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앞으로도
6개월 동안 준비(準備)한 후 자신만만(自信滿滿)하게 작전을 펼쳤으나 정작 헤이그는 제1차 대전 발발(勃發) 후 계속(繫屬)되어 온 포격(砲擊) 후 보병(步兵)이 열(列)을 맞추어 일제히 돌격(突擊)하는 고루(古壘)한 전술(戰術)을 그대로 답습(踏襲)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방식은 전열보병(戰列步兵, line infantry)이 주축(主軸)이었던 100년 전의 나폴레옹 전쟁 당시와 비교(比較)해 바뀐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이는 연합군뿐만 아니라 독일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놀랍게도 100년 전 전술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문제(問題)는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가까워져야 겨우 맞출 가능성(可能性)이 있었던 100년 전과 달리 상대편(相對便)이 난사(亂射)하는 기관총 세례(機關銃洗禮)를 받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소총(小銃)만 해도 머스켓(meoseuket)에서 후장식(後裝式) 볼트액션(bolt action)으로 바뀌었을 만큼 100년 동안 무기의 발달(發達)은 어마어마했으나 전투 방법(戰鬪方法)은 그대로였습니다.
결국 이런 모순(矛盾)은 엄청난 희생(犧牲)이 벌어진 결정적(決定的)인 요소(要所)가 되었습니다.
↑제1차 대전 초기에 일렬로 돌격하는 프랑스군.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방탄모(防彈帽)도 없었습니다
↑연합군 참호를 공격하는 독일군
1870년의 보불전쟁(普佛戰爭, Franco-Prussian War) 정도를 제외(除外)하면 강대국(强大國) 간 정면충돌(正面衝突)이 없었기에 전략(戰略), 전술(戰術), 작전(作戰)의 개발(開發)을 게을리 했습니다.
그렇다고 더 좋은 무기를 만들어 낸 이상 그로 인한 전과(戰果)의 확대(擴大)를 예상(豫想)하지도 못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습니다.
제1차 대전 최고(最高)의 살인병기(殺人兵機)에 등극(登極)하는 기관총도 러일전쟁, 발칸전쟁을 통해 이미 위력(威力)을 알고 있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은 맥심 기관총으로 대단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어떠한 변화(變化)도 주지 않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처럼 싸웠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제1차 대전이 시작되고나서 2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전쟁을 치루면서 고생을 했다면 뭔가 변화를 주어야 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헤이그는 같은 방법으로 공세(攻勢)를 취하다가 사상 최악(史上最惡)의 결과(決科)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상식적(常識的)으로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수준(水尊)입니다.