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破片)
어쩌면 소나기라는 것은 그 차가움 속에 뜨거운 정열을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깐동안 헤아릴 수 없는 빗방울을 지상으로 흩뿌리고는 금새 그쳐버리는 모습은 짧은 시간동안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다가 사그라드는 촛불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것이 아닐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리는 빗줄기는 냉정했고 동시에 무뚝뚝했다. 쉴 새 없이 차창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는 여러 사람들의 귓속으로 따갑게 파고들었다. 마치 제 자신이 거대한 폭포의 일부인 양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차창을 때리던 빗방울들은 안 그래도 어둠 때문에 좁아진 시야를 더욱 가린다는 이유로 차 앞창의 와이퍼에 의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암흑의 밤하늘만큼이나 어두운 색의 고급 승용차 몇 대가 비에 젖어 더욱 어두워진 아스팔트 위로 미끄러지는 모습은 간혹 지나가던 행인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간혹 마주치는 다른 차들의 수와 어느새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행인들의 모습이 어느새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다다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인지하기 위해 나는 창문에 낀 성에를 손으로 지워야했고, 곧 바깥에는 볼만한 광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욱 늘어서 있는 어두컴컴한 빌딩들 사이사이에 가끔씩 흐릿한 빛을 내뿜는 건물 내부가 보였다. 언뜻 보았을 때에도 이곳 건물들은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손님들에게 무엇인가를 판매한다든가 하는 용도라면 저렇게 건물 앞면들이 전부 벽으로 막혀 내부가 보이지 않게 했을 리가 없다.
운전수와 조수석,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사람은 모두 검은 색 정장을 맞춰 입고 있었다. 그것은 앞차와 뒷차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뿐만 아니라 복장까지 온통 시커먼 색으로 통일한 그들의 모습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색깔에 대한 나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검은색의 일반적인 상징적 의미와 현재 상황 사이의 적절성의 문제였다. 완벽하게 검은색으로 둘러싸인 일원들의 모습은 한 사람을 목적지까지 안내하기 위한 목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들은 내가 차에 탑승한 이후 한 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그들에게 안내받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고 사실 그건 이런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기분이었다.
문득 내 선택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뒤로 미루어놓았던 내 선택에 대한 의문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과연 내 선택이 좋은 결정이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내 그것은 옳은 결단이었을까.
그들이 하는 말만 듣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선택이 새로운 변화를 낳고, 그 큰 변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기술의 발전으로 연결된다는 그들의 말 이면에는 도덕성과 윤리의 결여가 잠재하고 있었다.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들의 제안을 수락한 나 역시 비윤리적인 인간인 것일까?
아니다. 어차피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나대신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제안에 귀가 솔깃할 사람은 한둘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돈이라도 필요했고 나에게는 그 최소한의 돈마저 없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문득 다시 창 밖을 보았을 때, 주변은 작은 빛 하나 없는 적막한 어둠으로 둘러싸여있었다. 그 동안 드문드문 보이던 가로등마저 보이지 않아 어느새 달이 빛의 유일한 공급원이 되어 있었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는 둥근 보름달은 소나기가 거의 그쳐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적으로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나는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 이곳이 목적지냐고 묻는 것은 어쩐지 방정맞아 보일 것 같았다.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을 물어볼 때는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나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내 직감은 틀리지 않은 듯 했다.
“이곳이 목적지입니다.”
나의 물음에 대한 그의 성실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의 짧고 간결하다 못해 사람을 무시하는 듯 느껴지는 어투는 갑작스럽게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들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나의 입에서는 내가 말해놓고도 나 자신이 그 싸늘함에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회사가 상당히 변두리에 있군요. 빛 하나 없는 외지라니. 시골이나 다를 바가 없네요.”
가시 돋친 말을 내뱉어 놓고 나는 옆 사람을 의식하고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가 멈춘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였다. 차가 멈춘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조수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내가 내리도록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도착하고 나니 세차게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가랑비가 되어 있었다. 부슬부슬 떨어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는 그들을 따라 차 바로 앞쪽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건물은 괴이했다. 건축 형식이 괴상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이 건물과의 비조화가 너무나도 강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주변에 드문드문 보이는 공장들을 보면 이곳이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공업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 건물은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업지대와는 거리가 먼 세련된 자태를 나의 앞에서 보란 듯이 뽐내고 있었다.
짙은 녹색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이 건물은 약 10층 정도 되어 보이는 고층건물이었다. 고작 10층 건물을 고층건물로 생각하게 한 데에는 고층건물 주위의 펑퍼짐하게 생긴 공장들의 역할이 컸다.
검은 남자들을 따라 들어가서 본 건물의 내부 모습은 일반적인 건물들의 내부와 그리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건물의 1층에 있는 넓은 홀이 이 건물에는 없다는 것 정도랄까.
“따라오십시오.”
검은 복장의 남자들을 따라 여기까지 따라왔더니 이번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다. 그러고 보니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경비원 두 사람 외에는 검은색 복장을 하지 않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여자의 말을 아무 말 없이 이행해 주었다.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윗층인 11층에 도달한 나는 곧 한 방문 앞에 서게 되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자는 문에 노크를 하더니 나를 그대로 세워두고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내가 서 있는 일자복도에는 내 앞의 문까지 포함하여 세 개의 문이 보였다. 하지만 내 앞의 문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개의 문은 일반적인 사무실용 문이 아니라 비상구 같은 데에나 쓰이는 철문으로 보였다.
“들어오세요.”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퍼뜩 놀라서 다시 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그 여자가 문을 열고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들어가자 그 여자는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나가고서는 문을 닫았다.
안으로 들어와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책꽂이에 빽빽하게 꽂힌 수많은 책들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 권이나 되어 보이는 그 책들은 나로 하여금 작은 도서관을 연상시키게 하였다. 순간적으로 책꽂이에 어떤 책들이 꽂혀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지만 이런 작은 도서관에도 주인은 있는 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K씨.”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사무용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지금 막 일어난 듯 보이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천천히 나에게 걸어오더니 내 앞에 서서 악수를 청했다.
“저는 김한철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악수를 나눈 후 그는 웃으며 나에게 자리를 권했고 나는 흔쾌히 그의 손이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사무적인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느낀 그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하지만 나의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밝은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내가 느낀 그의 인상은 그의 웃음보다는 저 동그란 안경 뒤에서 차갑게 빛나는 그의 눈에 비중을 더 두고 내려진 결론일 것이다. 저 웃음도 사무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짓는 웃음일터.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십니까.”
나이는 듣던 것보다 젊어 보였다. 나보다 10살가량 많다고 들었으니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을 텐데 그의 얼굴을 보면 아직 사회에 갓 진출한 신참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젊어 보일런지도 몰랐다.
“태균이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와는 오랜 친구사이시라죠?”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길게 늘어지지 않았다. 짧고 간결하게, 나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이였다. 문득 태균이가 자신의 사촌형과 그다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인간을 보면 왠지 구역질이 나거든... 기분이 나빠서 참을 수가 없어.’
이유가 어찌되었든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와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어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을뿐더러 나에게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곧 일곱 번째 생일을 맞는 어린 아들은 일찍 자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아빠가 올 때까지 자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지도 모른다. 내가 그 아이를 아끼는 만큼이나 그 아이도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해 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 무능한 아빠는 그런 아들에게 조그마한 생일선물을 사다 줄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군요. 일을 모두 마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이것으로 사담은 거부한다는 나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셈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 웃는 낯을 그대로 유지하며 오른손으로 안경을 고쳐 쓰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면 모두 끝낼 수 있습니다. K씨의 유전자 샘플을 채취하기만 하면 모든 작업이 끝나죠. 그냥 잠시 주무시다 보면 모두 끝나있을 겁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일을 끝내고 싶으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시작 하도록 하죠.”
주인이 손님에게 자리를 권한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대화를 거부하며 자리를 뜨는 듯한 상황은 우습기도 하고 어찌 보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기분이 아니었다. 적어도 겉으로 봐서는 그 주인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고 말이다.
그는 나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서 그는 나에게 바쁜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고 나는 그의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집에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지하 2층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다한 이야기들을 꺼내면서 나를 성가시게 했다. 진심으로 궁금해 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친한 사람인양 사무적으로 나의 신변에 대해 묻는 그를 마음속으로 경멸하며 나는 그의 안내를 따라 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조그마한 실험실이었다. 아니, 나는 그곳이 실험실이라고 생각했다. 실험실이라고 해봐야 무언가 거창한 실험도구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는 그곳에 있던 실험복을 입은 몇 명의 사람들과 벽 쪽에 진열되어있는 박제나 실험용 쥐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네 개의 벽들 중 두 개는 이런 용도로 쓰이고 있었고 또 한 벽은 다른 방으로 통하는 듯한 문과 함께 여러 가지 실험도구들의 진열대로 쓰이고 있었지만 한 쪽 벽만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사실 그 장막 바로 뒤편이 벽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 장막은 단지 이 실험실을 두개의 공간으로 분할하는 역할일 뿐일 것 같았다.
그들은 나와 한철을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흰 실험용 가운을 입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던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기는 했다. 그들이 말을 않자 한철이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곳에서 K씨의 유전자 정보가 담긴 샘플을 차출해 낼 것입니다. 이 분들이 말이죠.”
그러고 보니 이 실험실 한쪽에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일반적인 의자가 아니라 병원의 진료소에서나 쓸법한 눕히는 의자였다. 아무래도 나는 저 의자에 누워서 한 시간을 보내야 할 듯싶었다.
실험자로 보이던 사람들 중 한 남자가 나에게 가운을 건네주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것과 동일해 보였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눈치 챘는지 또다시 한철이 대신 설명했다.
“가운으로 갈아입으셔야 유전자 샘플을 채취하기 쉽습니다. 지금 복장이면 주사바늘 꽂기에도 방해가 될 듯싶군요.”
나는 그렇다고 해서 굳이 가운으로 갈아입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그냥 수긍하고 그 가운을 받아들었다. 한철이 알려주는 대로 나는 아까 본 그 문과 연결되어있는 방에 혼자 가서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그 방도 마찬가지로 실험실로 보였지만 아무도 없었기에 탈의실 대용으로 쓸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이상한 의문점이 생겼다. 그리고 옷을 다 갈아입고 다시 그들 앞으로 갔을 때 한철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유전자 샘플이라면 그냥 여러분 자신들의 것으로 쓰면 되지 않습니까? 굳이 저같이 모르는 사람을 이곳까지 데리고 와서 유전자 샘플을 채취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한철은 웃으며 내 질문에 대답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이 아까 보았던 그 의자 쪽에 가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글쎄요... 저희는 다만 자기와 똑같은 인간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K씨라 해도 K씨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나 K씨 주위사람과 똑같은 피조물들을 가지고 이것저것 실험하기 힘드실 겁니다.”
그 한마디로 나의 의문은 풀렸다. 그것은 공포일 것이다. 나와 똑같은 인간을 마주대하고, 더 나아가 실험용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룻밤 악몽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이어야지만 그들이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 받으며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의문이 풀렸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실험자 중 한 명이 나를 의자로 안내했다. 내가 그 의자에 앉자 의자는 자동으로 수평으로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의자에 앉았다기보다는 의자에 누웠다는 말이 적당한 상황이 되었다.
“K씨의 소지품과 옷은 제가 보관하고 있도록 하죠.”
의자에 누우면서 나는 한철에게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하얀 실험복을 입은 여자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다. 마취가 필요할 것이라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들 그 여자가 들고 있는 주사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냥 한 시간 동안 푹 주무시면 됩니다.”
왼팔 상박에 꽂힌 주사바늘을 보면서 나는 오른손으로 의자 옆에 달린 손잡이를 살짝 쥐었다. 곧 눈앞이 흐려지더니 곧 어둠이 나의 정신을 지배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홀연히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보인 것은 바로 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었다. 거울 속의 또 하나의 나는 나와 같은 얼굴, 같은 모습, 같은 표정으로 내가 그를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그의 차이점이라곤 각각에 대한 왼쪽 오른쪽의 개념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뿐이다. 그와 나에게 있어서 그 이상의 차이점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나와 다르다. 같지만 다르다. 나는 실재하지만 그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거울에 비친 허상일 뿐이다.
‘아니. 나는 너. 너는 곧 나야.’
너와 내가 같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너는 단지 나에게서부터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야. 넌 단지 가짜일 뿐이야. 이 세상에 진짜는 나 하나 뿐이야.
‘그렇지 않아. 나는 너와 똑같이 생겼고, 너와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웃어. 너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같은 꿈을 꿔. 만약 네 말대로 내가 가짜라면... 너는 네가 진짜라는 사실을 나에게 증명할 수 있겠어?’
거울속의 내가 마치 고개를 가로젓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면 나의 착각일까? 그의 말대로 내가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일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없다. 너가 나고, 내가 너라면. 우리는 대체 뭐지?
복잡하다. 머리가 뒤엉킬 것만 같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는 나를 향해 웃음 비슷한 것을 보내는 내 앞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그의 논리에 수긍할 수 없다. 나에게 있어서 진리는 하나뿐이다. 그 진리는 단순하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닌 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너의 생각은 옳지 않아.’
무슨 말을 지껄이든 나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지 나의 존재성을 위협하는 자들을 웃으며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주먹이 거울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두 주먹이 서로 맞부딪치자 거울은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산이 깨져 버렸다. 나는 보았다. 조각난 유리조각들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천천히, 아래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그리고 그 수많은 각각의 유리 파편 속에서 웃고 있는, 수많은 나의 모습들을.
‘K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걸...’
수많은 K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머리를 감싸안고 비명을 질렀다.
눈을 뜨고 나서 나는 곧바로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눈을 아프게 하는 밝은 조명을 손으로 가리면서 나는 서서히 강한 빛에 적응해갔다. 이마 위로 송송히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도 방금 전까지의 꿈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터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도 모르게 방금 전에 거울을 때린 내 주먹이 괜찮은지 확인해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이미 한 시간은 충분히 지난 듯싶었다. 의자 옆에 놓여져 있는 슬리퍼를 신으며 나는 내 몸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샘플채취를 했다고 해서 특별하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아무래도 주사기로 내 몸 이곳저곳을 찔러댄 것이 전부였던가 싶다.
갑자기 들려온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문들 열고 들어오는 아까전의 그 실험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어딘가 나갔다가 돌아온 듯싶다. 그 무표정한 얼굴들에는 변함이 없었다.
“모두 끝난 겁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나갔다 온 사이에 내가 깨어있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 놀랍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가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들어왔다는 듯이 말이다. 더욱이 그들은 나의 질문에도 대답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들의 노골적인 무시에 내가 화를 터뜨리려는 찰나 내가 누워있던 의자를 정리하던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테스트 하나만 하시면 끝납니다. 따라오시죠.”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무례는 일단 덮고 넘어가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모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온통 흰 복도를 걸어가며 나는 눈에서 통증을 느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사방에서 쏟아내는 흰 광선들이 사정없이 내 눈을 찔러대자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나를 안내해 주는 남자도 흰 가운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그의 몸이 흰 배경에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를 눈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눈을 뜨고 그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걸어가다 문득 다리에서 뻐근함이 느껴졌다. 마치 격렬한 운동을 해서 근육이 뭉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까지 마취제로 인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몸이다. 아무래도 요즈음에 급격하게 쌓인 피로와 이곳에 와서의 긴장 때문인 듯싶었다. 집에 가면 아무래도 푹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푹 쉬고 난 후에 나에게는 또 할 일이 있다. 이제 곧 생일을 맞는 내 아이를 위해 성대한 생일파티를 열어줄 수 있다. 내일부터 그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다른 중요한 일들도 있다. 일단 일자리를 찾는 것이 있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지 않았더라면 일자리를 찾기 위한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미 모두 다 지나간 일이다. 일단 내 아이의 생일을 축하해 준 후에 또다시 일자리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현재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아이의 생일이다.
어느새 안내하던 남자의 걸음이 멎어 있었다.
끼익.
지금 바로 내 눈앞에서 열리는 이 문 안에 바로 나에게 그 돈을 제공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안내하던 남자의 손짓에 따라서 나는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조그만 방. 그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긴 책상 위에는 김한철과 함께 안경을 쓴 다른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아무 말 없이 한철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김한철과 그 누군지 모르는 남자와 마주앉게 되자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얼굴 곳곳에 보이는 세월의 흔적을 보아하니 그는 나나 한철보다 적어도 수 십 년의 세상 경험을 더 가지고 있는 듯싶었지만 안경 뒤에 숨겨져 있는 날카로운 눈빛은 한철과 닮아 보였다.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한철과 마찬가지로.
김한철 인상과 그의 인상의 차이라고 한다면 그는 한철과는 달리 자신의 냉정함과 차가움을 자신의 얼굴 표면에 그대로 내비치고 있다는 것뿐일 터였다.
이렇게 마주대하기 싫은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니 갑자기 입이 근질거렸다. 자연스레 내 안주머니로 손을 향하려던 나는 그제야 내가 가운으로 갈아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담배, 한 대 하시겠습니까? K씨.”
시선을 앞으로 향하니 김한철이 나에게 담배 한 대를 내밀고 있었다. 눈에 익숙한 담배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김한철 씨도 이 담배를 피우십니까?“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친절하게도 그는 불까지 붙여주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유쾌한 연기가 내 목을 타고 들어왔다. 막혀있던 가슴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담배를 맛보는 것은 갈증이 심할 때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아니요. 저는 담배를 안 피웁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그가 이 담배를 왜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D사 담배를 오랜만에 만끽하며 이것이 얼마만의 담배인가를 회상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거의 삼 일 만에 피우는 담배인 것이다. 오랜만에 피우는 것인 만큼 그 만족감도 배가 되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긴장이 풀리고 몸이 약간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참. 소개가 늦었군요. 이분은 앤더슨 박사라고 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 관리하시는 분이죠. 미국에서 수 십 년간 이 프로젝트에 대해 연구를 해 오신 이 방면에서 대단한 전문가시죠.”
담배를 입에서 잠시 떼며 앤더슨 박사라는 인물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보았다. 네모나고 투박한 안경과 약간 벗겨진 그의 앞머리는 그의 얼굴 곳곳에 있는 주름들과 함께 그를 더욱 나이 들어 보이게 하였다. 하긴 저명한 박사라는 명칭이 그리 쉽게 얻어질 리가 없다. 젊은 시절부터 이렇게 나이가 들 때까지 이 분야에 자신의 모든 정열과 혼을 쏟았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 중 문득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사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인사가 늦은 것에 대해서 그가 그렇게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나는 최대한 죄송해 보이는 표정과 몸짓을 지어가며 그에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그는 웃지 않았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표정 변화 없이 예의 그 싸늘한 눈초리와 함께 차가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그가 화가 나서 그런다기보다는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서 나는 그것이 내 손의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책상 위를 보니 재떨이 하나가 있었다. 내가 지금 피우고 있는 것과 똑같은 D사 담배꽁초 하나가 들어있는 그 재떨이에 재빨리 담배를 비벼 껐다. 나는 재떨이 안의 그 담배꽁초를 누가 피운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보다도 담배를 꺼서 더 이상 그것을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고, 그에 따라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철은 웃으며 나에게 종이 몇 장과 펜을 건넸다. 종이에는 빽빽하게 글씨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테스트입니다. K씨가 이 문제들에 답한 것과 K씨의 복제인간들의 답과 비교해 볼 생각입니다. 정신적이나 심리적으로 원본과 복제인간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죠. 여러 가지 잡다한 문제들도 있지만 성의 있게 작성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가 말한 테스트지를 보니 정말 말 그대로 ‘잡다한’ 문제들이 눈에 들어왔다. 만약 인형가게에 들어간다면 어떤 인형을 살 것인지를 물어보는 질문에서 시작해 한 개의 지문을 주고 거기서 나오는 인물들 중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 지 고르는 문제까지 있었다. 심지어는 상당히 복잡한 수학문제들도 몇 개 있었다.
하지만 잡다한 문제건 아니건 간에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단지 이 테스트를 끝내고 다음 테스트를 보거나 아니면 다음 테스트가 없다면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나는 문제들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테스트지를 하나씩 채워갔다. 학생 때부터 싫어했던 수학문제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반시간이 약간 지난 후에 나는 네 장의 테스트지를 모두 채울 수 있었다. 혹시 빠뜨린 것이 있나 대강 확인해 보고 그동안 내 앞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철과 앤더슨 박사에게 그 테스트지를 건넸다. 한철은 종이를 받아들고 그것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K씨.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다 끝났다는 말에 나는 약간의 기쁨을 느꼈다. 이제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내 아들의 생일 파티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받아가는 돈으로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내가 한 일은 내가 받기로 한 돈의 액수에 비해 얼마 없는 듯싶었다.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나 간단한 테스트를 받고 그 상당한 고액의 대가를 받는 것이니 말이다. 하긴 복제인간이라는 법률적으로 금지되어있는 일에 관련된 일이니만큼 대가가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간에 나는 적지 않은 돈을 벌고 돌아가는 것이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끝난 겁니까?”
“네. 이정도면 K씨에 대한 정보는 모두 얻은 셈이니까요.”
“그렇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내 소지품을 찾고 돈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남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한철에게 물었다.
“복제인간을 만드는 데에는... 얼마나 걸립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에 의아함을 느낄 만도 하건만 그는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대략 2주 정도 걸릴 거라고 봅니다.”
나는 그에게 확답을 받아야 할 것이 있었다.
“2주 후에 복제인간들이 완성 된 후 그들에 대한 시험이 모두 끝난다면... 모두 확실하게 폐기해 주십시오. 저와 똑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싹해질 테니까요.”
“물론입니다.”
그는 시원스레 내 요구에 대답하고서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이 다시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있던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과 앤더슨 박사는 이곳에서 곧바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를 배웅할 수 없다며 유감을 표시했다. 그와 앤더슨 박사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또다시 해야 할 말을 생각해냈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한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K씨께 드릴 사례는 밖에다가 준비해 두었습니다.”
더 이상 그에게 할 말은 없었다. 그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나는 방 밖으로 나왔다.
내가 이상한 것을 처음 느낀 것은 건물 밖으로 나온 후 나를 안내하던 두 남자가 내가 아까 차에서 내렸던 곳과 반대 방향으로 향했을 때였다. 나는 그쪽에서 차가 대기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별 말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둘도 완전히 검은 복장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검은색에 대한 불쾌감보다는 집에 간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어두운 곳에서 멈춰 섰을 때도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에 그들이 걸음을 멈춘 것을 깨달아 그들을 쳐다보았을 때 그 두 명이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그 이유를 찾아내려 애썼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둘 중 한명이 안주머니에서 이상한 검은 물체를 꺼냈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들이 이곳으로 날 끌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순간 방금 전까지 들뜬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두려움만이 내 몸을 지배해 내 몸은 경직되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대체 이유가 뭐지? 왜 저러는 건가? 설마?
이제껏 이상하게 여겼던 일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사실 애초부터 수상한 일이었다. 하루만에 10만 달러라는 거액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절친한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자라고 해서 너무 쉽게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나의 실수였던 것이다.
남자가 권총을 든 손을 올려 나에게로 향했다.
제길.
저들이 나를 죽이려는 것은 아마도 이 실험에 대한 비밀을 누설시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내가 비밀을 지킬 것이라 아무리 약조를 한들 나를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들은 이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문득 태균이 떠오른다. 그 녀석은 내가 자신의 사촌에게 속아 이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김한철은 물론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할 테지. 예의 그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역시 그자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억울하다. 내 가족들의 얼굴이 내 앞에 떠오른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내 아내와 내 아들... 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나도 나지만 이제 그들은 누가 책임지고 보살핀단 말인가? 그들을 위해서 시작한 일의 결말이, 나의 가족 모두의 불행으로 끝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어느새 권총을 든 남자는 나에게로 정확히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나를 향해있는 저 새카만 총구 속에서는 깊이를 잴 수 없는 절망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낀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검은 선글라스는 그의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는 대신에 깊은 암흑만을 제공해줄 따름이었다.
권총을 들고 있는 남자의 뒤편에서 초승달이 보였다. 권총은 시리고 푸른 초승달 빛을 반사하여 더욱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내가 마지막을 본 것은 차가운 금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불꽃이었다.
그곳은 잠시 적막으로 둘러싸인 상태로 유지되었다. 좁은 방은 그리 밝지 않았다. 천장에 달려있는 전구가 이 방을 완전히 밝게 비출 만큼 크지 않는 이유는 더 큰 전구를 달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방의 용도에 있어 보였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몇 장의 자료들을 서로 세심하게 비교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자료들을 들여다보던 앤더슨은 여전히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잠시 동안의 적막을 깨뜨렸다.
“역시 예상대로군요.”
“그렇군요.”
김한철 역시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앤더슨이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좀 더 많은 자료를 들고 있었다.
“그나저나 역시 대단한 기술이군요. 이미 박사님께 들었었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다 아는 것이라고 해도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놀라움을 수반하게 되죠. 아마 제가 미리 당부하지 않았으면 아무리 김한철 씨라 해도 그 앞에서 실수하셨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철은 웃었다.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포를 배아 하는 것이 아니라 세포 조직 자체를 똑같은 형질로 만들어 낸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바로 제 눈앞에서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2주 만에 똑같은 인격이 만들어 진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믿겨지지 않은 일입니다. 앤더슨 박사님께서도 이번이 첫 번째 경험이 아니십니까? 박사님께서는 그리 놀라시는 것 같아 보이지 않더군요.”
앤더슨은 자료 검토를 모두 마친 모양인지 책상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한철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사실, 대상이 인간이 아닌 실험은 이미 몇 차례 해왔었습니다. 물론 대상이 인간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하지만 웬일인지 이번이 첫 번째 실험인데도 그리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 꿈을 실현시켰다는 기쁨이 더 컸던 탓일 테지요. 그건 그렇고, 그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요.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잊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어제 제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철도 검토를 모두 마친 모양인지 책상 위에 자료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어제가 아들 생일이었다더군요. 상당히 성대하게 축하파티를 열었었나 봅니다. 제 조카도 가서 축하해주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현재는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군요.”
“다행이군요.”
앤더슨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째, 도착 직전입니다.”
앤더슨과 한철은 자신들이 들고 있던 자료들을 모두 정리해서 책상 아래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의자에 고쳐 앉고 자신들의 앞에 보이는 문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은 그 문이 천천히 열리는 그 순간까지도 침묵을 유지했다. 잠시 후, 열린 문을 통해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김한철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오자 한철은 손가락으로 그 남자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이곳에 앉으시죠.”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젊어 보였다. 사실 한철은 얼굴이 젊어보였을 뿐이었지만 그 남자는 젊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젊음의 열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상당히 초조해보였다. 한철은 자신의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물건을 꺼냈다. 담뱃갑에서 오늘로써 세 번째 담배를 꺼내고 자신 앞의 남자를 바라보니 그는 역시 가운의 안주머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철은 담배를 든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 대 하시겠습니까?,”
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반가운 표정을 보고 한철 역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짓던 거짓 웃음이 아니었다. 회심의 미소였다. 이걸로 거의 확실해 진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가.
“K씨.”
수정을 좀 했습니다.
어떤분이 비오는데 어떻게 달이 보이냐는 지적을 해주시는 바람에 그 비를 그냥 '보통비'가 아닌 '소나기'란 언급을 좀 해주었습니다. 다른건 고치지 않았네요.
앞부분 지루한 부분을 좀 간결하게 해보려고도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것 같기도 하고 쓴게 아깝기도 해서 포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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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짧은 시간동안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다가 사그라드는 촛불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 아닐까... 별반 다를 것이 없는게 아닐까. 별반 다를 것 없는게 아닐까. 가 더 자연스럽지 않나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섬뜩하네요. 인간 복제라는 것.
아... 그렇군요 -_-;; 그게 더 자연스럽네요. 감사합니다^^ 고칠게요
인간 복제라. 나와 같은 사람이 몇명이나……(인류종말이다, 그건-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