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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조국의 아픔 사우회 대구지회 판문점 견학
온 산에 단풍이 물드는 깊어가는 가을, 10월의 마지막 날 사우회 대구지회의 추억만들기 행사는 판문점 견학이다. 아무 때나 쉽게 갈 수 없는 판문점 견학이라 관심도 높고 공동경비구역과 북한 접경지역을 직접 밟아 본다는 설레임에 먼 길을 선뜻 나섰다. 판문점 견학은 국가정보원 홈페이지 판문점 견학 코너에서 신청하고, 30인 이상 45인 이하의 단체일때 방문 희망일 2개월 전에 서류준비 후 국정원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견학신청을 한다고 한다.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해야 되고 등산복 금지 등 복장도 기준에 맞게 갖추어야 한다. 외국인은 유엔군사령부에서 지정한 여행사에 견학 신청을 하면 된다고 한다. 임채기 회장님이 준비하시고 판문점 견학 신청을 하신 후로 계속 일정이 오락가락해서 마음고생을 하시더니 다행히 10월 마지막 날로 견학 배정을 받았다고 한다. 회장님의 노심초사로 좋은 날 일정을 잡았고, 푸짐한 간식을 준비하시는가 하면 휴게소에서는 식비까지 자상하게 나누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또 대구총국 김태민 총국장께서도 음료수와 간식을 지원해 주어서 항상 사우회를 배려하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아침 7시에 대구총국에서 모여 버스 한 대로 서둘러 출발했는데 가족들도 참여할 수 있어서 더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길이 멀어서 5시간은 걸려야 임진각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하는 일정이고 왕복 10시간의 장거리 버스 여행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우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시간가는 줄 모르게 버스가 달리더니 어느틈에 차창 왼편으로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이 눈에 들어온다. 북한땅이 건너편으로 보일 듯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운데 12시가 되어 임진각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내리니 실향민들이 설날과 추석 때 모여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망배단이 눈에 들어 온다. 땅굴과 도라산전망대, 판문점을 견학하기에는 주말이라 시간이 촉박하다고 중앙고속 여행사 가이드는 걱정을 한다. 임진각 한정식집에서 불고기전골로 점심식사를 맛있게 하고 바삐 땅굴 견학을 하러 갔다.
제 3땅굴 견학을 위해 주차장에 도착하니 외국인도 많고 학생들과 노인들하며 주말이라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에 위치한 제 3땅굴은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435m에 있는데 1978년에 발견되었고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이며, 한시간에 3만명의 병력이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높이 2m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1m60cm 정도의 구간이 많아서 허리를 숙이고 다니느라 목도 아프고 힘들었다. 파주시에서는 성인단체 4,000원, 어린이와 청소년 단체는 2,500원의 입장료를 받는데 개인은 성인 5,000원, 청소년 3,300원이다. 주말에는 2,000명에서 4,000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하는데 파주시로서는 안보관광수입이 적지 않다고 한다. 2002년 땅굴을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미니 열차형의 셔틀승강기가 설치되어 편리해졌으나 수용인원에 한계가 있어 2004년 6월 지름 3m의 도보 관람로를 신설하여 많은 관람객의 수용이 가능해졌다. 셔틀승강기는 유료로 이용할 수 있고, 운행 소요시간은 왕복 18분정도로 임진각매표소에서만 매표가 가능한데 우리는 사람이 많아 타지 못하고 힘들게 경사 30도가 넘는 길을 360여 미터 걸어 올라오느라 숨찬 운동 좀 했다. 이어서 땅굴 옆에 있는 도라전망대로 이동했다.
도라산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1000년 사직의 신라국을 삼한 통일을 이룩한 고려의 왕 왕건에게 바치고 고려의 수도인 송악(현재의 개성)에서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 노후를 보내게 된다. 낙랑공주는 경순왕의 우울함을 위로하고자 수도 개성에서 20여리 떨어진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지었고 경순왕은 아침저녁으로 이산의 산마루에 올라 옛 新羅 도읍 서라벌을 사모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도라산은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개성공단과 개성시 변두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며, 그밖에 송악산·금암골(협동농장)·장단역·북한선전마을 기정동·김일성 동상 등이 바라다 보인다. 망원경도 관망을 위해서 설치되어 있다. 고려 왕건이 궁궐을 지었던 만월대가 요즘 남북 역사공동발굴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개성공단과 송악산이 바로 코 앞에 보이니 감회가 새롭고 사람이 막아 놓은 경계선과 통행금지가 얼마나 실없는 일인가를 느끼게 해준다.
전망대를 나와 도라산역으로 이동했다. 평양까지 205km, 서울은 56km인데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하는 첫 번째 역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한국철도가 시베리아철도, 중국철도와 이어지면 도라산역은 대륙을 향한 출발점으로 그 의미를 다시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안내판 문구가 인상적이다. 서울에서 도라산 관광열차가 출발하는데 토,일요일에 하루에 두 번, 평일에는 하루에 한번 운행하고 월요일과 공휴일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승강기를 타고 땅굴까지 견학할 수 있다. 도라산역에서 철마가 북한을 향해 달리는 그 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기대에 다시 한번 경의선 마지막 역의 끊어진 철길이 이어질 것을 기원하며 판문점 JSA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 차창가의 야산들이 지뢰위험지역이라고 중앙고속의 가이드가 설명해 준다. 군에서 판문점 지역 근무를 했다는 가이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뢰를 밟았을 때 발을 떼지 않으면 영화처럼 터지지 않을까요?” 하고 묻는다. 그리곤 영화가 전부 사람들을 잘 못 알게 해 놓았다고 말한다. 지뢰는 밟는 순간 바로 터져버린다고 한다. 그러니 영화처럼 밟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터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 지뢰와 관련한 상식을 재미있게 배웠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 안보견학관에 도착했다. JSA에 관한 역사와 개요를 보여주는 홍보 동영상을 먼저 시청했다. 홍보동영상을 시청하고 우리가 타고 온 버스는 주차해 놓고 견학 안내 사병의 가이드와 함께 버스도 JSA에서 제공하는 대형버스로 갈아타고 이동했다. 안내 사병이 신분증 검사와 신발검사를 한다. 왜 신발검사를 하느냐고 나중에 물었더니 혹시라도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피신하기 위해서 슬리퍼나 굽 높은 구두는 착용하면 안되기 떄문에 검사한다고 한다.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인데 판문점을 이동하면서 보는 산천은 서울 근교와 다름이 없는 낙엽 쌓인 낯익은 가을산이라 접경지역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판문점은 남한의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과 북한의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소재한다. 서울에서 서북방으로 62Km, 북한의 평양에서 남쪽으로 215Km, 개성시로부터는 10Km 떨어져 있다. 공식명칭은 JSA-Joint Security Area-공동경비구역이다. 유엔군과 북한국의 공동경비구역으로 남북한 어느 쪽도 행정관할권을 가질 수 없는 특수지역이다. 판문점은 6·25 전에는 널문(板門)이라는 지명으로, 초가집 몇 채만 있던 외딴 마을이었다. 1951∼1953년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곳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휴전회담은 1951년 10월 이래 1년 9개월이나 계속되었고, 휴전회담을 마친 뒤 정전협정 조인을 위해 부근에 목조건물을 지었으며, 그 후 1km 남쪽의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했다.
버스 이동 중이나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 장소 외에는 사진을 찍어서는 안된다고 안내 사병이 주의를 준다.
판문점 향하는 길에 비무장지대에 사는 대성동마을 주민들이 농사짓는 논밭들이 차창 좌우로 펼쳐진다. 논밭이 잘 다듬어져 열심히 농사를 짓는 느낌을 받았다. 대성동(臺城洞) 마을 주민은 49세대 207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데(2015년 4월 기준)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1951년 10월, 정전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게 되면서 판문점 근처에 위치한 남쪽의 대성동 마을과 북쪽의 기정동 마을은 군사분계선 상에서 유일하게 전투 지역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 각 마을에서는 민간인들의 거주도 가능했다. 정전협정1조 10항(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의 부분에 있어서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에 의해 이 마을은 UN사령관(한미연합사 겸직)이 관할하고 UN의 통제를 받는다. 마을 주민은 병역과 납세의 의무가 없다. 면세지역 같은 곳이지만 규제가 심하다. 1년의 8개월, 2/3는 마을에서 살아야 하고, 여자가 외부인과 결혼 시 마을을 떠나야 한다.(외부인 전입을 불허-병역의 의무 악용 방지)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위반시 1차경고, 2차 7일 추방, 5차 주민권 박탈), UN군에게 행패부리면 4개월 추방, 범죄자를 한국경찰이 체포할 수 없고(UN사가 추방시키고 한국영토로 나오면 체포), UN사령관이 이장 파면가능, 친척, 직계가족만 UN사 허락받아 출입가능하고 외부인이 마을에 들어와 살 수 있는 방법은 마을의 남자와 혼인하는 여자만 가능하다. 대성동 초등학교는 1967년 이후 2015년 2월까지 46회의 졸업식을 가졌다고 한다.
북측에는 기정동(機井洞) 선전마을이 있는데 대성동 마을과의 거리는 1.8km다. 멀리서 봐도 대성동과 기정동 마을의 국기게양대가 어디에서나 높이 서 있는데 사실은 서로 게양대 높이 때문에 치열하게 경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북측의 인공기 게양대의 높이는 무려 160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게양대라고 한다. 남쪽 대성동마을 국기게양대는 99.8미터인데 아파트 33층 높이이고 태극기는 가로 19미터, 세로 12미터로 엄청나게 크다. 이 태극기가 대성동 마을에 먼저 들어서자 한달 뒤 북한의 기정동에는 높이 160m의 게양대가 들어서서 기싸움을 벌였다. 대성동은 남북의 쓸데없는 경쟁이라고 더 이상 게양대 겨루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성동 마을 태극기는 특수천으로 만들어져 개당 180만원의 제작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워낙 크다 보니 바람에 찢기거나 낡아져서 한 해 평균 10개 안팎으로 교체해 줘야 하는데 게양과 하강 등의 관리를 하는 데만 한 해 960만원의 인건비도 들어간다고 한다.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도 제작·관리비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남북 모두 쓸데없는 경쟁 끝에 지출하는 또 하나의 ‘분단비용’이다.
드디어 영화에서나 보던 공동경비구역에 도착했다. 남측의 자유의 집을 들어서서 건너편 문으로 나가니 북측의 판문각 건물이 바로 앞에 보이고 영화에서 보던 경비병들이 꼿꼿이 서서 부동자세로 근무를 하고 있다. 북측 판문각과 남측 자유의 집 사이에 작은 집들이 보이는데 파란색은 남측, 하얀색은 북측 건물이다. 안내사병은 바로 북한과 코 앞에서 마주하고 있어서 잘 못하면 북측을 자극해 불상사가 일어나니 특별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은 예전에는 주로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1971년 9월 20일 열린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을 계기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장소 뿐 아니라 남·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을 왕래하는 통과지점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공동경비구역(JSA)이 설치된 이후 처음에는 쌍방 군사정전위원회 관계자들은 구역 내에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의 도끼만행사건 이후부터 양측간 충돌 방지를 위해 군사분계선을 표시하여 경비병을 포함한 모든 군인들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상대측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개인적으로 북한군을 만나거나 말을 거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근무기간이 오래된 사병들은 안면이 있는 북한병사와 수시로 대성동 마을 부근과 판문점 내 감시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담배와 술을 주고받는 등 접촉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2000년에 제작되어 한국에서만 백만 관객을 넘게 동원했던 영화 JSA의 소재가 되었다.
자유의 집 앞에서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판문각과 북한 사병을 줌인해서 찍어 보고 회담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TV에서 많이 보던 회담장 탁자 위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고 창밖을 내다보면 회담장 중앙을 기준으로 남북 경계선이 시멘트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회담장 안에서는 북쪽으로 경계를 넘어갈 수 있도록 허용이 되어 우리는 잠시나마 즐거운 기분으로 북한땅을 밟아 볼 수 있었다. 회담장 안에도 JSA경비병이 근무하고 있는데 사진촬영이 가능해서 근무병 옆에서 서로 사진 찍느라 분주했다. 잠깐 동안의 견학이었지만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곳, 분단조국의 아픔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곳을 찾아 왔다는 감회와 통일이 되어 서로 왕래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했다. 특히 남북이산가족이 이곳을 찾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경계선 때문에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있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플 것이라고 생각되어 더욱 통일의 꿈이 한시바삐 이루어지길 기도했다.
JSA회담장과 자유의 집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미루나무 가지치기하다가 발생한 도끼만행사건의 현장을 차장 밖으로 보았다. 겉으로는 산골마을처럼 조용한 이곳이 언제든지 서로 충돌하고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긴장의 현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지난다. 정전협정 후에 포로들이 오가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였는데 잡초가 우거져 있고 시골마을의 개천을 건너는 다리처럼 작은 다리가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새벽에 일어나 대구를 출발했는데 견학일정을 마치고 JSA안보견학관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5시, 석양이 판문점을 뉘엿뉘엿 넘어 간다. JSA버스에서 내려 타고 온 중앙고속 버스로 갈아타고 서둘러 대구로 떠나 왔다. 밤 11시가 지나서 대구총국으로 돌아와 사우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귀가했다. 하루 10시간의 버스 이동 강행군이었고, 좀 더 자세히 분단조국의 현장을 느끼고 싶었는데 제한된 장소와 짧은 시간의 견학이라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나 돌아와서 남은 사진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고 정말 귀한 체험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이번 여행을 준비하느라 애쓰시고 또 10여년동안 대구사우회를 이끌어 오시느라 온갖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임채기회장님에게 감사드리며 분단 조국의 통일이 오는 날 판문점을 넘어 개성으로 신의주로 훨훨 날아 여행을 떠나기를 기대해 본다.
첫댓글 이철민 회원께서 쓰신 멋진 기행문을 보니 자료 찾으며 글 쓰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