던 건, 부반장이었던 아이가 전학하게 되고, 그녀석이 부반장이 된 이유도 있었겠지만 항상 이야기하는 건 그 녀석, 듣는 사람은 나였던 탓이다. 나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그 녀석한테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불안함의 표현이었을까. 그 녀석과의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우리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애가 석훈이라지?”
수업 시간 중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시작한 이야기다.
“학기 초에는 조용한 줄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부반장으로 뽑힌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
“하지만 석훈이는 반장 한선희랑 사귀는 걸요-.”
“아, 그래?”
“이야기도 만날 자기들끼리만 해요.”
“이거 몰랐네. 정말 그러냐?”
얼덜결에 상황해서 그 녀석을 보았지만 그 녀석은 그저 무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화난 기색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붉어진 얼굴이 역력히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던 것 같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아니라, 한석훈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 뿐이라구요.”
“그게 아니던데-.”
“그만 수업하죠.”
그 때 그 녀석의 표정을 조금이라도 봤다면 달랐을 테지만, 그때 이미 타의에 의해, 자의에 의해서 날카로워진 신경은 나 자신을 손만 대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폭탄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아까 당황했지? 하여간 담임선생님도 엉뚱하다니까.”
물론 그것 말고도 변명을 하자면, 그 때 그 녀석의 심기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건 수업이 끝나자마자 평소에 다름없이 밝게 말을 걸어온 탓도 있었다. 나 역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별로 반응 없는 얼굴에 서운한 마음과 안도하는 마음이 함께 들었으니까.
“뭐, 선생님들이야 다 그렇지. 다음 시간은 체육이니까 빨리 나가지 않으면 혼나겠다.”
“알고 있어. 하여간 누가 반장 아니랄까봐.”
“반장한테 추파 던지는 너는 뭔데?”
“글쎄-, 심리학자 정도 되려나?”
그렇듯 그 녀석은 나보다도 감정 컨트롤을 잘 했다. 물론 그것은 그 후 일어난 일의 시초가 누구 때문이든, 우리 둘 모두를 괴롭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해 11월 11일이었다. 지금이야 빼빼로 데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때까지는 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도 그저 그런 게 있구나 정도로 아는 편이었으니까 빼빼로 데이 따위는 전혀 알지도 못했었다. 아마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만 아니었다면 그 날짜가 훨씬 지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에 돈 좀 썼지?”
“왜? 바구니라도 샀냐?”
“헤에-? 어떻게 알았어? 맞아.”
“뭐어-? 발렌타인 데이도 아니고. 빼빼로 데이에 바구니라니.”
‘빼빼로 데이?’
“그럼, 석훈이한테 줄건데 발렌타인하고 똑같지.”
“한석훈?”
“그래-, 체육대회 때 나랑 한 조 한 애 있잖아.”
“그나저나 의외네. 그 애 한선희랑 사귄다는 소문 있잖아.”
“석훈이 같은 애가 그런 애랑 친할 리가 없잖아. 걔네들은 이름조차도 성을 붙여서 부른다고. 보통 친한 사이에선 안 그렇잖아? 그러니까 그럴 걱정은 없어.”
“어떻게 보면 신기하네-, 석훈이 그녀석. 처음엔 그냥 과묵한 녀석일줄 알았는데.”
“쯧쯧, 그게 또 매력 중 하나 아니겠어?”
거기까지 들었을 때 어느 새 나는 이미 반에 돌아와 있었다. 그건 말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가 왜 화가 나지? 장현주가 관련되어서 그런가? 역시 그렇겠지? 한석훈은 일단 친구이기도 하니까. 그 녀석이 저런 앨 좋아할 리가 없지. 여자한텐 관심도 없는 애인데.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밥 먹을 때에도 그 생각만 머릿속을 윙윙 맴돌았다. 그리고 일단은 친구라는 명목하에 빼빼로를 줄까 하는, 사실은 그 일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을 결정할 때까지도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는 채 반나절을 멍하니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11일이었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특별히 이상하게 느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성한테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포장된 빼빼로를 내밀었다.
“아무한테도 못 받을 것 같아서.”
내가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당황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는 능글맞게 대처했을 그 녀석의 얼굴이 곤혹스럽다는 듯이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정타는 그 다음에 나온 말이었다.
“아? 아 괜찮아. 많이 받았는걸.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못 준비 했어서…….”
분명 굉장히 당황한 말투였다. 그 곤혹스러움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왜인지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거절 받았다는 느낌만 머리에 남아서 별로 끝맺음도 잘 못 맺고 돌아섰던 것 같다. 그건 이를테면 어릴 때 인식하지 못하고 ‘고백’했다가, 인식하지 못하고 ‘차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후로 우리 사이는 급속도로 서먹해져 갔다. 나름대로 그 결말을 해석해보자면 친구도 애인도 아닌 어색한 관계의 종말이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 녀석을 피하면 그 녀석도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별 반응 없이 피해 주었다. 그 날 내가 관심 없이 동생에게 줘버린 빼빼로 중에 그 녀석의 빼빼로가 있었다는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게 누군가의 계획이라던가 음모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왜인지 슬퍼보이는 그 녀석의 얼굴을 뒤로 하고 갑자기 전학을 가버리게 되었다. 내 세상이라는 것을 억지로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그다지 반대하지도 않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전학을 가버리게 된 건 역시 그로 인해 모든 것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전학을 간 후부터 나는 완전 딴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성격이 그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그 전처럼 적극적이지도, 당당하지도 않고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의 여자아이로 변해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친구를 사귀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사실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 기적일지도 모른다. 마치 기억 상실에 걸린 것처럼 깨끗이 잊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물론 잘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공부라는 것에 바빠지면서 나는 그것을 ‘사춘기’에 겪는 운 나쁜 경험일 뿐이며, 나중에 생각하면 웃을 수 있는 유년 시절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짧았던 1년간의 기억을 버렸다.
“사실 우리 사이는 지독하게 이상했어. 그때의 나도 나지만 지금 그 녀석을 만나면 한 대 때려줄지도 몰라. 어른스러운 척은 혼자 다 했으면서 그렇게 미적미적한 감정 표현이라니.”
이야기를 거의 끝낸 후에도 진희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의 의미를 안 것도 훨씬 더 이후의 일이지. 사실 우리들은 밤하늘을 볼 때 달은 거의 신경쓰질 않고 있거든. 항상 그렇게 우리를 비춰주고 있는데도 말이지.”
그때까지 말했을 때 진희를 다시 돌아보았지만 진희는 자고 있지 않았다. 전혀 재미없는 전혀 사적인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모든 것이 너무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해석하게 된 건 오래 걸리지도 않았지만 그 녀석의 연락처도 몰랐고, 좀 후에는 잘 지내고 있다는 친구의 말에 이미 너무 늦은 걸까 생각했지. 소용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진희를 다시 보았을 때 뜻밖에도 진희는 나를 깊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말 그대로 깊은 눈. 약간 당황했지만 어쨌든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다니 칭찬해줘야겠네. 이젠 말 잘들을 거지?”
“돌아갈 곳.”
“너를 돌려보내려면 좀 어려운 생각이 들 것 같긴 하지만 말야.”
“……응.”
진희는 아까완 달리 가라앉아 있었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였다면 누구든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약간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지만 말을 이었다.
“바쁘긴 했어도 지금까지 그걸 어떻게 잊고 지냈는지 몰라.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지. 그렇게 보이지 않던 별도 잘 보이고.”
진희는 말이 없다. 오랜만에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꽤 말을 많이 했는데 조금의 침조차 마르지 않았다.
“잊는다는 건 슬픈 거야, 그렇지?”
순간 진희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애석할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얼굴이었다.
“그 4년 전의 나.”
“…….”
점점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지만 말을 이었다.
“맞았어. 너는……너는 바로 나였던 거야.”
그 말과 함께 진희의 체온이 느껴졌다. 아직은 작은 아이지만, 따뜻하다.
“내가 잊은 시간들 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 다만 지금 느낄 수 있는 건 잊는 것에서 오는 슬픔 뿐이야”
진희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진희는 내가 잃어버린 또 하나의 나였다.
“진(眞)……."
애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던 진희의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돌아왔다.
“어이, 학생! 여기서 뭐하는 건가?”
이미 막차 시간은 지나 있었다.
“원, 피곤했나 보구먼. 학생이 이 시간에 집은 어떻게 찾아가려나.”
혀를 끌끌 차며 불쌍한 눈으로 보는 아줌마를 뒤로 하고 나는 멍하니 차부를 빠져나왔다. 불편하게 잔 탓에 머리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그리고 마술에 걸린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와 잠에 빠졌다. 그건 얼핏 전과 아무 차이도 없어보였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 후 나는 대학을 입학했고 그 날의 기억 때문인지 언제나 그렇듯 거리를 스케치하던 날, 사진기를 들고 다가온 남자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이네.”
“……진(眞)희도.”
“이게 누구야?”
“나야, 나.”
“하나도 안 닮았잖아.”
“이건 추상화라고, 추상화.”
“추상화라면 말 얼굴에 사람 코가 달린다던가 하는 이상한 그림 아니야?
“추상화도 여러 종류인 거야.”
“어쨋든 잘 그리네. 그럼 이게 네 마스코트야? 무슨 뜻인데-?”
“그렇게 한꺼번에 물어보면 내가 말을 못하잖아. 이건 추억이야.”
“추억?”
“그래. 지금의 기억. 추억은 소중하다고 하잖아. 혹시 나중에 잊어버릴 때를 대비해서-.”
“넌 하도 깐깐……아니, 똑똑해서 안 잊어버릴 테지만, 멋지네 이 그림.”
“내 심혈을 기울인 거라고.”
“네가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는 줄은 몰랐어.”
“한번 그렸다 하면 너무 빠지니까 부모님이 싫어하시거든.”
“나중에 인정해주시겠지. 이 그림-, 그러니까 네 마스코트 이름. 내가 지어줘도 돼?”
“추억이라니까, 추억.”
“촌스럽잖아, 그건.”
“네가 지은 이름, 촌스럽기만 해봐.”
“진희, 진희라고 부르자.”
“뚱딴지같이 갑자기 웬 진희? 누구 이름이야?”
“추억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참 진(瞋)자를 써서 진희로 하는 거야.”
“너다운 생각이다.”
“진희, 예쁜 이름이잖아.”
“동생 이름을 듣는 느낌이다. 하긴, 덕분에 그 이름은 평생 못 잊어버릴 것 같기는 해.”
“평생.”
일단은 수정.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타 지적해주세요. 고치겠습니다.
간격을 띄운다고 띄웠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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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ch-black[自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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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상쓸라카다가 밀려있는게 한게 있어서 고만 꼬리말로. 그래도 용서해주십사 합니다. 아핫. 일단 설명이 필요이상으로 많은 듯 합니다. 이런이런 일 이후에 어떻게 살았나에서 너무 자세한 설명이면서도 또 붕뜬 설명. 꿈에서 사실로 넘어갈때 별다른 느낌없이 넘어가는데, 오히려 그 느낌이 조금 좋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너무 짧은 느낌이군요. 중간중간 설명하는 내용이라던가 상황이라던가 이야기라던가, 조금 더 '재미있게' 끌 거리는 많아 보이는데 그리 하지 못했다라는 느낌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할말만 하면서 짧게짧게 호흡도 빠르게 나가려다가 오히려 재미가 없어졌다는 느낌이랄까나요. 저럴까나요 요럴까나요.
추억의 극적 요소라던가, 마지막의 부드러운 여운 등이 조금 부족한듯도 합니다. 대충 요런게 감상이라고 말은 못하지만 아무튼 끝났습니다. 다음번에 퇴고한다면 그때 다시 합지요. 읏헝읏헝.
이 사람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의 좋고 나쁨은 퇴고의 질, 양에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도요. (게시 전의, 머리 속의 퇴고 또한) 수명이 1년 줄기 전 부분은 너무 지루하므로 없애버리거나, 압축하는 건 어떨까요. 굳이 병원이나 약이나 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주인공의 감정 전환이 지나치게 빠르네요. 문단이 커서 가독률이 낮습니다. 건필하세요.
아~ 이해가 안되~ ㅡㅡ;;;
음..과거에 매인 주인공에서 제 일면을 읽었는지도.. 굳이 이 글을 고치기보단 이 글로서 자신을 고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재미없다. 내 취향 글은 아니다.
두구두구~ 오랜만에 들어와서 본 첫번째 글은 마녀님의 글인 건가!! 과거에 매이는 건 다메요~;;
시험 끝나면 나중에라도 감상을 올리고 싶은 소설입니다. ^^
호흡이 기네. 그냥 문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환이 매끄럽지 못해서 흐름이 중간중간 깨어지는듯 하다. 좀 건성으로 읽었는지는 몰라도 괜찮은 느낌인데 전달이 좀 약한거 같고. 내 얘기는 별로 신경쓰지 마라.
잘읽었습니다.
호흡이 빠릅니다.
감상만을 말하자면 과거와의 화해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장면이 그 추억인가하는 것같다. 과거의 추억이 이야기처럼 남아 있는 것보다는 어떤 풍경을 그리며 남아 있는 편이 더 인상깊은 효과가 되지 않을까.
내가 말해주고 싶은 것은 글에 중요한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한 어떤 화상이 아닌 감정이 응집되고 고여 마지막으로 움직이는 인상적인 순간이 없다는 점이다. 그 것이 굳이 없어도 나쁜 글은 아니지만 하나의 작품에는 한 작가의 생각이 담겨있듯 그 작품에서 독자가 얻어 갈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쯤은 있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냉막한 분위기로 쭉 이어진 괜찮은 글 같았다. 물론 약간 문장의 배열이나 말을 이어짐이 어색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런 것들은 차차 나아질 수 있는 것들이니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럼 감상은 이쯤에서... 감평은 3월에나 해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