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도(棧道)를 따라
추석을 이틀 앞둔 시월 첫 월요일 아침은 간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질 않았다. 정부가 선심 쓰듯 임시 공휴일로 정해 대다수 국민은 징검다리 근무가 열흘 연휴로 늘어났다. 내야 임시 공휴 지정 여부와 상관없는 일상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로 출근했다. 다만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는 학교가 아니라 자연에서 한 수 배우는 학교였다. 210번 버스를 타고 창원중앙역으로 나갔다.
역귀성을 하려고 타는 열차가 아니었다. 나는 역무원에게 삼랑진까지 무궁화호 열차표를 달라고 했다. 이른 아침 순천을 출발해 부전역과 태화강역을 지나 경주 포항까지 가는 열차다. 경전선 구간서 동해남부선으로 바뀌는 열차다. 날이 맑았다면 구산 바닷가나 진북 서북산 임도를 걸어볼 참이었는데 비가 와 그럴 수 없었다. 빗속에 철길을 달리는 열차를 타 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중앙역에서 곧장 긴 터널을 통과해 진영역과 한림정역에 정차했다. 화포 습지를 지난 모정터널을 빠져 생림에서 낙동강 철교를 건너니 삼랑진이었다. 나는 삼랑진에서 내려 4대강 자전거 길을 따라 원동까지 갈 요량이었다. 전에는 물금을 지나 화명까지도 걸러 본 적 있으나 빗길이고 명절을 앞둔 때라 무리할 일 없었다. 역전에서 송원마을로 가는 길을 따라 걸어 강변으로 나갔다.
철길 지하도를 지나 강변으로 나가니 드넓은 둔치가 펼쳐졌다. 늦게까지 남은 노란 달맞이꽃이 피어 있고 물억새는 어지러이 쓰러진 채 이삭이 나왔다. 이미 낙동강 본류에다 밀양강과 화포천이 합류해 세 갈래 물길이 되어 삼랑진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일제 강점기 강변 사질토 딸기 시배지로 알려졌고 산비탈은 복숭아를 가꾼다. 근래 양수발전소의 안태호와 천태호가 지역 명소다.
낙동강이 굽이쳐 천태산과 부딪히는 곳이 작원이다. 우리말로 까치마을인데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길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지금은 작원관 전투 기념비가 세워졌다. 작원으로 가는 길목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몇몇 지명고에 ‘처자교’와 ‘승교’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설화에 얽힌 이야기와 고적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 현장이다.
4대강 사업으로 강변 매장문화재를 발굴한 현장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아치형 쌍무지개 다리였다, 아쉽게도 현재로선 활용이나 보존에서 가치를 잃어 다시 그 상태로 덮어두었다고 했다. 그 마을 처자를 연모한 스님과 처자가 돌다리 놓기 시합을 벌여 처자가 지면 청혼을 들어주기로 했단다. 그런데 미모의 처자가 돌다리를 먼저 놓자 스님이 강물에 뛰어들고 처자도 뒤따랐다.
작원 나루에는 어로작업을 하는 빈 배가 세 척 묶여 있었다. 그곳부터는 조선시대 지방 팔도에서 X자 형으로 한양 올라가는 영남대로 옛길 길목에 해당하였다. 부산 동래에서 시작된 유생들의 과것길은 양산과 밀양과 청도를 거쳐 대구로 합류한다, 그곳에서 동쪽의 영천과 경주와 울산의 선비들이 보태어져 문경 새재를 넘어 연풍 충주에서 용인을 거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갔으리라.
영남대로에서 낙동강 벼랑 잔도는 물금에서 화제들판으로 가는 황산 잔도가 유명하다. 잔도는 바위 벼랑에 돌이나 나무로 선반처럼 받침을 덧대어 만든 길이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는 사람도 내려서 조심조심 걸어가야 하는 곳이다. 작원에서 밀양과 양산 경계 벼랑에 돌이끼가 낀 잔도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4대강 자전거 길 따라 생태 보도교를 걸어가니 바로 곁이었다.
너울너울 흐르는 강 건너는 김해 생림 도요에서 상동 용산으로 이어졌다. 원동 못 미친 둔치는 가야진사가 있었다. 신라 적 변방 가야국으로 건너는 나루에서 용신에게 제를 지낸 풍습이 이어오다 일제 강점기 맥이 끊겼다. 국권을 되찾은 이후 다시 사당이 세워지고 강물 용신에게 제례를 지낸다. 사당 곁 정자에 올라 곡차를 비우고 원동을 향해 바삐 걸어 창원행 무궁화호를 탔다. 17.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